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공로명 전 외무장관의 新 한일관계론 특강

“냉철한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 공로명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전 외무부 장관

    입력2005-12-01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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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활동가’보다 ‘독도 연구가’가 많아야
    • 미일동맹은 일본 패권국가화 막는 안전장치
    • 감정적 기(氣) 싸움 그만두고, 일본과 FTA 추진해야
    • 일왕 한국 초청해 과거사 사과하면 역사 문제 종지부 찍자
    • 북한 개발은 한국에 기회, 미국보다 일본의 협력 필요
    • 끝도 없이 과거사 들춰내면 결국 우리 치부(恥部) 드러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모든 것은 변해도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but geography)”는 것이다. 이 문장은 군사전략을 가르치는 미국의 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 현관 벽에도 붙어 있다.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다는 우리 옛말도 있다. 이웃이 밉다고 한반도를 뚝 떼어 태평양 한복판에 갖다 놓을 수는 없는 만큼, 일본과 공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전제를 깔고 긴 안목으로 한일관계를 설정하고, 어떤 정책이 우리의 국익(國益)이 될지 살펴보자.

    지정학자들은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나라의 지리를 살피면 그 나라의 대외정책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지정학적 여건이 나라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끼쳐왔음은 역사가 말해준다.

    미국 국무성 아·태차관보를 지낸 제임스 켈리가 1992년 평양을 방문한 뒤 도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한을 합친 통일한국은 인구 7000만명, GDP 1조달러로 유럽 기준으로는 대국(大國)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반도 북쪽에는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 서쪽에는 핵으로 무장한 중국, 남쪽에는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이 있다.”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의 저자 돈 오버도퍼도 한국은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존재의 제약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은 잘못된 곳(wrong place)에 있는 잘못된 사이즈(wrong size)의 나라다. 주변 국가들은 한국을 크기나 지리적 이점에서 실질적인 가치가 있어 책략을 꾀할 만한 나라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은 강대국이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너무나 작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운명은 자신의 권익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강대국의 긴박한 요청이나 강요된 요구로 결정된 일이 많았다.”

    한국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하타다 다케시는 ‘이와나미 신사의 조선사’라는 책에서 “한국은 180회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는데, 이러한 환난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은 요인은 강인한 인내심, 불요불굴의 독립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이 생존한 이유가 동아시아 세력 다툼의 본무대였던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중국 대륙의 중원인 장안, 뤄양, 또는 난징 같은 곳에 있었다면 한민족은 한족(漢族)에 흡수됐을 것이다.

    중국은 냉철한 이해타산가

    따라서 우리의 생존전략은 자명하다. 주변국가와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안전보장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장제스 정권의 중국 덕분에 해방을 약속(카이로 선언) 받아 독립했다. 1950년 6월 북한이 무력침략했을 때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의 도움으로 자유와 독립을 지켰다. 그 뒤 미국과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냉전구도에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그려보자. 일본은 밉든 곱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자유세계의 일원이다. 미국과 같은 동맹국이므로 협력하는 길밖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환경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됐다. 중국의 경제력이 급부상하자 사회 일각에서 한일, 한미관계를 새롭게 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은 25년 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세계에 문호를 열었다. 그 결과 중국의 경제규모는 1조6000억달러를 상회해 세계 6위의 경제력을 갖추게 됐다.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제1위 교역대상국이 됐다. 이 같은 중국의 부상과 기존의 국가 정책을 새롭게 보려는 우리 정부의 태도가 맞물려 요즘 우리 사회엔 ‘중국 요소(China Factor)’가 회자되고 있다.

    새로운 시각이든 기존의 시각이든 외교관계를 재편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감성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의 ‘포린 어페어즈’(9·10월호)에 실려 화제가 된 중국학자 왕 지시(베이징대 국제학 대학원장이자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 국제전략연구원장)의 논문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그는 미중관계가 서로의 이익에 의해 맺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경쟁관계로 때론 상호협력 관계로 나아갈 것임을 역설했다.

    “중국과 미국이 진정으로 우호 관계를 수립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비정부기구나 개인끼리는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대 국가로서 중국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 관계를 맺는다. 중미관계에는 다른 국가간 관계보다 강력한 애증이 녹아 있다. 두 국가의 연결고리는 플러스와 마이너스 요소가 꼬여 있으며, 이것이 왕왕 교차한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그의 회고록(‘The White House Years’)에서 중국인을 “힘의 정치에서 가장 냉철한 이해타산가”라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인용한 것은 우리 외교가 감성에 휘둘리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적어도 ‘손 안에 들어온 복’을 내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21세기 국제정치판에서 살아남고 번영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냉철하고 성숙한 민족이 돼야 한다.

    2002년 6월 경기도 의정부에서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사건은 반미운동의 인화점이 됐다. 뒤이어 일어난 촛불시위는 그해 대통령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부대 이동 중이던 미국 장갑차가 노상에서 일으킨 사건은 분명 과실치사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렇게 큰 사건으로 번졌을까. 우리가 좀더 냉철하게 생각했다면 반미 촛불시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일관계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쓸데없이 양국의 긴장을 조장할 필요가 없다.

    캐딜락과 쏘나타

    독도 문제가 그렇다. 얼마 전 국회 국방위원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이 밉다는 이유로 독도에서 국정감사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나쁜 쪽으로 일이 진행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에게 국민감정이 있듯 일본도 국민감정이 있다. 만약 양국이 독도 주변에서 물리적 힘겨루기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일본은 F-15 전투기를 190대(한국은 F-16 140대),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는 이지스함을 4척이나 갖고 있다. 전투비행단장을 지낸 한 공군장성은 “F-15는 캐딜락이고, F-16은 쏘나타”라고 비유한다. 두 자동차가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이와 같은 일본의 군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국방위 의원들이기에 그들의 행동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외교안보 정책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국민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무책임하게 행동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독도 얘기를 좀더 해보자. 시마네현의 ‘다케시마(竹島) 기념일’ 지정이 우리의 독도영유권을 훼손하는 것일까. 일본은 이미 1905년에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도는 엄연히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영토이며 지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일부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독도에 경찰수비대를 상주시켜 관리하고 있다.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우기면서 기념일을 지정해도 독도의 지위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외교부 성명 하나로 그들의 행동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일축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위로는 대통령부터 아래로는 초등학생까지 독도가 당장 일본 땅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었다.

    1952년부터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부의(附議)하자고 우리측에 요구했다. 국제사법재판소 규약에 따르면 분쟁 당사국들이 재판의 결정을 수락한다는 합의 없이는 재판소가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동의 없이 일본이 독자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안건을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물리적인 힘으로 독도를 강제점거하지 않는 한 독도에 대한 실효적 권리는 우리 손에 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말했듯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독도 활동가’가 아니라 ‘독도 연구가’다. 독도 전문가가 많이 나와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 이를 단번에 격파해야 한다.

    국제 문제를 다룰 때는 냉철함과 동시에 균형감각을 잃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일본의 보수 우경화와 개헌 문제가 자주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개헌 움직임에 단세포적으로 대응하다가는 대세를 그르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일본이 자위대 300명을 이라크에 파병한 것을 두고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한다. 사실 일본은 헌법 제9조의 해석과 자위대법에 묶여 파병한 자위대원의 자체방어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인근 네덜란드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보통 국가의 상식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다. 일본의 이 같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개헌 움직임도 편견을 갖고 볼 필요는 없다. 이번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을 거둬 개헌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헌법 제9조 개정의 초점은 ‘일본이 집단 안전 보장권을 갖느냐’에 맞춰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헌법 논의를 볼 때, 일본이 20세기 전반기의 군국주의로 돌아가거나 국가정책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냉철하게 관망해야 한다.

    일본은 아시아 성장의 자극제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평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일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이 재무장하더라도 오늘의 국제정세가 20세기초처럼 군사력을 투사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미일동맹은 미국이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며 일본의 안보를 지켜주는 동시에 일본이 패권국가화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다.

    일본에 대해 균형 있는 시각을 갖기 위해 과거 일본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줬는지 살펴보자. 한국 경제의 토대는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와 양국의 경제협력으로 구축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국내 30대 재벌기업 중에 일본의 상업차관 신세를 지지 않은 기업이 있을까. 우리가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 일본이 많은 부분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해선 안 된다.

    공로명 전 외무장관의 新 한일관계론 특강

    지난 8월16일 국회 독도특위 소속 여야의원 16명이 독도를 방문, 경비대원들을 격려했다.

    최근 싱가포르대 키쇼 마부바니 공공정책대학원장은 ‘타임’지에 쓴 ‘아시아의 현대화(The Making of Modern Asia)’에서 “19세기말∼20세기초 일본이 이룩한 산업화가 오늘날 아시아가 경제성장을 일궈낸 자극제가 됐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벗어나서 보면 이 같은 시각은 보편적이다. 이를 부정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마부바니 원장은 “한국이 일제 강점기 때 가혹한 식민통치를 받았으나, 한국이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일본의 사례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산업의 대부분이 일본의 공작기계, 중간재, 원자재에 의존하는 현실을 보자. 한국 정보통신(IT) 산업의 꽃이라고 하는 휴대전화 부품의 60∼70%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일본과 맺게 될 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 경제 활동의 영역을 넓혀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기적으로 물품 교역상의 적자폭 확대만 걱정할 게 아니라 무역외수지도 포함해 계산해야 한다. 일본의 직접투자 확대 가능성, 자격증의 상호 인정 등에서 창출되는 이익까지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자세는 교섭하겠다기보다 기(氣) 싸움만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향후 한일관계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더 이상 과거사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옳다. 다만 그러한 자세가 오래가지 못한 것이 흠이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더 거론해도 별다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거론할 것은 다 거론했다.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한때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따른 미래 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말했다. 서로 할 말은 다 한 셈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깜짝 공개

    반성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내가 1993∼94년 주일대사로 있을 때 오자와 이치로 의원(민주당의 부총재)이 사죄 문제를 놓고 “한국은 우리가 땅에 무릎을 꿇고 빌기를 원하느냐”며 “당신들이 우리 조상을 동북으로 쫓아낸 것은 잊었느냐”고 항의했다. 6∼7세기 신라와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일본 조정은 이들을 지금의 도쿄, 즉 관동지방으로 보냈다. 관동지방에 고려신사가 있고, 도처에 한국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일본인은 동북지방으로 쫓겨났다. 오자와는 이때 쫓겨난 사람의 후손이라 볼 수 있는 동북지방의 이와테현 출신이다. 나도 이 같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억지 주장에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지난 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현홍주 전 주미대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회의에서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가 논의됐을 때 카를 카이저 전 독일 외무성 국제문제연구소장이 “독일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기념 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며 “우리는 이처럼 전세계에 독일 국민의 진지한 역사 반성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왜 일본은 이와 같은 제스처가 없느냐”고 지적했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 일본 왕가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아키히토 일왕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2001년 12월 ‘생신 기자회견’에서 간무덴노(桓武天皇)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며 스스로 천황가의 혈통과 한국의 인연을 밝혔다. 이는 일본 궁내청이 준비한 시나리오에는 없던 얘기였다. 이처럼 일본 왕가가 한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표명해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재일동포 신문 ‘통일일보’ 8월15일자는 아키히토 일왕의 학우인 하시모토 아키라씨와 최서면 원장의 대담을 게재했다. 여기에서 하시모토씨는 아키히토 일왕이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당시 하시모토씨에게 이렇게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 가서 일본의 과오를 말하면 한국 국민이 우리를 이해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한국 대통령을 일본으로 영접해 얘기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다툼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 일본 국왕이 한국을 공식 방문한다면 역사 청산에 커다란 진전이 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이래 역대 한국 대통령들이 일본을 공식 방문해 일왕의 방한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왕이 한국을 방문할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일왕은 1992년 일·중 국교 정상화 20주년 때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의 방한이 이뤄지려면 우리 국민이 일본을 동맹에 준하는 ‘우호협력국’으로 인식해야 한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는 시기쯤 일왕의 방한을 실현시켜 역사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보자.

    이렇게 말하면 친일파적 발언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은 “일본이 이웃인데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며 “없다면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말은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것이지, 친일파라고 해서 다 처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던 한 신문사 사장이 “그렇다면 언제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란 말이냐”라고 질문했다. 이에 김구 선생은 “건국이라는 북새통에 불을 끄려면 강도의 손도 빌려야 한다”고 대답했다(최서면 원장의 증언). 광복 후 김구 선생과 한독당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관리를 지낸 인사들을 비호하기도 했다. 이는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손을 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과거사 규명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언젠가 김종필 전 총리가 일본에서 강연하면서 “당신들도 한번 생각을 해봐라. 남의 나라 낭인(浪人)들이 일본 궁성에 쳐들어가서 일본 국모를 살해했다면 당신들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그 심정을 헤아려보라!”고 했더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역사를 더 들여다보면 우리가 부끄러워진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대원군이 친위대 및 일본 낭인들과 함께 경복궁 앞까지 왔다. 일본 낭인들이 그에게 궁 안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하자 그는 국왕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면서 궁 밖에 남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며느리가 미웠던 시아버지가 일본제국주의자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될까.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친위대의 제2대대 대대장이 우범진인데 그 아들이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다. 우범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에 망명해 히로시마에서 살다가 자객의 손에 죽었다. 김옥균과 똑같은 식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을 들어내는 동시에 구한말 역사의 치부가 아닐 수 없다.

    과장된 일본 우경화

    한일관계는 ‘실질적 동맹’의 관계로 풀어야 한다. 성균관대 김태효 교수에 따르면 ‘실질적 동맹(virtual alliance)’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미국 하와이태평양포럼 대표인 랠프 코사라고 한다. 그는 1999년에 쓴 논문(Building toward a Virtual Alliance)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반도는 언젠가 통일되겠지만, 이를 평화롭게 실현하려면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협력해야 할 것이다. 3자간 협력은 3국이 실질적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이 같은 전략적 파트너십은 각국의 국가 안보이익에 기여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때문에 한·미·일의 실질적 안보협력체제 구축에 소극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3국 동맹체제하의 한국이 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존재는 중국 정부의 눈에는 땅덩어리나 인구에서나 산둥성의 절반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성이다. 그러나 3국 협력의 틀을 구성하면 한국은 훨씬 큰 나라가 된다.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하면 당연히 국익에 도움이 된다. 양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동맹국에 버금가는 관계가 서로에게 좋다.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다르면 우리뿐 아니라 외국도 혼란에 빠진다. 외국인은 19세기 열강에 기웃거리던 대한제국을 보던 눈으로 우리를 볼지 모른다. 미들급 체격의 한국은 대외 정책을 신중하게 수립하고, 외국이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역사학자 이병도 선생은 저서 ‘국사대관’에서 “살아 있는 역사 연구를 하려면 과거는 현재의 뿌리고, 현재는 과거의 집적이며 과거 생활 중에는 항상 현재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과거를 알되, 과거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한일 역사 문제를 극복하려면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양국의 바람직한 장래를 맞이하려면 가해자인 일본은 겸허해야 하고, 피해자인 한국에는 역사적 화해를 위한 관용이 필요하다.

    [토론]

    ※일민국제관계연구원의 요청으로 토론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질문자 : 일본 사회가 총체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 어떤 외교전략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막고, 국익을 위해 일본을 활용할 수 있을까. 또한 한국과 중국, 일본이 모두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데, 3국간에 빚어질 민족주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공로명: 일본 우경화의 실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경화=제국주의’라고 도식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일례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후쇼사 교과서는 일본 내 채택률이 0.4%다. 우리 눈에 비친 우경화와 일본의 실질적 우경화의 차이를 찬찬히 분석해야 한다. 일본의 헌법 개정안도 그렇다. 헌법을 개정하면 자위대법도 개정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에 국군이 생긴다. 자위대가 아닌 군대가 생긴다. 그러나 일본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얼마나 투자할 수 있을까. 키신저는 “이제 대국 간의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핵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핵을 가질 것인가. 당분간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핵폭탄 제조 능력은 있지만, 일본은 핵을 가진다고 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다. 오히려 중일 양국간 긴장이 고조돼 핵 경쟁을 하면 갈등이 더욱 커진다.

    한·중·일 3국의 민족주의가 충돌한다는 것도 서로 이익을 볼 게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 3국이 잘사는 길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뿐이다. 안보 공동체까지 가기에는 멀었지만, 우선 그 중간 단계로 경제적인 공동체는 논의되고 있다.

    혹자는 일본과 중국이 맹주가 되려고 다툴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재미있다. 중국 사람은 “중국과 일본은 같은 산 속에 있는 호랑이들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과 일본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 말이라는 점이다. 마차를 끌고 가는 두 마리의 말이 동아시아 공동체와 상호번영을 위해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의 우경화와 관련해서는 우리 언론이 과민반응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최근 일본 자민당 신헌법 전문을 인용하면서 독도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 자민당 신헌법 전문을 보면 첫 단락이 “일본 국민은 아시아의 동쪽, 태평양과 일본해의 파도가 치는 아름다운 섬에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 섬은 일본이라는 섬이지 독도가 아니다.

    신헌법 전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일본이라는 섬에서 천황을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받들고 화(和, 협동)를 존중하며 다양한 생활신조를 너그럽게 인정하면서 독자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전하고 많은 시련을 극복하며 발전해왔다.” 이 같은 문학적 표현을 두고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으로 보긴 어렵다. 일본을 자꾸만 대결구도로 바라봐선 곤란하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우리가 주자학을 배운 후손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너무나 이념적이고 신경과민적이다. 지나친 민족주의는 문제다. 민족주의가 전면에 나서면 외교 마찰이 빚어진다.

    질문자 : 역대 대통령들의 대(對)일본 외교를 평가한다면?

    공로명 :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 외교에 관해서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1957년 이 대통령은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주일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김 총재를 일본에 보내면서 “일본에 가서 국교 정상화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야”라며 “한일 국교 수립은 지금(1957년) 마흔 살 된 사람들이 다 죽어야 성사돼. 당신은 일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만 잘 듣고 보고하면 돼”라고 했다.

    그런데도 김 총재는 그해 일본에 가서 제4차 한일회담 초안을 만들었다. 3차 회담이 구보타 망언으로 깨진 지 4년6개월 만에 다시 이뤄지는 순간, 이 대통령이 문장 하나를 가지고 비틀어 성사되지 못했다. 김동조 전 장관의 회고록을 보면 김 총재가 그것 때문에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성사시켰다. 한일회담에서 정작 골칫거리는 평화선언을 어떻게 하는가였다. 나는 당시 청와대 회의에서 실무담당자로 앉아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필코 국교 정상화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일권 총리가 일어나서 “각하 말씀을 내각의 제일 보좌관(국무총리)으로서 받들겠습니다”고 했다. 그때 국내 여론은 모두 굴욕적이라고 했다 신민당 소장 논객이던 김대중, 김영삼씨 등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반대했다.

    그러나 정권의 운명을 걸고 회담한 결과 돈이 생겼고, 그 돈이 씨앗이 돼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당시 세계은행은 서울-대전, 부산과-대구 구간은 경제성이 있지만, 대구-대전 구간은 경제성이 없어서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하나로 연결해야 일일 경제권이 된다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그 돈은 한일경제협력기금에서 마련됐다. 우리가 그 기금을 연간 5000만달러씩 10년 동안 5억달러를 쓸 수 있었고, 여기에 산업차관 3억달러가 추가됐다. 그래서 총 8억달러였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외상과 합의할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6억달러였다.(2004년 말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8352억달러)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의 대일관계는 박 대통령의 연장선 위에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기본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후보 연설을 할 때는 일본에 문화개방을 하겠다고 했다. 표심(票心)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이다.

    질문자 : 개인사업을 하기 전 19년 동안 삼성에서 일하면서 일본인과 일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과 만나면서 때론 이들의 친절함이나 잘 갖춰진 기반시설에 부러움을 느꼈다. 반면 우리가 이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데 대해 질투도 했다.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니까 냉철하게 이들의 장단점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한일관계도 이런 감정 때문에 쉽게 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쉽게 증폭되는 애증관계

    공로명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애증관계라는 것이 있다. 일본 사람이 좋다가도 정이 없어지는 게 애증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일관계에도 이런 감정이 개입되는 것 같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너무 닮아서 그런 것 같다. 한국인은 일본인을 자신의 동류처럼 생각하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긴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감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감정적인 면에서 유사점이 많기 때문에 애증관계가 쉽게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과 비즈니스 혹은 외교적 교섭을 할 때면 ‘이들처럼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이들은 아주 세세하게 따진다. 문제를 해결할 때도 지나치게 천천히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외교관들도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이러한 면모 때문에 많이 싸운다. 하지만 교섭이 성사되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

    질문자 : 한일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일본의 농업보험제 때문에 답보상태이고 한국 정부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태도라 지지부진하다. 어떻게 접근해야 일본의 한국 투자를 확대시키고,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은 일본과 북한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북·일 국교 정상화가 본 궤도에 오르면 일본이 최소 50억달러, 많게는 150억달러까지 북한에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기 전에 한일관계를 지금보다 훨씬 긴밀하고 돈독하게 해야 한다. 일본이 북한에 자금을 지원할 때 한국과 긴밀하게 논의할 것이고, 한국은 북한의 산업부흥 프로그램에 참여해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해나갈 수 있어서다.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다.

    법률가 기질 외교관은 빵점

    마지막 질문은 한일 해저터널에 관련된 것인데, 해저터널이 한국으로선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건설교통부는 항만, 물류산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는가.

    공로명 : 한일 투자협정 협상안은 대부분 마련돼 있다. 일본이 농산물 시장을 50% 개방하겠다고 했는데, 우리는 좀더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서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만나서 교섭하면 자신의 안을 제시하겠다고 했고, 한국은 먼저 일본이 내놓은 안을 본 뒤 교섭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처음 이야기할 때는 괜찮았는데 여러 번 반복되니까 기 싸움으로 변질됐다. 정부 일각에서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시각이 있지만, 대통령이 썩 내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것을 방패삼아 실무 담당 부서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가장 큰 문제가 수산물이다. 한국이 생산하는 김을 전부 일본에 팔아도 2000만∼3000만달러다. 태평양에 있는 참치를 다 잡아 일본에 팔아도 10억달러에 못미친다. 농수산물 문제를 가지고 따져봐야 전체 무역에서 볼 때 큰 손해는 아니다.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만약 중국이 주저앉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버팀목을 만들어야 한다. 어느 한쪽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재계에선 한국시장보다 10배나 큰 일본시장에 진출해야 한국 경제가 뻗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 자동차업계가 시장개방에 반대하고 있지만, 이 분야도 3∼4년 지나면 우리 경제에 플러스가 될 것이다. 요즘 국내 젊은이들의 실업률이 높다는데,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일본에서 얼마든지 취업할 수 있다. FTA는 우리에게 기회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협상을 못하겠다고 한다. 외교통상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해럴드 니콜슨이 쓴 ‘외교(Diplomacy)’라는 책을 보면, 법률가적 성격을 갖고 있는 외교관이 가장 자격미달이라고 한다. 법률가는 지느냐 이기느냐, 흑이냐 백이냐를 따지기 때문에 중간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본과 싸우고 있는 양상을 보면 법률가가 흑백을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비판적이기 쉽고,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일을 처리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기 싸움은 그만두고 우선 일본과 만나야 할 것이다.

    일본인이 한국서 드라이브하도록

    일본과 북한의 수교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역사를 참고하면 좋다. 우리가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이유는 산업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은 우리에게 밀가루는 줬지만 돈을 빌려주지는 않았다. 미국의 의도는 한국이 일본과 수교해 일본에서 산업자금을 빌려가라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등을 떠밀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게 한 셈이다. 두어 달 전에 국민대 정외과 김영작 교수와 한국정치학회 등 여러 학회에서 개최한 한일 심포지엄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박사논문 거리가 될 만한 게 있냐고 묻기에 한일 국교정상 회담에서 미국의 역할을 살펴보면 훌륭한 박사논문이 나올 것이라고 말해줬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은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추진할 것이다. 돈 나올 곳은 일본밖에 없기 때문에 한일관계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올 때 한국이 활약할 부분이 많다. 북한 개방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다. 한국과 일본이 지금처럼 긴장관계를 지속하면 이 같은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 양국이 실질적인 동반자로서 공동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면 동북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얼마나 뜻있는 일이 되겠는가.

    예전에 (로비스트) 박동선씨가 해저터널 문제를 해결하려고 현해탄을 오고간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해저터널 공사가 매력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한류(韓流)가 일본을 휩쓸고 있다지만, 나는 예전부터 일본 관광객이 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한국에 와서 누비고 다닐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안보에 깊숙이 관여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사람이 연간 400만명이라고 한다. 그중 한국인은 170만∼180만명, 나머지는 일본인이다. 만약 일본인이 한국에서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즐긴다면 이것이야말로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양국의 거리를 훨씬 좁히는 길이 아니겠는가.

    해저터널을 통해 일본인이 차를 몰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해보자. 관계개선이 별건가. 사람의 접촉이 빈번해지면 친해지기 마련이다.

    [이 글은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이 10월10일 고려대 일민 미래국가전략 최고위과정에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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