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KGB 비밀문건 들고 주석궁 찾은 김정일, “이젠 내가 군을 쥘 때가 됐습니다”

  •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6-03-03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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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도화선 된 ‘소련 간첩단’ 사건●“1000만달러 주면 유학생 포섭자 명단 넘겨주겠다”● 1991년 여름, 군 지휘권 둘러싼 김일성과 김정일의 담판● 인민무력부 부참모장, 교도지도국 부국장, 대외사업국장 긴급체포●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작가 리진우의 처형● 보위국 여성공작원 제보로 시작된 ‘6군단 쿠데타 모의’의 실체●“안기부 내통자들이 6군단 포를 평양 향해 조준했다”●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와 국가안전보위부의 권력다툼● 황해제철소 농성진압 전말과 ‘온 나라의 선군정치화’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1970년대부터 아들에게 서서히 권력을 인계하던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 순간까지 내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인민군에 대한 지휘권, 즉 ‘최고사령관 직위’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1991년 겨울 급작스럽게 김정일 당시 조직비서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발표했고, 이후 김정일 위원장은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숙청을 단행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의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아’ 사건과 1995년의 ‘6군단 사건’이다.‘신동아’는 ‘김일성 사망 직전 父子암투 120시간’(2005년 8월호)과 ‘親김일성 세력 제거작업 ‘심화조 사건’의 진상’(2005년 10월호)이라는 제목으로 북한 핵심 권력기관에서 일하다 탈북해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전직 관료의 수기를 게재한 바 있다. 이번에 공개하는 문서는 1990년대 김 위원장이 인민군의 군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간에는 ‘쿠데타 모의’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이 시기 각종 조직사건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수기에 따르면, 1991년 여름 몰락 중이던 소련 가안보위원회(KGB) 동아시아담당 요원으로부터 ‘북한 내 소련 포섭자 명단’을 입수한 김 위원장은 이를 근거로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벌여 최고사령관 지위를 승계하는 데 성공한다. 취임 이후 명단을 근거로 소련 등의 군사교육기관에 유학한 군부 내 비토 세력에 스파이 혐의를 씌워 대대적으로 숙청한 그는, 원응희(북한식 표기로는 ‘원응히’) 인민무력부 보위사령관을 중심으로 강력한 친위세력을 만들어 군 전체를 견제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들어 각급 부대가 ‘외화벌이 사업’에 몰두하면서 지휘서열이 흐트러지자, 이번에는 함경북도에 있는 6군단 지휘관들에게 ‘남한 안기부와 내통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슈화하고 이들을 사형시킨다. 이런 사건을 통해 총 1만5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처형, 숙청, 조사한 보위사령부는 명실공히 ‘선군 정치의 기수’가 되어 최고 권력기관으로 떠오른다. 이후 ‘황해제철소 농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민간에까지 개입하는 보위사령부의 위세를 경계한 김 위원장은 군권 장악이 완료됐다고 판단하자 보위사령부를 다시 총정치국에 예속시켜 권한을 축소한다. 한때 최고 실세로 군림했던 원응희 사령관 또한 독직혐의로 해임당해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북한 권력전환기의 상황과 분위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기의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에게 생소한 표현은 일부 수정했으나, 고유명사는 북한식 표기를 그대로 살렸다.]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가장 마지막으로 넘겨준 권력 직위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가 공식 발표된 것은 1991년 12월24일 열린 전국중대장대회에서였다. 이 날은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념 국가인 북한에는 국가적 기념일이 많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2·16(김정일 생일)과 4·15(김일성 생일)는 물론 4·25 인민군 창립절, 9·9 공화국 창건절, 10·10 당 창건절이 있다. 새 최고사령관 추대를 선포하는 일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2월16일이나 4월15일, 4월25일이 적절했겠지만, 김일성은 굳이 12월로 날짜를 정했고 중대발표를 위해 전국중대장대회를 열었다.

    인민군 모범 중대장들을 대거 평양에 불러들인 대규모 대회는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 규모를 능가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각 병종의 군, 사단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수천명의 대회 참가 군인이 수령 만세, 혁명 만세를 불러 젖히는 대회장에서, 백발의 김일성은 자신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김정일 동지를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다”고 소리쳤다. 수많은 대회 참가자나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이 굳이 한 해가 다 끝나가는 12월말에 급작스럽게 중대발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이면에 있었던 일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조용하고 은밀히 퍼져 나갔다.



    당 선전선동부가 언론과 방송을 앞세워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소식을 연일 소개하며 온 나라에 명절 분위기를 강요하던 그 축제는 사실상 김정일의 작품이었다. 내각은 당에 소속돼 있고 당은 조직부가 통제하고 있어 명색만 총비서이고 주석이던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이란 직함마저 김정일에게 내놓는 것은 곧 인생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대성산 혁명열사릉의 밤

    이 날 대회가 끝난 후 김일성은 자정이 넘은 시각에 금수산의사당 의례국장 전희정과 함께 조용히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았다. 대성산 혁명열사릉이란 항일무장투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유골이 묻힌 북한 최고의 열사릉으로서, 터는 물론 거기에 안장할 사람들까지 김일성이 직접 선택한 곳이다. 그런 까닭에 김일성은 금수산 주석궁 자기 침실에 포대경을 설치하고 외로울 때마다 열사릉에 있는 반신상들을 가까이 당겨 보는 것을 말년의 최고 취미로 삼았다.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시신을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치하라고 말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적이 거의 끊긴 새벽에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올라 전우들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던 그때의 김일성은 대회장에서 김정일 추대를 열렬히 축하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마에 주름이 깊은 힘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김일성 사후 당 선전선동부는 전국에 배포한 강연자료에서 김일성이 1991년 12월25일 새벽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은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강연자료는 “이 날 김일성 수령이 김정숙 반신상을 찾아 김정일 동지께서 드디어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고 이야기하시며 자신의 인생총화를 했다”고 표현했다. 조선의 앞날을 김정일에게 모두 맡긴 데 대한 기쁨과 긍지를 김정숙과의 추억 속에서 더 진하게 체험했다고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날의 김일성은 어두운 얼굴로 전우들의 반신상을 하나하나 찾으며 권력으로 이어온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열사릉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쟁취하기까지의 반성과 교훈, 또한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사연을, 김정일에게 권력을 깡그리 내놓은 그 시점에 쏟아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한 김일성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의례국장 전희정은 뒤에서 김일성 대신 눈물을 흘렸다.

    김일성은 사실 그동안 당 조직비서이던 김정일의 당 사업 전횡을 지켜보며 자기 숨이 붙어 있는 한 김정일에게 공식직함을 절대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간부들 앞에서 김평일(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편집자)에 대한 인간적, 사업적 평가를 자주 함으로써 권력층 내부에서 김평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도 했다. 이 때문에 한때 간부들 사이에서 김평일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는 억측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김평일에 대한 감시는 더 심해졌고, 김일성 자신도 그 어느 때보다 더 고립되었다는 것을 의식했다.

    이러한 일화도 있다. 1985년 소련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단의 활동사항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사소한 문제를 물어보았다.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김정일은 즉시 조직부에 전화를 걸어 자기에게 올라왔던 일보 내용을 어떻게 김일성이 알 수 있느냐고 화를 내며 당장 확인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KGB의 포섭자 명단

    조직부가 추적해보니 TV를 통해 소련 군사대표단 방북일정을 파악하던 김일성이 하도 궁금해 금수산의사당 군사무관 대장인 김두남에게 관련내용을 좀 알아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김두남은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 김학산에게 전화로 문의한 내용을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두남은 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동생으로 오랫동안 김일성을 보좌한 군사고문이다.

    김정일은 조직부의 보고를 받자 조직부 검열4과를 발동해 김두남의 당 생활을 검열하게 하고 6개월 동안 사업권한을 박탈했다. 이렇듯 김정일의 독단정치는 횡포에 가까웠고, 김일성은 중요 사안마저 결과보고서를 받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면 김일성이 직접 나서서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1991년 중반, 김정일은 직접 보고서를 하나 들고 금수산의사당을 찾았다. 문건을 받아본 김일성은 순간 아연실색했다. 보고서에는 최근 인민군 무력부 내에서 쿠데타를 목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하고 있는 반정부 동향이 담겨 있었다. 김일성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 반정부 쿠데타의 조직구성원이 미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친(親) 소련계 인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고서는 조작된 내용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북한이 처음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당시 붕괴 직전에 처한 사회주의 소련에서는 개혁·개방 속도가 빨라지자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요원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정보와 예리한 판단력으로 사회주의 해체가 시간문제라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직감했던 것이다.

    하여 KGB 내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밀거래를 하는 요원이 많아졌으며 정보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사실상 소련의 붕괴는 이 거대한 국가를 거머쥐고 있던 국가안보위원회의 해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산주의 진영 확장을 위해 전세계를 상대로 활동해왔던 KGB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북한이 비록 사회주의 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소련에는 인접국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에 대해 KGB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공작을 본격 진행한 상태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독재국가 북한과 얼마든지 흥정할 만한 거리가 되었다. 이 때문에 KGB 동아시아 담당요원은 1000만달러를 조건으로 북한에 친소련계 반정부조직 명단을 넘겨주겠다고 은밀히 제안했다.

    1000만달러라는 금액에 놀란 북한 관계자들은 즉시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회주의 초강대국인 소련의 해체 속도가 빨라지는 걸 보며 불안했던 김정일은 “국운이 걸린 문제인데 돈이 아깝겠느냐”며 당장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물론 인민무력부 보위국 간부들도 KGB의 수완에 경악했다. 문건에는 영원한 우방이나 친구는 있을 수 없다는 KGB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주석궁에서의 담판

    현대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현대화와 함께 군 지휘관의 군사 안목도 넓혀야 한다는 판단하에, 북한은 1985년부터 군 지휘관들을 대거 소련 군사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장군 양성기지로 불리던 위르실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유학한 대학)나 연대장 이상 간부 교육·양성 기지인 프룬제 아카데미아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군의대학, 전자대학, 공군대학(현 공군사령관 오금철이 유학한 대학) 등 20개가 넘는 소련 군사대학과 관련기관에 거액을 지급했다. 또한 구 동독에도 지휘관들을 유학 보냈는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내보낸 지휘관 숫자만 해도 무려 700명에 가까웠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해온 평양 내부에서 친소련계 급진세력이 득세하기를 원했던 소련으로서는, 북한이 이렇듯 현직 군 지휘관들을 대대적으로 유학시키는 상황이 유일무이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KGB는 군사대학의 2년, 혹은 3년 재학기간을 포섭기간으로 정하고 출세 경력과 군사자질을 갖춘 북한 유학생들을 상대로 금품매수와 미인계, 협박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해 친소련 비밀조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아시아 담당요원이 거액을 요구하며 북한과 흥정한 문건이란 바로 이들의 명단이었다.

    문건을 전달받은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장이던 중장 원응히에게 전후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면서, 인민무력부가 그동안 대(對)소련 정책이 안일하게 운용돼왔다는 데 대한 의견도 첨부하라고 지시했다. 나중에야 알려졌지만, 이는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직위를 요구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은 최고사령관보다는 당 총비서나 국가주석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당 군사부도 당 조직부에 구속돼 있는 종적(縱的) 사업원칙상 군사부문에 대한 책임을 김일성이 전적으로 맡은 것은 아니었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3년부터 노동당 중앙위 조직담당 비서 직위를 이용해 인민군에 영향력을 행사했음-편집자). KGB 문건을 보고받기 전날까지 절대적인 친소정책을 추진해온 것도 다름 아닌 김정일이었다.

    그 실례로 북한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라모나 기지를 들 수 있다. 냉전시기 소련은 미국의 포위 구상에 맞서는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북한에 소련 군사위성 통신결속소를 세우는 방안을 제기했다. 1960년대 북한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황이어서, 김일성은 크든 작든 또 다른 형태의 주둔을 반대했고 소련이 기지 후보지역으로 평양시 형제산 구역을 정한 데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결국 김정일이 완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수락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군사 암호로 ‘208조’로 불린 소련 위성 통신결속소 성원들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과 배려는 대단했다. 208조 단장이던 백러시아 군관구 부사령관 웨리드좌노프 중장을 위해 평양시 중심구역에 호화주택도 짓게 했다. 지금은 민주조선사 주필인 김정숙(김일성의 친척으로 허담 전 대남비서의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4·25문화회관 뒤 개인주택이 바로 그 집이다. 또한 라모나 기지 성원들을 위해 평양시 중구역 고려호텔 뒤 영광동 번화가에 20층짜리 초호화 아파트를 세우기도 하였다(지금은 인민군 총정치국, 총참모부 장령 아파트로 바뀌었다).

    1989년 소련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라모나 기지를 철수할 때에는 미림대학(군사대학으로 지금은 김일대학으로 불리고 있음)에 나와 있던 40여 명의 소련 군사대학 교수도 함께 목란관에 초청하여 북한 유명 여배우들까지 동원한 최상급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한 사람도 다름아닌 김정일이었다. 그간 군사분야의 친소련 정책에 책임질 사람은 바로 김정일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무력부 보위국 국장 원응히가 준비한 보고서를 들고 금수산의사당을 찾아갔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1991년 8월18일 소련의 비상사태와 그로 인한 냉전구도 해체를 새삼 열거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부의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제는 내가 군을 쥘 때가 됐다’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1991년 12월24일 김일성이 발표한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 선언은 이렇듯 소련 KGB의 작전을 역이용한 김정일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 앞당겨진 결과물이었다.

    만경대학원 출신을 제거하라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김정일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군부 내 쿠데타 조직 척결사업을 시작한다. 사실상 최고사령관으로서 가장 먼저 벌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사건을 가리켜 흔히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설명했듯 프룬제 아카데미아는 소련의 이름있는 군사종합대학으로, 무력부 보위국이 소련 KGB와 연결돼 있는 스파이들이라면서 숙청한 사람들 중 여럿이 이 대학 유학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기 바쁘게 군부 장악과 정돈을 위해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물론 인민무력부도 당 조직부 13과로부터 당 생활지도를 받게 돼 있고 더욱이 당 조직부 간부4과에서 군 장령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당 조직비서직은 이전부터 최고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 권좌에 앉아 있는 이상 김정일의 군부 장악은 완벽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진우는 김일성의 최측근이었고 더욱이 당내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김정일을 당 조직비서로 내세우는 사업에서 공헌한 평생의 은인이었다. 김정일은 표면상 인민무력부장의 의견을 존중했고 오진우는 심술과 엄살을 배합해가며 교묘히 권한을 유지했다. 오진우의 권한은 전시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으로서 군만이 아닌 당, 정무원도 칼질할 만큼 막강했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국방위원회 명령으로 진행되는 인민무력부 군수생산총회는 전국의 도·시·군당 책임비서들은 물론 제2경제 산하 연합기업소 책임자들도 다 참가하는 회의였다. 주석단에서 회의를 집행하던 오진우는 군수생산계획 미달자들이나 혹은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회의하다 그 자리에서 해임하고는 김정일에게 이러이러해서 목을 잘랐다고 전화 통보만 하는 정도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오진우를 통해 군부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진우는 “무력을 쥔 군부 장령급에 대한 인사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만경대 혁명열사유자녀 학원 출신을 많이 선발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항일투사나 김일성과 연고가 있는 인물의 자녀들이었다. 수령 신격화가 시작되지 않았던 김일성 정권 초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김일성과 항일투사들의 지위가 비교적 평등했다. 그런 까닭에 투사들 자녀들은 수령의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사치와 자만자족을 일삼던 김정일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따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악연은 김정일에게 증오심과 야심을 키운 영양소가 되었다. 하여 1970년대까지 권력 일선에 있었던 항일투사들을 의식한 김정일은 당 조직비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 자녀의 권력장악 의도를 뿌리째 뽑기 위해 중앙당에서 근무하던 항일투사 자녀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내각 부수상을 하던 김일의 아들과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현의 맏아들, 단 두 명만을 허용했다. 다른 항일투사 자녀들은 대부분 정무원이나 중앙기관에서 현상유지나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동독 군사유학생 700명 체포

    그래도 아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김정일에게 다음으로 시급한 과제는, 김일성이 군부 장령으로 인사조치한 만경대학원 출신들을 솎아내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KGB 문건을 이용해 그 숙제를 할 때가 왔다고 계산했다. 김정일은 보고서를 작성한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 중장에게 반혁명 분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인민무력부 보위국 요원들은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현장에서 사살한다’는 행동 지침을 내걸고 대대적인 체포작업에 들어갔다.

    1992년 중반 우선 군 고위급 인물 수십 명이 긴급 체포됐다. 4군단 참모장으로 있다가 위르쉴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2년제 과정을 마치고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상장 홍계성,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의 아들인 인민무력부 작전국 교도지도국(게릴라 부대) 담당 부국장 강운용, 소련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으로 일하던 김학산 등이었다.

    이후 조사는 총정치국, 총참모부는 물론 각 군단 사령부와 사단, 여단에서 지휘군관으로 근무하는 소련 군사대학 유학생으로 뻗어나갔다. 국방분야 연구소의 수재급 인재들이나 장산병원(고급군관병원), 어은병원(장군병원), 김형직 군의대학, 조선인민군 11호 병원 등의 고급 군의관들도 폭풍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인민무력부 전반이 심대한 인적 손실을 입어 지휘체계가 거의 마비될 정도였다.

    KGB가 실제로 포섭한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했으며 그들에게도 당장 북한 정권을 뒤집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KGB의 미인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서약서에 지장을 찍은 사람도 있었고, 비록 서약서에 서명은 했지만 민족의식을 가지고 양심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당에 더욱 충성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늘 “한번 변절한 자는 열 번 변절한다”고 말하는 김정일이 그들을 용서할 리 없었다. 무력부 보위국은 KGB에 서약을 했건 안 했건 단지 소련 및 동독 군사대학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7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체포하여 매우 혹독하게 예심하고 고문했다.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김일성 주석 생전에 집무실로 쓰일 때는 금수산의사당 혹은 주석궁으로 불렸다. 1991년 입수한 사진이다.

    다만 이 군사대학 유학생 소탕작전에서 현 공군사령관 오금철을 비롯한 공군 군인은 제외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도 공군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경력이 있고, 조사를 책임진 보위국장 원응히도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을 지냈기 때문이다. 공군 유학생까지 포함하면 김정일의 최측근까지 지휘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력부 보위국은 “공군 비행사 한 명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국고를 감안해 용서한다”는 식으로 자체 사상검열 정도로만 끝내고, 그들을 청산 대상에서 면제했다. 이것만 봐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죄를 쫓는 소탕이 아니라 김정일의 철저한 군부 장악 의도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력부 보위국에 뒤질까 염려한 국가보위부는 KGB가 군사대학 유학생들만을 상대로 공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하에 사건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 나갔다. 군사대학이 아닌 일반대학 유학생들도 경쟁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정치·경제·군사·과학·문화·체육계의 수많은 인재가 무력부 보위국과 국가보위부의 고문 대상이 되었으며 혁명의 준엄한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조사를 받은 이만 수천명에 달하며 연좌제로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그들의 가족과 친지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이 때문에 북한의 지식인들은 1992년을 중국식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악몽의 해’라고 평하곤 했다. 당시 군부 내에서는 “하사관 복무경력도 없는 사람이 최고사령관이 되더니 아군 장군들을 잡는 장군이 됐다”는 냉소적인 이야기가 조용히 오갔다.

    “소련말고 남조선 간첩을 잡으라”

    유학생 소탕 사건을 통해 김정일은 군부 장악의 전기를 마련했지만, 정치적 역효과가 발생하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선포한 북한 당 선전선동부는 1970년대부터 주민들에게 북한 정권의 주체성을 과시하고 수령 신격화를 위해 김일성·김정일을 세계혁명의 수령이라고 선전해왔다. 아프리카 나라들을 포섭하기 위해 거액의 무상원조를 한 것도 국제인도주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반미전선 형성과 김일성·김정일을 세계혁명의 지도자로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북한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방송위원회는 수십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대외선전부 작가들이 창작한 ‘외국인이 지은 흠모시’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러나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북한이 사회주의 종주국에서조차 지지와 동정을 받지 못한 국제고아 신세임을 폭로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입을 것 먹을 것 하나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에서 수령 신격화까지 허물어진다면 김정일 정권은 일부 군인들의 군사쿠데타 정도가 아니라 전 인민적 항쟁에 직면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을 의식한 김정일은 무력부 보위국에 “이제 소련 간첩은 그만 잡고 남조선 간첩들을 빨리 색출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무력부 보위국은 새로운 일감에 기세가 충천했지만 고민 또한 적지 않았다. 수천명을 조사, 처리한 사건보다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자면 과연 얼마나 더 잡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설사 고위직 인물 수십 명을 가둔다 해도 프룬제 아카데미아 충격 속에 묻힐 건 뻔했으므로, 이는 결코 숫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무력부 보위국은 북한의 모든 주민이 아는 상징적인 인물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작된 것이 바로 4·25영화문학창작사(인민무력부 산하 창작사) 작가 리진우 대좌 간첩 사건이다.

    리진우는 북한의 갓난아이도 다 안다는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다. 6·25전쟁 시기 남한에 파견된 북한 공작원의 영웅담을 담은 이 영화는 21부작이라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전쟁물이다. 지난해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당국 대표단 만찬이 벌어진 평양 만수대 예술극장 연회장에서 불렀다는 노래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가 바로 이 영화의 주제가다. 리진우는 이 영화를 창작한 후 ‘김일성상 계관작가’가 되었으며 그후에도 소련의 조르게를 능가한다고 북한이 자평하는 성시백(6·25전쟁 전 남한에 침투해 남침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인물로 북한 최고의 공작원으로 신격화되고 있음)을 주인공으로 하는 ‘붉은 단풍잎’ 등 수많은 유명 영화를 창작했다.

    6·25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월북한 리진우는 친척들이 대부분 남한에 있었다. 스파이 영화만 만드는 전문작가로서 무력부 기밀실에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무력부 보위국이 안기부 간첩으로 지목하기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무력부 보위국은 리진우가 무력부 기밀실에서 복사한 자료를 남한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빼돌리려 했다면서 그를 체포하기 바쁘게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했다.

    민심은 하루아침에 안기부 간첩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졌다. 노태우 정부가 고르바초프에게 30억달러의 차관을 주었다는 소문이 더해지면서,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 또한 ‘소련의 KGB가 안기부로부터 돈을 받아먹고 공화국을 말살하려 했다’는 식으로 기정사실화됐다. 마침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1995년경 북한 북부지역에서는 ‘안기부의 지령으로 군사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이른바 ‘6군단 사건’이라는 것이 터져나왔다.

    ‘6군단 쿠데타 사건’의 내막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6군단 사건’은 김영삼 정부가 북한 내에서 무력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안기부가 공작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무력부 보위국 소속 한 여성 비밀공작원이 제보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는 이 사건을 두고 갖가지 소문이 엄청난 기세로 퍼졌다. 6군단 포들이 금수산기념궁전과 평양에 일제히 사격을 하기로 했다더라, 6군단 반란세력이 중국 국경을 열어주면 합세하기 위해 남한 군인 5만명이 옌볜 지역에 나와 노동자로 위장하고 콩 농사를 짓고 있다더라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6군단 사건은 정치적 음모가 아니라 일부 부대 지휘관들의 단순한 비리사건에 불과했다. 이 무렵은 북한의 국가유일 경제관리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군부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던 때였다. 군부대에서는 영양실조 환자와 탈영병이 속출했고 상하관계, 군민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등 사회문제로까지 번졌다. 군대 고유의 명령체계와 복종체계가 마비될 만큼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이었다.

    김정일은 어쩔 수 없이 각급 군부대에 자체 외화벌이를 허락했다. 군부대 자체에서 살림살이를 알아서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자, 1994년 말부터 사회주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모든 군단과 사단, 여단에서까지 온갖 명칭의 외화벌이 회사와 기지가 생겨났다. 그 통에 달러 맛을 알게 된 군부대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빠져들었다.

    6군단 사건은 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내려갔던 시기에 일어났다. 무력부 작전국장으로 일하다 과오를 범하고 지방 여단 부여단장으로 내려갔다가, 그후 군수동원 총국장을 거쳐 6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김영춘이 막상 군단에 부임하고 보니 사령부 정치위원을 비롯한 부대 지휘관들은 이미 귀족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 제국주의라면 달러까지 증오하는’ 김영춘을 자기들과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고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국경과 접한 지리적 우월성 덕분에 6군단 산하 외화벌이 회사는 다른 군부대에 비해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사령관인 김영춘에게만은 단 1달러의 권한도 없었다. 김영춘은 부대지휘 능력을 상실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 같은 사태는 6군단뿐만이 아니었다. 김정일의 신임으로 지휘관의 지위와 권위가 보장되던 것은 옛이야기일 뿐, 곳곳의 부대 내에서 달러가 부대를 지휘 관리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빚어졌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달러를 통해 제국주의 사상이 들어오고 나중엔 정권까지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항상 김정일을 괴롭혔다.

    결국 김정일은 ‘국고가 거덜나더라도 군은 반드시 정부 지원으로 장악해야 한다’는 결론하에 인민무력부 10만 축소 계획을 발표하는 한편, 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에게 무력부 내 황색숙청 차원에서 미국과 남조선 돈에 매수된 간첩들을 적발하라고 지시했다. 원응히는 때마침 김영춘 6군단 사령관이 부대관리를 전혀 할 수 없다며 상부에 고발한 내용을 토대로 이른바 ‘6군단 쿠데타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군인이 안기부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김정일은 그 사회적 파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6군단을 통째로 남부지역으로 이전시켰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전국의 모든 부대에 대해 지휘관 사상검열을 단행하고 군부대 자체 살림살이나 자급자족 명목으로 진행되던 외화벌이도 중단시켰다.

    이후 현재까지 북한군의 외화벌이는 군단사령부나 군종별 사령부에서도 완전히 폐지됐다. 대신 중앙집권관리 형태로 총정치국 54부, 총참모부 53부, 인민무력부 내 후방총국을 비롯해 국마다 하나씩 외화벌이 회사를 두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군의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 주요 닭공장, 빵공장 등 인민경제 필수 생산단위와 금광, 광산, 어장 등 굵직한 외화벌이 기지는 모두 무력부에 넘겼다. 따라서 이후 북한 주민들은 사실상 시장이 아니면 굶어죽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북한 정권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이러한 배경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에 가깝다.

    최고권력, 무력부 보위사령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가장 무서운 권력기관은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추게 한다는 국가보위부였다.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며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좌제 권한을 휘두른 국가보위부는 김정일 유일체계를 확립하는 철권도구로 장수해왔다.

    그러나 무력부 보위국이 김정일 의도대로 6군단 사건까지 종결지은 1995년부터는 기관간의 위상에 변화가 생겨났다. 이후 보위국이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어 최고권력기관 자리를 빼앗았다. 보위사령부는 인민무력부 산하에서 일약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으로 부상했으며, 보위국장이던 원응히는 상장단계를 거치지 않고 중장에서 곧장 대장으로 급승진해 보위사령관이 되었다. 아무리 1인독재 체제라 해도 이런 식의 인사는 처음이었다.

    보위사령관 원응히는 중국 출신 김남선이 보위국장으로 사업을 벌이던 무렵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항상 일상사보다 사업을 우선해 첫 자리에 놓는 사람이었으며 특히 김정일에 대한 충성도가 남달리 높았다. 대상을 한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혼신을 다해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그를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자신의 권력강화 과정에서 맹견으로 활용했다.

    김정일은 원응히에게 우선 평상시 자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군 장령들을 색출하도록 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 6군단 사건으로 구속된 장령들에 대한 예심과정에서 나온 이름을 토대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대상이란 대체로 사적인 술자리에서 체제논쟁이나 김정일 비난 발언을 한 사람들이었는데,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그들을 모조리 안기부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특히 교도지도국 청산이 그중 심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으로 구속된 인민무력부 작전국 교도지도국담당 부국장 강운용은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데다 술을 좋아하고 인심도 후해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강운용의 친구들은 대부분 1·21청와대습격사건을 비롯해 남한 침투 경험이 있는 전투 영웅으로서 모두 정찰국이나 경보지도국, 교도지도국 같은 게릴라 부대의 지휘관들이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이들의 단순한 체제비난 발언을 문제 삼아 ‘이전에 남파됐을 때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이미 전향하고 위장 침투한 자들’이라는 혐의를 씌웠다. 단번에 장령 60명이 체포됐다. 김정일은 군부 내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며 그들에 대한 사형도 군대식으로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여 이들 총정치국, 총참모부 장령 60명을 모아놓고 미림 비행장에서 일괄 처형했다.

    또한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총정치국, 총참모부와 군단사령부 장군들을 한꺼번에 물갈이하기 위해 전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리봉원을 안기부 간첩혐의로 1996년 체포했다. 리봉원이 김정일의 눈 밖에 난 것은 작전국장 김명국에 대한 평가보고서를 잘못 올린 사건 때문이었다. 작전국장 김명국은 군부 내 김정일 유일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정일봉상 쟁취운동’을 발기한 인물이다. ‘정일봉상 쟁취운동’이란 군부 내 군사 자질을 갖추기 위한 준비운동의 일환으로 마련된 일종의 정치 평가상이었다. 이 일로 김명국은 김정일에게 특별한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리봉원은 김정일의 핵심측근인 김명국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을 기록한 자료를 묶어 원칙적인 입장에서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오히려 리봉원을 격렬하게 질책했다. 이에 기겁한 리봉원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병 치료 후 한 달 만에 끝내 군복을 벗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리봉원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고 군부 내 인사행정을 총괄했던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앞잡이들을 청산한다며 숱한 사람을 체포했다.

    김정일이 인민무력부 내 부서에 불과하던 보위국을 보위사령부로, 국방위원회 직속기관으로 만든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경제난으로 고조되던 북한 주민의 불만을 전시체제로 통제하려면 군 사법기관의 통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온 나라의 선군(先軍)정치화’를 명목으로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권한을 사회 전반으로 넓혔다. 군은 무력부 보위국이 맡고, 민간인은 국가보위부가 담당하던 이전의 분담구조를 허물고 계엄식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간인도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나서서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위력은 1998년 황해제철소 농성진압에서 그 첫선을 보였다. 보위사령부는 먹을 것을 요구하던 제철소 노동자들을 탱크를 동원하여 사정없이 진압해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북한의 공업화를 허물기 위해 파괴 목적으로 설비 및 강철을 사들인 안기부의 고용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생존을 위해 고철을 팔았던 노동자 다수가 처단됐다.

    덫에 걸린 원응히

    이뿐이 아니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절대권한을 부여받자마자 그동안 국가보위부로부터 열등한 취급을 당했던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국가보위부 감찰을 시작했다. 간부부장을 뇌물혐의로 체포하고 국가보위부 간부들에 대한 협박과 감시를 노골적으로 한 결과 2명의 부부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살을 반역으로 취급하는 북한에서 조직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국가보위부의 권능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무력부 보위사령부의 권력은 김정일의 경호를 맡게 됐다는 점에서도 절대적이었다. 1994년 김일성 경호원을 지낸 호위총국 요원이 김정일을 저격한 사건은 북한의 경호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김정일은 김일성 치하에서 성장한 경호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이유로 호위사령부를 믿지 않았고, 국방위원장은 마땅히 군이 경호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해 무력부 보위사령부에 경호담당 10처를 신설했다. 전 사회적인 감시통제 및 처벌권한과 국가지도자 경호권까지 갖고 있는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그 이름만으로도 북한 주민을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요체가 곧 무력부 보위사령부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정일 독재 외에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절대권한을 장기적으로 가질 수 없다. 총정치국에 소속돼 있는 동안 박해를 받았던 보위사령부 사람들이 김정일이 준 권력을 이용해 앙숙관계의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호소와 울분이 군부 내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지 않아도 보위사령부의 지나친 권력부상과 남용을 우려한 김정일은,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보위사령부 내 경호담당 10처를 국방위원회 직속 행사총국으로 분리하고 보위사령부를 다시 총정치국에 예속시켰다.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보위사령관 원응히도 ‘동히 사건’으로 불운한 생을 마감한다. 동히 사건이란 북한의 이름있는 영화배우 리월숙의 남편이 평양시 만경대구역안전부에 의해 처형된 사건이다. 보위사령부를 끼고 외화벌이를 해 상당한 돈을 벌어들인 동히는 예심과정에 보위사령관 원응히에게 10만달러를 주었다고 발설했다.

    당황한 만경대구역안전부는 이 사실을 원응히에게 전달했고 결국 입을 잘못 놀린 동히는 군중 앞에서 ‘황색숙청’이란 명목으로 공개 처형당한다. 훗날 이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달러 맛을 안 원응히를 그대로 제 옆에 두지 않았다. 원응히는 2003년 보위국장에서 해임됐고 이듬해 간암 진단을 받고는 급사한다. 그의 사망으로 보위사령부의 절대권력도 서서히 저물어갔다.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이유

    그러나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위해 처형, 숙청, 조사한 사람의 숫자는 무려 1만5000명이 넘는다. 김정일의 이러한 군 장악은 그대로 당 장악으로 이어졌고, 1997년부터 전 농업비서 서관희 간첩사건을 발단으로 사회안전성이 급부상하면서 전국에서 2만5000명이 숙청되는 ‘심화조 사건’으로 이어진다(‘신동아’ 2005년 10월호 ‘親김일성 세력 제거작업 ‘심화조 사건’의 진상’ 기사 참조).

    오늘날 북한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은 외부에 있지 않다. 경제난과 숙청의 악순환 속에 커가는 내부 반발이야말로 가장 큰 위협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이 남한의 대북지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보니,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남한 우상화’ 현상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편이다. 김정일 정권이 더욱 강하게 반남(反南)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늘날에도 적잖은 이가 국정원 간첩으로 몰려 조사 받고 처형되는 현실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권 문제를 외면한 채 진행되는 현재의 대북지원은 그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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