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내기 골프 치며 장자(莊子)를 읽다

  • 윤방부 연세대 의대 교수·가정의학

    입력2005-11-30 18: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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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기 골프 치며 장자(莊子)를 읽다
    구력 22년에 핸디 9. 나의 골프를 숫자로 표현하자면 대략 이 정도다. ‘질보다는 양’을 모토로 필드에 서는 필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골프 마니아다. 시간만 충분하면 하루 36홀은 물론 그 이상도 사양하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제주도에서 45홀을 쉬지 않고 계속 친 일도 있다.

    나를 처음 골프로 끌어들인 친구들은 이런 내 모습에 키득키득 웃을 것이다. 골프를 시작하기 전인 1980년대 초반에는 매일 전파를 타던 ‘윤방부의 생활건강’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골프는 운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지만.

    골프는 건강과 재미를 동시에 가져다주는 운동이다. 운동종목을 구분하는 수많은 분류법이 있지만, 골프는 그중에서도 재미를 주로 생각하는 ‘오락성 운동(recreational sports)’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오락의 기본목적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재미없는 골프는 골프의 기본목적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있다.

    내기 골프를 할 때는 내기를 최대한 즐기고, 라운드 중에 오가는 얄궂은 입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대화를 즐기고, 스코어를 줄이는 즐거움으로 골프를 치는 사람은 거기에 맞춰서 치면, 그것이야말로 골프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다. 심지어 규칙을 심하게 따지거나 매너를 엄격하게 중시하는 것도 재미일 수 있다. 규칙과 규정이 스포츠의 기본이긴 하지만.

    내기 골프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지만, 필자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승부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뭐니뭐니 해도 내기가 걸려 있을 때 라운드의 긴장은 최대치가 된다. 사실 내기 골프에 도박성이 아닌 것은 없다지만, 골프에 적당히 익숙해져 스코어에 자신이 생긴 골퍼가 호승심(好勝心)을 자극하는 요인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길디긴 18홀을 돌겠는가.



    그래도 1983년부터 시작해 구력이 어느새 20년을 넘기고 나니, 이제는 그러한 단계도 지나 스코어든 내기든 별 욕심이나 목적의식 없이 그냥 즐거움 또는 사교의 의미로 필드에 나서는 수준이 됐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산 넘고 물 건너는 갖은 풍상을 다 겪어야 했다.

    여기서 잠깐 필자의 기억 속에 단단히 자리잡은 승부 한 토막. 10여 년 전 춘천에서 열린 제1회 연세동문교직원 친선골프 대회였다. 그날의 동반자들 가운데는 클럽 챔피언을 한 이도 있었고, 흡사 교과서처럼 폼이 좋은 분도 있었다. 스코어도 늘 70대 초반을 기록하는 쟁쟁한 실력파가 대부분이었다. 그날따라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시작된 경기가 130야드쯤 되는 파3홀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너(honor)이던 필자는 이곳에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작전을 짰다.

    빗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핑계삼아, 필자는 다른 동반자가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캐디에게 피칭웨지를 달라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나는 혼마 10번 아이언을 피칭웨지로 쓴다. 나는 10번 아이언을 제대로 휘둘렀고, 볼은 연못을 넘어 보란 듯이 그린에 올랐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다른 세 사람은 덩달아 피칭웨지를 꺼내 쳤다가 공을 모조리 연못 속에 풍덩 빠뜨리고 말았다. 덕분에 79타를 친 필자는 기대하지도 않은 초대 챔피언이 됐다. 상품은 큼지막한 TV. 비록 친선대회였지만 우승소식이 한 일간지에 실려 이름이 나기도 했다.

    그렇듯 상품이 걸린 대회나 내기가 걸린 골프를 치다 보면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평소에는 플레이가 기가 막힌 싱글인데, 내기만 하면 무너져내려 스코어가 형편없이 나오고 돈도 잃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적은 돈이 걸려 있을 때는 항상 신나게 따먹고 점수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잘 나오는 사람이, 액수가 조금 커지면 벌벌 떨면서 자신의 기본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 잃는 경우도 있다. 큰 내기에서 항상 난조를 보이는 유형이다.

    이럴 때 적절한 표현이 ‘외중내졸(外重內拙)’이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에 나오는 이 고사성어는 ‘밖을 중시하면 속이 졸렬해진다’는 뜻이다. 옛날에 활쏘기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값싼 물품을 걸고 활쏘기 내기를 하면 반드시 승리했는데, 황금 덩어리가 걸리면 통 맞히지를 못했다. 활 솜씨는 뛰어나지만 통도 작을 뿐 아니라 상품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는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 충실하다’고 믿는다. 만고의 진리다. 그러나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큰일을 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흔히 말하는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와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 미국 사람들도 이런 경우를 설명하는 속담을 갖고 있다. ‘No Blood, No Gain’ 혹은 ‘No Gut, No Glory’라는 말이다. 배짱이 없이 소심하면 결코 영광을 얻지 못하는 법. 골퍼라면 누구나 기억해둘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골프에서만 통용되는 진리이랴. 작은 일에서는 승리하지만 큰일이 닥치면 무너지는 것 또한 어찌 필드에서만 벌어지는 비극이랴. 인생의 큰 내기에서 난조를 보이지 않고 승리하려면, 먼저 외중내졸의 의미를 새기며 자신의 그릇을 키울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번 사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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