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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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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언론에는 국정원 당국자들이 이 인물에 대해 ‘현직’이 아니라 ‘전직’이라고 확인해줬다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더욱 구체적인 정보가 탈북자 단체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11월에 들어서였다.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조사를 마친 이 인물은 나이가 72세로, 당초에는 김씨 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이모씨라는 이야기였다. 이 전 대의원은 최근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정원의 강도 높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이 전 대의원이 설명했다는 본인의 가족사였다. 자신이 한국 공군의 창설멤버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영무 전 육군 항공사령관의 아들이며,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라는 것이었다(이에 대해 탈북자 단체 관계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의 말이 약간의 혼선을 빚었다. 이 전 대의원이 장 전 총리의 사위라는 전언과 손자사위라는 전언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전 대의원은 본가와 처가가 모두 한국 정부 수립과 군 창설의 핵심을 담당한 가문인 셈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인물이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른 뒤 서울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군 창설 7인 간부’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공군본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창설 7인 간부의 사진. 윗줄 오른쪽 끝이 이영무 초대 항공사령관이다. 왼쪽 끝은 광복 전 그와 함께 중국에서 활약했던 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

이 전 대의원의 아버지라는 이영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 공군사(史)에 이름을 남긴 주요 인물이다. 공군사는 1948년 미군으로부터 정식으로 간부교육을 받아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처음 조직한 일곱 명의 멤버를 ‘공군 창설 7인 간부’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7인 간부 중 상당수는 이후 군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이 전 사령관은 바로 7인 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군본부 홈페이지에 사진이 실려 있다.



7인 간부는 항공부대 창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항공건설협회’라는 민간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중 선배 축에 든 이 전 사령관은 협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국가보훈처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이 전 사령관은 광복 이전에는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했다. 광복이 되어 귀국한 후에는 1948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와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육군 산하에 배치됐던 항공부대는 1948년 연말에 이르러 육군 항공사령부로 개편되고, 이영무 초대 사령관이 취임한다. 창군 시기에 활약했던 원로 군 관계자들은 이 전 사령관을 “50대 중년답게 풍채가 두둑하고 키도 꽤 컸다. 인간관계가 원만해 두루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망명한 이 전 대의원의 나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이 무렵 10대였다. 이 전 대의원은 이때 대구 경북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전언이다(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영무 사령관과 함께 근무했던 군 원로인사들 가운데 그의 아들이나 가족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항공사령부가 경기도 수색에 있었는데도 그가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까닭이 무엇인지 또한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기록이나 당시 동료들의 회고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이영무 전 사령관의 행적은 여기까지다. 이후 1949년 어느 무렵에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는 것. 원로 군 관계자들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불었던 군내 좌익소탕 바람에 희생됐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은 “그 무렵 아까운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혐의가 있었는지, 정말 좌익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영장을 제시해 데려가서 정식으로 재판받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료들도 감히 확인할 엄두를 못 냈다”고 회고했다.

공군 창설 7인 간부 가운데는 이영무 전 사령관과 후일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 두 사람만이 중국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공군사는 공군의 뿌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하며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인물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영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 중의 뿌리인 셈이다. 그런 그가 왜 좌익 혐의를 받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로는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동료들은 “계속 감옥에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진격했을 때 풀려 나왔고 이후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온 적이 있다”고 전했다. 강제납북인지 자진월북인지도 분명치 않다는 이야기였다. 이 전 대의원도 관계기관에서 10대 후반이던 전쟁 중에 북한으로 갔다고 진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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