2005년 12월호

팜 파탈의 독립선언 염정아 VS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 엄정화

  • 조성아 일요신문 기자 ilyozzanga@hanmail.net

    입력2005-11-30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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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사람은 미스코리아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수였다. 그러나 둘 다 ‘배우’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30대. 조연에만 머물러 있던 미스코리아는 손꼽히는 여배우가 됐고,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해도 배우의 꿈을 접지 못한 가수는 영화에서 원톱 주연을 따냈다. 염정아와 엄정화. 오랜 기다림 끝에 서른을 훌쩍 넘어 정상에 오른 두 배우의 연기 세계.
    팜 파탈의 독립선언 염정아 VS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 엄정화
    팜 파탈의 독립선언 염정아 VS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 엄정화
    13세 소년 ‘네모’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몸에 받는 미혼모 만화방 주인 ‘부자’. 최근 개봉한 영화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 염정아(33)가 맡은 역할이다. 앳되기만 한 ‘네모’는 일찌감치 이성에 눈을 떠 머릿속이 온통 부자 생각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네모는 불이 난 극장에서 부자의 아들을 구해내고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 이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행운을 얻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몸이 33세 어른으로 훌쩍 자란 것.

    외관상으로 엄연히 어른인 네모는 부자에게 ‘어른답게’ 맘껏 추파를 던진다.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붙잡는’ 성격의 부자는 이런 네모가 싫지 않다. 물론 네모가 가진 엄청난 비밀을 부자는 알 길이 없다. 염정아는 판타지 멜로 장르를 표방한 ‘소년, 천국에 가다’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이건 내 영화다 싶었어요. 그날 밤을 새워 3번을 반복해 읽으면서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다니까요.”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를 끝낸 뒤 다음 작품을 고르고 있던 염정아에게 ‘소년, 천국에 가다’는 운명처럼 다가온 영화였다. 낮에는 만화방을 운영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카바레에서 노래하는 미혼모 부자는 평범한 캐릭터가 아님에도 염정아는 주저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그의 표현대로 ‘필이 꽂힌’ 작품이다. 그는 “카바레 가수라는 설정이 무척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염정아는 ‘소년, 천국에 가다’와 불과 며칠 차이로 먼저 개봉한 ‘새드무비’에도 출연했다. 장르는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는 ‘엄마’를 연기했다. 서로 다른 커플 네 쌍의 이별과 사랑이야기를 다룬 ‘새드무비’에서 염정아는 아이를 남겨두고 죽어야 하는, 암에 걸린 엄마를 연기했다.



    본의든 아니든 다작을 하지 않던 염정아가 거의 동시에 영화 두 편에 출연하자 주위에서 “좀 쉬어가라”는 얘기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며 일 욕심을 부렸다. 뒤늦게 사랑받고 있으니 일욕심을 낼 만도 하다.

    염정아는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뽑힌 뒤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큰 인기를 얻진 못했다. 연기자보다 미스코리아의 이미지가 강했다. 대중이 비로소 염정아를 배우로 평가하기 시작한 건 2003년 영화 ‘장화, 홍련’을 통해서다.

    염정아가 ‘장화, 홍련’에 출연하게 된 과정이 재미있다. 김지운 감독의 팬이던 그는 김 감독이 새 영화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내가 할 역할 있어요?”하고 물어봤다고 한다. 김 감독은 염정아에게 두 주인공 임수정과 문근영의 계모 역을 맡겼다. ‘장화, 홍련’ 개봉 당시 염정아는 “내 인생에 다시 안 올 역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염정아의 매서운 말투와 앙칼진 목소리는 그 자체로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스멀스멀 스며드는’ 공포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의도에 염정아의 연기는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전까지는 왜 염정아에게서 그런 면모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장화, 홍련’을 계기로 염정아는 본격적인 연기인생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장화, 홍련’ 이후 염정아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염정아의 비중은 사실 높지 않았다. 박신양, 백윤식과 함께 주연급이었지만 출연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로 염정아는 확실한 색깔을 가진 배우임을 보여줬다.

    선머슴에서 요부로

    염정아는 팜 파탈의 이미지를 지닌, 국내에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서인경’은 염정아를 통해 매력 넘치는 인물로 그려질 수 있었다.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거울 속 여자, 그가 바로 서인경이자 염정아다. 뇌쇄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담배연기처럼 빨아들이던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요부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당시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 염정아를 흠모하던 남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팜 파탈의 독립선언 염정아 VS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 엄정화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뽑히며 연예계에 데뷔한 염정아는 ‘야망’ ‘태조왕건’ 등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영화 ‘재즈바 히로시마’ ‘H’의 주연을 맡았지만 배우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만든 건, 2003년 개봉한 ‘장화, 홍련’이다. 두 얼굴의 계모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낸 염정아는 이어 ‘범죄의 재구성’으로 팜 파탈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며 거울 앞에 서서 춤을 추던 여자도 염정아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염정아도 ‘선머슴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콤플렉스를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에선 섹시함이 절로 묻어나지만 한때는 “도무지 여자 느낌이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뿐 아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슴 아픈 추억을 떠올린 적이 있다.

    “몇 년 전 예쁜 ‘종이인형’ 같다는 말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게서 사람 냄새가 덜 나거나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가짜 연기처럼 보인다는 말로 여겨져 생각을 많이 했다.”

    과연 무엇이 염정아를 변하게 했을까. 염정아는 “주변의 기대가 나를 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대 초반부터 10여 년 동안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단 한 번도 ‘연기파 배우’로 불리지 못했던 그는 30대에 이르러서야 배우로서 제 색깔을 내게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인내와 고통의 산물이겠지만 ‘이제라도’ 배우로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박중훈 보며 배우 꿈꿔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 역시 염정아의 팜 파탈 이미지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 극중 영화사 대표인 조이나(염정아)는 자신의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연하남 김병수(김래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포용보다는 집착에 가깝다. 조이나는 병수에게 피붙이 같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이기적인 여자다. 당당하고 능력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고,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른 이의 사랑을 짓밟는 악녀를, 염정아는 훌륭하게 소화했다.

    염정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 ‘여선생 vs 여제자’에 출연하며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를 인상 깊게 본 좋은영화사 김미희 대표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출연하게 된 ‘여선생 vs 여제자’는 염정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한 작품이다.

    하지만 처음엔 선뜻 출연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코미디 장르인 데다 원톱 여주인공이라는 점이 적잖이 부담됐던 것. 지인들로부터 “너라면 할 수 있다”는 격려를 수차례 받고서야 시나리오를 읽어본 그는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고, 장규성 감독을 직접 만난 다음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염정아가 연기한 ‘여미옥’은 흔히 ‘여자 김봉두’라고 표현되는 인물이다. ‘선생 김봉두’도 장규성 감독의 작품이다. 염정아에겐 ‘선생 김봉두’의 흥행 성적도 부담스러웠을 터. 더욱이 코미디 연기의 수위조절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크랭크인 장면을 하루 종일 찍었을 만큼 염정아는 촬영 초기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장규성 감독은 장면마다 넘치거나 혹은 모자란다고 지적했고, 이런 감독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염정아는 조바심을 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굳이 애쓰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연기에 킥킥대며 웃음을 참는 스태프들과 웃기는 연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30대에 들어서야 인기를 얻은 염정아는 데뷔 이후 1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영화 ‘텔미 썸딩’‘테러리스트’ 같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고, 1992년의 데뷔작 ‘재즈바 히로시마’ 이후 10년 만에 ‘H’에서 여주인공을 맡았지만 흥행성적은 형편없었다. 드라마 ‘태조왕건’에 출연했을 때도 그저 여러 조연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한때 EBS ‘장학퀴즈’와 케이블 TV의 영화프로그램 MC를 맡았던 것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염정아가 거쳐온 길이다.

    중학교 시절 당시 최고 스타이던 박중훈을 보며 영화배우를 꿈꾼 염정아는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나이가 들며 더욱 아름다워지는 여배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염정아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정말 흐뭇하다. 20대 시절, 하고 싶은 연기를 맘껏 해보지 못한 염정아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것도 그래서다. 이젠 아무도 못 말린다. 그가 어떤 변신을 하건 냉정하게 평가하고, 충분히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다.

    첫 원톱 주연

    엄정화(34)는 사뭇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태연한 척 입술은 웃고 있지만 눈빛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첫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오로라 공주’를 세상에 처음 내보이는 날, 엄정화는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보였다.

    ‘오로라 공주’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연쇄살인범인 ‘정순정’의 이야기다. 엄정화가 연기한 정순정은 다섯 명을 잇따라 무참하게 죽이고도 유유히 세상을 활보하고 다니는 무자비한 인간이다. 정순정이 사람들을 죽인 데는 그가 생각하는 나름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딸을 폭행하는 계모나 아무런 죄책감 없이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 주변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는 불륜남의 상대여성…. 연쇄살인범에게 그 어떤 변명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의 시선을 알 듯, 정순정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한 것뿐이다. 엄정화가 표현한 대로 정순정은 ‘과거의 가슴 아픈 일로 인해 온통 마음의 문을 닫고 복수를 위해서만 사는 여자’다. 그가 당한 가슴 아픈 일이란, 어린 딸아이가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돼 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진 사건이다.

    정순정이 택한 복수 방법은 연쇄 살인. 영화는 처음부터 정순정이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백화점에서 아이를 심하게 구박하는 계모를 찔러 죽이거나 마사지를 받고 있는 ‘싸가지’ 없는 여자의 콧구멍에 석고를 들이부어 죽이는 방법으로 순정은 한풀이를 한다. 남 보기엔 외제차 딜러로 일하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이지만 그의 가면 속 진짜 모습은 잔혹한 살인마다.

    ‘오로라 공주’는 엄정화의 연기인생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을 작품이다. 가수로서 이름을 알리고 간간이 배우로서도 명함을 내민 엄정화는 이제야 마침내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진 듯하다. 가수로서도 배우로서도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인 ‘섹시함’을 내세웠던 그가 처음으로 ‘맨얼굴’로 대중 앞에 선 것이다. 엄정화가 긴장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화려한 메이크업, 풍만한 가슴과 히프를 강조한 섹시한 옷차림에 기대지 않고 순전히 연기력으로 승부하겠다고 다짐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그는 아직도 정순정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엄정화는 고백하듯 말했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때도 ‘싱글즈’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은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니가 내 맛을 알아?”

    잘 알려진 것처럼 ‘오로라 공주’는 엄정화가 ‘자원’해 출연한 작품이다. 배우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인 ‘오로라 공주’는 시나리오 작업 단계 때부터 화제를 모았고, 우연히 시나리오를 읽게 된 엄정화는 얼굴만 아는 정도인 방은진을 무턱대고 찾아가 자신이 정순정 역을 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오로라 공주’ 출연에 대한 엄정화의 의지는 대단했다. 다른 배우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그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기어이 주인공 역을 따낸 다음엔 영화에 나오는 단 한 장면을 위해 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섹시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시대다. 엄정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섹시 아이콘이다. 여느 가수나 배우 못지않게 도발적이다. ‘싱글즈’에서 엄정화는 자유연애주의자 동미로 등장한다.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섹스상대가 마흔 몇 번째인가를 세고 있으니 두말 할 것도 없다. “니가 내 맛을 알아?” “남녀관계는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면서도 남자 친구와 ‘쿨(cool)하게’ 섹스리스 동거를 한다. 일과 사랑에 있어 용기 있는 동미에게 적잖은 여성 관객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당당한 커리어우먼인 데다 자유분방한 연애감각을 지닌 동미는 친구로 등장한 나난(장진영)과 달리 통쾌함마저 안겨준다. 자신을 희롱하는 남자의 바지를 벗긴 뒤 목덜미를 잡아끌고 사무실 밖으로 내쫓는 당찬 면모. 부럽지만 아무나 가질 순 없는 모습이다. 동미는 바로 엄정화가 가진 이미지를 대변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가요 ‘몰라’를 부를 땐 또 어떠했나. 사이버 여전사 같은 차림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몰라, 알 수가 없어” 하며 노래할 때 엄정화는 그 자체로 ‘섹시 아이콘’이다. 신곡을 선보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엄정화에게 사람들은 카멜레온 같다고도 했고, 변신의 귀재라고도 표현했다. 그렇게 엄정화는 지난 10년간을 섹시함을 무기로 세상을 살아왔다.

    노출? 일부러 가리지 않을 뿐

    하지만 엄정화는 언제나 목말랐다고 한다. 섹시한 이미지 때문에 정작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일 기회가 없었다. 대중은 청순한 엄정화보다는 섹시한 엄정화를 원했고, 풋풋한 메이크업을 한 얼굴보다는 화려하게 치장한 얼굴에 익숙했다. 드라마 ‘아내’를 찍을 때 일부에서 엄정화에게 질타의 시선을 보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엄정화는 진한 쌍꺼풀 때문에 극중 ‘현자’의 촌스럽고 억척스러운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가시 돋친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팜 파탈의 독립선언 염정아 VS 냉혹한 살인마로 변신 엄정화

    MBC 합창단 출신의 가수이자 배우인 엄정화는 영화에서나 가요 프로그램에서나 독보적인 섹시 아이콘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섹시한 이미지는 연기 폭을 한정지었고, 그는 늘 갈증을 느꼈다. ‘오로라 공주’에서, 그간 보여준 발랄하고 도발적인 이미지와 전혀 다른 냉혹한 연쇄살인범을 연기하기 위해 노 메이크업도 불사하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올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엄정화의 본모습은 동미보다는 현자에 가깝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엄정화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은 ‘아내’의 현자 역이 실제 내 모습과 동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절대 오해다. 사실 내게는 현자 같은 면이 더 많다. 타고난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가 보다.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성격이 그나마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엄정화가 동미를 연기할 때도, 현자를 연기할 때도 그의 연기보단 외모를 먼저 봤다. 그러나 ‘오로라 공주’를 보고 나면 달라질 것이다.

    여배우는 두 부류로 나뉜다. 노출에 당당한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누구나 꺼리는 노출 연기를 하는 배우와 안 하는 배우다. 영화 ‘러브토크’에 출연한 배종옥은 “가슴이 다 드러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고 했고, 톱스타로 불리는 몇몇 여배우는 “몸매에 자신이 없어서”라고 에둘러 말하며 노출 신을 피한다. 어쨌든 노출 연기는 여배우에게 민감한 문제다.

    ‘오로라 공주’엔 정순정이 살인을 저지른 뒤 혼자 목욕하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있다.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엄정화는 가슴을 드러냈다. 다른 영화였다면, 다른 여배우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정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부러 가리는 것이 더 어색할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일부 언론에서 ‘자진 노출’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정화는 “일부러 가리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푼수기 있는 발랄한 소녀

    엄정화는 1992년 영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데뷔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수로 1집 앨범 ‘눈동자’를 발표했다. 올해로 데뷔 13년째이니 연기 경력도 웬만한 배우들을 능가한다. 하지만 엄정화는 한동안 배우로서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그동안 가수활동을 했으니 공백기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연기를 하지 않는 동안 욕심 많은 엄정화는 배우로서 자괴심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어언 10년 만에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출연하면서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데뷔작을 함께 했던 유하 감독의 연락을 받고 엄정화는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사실 이 시나리오는 엄정화에 앞서 몇몇 여배우에게 건네졌지만, 적나라한 섹스 신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애당초 그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지만, 10년 만의 스크린 복귀는 호평과 흥행으로 이어졌다. 엄정화는 다시 연기에 도전할 용기와 오기를 갖게 됐다.

    드라마 ‘12월의 열대야’를 찍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엄정화는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철부지 같은 유부녀 ‘영심’을 연기하고 있었다. 역시 ‘가수 출신 연기자’인 신성우가 극중 그의 남편이었다. 촬영장에서 만난 엄정화는 “어릴 때 신성우씨의 ‘왕팬’이었는데 지금 함께 연기하고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정화의 실제 모습은 그렇게 푼수기 있고 발랄한 소녀 같다. 그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 매사에 열심이고 유쾌하다는 것이다.

    엄정화는 다음 작품으로 ‘호로비츠를 위하여’라는 영화를 선택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지만 이루지 못하고 변두리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 천재인 자폐아를 가르치는 초보 피아노 교사 김지수를 연기한다. 초보 교사가 진정한 스승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가 어떻게 표현해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중년이 되어서도 멜로 연기를 하는 게 배우 엄정화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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