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소회

역사가는 냉철한 현실주의로 과거 돌아봐야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소회

2/4
그러나 그 책이 주장하는 바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나는 한국사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우리 역사를 알아야겠다는 갈증이 생겼다. 그래서 서양사를 전공하면서도 한국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사를 조금씩 공부하다 보니 ‘인식’이 주장하는 바를 반박하고 그 오류를 수정한 좋은 글이 많이 발표되었음을 알게 됐다. 특히 노동사를 전공한 나의 관심 분야인 ‘인식’ 1권과 3권에 발표된 광복 후 노동운동에 대한 글도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1990년 여름 미국 워싱턴으로 가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미 군정기 노동운동 관계 자료를 뒤져봤다.

‘인식’에 실린 좌파 노동조직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대한 논문들은 국내 자료만 참고했기 때문에 편파적 주장을 많이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전평은 1945년 11월에 이미 50만명의 조합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자료를 찾아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니 그 숫자는 과장된 것이었다. 광복 후 경제활동이 급격히 축소된 상황에서 그런 숫자의 노동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숫자 부풀리기는 이승만측의 대한노총도 마찬가지로 자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광복 후 각 정파에서 제시한 숫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국내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전평이 제시한 숫자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재인식’은 우선 ‘인식’에 나타난 그런 식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식’이 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책은 여전히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역사 인식을 압도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그 세력은 권력화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나 ‘과거사청산위원회’ 같은 것으로 구현됐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1980년대에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을 가진 채 현재의 정책 결정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내가 우려한 것은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목표가 사실 추구가 아니라 현실적·정치적 이념에 대한 봉사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사회 분위기였다. 과거사 청산, 친일행위 규명과 같은 현 정부가 벌이는 주력사업의 배경에는 현 정권이 역대 정권과 차별성을 갖고 개혁을 주도하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다. 즉 학문이 현실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봉사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나로 하여금 ‘재인식’을 구상하게 만들었다.

민족지상주의, 민중혁명 필연론

‘인식’이 드러낸 두 가지 문제점, 즉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두 가지가 우리 역사해석에 끼친 폐해는 그동안 누누이 지적되어 왔다.

민족주의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유럽에서 태동할 때부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었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우수함과 우월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깎아내려야 하는데,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혈육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구분된다. 민족주의는 고난의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가 되고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같다. 남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잘못을 자성할 때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논리와 관련된 여러 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민족이 지고의 가치로 부상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상천외한 이념을 국민 앞에 내세우면서 그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짓누른다. 민족에 앞서 인권과 자유가 먼저라는 외침은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게다가 국민에게 ‘우리 민족끼리’ 잘만 하면 통일이 될 것이라든지, 통일이 되면 북한의 핵은 우리 것이 된다든지 하는 환상을 심어주는데 이는 역사에 중죄를 짓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두 번째 주제는 민중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민족주의에 못지않은 거대담론일 뿐이다.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삼을 때 개인은 말살된다. 좌파적 민중이건, 우파적 민중이건, 혹은 파시즘적 민중이건, 민중을 앞세우는 역사 해석은 개인의 능동성과 자율성을 무시하며 역사에서 개인을 제거해버린다. 그러면 역사에는 거대한 구조만 남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주장하는 경직된 역사 해석이며 이런 해석은 서양에서는 이미 공산권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지 오래다.

2/4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
목록 닫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소회

댓글 창 닫기

2019/09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