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미·소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 모스크바 3상회의의 허구성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입력2005-12-15 1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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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영·소 3국 외무장관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한국 독립과 관련해 ‘선(先) 탁치, 후(後) 정부 수립’을, 소련은 ‘선 임시정부 수립, 후 후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합의된 의정서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방안이 들어 있지 않았다. 미·소 모두 신탁통치안을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미·소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 모스크바 3상회의의 허구성

    1945년 12월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반탁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좌익 세력은 해가 바뀌자 찬탁으로 돌아서서 지지시위를 벌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인 1945년 12월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외무장관이 회합했다. 당시 미국 대표는 번스(Byrnes) 국무장관이었으며, 소련은 몰로토프(Molotov), 영국은 베빈(Bevin) 외무장관이었다.

    우리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역사적 회의로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의 과소평가와 왜곡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이었다는 그릇된 인식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 1945년 12월28일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각)에 발표된 코뮤니케(의정서)를 보면 한국에 관한 결정은 주변 문제 중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7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의정서의 셋째 항목이 한국에 관한 조항인데, 한국문제는 토론된 여섯 가지 의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한국인에게는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의 핵심이 한국문제로 비쳤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지 한국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회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왜곡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곧 신탁통치이며 이 회의에서 미·소가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의정서를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신탁통치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단지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설치하고 일정 기간 신탁통치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것 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미·소간 타협의 산물로 어느 누구의 독단으로 결정된 게 아니었다. 1945년 12월16일 미국은 ‘유엔 주도하의 4개국(미·영·중·소) 5년내(5년 연장 가능) 탁치(託治)’ 안을 제출했지만 소련은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대신 일본문제에 주의를 돌렸다. 18일과 19일 회합에서 소련은 미국의 양보를 얻어 일본 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장받았다. 이에 소련은 더욱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해 중국문제에서 미국의 주장을 인정했다. 이로써 전후 미·소의 협조는 최고조에 이른 것처럼 보였으며 냉전(冷戰)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련의 수정안 제시

    한국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소련은 12월20일 이후 4개항으로 된 안(案)을 제출하면서 유화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했다. 소련안은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후견’을 골자로 한 것으로서 ‘선 탁치, 후 정부 수립’을 규정한 미국안과는 상당히 달랐다.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탁치’라는 용어를 러시아어 (영어의 ‘후견(tutelage)’에 해당)로 번역해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 수립을 미·영·중·소가 원조한다’는 후견 제안으로 수정했다.

    소련이 이처럼 수정안을 낸 것은 미·영·중·소가 참여하는 미국안대로라면 3대 1로 수적으로 우세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탁치를 주도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조선인의 참여를 보장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기도하는 실리를 챙기고 조선인의 자주적 욕구를 반영하는 명분을 살리는,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소련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타협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실현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인지 소련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합의된 의정서는 문구를 몇 군데 수정한 것을 빼곤 소련안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모스크바 결정 중 한국문제 조항은 당시 한시적으로 조성된 한시적인 미·소 협조 분위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간 실질적인 협조가 불가능하다면, 그 문구가 해석상 논란의 여지없이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은 한 실현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측은 이후 역사에서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났다.

    흔히 모스크바 의정서 한국 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더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않은 휴짓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모스크바 의정서의 한국 관련 부분은 4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항부터 인용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해, 장기간의 일본 지배에 따른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기 위해,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코리아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첫째 항은 미국안에는 없는 다소 선언적인 문구로 탁치가 실시된다는 구체적 언급 없이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조선민족에게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첫째 항을 과대평가한다면 모스크바 결정은 탁치에 관한 의정서가 아니라 독립의 실현방법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탁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위 조항은 하나의 선언적 수사(rhetoric)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탁치안이 확정된 것도 아니므로 모스크바 의정서의 3대 축인 탁치와 독립, 임시정부 구성 등에 관해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 설립

    둘째, 코리아 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해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해, 남부 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 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둘째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째 항에서 규정한 임시정부 구성은 즉각 실현되는 게 아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이하 공위)라는 기관이 설립된 후 공위의 도움으로 구성된다는 순서였다. 그렇다면 공위의 임무는 무엇인가? 셋째 항의 규정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셋째, 코리아 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 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다.

    탁치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셋째 항에서 탁치는 ‘독립달성의 수단’이라고 해석돼 있다. 공위의 주된 임무는 ‘신탁통치 방책의 작성’이며 둘째 항 맨 앞에 언급된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 것’도 부차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는 탁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다. 첫째 과정은 결정의 주체인 공위가 코리아 임시정부 및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탁치방안을 작성한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둘째 항의 둘째 문장과 셋째 항의 둘째 문장 서두에 나온다. 이는 코리아 사람을 단지 행정관(administrator)이나 고문(consultant)으로 임용할 수 있다는 미국안의 규정보다 코리아인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것으로 소련측에 유리한 규정이다.

    둘째 항 둘째 문장 : 공동위원회는 그 제안들을 준비할 때 코리아의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할 것이다.

    셋째 항 둘째 문장 :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코리아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친 후,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미·소·영·중의 공동심의에 회부될 것이다.

    둘째 과정은 공위가 작성한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한다는 것인데, 바로 위의 문장과 다음과 같은 둘째 항 셋째 문장의 규정이다.

    둘째 항 셋째 문장 : 공동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대표권을 가진 양국 정부가 최종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미·소·영·중 정부의 심의를 위해 제출돼야 한다.

    마지막 과정은 바로 위의 문장에서 본 바와 같이 4개국 심의를 거친 탁치협정안을 미·소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소 합의만이 통일에 대한 유일한 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탁치’와 ‘후견’의 차이

    이처럼 탁치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인데 이를 크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공위가 임시정부와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탁치방안 작성→②‘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③탁치협정안을 미·소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

    의정서의 마지막 항인 넷째 항은 미·소 사령부가 2주일 안에 긴급 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것 외에는 모스크바 의정서의 확실한 결정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의정서 자체는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모스크바 회담에서는 막연히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결정됐을 뿐이다. 그리고 구체적 실행방법은 미·소가 주체가 돼 조선인과 영·중과 단지 협의만 해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제시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의 요점이다. 즉 미·소가 결정 당사자라는 점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미·소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 모스크바 3상회의의 허구성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외신기사를 전재한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이를 흔히 탁치에 관한 의정서라고 부르지만 탁치 실시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결정했다기보다는 ‘탁치 실시 방안의 결정 절차’를 대략적으로 규정한 문서에 불과하다. 원래 탁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실행안이 분할점령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곧바로 실행하지도 못하고 미·소는 한반도 분할점령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안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단지 ‘5개년 이내 4개국 탁치안’을 미·소가 조선인·영·중과 협의해 결정한다는 것 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지침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위가 열렸으나 앞의 3단계 절차 중 1단계에서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 문서의 구속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미국과 소련은 탁치를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었다.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던 탁치를 미국은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부각된 ‘정치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평등한 ‘도와줌’의 의미가 부각된 ‘협력 원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탁치와 후견이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이처럼 개념마저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따위의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이후 개최될 공위에 떠넘겨버렸으니, 한국문제에 관한 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소 양국의 협력이 공고하다면 결정이 유보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합의된 결정이 미·소간 불화로 실행되지도 못한 채 파기되고 마는 형세가 조성됐다. 이 과정에 세계적인 냉전체제 출현의 국지화에 기여한 또 한 가지 요인은 반탁(反託)과 모스크바결정 지지(贊託)로 갈린 국내 세력의 대립이었다.

    그렇다면 미·소가 왜 이렇게 명확한 것 하나 없이 비정상적인 합의에 도달했을까. 거기에는 두 나라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며 양국은 그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규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두 가지 흥미 있는 추론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미·소 양국은 탁치 실시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속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탁치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구체성이 없는 탁치안은 미국의 이익에 합치하는 동시에 소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속셈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의 배타적 이익보장이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방안이 바로 탁치안이다. 또한 그것이 위임통치처럼 식민지의 변형이 될지, 아니면 소련의 주장처럼 독립의 지름길이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의 탁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건하게 발산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제국적 반식민주의 정책의 산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패전국 식민지에 적용된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미국의 이익에 맞게 변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임통치든 탁치든 모두 자국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주의 정책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문호개방적인 탁치안은 ①식민지의 혁명적 기운을 의식해 위임통치의 구(舊)식민주의적 특성을 신(新)식민주의적으로 변화시켜 식민지 민중의 요구에 부합하면서 ②동시에 구식민세력(영·불·독)을 견제, 구식민지적 방식을 통하지 않고 ③따라서 구식민지가 무장력이 필요한 반면 탁치는 별다른 무장력의 필요 없이 더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방안이다.

    합의안에 이미 파기 가능성 엿보여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인 우세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소련은 국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 탁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의 수단으로 규정됐으나, 이는 미·소 양국의 숨은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며 실제로는 자국에 우호적 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소 모두 탁치를 통해 우호적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이 합의안은 언제라도 가차없이 파기하고 다른 수단을 택할 소지가 애초부터 있었다. 미·소가 서로 양보해 타협하지 않는 한 ‘조선을 위한 통한안(統韓案)’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이후의 역사(1947)에서 미국의 일방적 파기로 현실화됐다.

    둘째는 어느 한쪽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으나 지엽적인 한국문제에 합의하고 더 중요한 중국과 일본 문제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미·소 화해분위기를 먼저 해쳤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 별다른 고려 없이 합의했다는 분석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소는 각각 실현가능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미·소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단독 행동으로서의 ‘단정(單政) 수립’(미국)과 ‘양군 철수-즉시 독립’(소련)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됐다.

    또한 미국의 경우 탁치안을 주도했던 루스벨트가 1945년 4월12일 미·소간의 공식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트루먼이 승계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주도한 국무부가 루스벨트의 탁치안을 무시하면서 탁치안과 모순되는 분할점령을 결정했다.

    국무장관 번스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소 협력을 위해 탁치안을 받아들였지만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었으므로 실현가능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부터 논의를 주도하게 된 국무부는 탁치에 집착하지 않는 일관적인 행태를 보였다.



    첫째와 둘째 가설을 종합하면, 미·소 양국은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으나 탁치안이 실현된다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속단해 별다른 고려 없이 의정서에 합의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다소 수사적으로 규정한다면 탁치안은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이었다. 미·소는 탁치안을 결정할 때부터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실현을 가로막고 미·소 대립을 조장한 요인은 탁치안의 규정이 각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모호해 구속력을 갖지 못했던 점이다. 즉 동상이몽의 불확실성이 한국내 정치세력의 좌우대립과 맞물려 탁치안의 폐기로 몰아간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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