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3-06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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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교● 한국 농촌에서 효부상, 표창장 휩쓰는 일본 며느리들● 원리원본 작성해 이대생과 연대생 매료시킨 문선명● 남한은 아벨, 북한은 카인이다…아벨이 카인을 포용하라● 통일교의 키워드는 순결과 가정, 勝共, 초종교, 초국가● 일본 불교단체 입정교성회 간부들이 통일교 들어온 이유● “한국은 아담, 일본은 하와…두 나라 결합해 세계평화 이룬다”● “통일교는 세계 종교를 통일교로 통일할 생각 없다. 그러나…”

    창가학회●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창가학회엔 승려도 절도 없다●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며 성장한 창가학회● 재일교포들에 의해 한국 전파, 현재는 120만 회원● 김대중 대통령, 한겨레신문에게도 감사장 받아● 평화 정착 위해 세계 편력하는 이케다 회장● 한국 창가학회 비판하는 일본 우익 언론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통일교와 창가학회는 세계적인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통일교 문선명 총재(위 사진)와 창가학회 이케다 회장(아래의 사진 왼쪽)은 1990년 각각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 평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한국과 일본만큼 민족감정의 장벽이 높은 사이도 없을 것이다. 경제교류는 과거부터 활발했고 체육·문화교류도 활발하지만, 과거사 문제나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한국인은 일본과 일본적인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장벽을 ‘이단(異端)과 ‘사이비’로 몰렸던 소수파 종교가 무너뜨리고 있다. 한국의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와 일본의 창가학회(SGI)가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 주력 세력과 마찰을 빚었던 통일교의 일본 진출은 눈부시기 그지없다. 어느새 통일교는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중 세력이 가장 큰 집단이 되었다. 통일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일본 여성이 한국 농촌 총각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에 건너오고 있다. 창가학회는 ‘일본판 통일교’라고 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비난과 공격을 받아온 종교단체이다. 한국에서도 왜색 불교란 비판이 높았는데 어느 틈엔가 한국에서 놀랄 만큼 많은 수의 회원을 확보했다. ‘남묘호렌게쿄’라고 하는 불교가 바로 창가학회인데, 자의식이 강한 한국인은 왜 일본풍 불교를 수용한 것일까. 두 종교의 일본과 한국 진출에선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종교는 모두 “어느 종교가 인류를 구원하고 진정으로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지 경쟁해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의지 덕분에 민족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상대국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며 세계 190여개 국에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 대학 종교학과 교수는 “ 두 종교는 현대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만 해결하는 신약(新藥)일 수 있다. 이 문제가 가라앉으면 신약의 필요성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로 성급한 판단을 경계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생겨난 신흥 종교가 아주 짧은 시간에 국경선을 넘은 비결을 추적해보았다.]

    일본의 통일교 - ‘하와’ 일본, ‘아담’ 한국과 天倫을 엮는다

    전북 김제시에서 농업을 하는 엄모(72) 씨는 이렇게 말했다.“일본 색시들은 정말 잘혀. 중국에서 온 조선족 색시나 베트남에서 온 색시들은 농촌 총각과 살다가 열이면 열 다 도망을 가는데, 일본 색시들은 절대 그러질 않아. 야리야리해 보이지만 야무지게 살림 잘혀고 시부모도 아주 깍듯이 모셔. 일본 색시들 때문에 농촌에서는 통일교를 다시 보게 됐다니까.”



    요즘 농촌 사회에서 회자되는 화제 중의 하나는 한국 농촌 총각에게 시집온 통일교를 믿는 일본인 며느리이다. 이들은 지방 각지 여러 단체에서 수여하는 효부상(孝婦賞)을 휩쓸고 있다.

    충북의 한 농촌에 살고 있는 일본 여성 A씨는 5년 전 적십자사로부터 효부상을 받았다. 도쿄 북쪽에 있는 야마나시에서 태어난 그는 10년 전 합동결혼으로 한국 농촌에 살고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현재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말이다.

    “이장님 추천 덕분에 효부상을 받은 것 같다. 물론 이곳은 일본 농촌보다는 못하지만 지낼 만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선배로부터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고 종교적 신심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다.”

    일본 여성 B씨는 대도시인 요코하마에서 자라 1995년 충북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 남편과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았다. 군청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그가 웃음으로 전한 한국 농촌 생활 이야기다.

    “물론 한국의 시골 생활은 일본보다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결혼 생활에 만족한다. 나는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KBS 전국노래자랑 프로에 이따금 나와 한국 가요를 부르는 농촌의 일본여성이나, 광복절을 즈음해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사과하는 일본인 며느리들은 대개 한국으로 시집와 ‘시집을 더 사랑하게’ 된 통일교인이다.

    한국으로 시집온 5000여 일본 여성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통일교의 합동 결혼식

    통일교가 합동결혼을 통해 교인들을 국제결혼(교차결혼) 시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합동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시집왔는데, 남편이 될 한국 남성을 사진으로만 보고 결혼했다고 한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의 중매혼 같은 과정을 거쳐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한국 땅으로 시집 온 것인데 대체로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통일교 측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 남성에게 시집온 일본의 통일교 여성 신자는 5천여 명이라고 한다. 일본으로 시집간 한국의 통일교 여성 신자는 3천여 명이다. 지난 1월 말 일본에서 만난 전남 출신의 박모씨는 일본으로 시집간 통일교 신자다. 그 역시 사진 한 장만 받아보고 합동결혼식에서 지금의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낳고 10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그의 시집 식구들도 역시 통일교 신자이다).

    “처음 일본에 와 보니까 시어머니가 쓰는 부엌과 며느리가 써야 할 부엌이 따로 있었다. 전자산업이 발전한 나라답게 방마다 TV가 있어 각자 자기 방에서 TV를 봤다. 한 가족인데 각자 생활하고 있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어머니가 쓰시던 주방을 없애고 내 주방에 있는 TV도 없앴다. 비로소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한국 가정에서는 욕조 물을 혼자 쓰면서 목욕하지만, 일본 가정에서는 욕조 물 한 통으로 온 가족이 다 씻는다. 일본 사람들은 욕조 물에는 몸만 담그고 씻는 것은 나와서 한다. 시아버지-시어머니-남편-며느리 순으로 목욕한다. 그러나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시아버지께서 들어갔다 나온 욕조엔 들어갈 수 없었다. 시아버지께서는 양국의 문화 차이를 이해하고 특별히 나만 혼자 욕조 물을 다 쓰도록 해주셨다(웃음).

    일본 사람들은 자전거를 주로 타고 다니기 때문에 가정에는 여러 대의 자전거가 있다. 그런데 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자전거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시아버지께서는 무심코 ‘한국과 중국 사람들 때문에 자꾸 자전거가 없어진다’고 말씀 하시다가 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 후로는 절대 한국 사람이 자전거를 훔쳐간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한국이 아주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결혼 10년차 주부이면 살림살이에 찌들어 처녀 때의 포부가 희미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던진 선교사임을 자임했다.

    “내가 일본으로 시집온 것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일본과 우리 사이의 갈등을 풀려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내가 일본인과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그들도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한다. 천륜(天倫)을 엮으면서 사랑하는 것이 갈등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뉴커머의 한 축으로 성장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래 재일교포를 대표한 조직은 민단과 총련(조총련)이다. 민단과 총련에 속해 있는 재일교포의 수는 60만명가량인데, 이 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교포가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북한은 총련계를 위해 적극적으로 학교 건설을 지원했다. 비록 일본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이 학교가 있어 총련계 젊은이들은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차경환씨는 “이 음파는 니치렌 대성인이 산스크리트어 발음과 일본어 한자 발음을 융합하고 다시 변화를 줘서 만들어낸 우주본연의 리듬이다. 남묘호렌게쿄를 반복해서 창제하면 이 리듬을 타게 돼, 숨어 있던 생명력이 일어나 희망을 놓지 않고 도전해볼 마음이 생겨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를 이렇게도 설명했다.

    “무도를 연마하면 나도 모르게 ‘얍-얍’ 하고 기합을 넣게 된다. 반대로 기합을 지르다 보면 기운이 일어나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판매회사 사원들이 목청 높여 ‘할 수 있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나가는 것도 소리를 냄으로써 힘을 얻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를 반복해서 부르면 긴장이 풀리면서 할 수 있다는 생명력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文證, 理證, 現證

    생명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구체적인 ‘기복(祈福)’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이뤘다는 행복감 때문에 SGI의 교세가 확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차씨의 설명이다.

    “종교가 일어나려면 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묘사해놓은 문서가 있어야 한다. 성경이나 불경처럼 깨달음을 정리해놓은 문서가 있어야 누구라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검증해볼 수 있다. 이를 문서화된 증거라는 뜻에서 ‘문증(文證)’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석가모니가 열반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을 적은 묘법연화경을 문증으로 삼는다.

    두 번째는 그 깨달음이 과연 이치에 맞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증(理證)’이 있어야 한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인과관계가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SGI는 인과론을 내놓은 불교의 일파이므로 ‘업보’등을 통해 이증을 보일 수 있다.

    세 번째는 문증과 이증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현증(現證)’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다 보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바라던 일이 이뤄지는 것을 경험해 왔는데, 바로 이것이 현증에 해당한다. 문증과 이증, 현증을 갖고 있기에 한국 SGI는 빠르게 성장해왔다.”

    현증은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자가 참관한 행복좌담회도 회원들이 경험한 현증을 밝히는 자리였다. SGI 측은 이러한 현증을 대중 앞에서 밝히게 함으로써, ‘나도 행복한 현증을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증 도미노가 토종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풍 불교라는 장벽을 건너뛸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행복만 현증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생긴다. 현증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행복뿐만 아니라 불행도 현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차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유불성(萬有佛性)이라고, 불교에서는 만물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한정해서 말하면 사람 속에는 부처 마음도 있고 아수라(불교에서 말하는 나쁜 신)의 마음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마음 중에 어느 것을 일으키느냐는 것인데, 이왕이면 좋은 것을 일으키자는 것이 SGI의 신조이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야 새끼야’라고 욕하면 당신의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참 멋진 분이군요’라고 하면 얼굴에 미소가 번질 것이다. 당신 마음속에는 화도 있고 미소를 띄우는 마음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중 하나가 일어난다. 부처도 있고 아수라도 있는 사람 마음속에서 부처 마음만 일으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모두가 행복해지면 바로 그것이 극락세계다. 극락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이뤄야 하는 세계다.”

    三寶가 다르다

    SGI에서는 석가모니는 정법 시대의 부처이고 니치렌은 말법 시대의 부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SGI의 회원이 되면 일본인을 모셔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한일 간에는 역사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여러 차례 침략한 바 있고 현재도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권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이 일본 불교의 성인을 따르는 것은 꺼림칙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한국 SGI 관계자는 “기독교가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한국 기독교가 이스라엘을 숭배하는 것인가. 불교가 인도 땅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한국 불교가 인도의 것인가. 석가와 예수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기에 국경을 넘어 인류의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는 니치렌 대성인을 깨달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존경한다. 그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과 SGI가 일본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부처(佛)와 경전(法)과 스님(僧)을 3보(三寶)라고 해서 매우 소중히 여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를 불보사찰, 8만대장경을 갖고 있는 해인사를 법보사찰,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SGI의 3보는 다르다.

    이들이 경배하는 대상은 부처가 아니라 니치렌 대성인이 깨달음을 얻은 후 썼다는 ‘만다라’다. 만다라는 부적 글씨체 같은 문자와 그림을 쓴 종이인데 이 종이를 어본존에 넣어 경배하고 있다. SGI는 만유불성 그대로 부처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부처)이 아니라 깨달음을 표현한 만다라(어본존)를 불보로 여긴다.

    SGI는 석가모니의 모든 말을 기록한 8만대장경이 아니라 그중 하나인 묘법연화경만을 법보로 여긴다. 묘법연화경은 말법 시대의 깨달음에 대해 적어놓은 것인데, 지금은 말법 시대이므로 이 경전만 의존하겠다며 ‘나무묘법연화경(남묘호렌게쿄)’을 창제하고 있다(묘법연화경은 종종 법화경으로 약칭되기도 한다).

    셋째로 이 단체에는 단 한 명의 승려도 없다. 이유는 창가학회가 승려가 아닌 신도 단체에서 비롯됐기 때문인데, 재가불자(在家佛子)는 스님과 달리 머리를 기르고 육식은 물론 술 담배도 할 수 있다. SGI의 회원들은 개고기도 거리낌없이 먹는다. 재가불자 단체이다 보니 계율도 없고, 화두를 붙잡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참선하는 문화도 없다. 이들은 회원을 승보로 여기고 있다.

    일련정종과 일련종은 다른 단체

    SGI는 절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이 집회를 갖는 장소는 문화회관이다. 좌담회는 작은 단위의 회원 조직이 각자의 집에서 돌아가며 여는 것이고, 정기적인 큰 모임은 문화회관에서 갖는다. 문화회관을 지키는 사람을 ‘직원’이라고 하는데, 직원은 회관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만 한다.

    SGI는 신도 단체인지라 거의 모든 것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한다. 회원 대표가 한국에서는 이사장이 되고 각 지역에서는 지역장이 돼 평의회 형식으로 조직을 이끈다.

    창가학회는 한때 ‘일련정종’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일련정종과 결별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단체가 대성인으로 모시는 니치렌을 살펴보아야 한다. 니치렌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을 받아 굴복하던 무렵(1231~1259년) 태어나 활동한 승려이다. 1222년 그는 도쿄 남쪽에 있는 지바(千葉)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 때 승려가 되었다.

    그리고 사색과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묘법연화경을 기본 경전으로 삼는 불교를 수립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때 니치렌이 일본 불교를 개혁했다고 주장한다. 니치렌은 말년에 미노부(身延) 산에 머물며 여섯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닛코(日興) 상인을 사랑했다고 한다.

    니치렌이 죽자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막내인 닛코가 미노부 산을 나와 후지산 기슭에 대석사(大石寺)를 짓고 스승의 가르침을 전했는데, 이 종파를 ‘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고 했다. 미노부 산에 남은 다섯 제자가 세운 종파는 일련종이 됐다. 일련정종과 일련종은 같은 니치렌을 모시지만 다른 종파가 된 것.

    소학교 교장이 만들어

    그로부터 650여 년이 흐른 1930년, 대석사의 신자였던 소학교 교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朗, 1871~1944)가 니치렌의 가르침을 토대로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창가교육학회’라는 신도단체를 만들었다. 당시 대석사에는 ‘단도회(壇道會)’ ‘법화강(法華講)’ 등의 신도단체가 있었는데, 창가교육학회는 이러한 단체 중의 하나였다.

    1937년 중국 침략을 시작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모든 사찰에 일본 개국신을 모시는 신찰(神札)을 하라고 강요했다. 대석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찰과 신도단체는 이를 수용했으나 창가교육학회만 반대했다. 그로 인해 창가교육학회는 대석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군국주의 정부로부터 법적인 제제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의 대석사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반체제 인사를 불경죄로 잡아들일 수 있는 치안유지법이 있었다. 1943년 일본 검경은 이 법을 근거로 마키구치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1900~1958)를 잡아넣었다. 마키구치는 1944년 감옥에서 사망했지만 도다 조세이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석방되었다. 출옥 후 도다는 ‘교육’자가 빠진 ‘창가학회’를 재건해 2대 회장에 취임했는데, 이때부터 창가학회는 교육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분야로 행복을 전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창가학회가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했었다는 사실은 재일동포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회원을 확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억압을 받았던 재일교포들은 종전 후 창가학회에 가입했고 1960년대엔 고국으로 이를 전하는 주역이 되었다.

    창가학회는 반공(反共) 노선도 견지했다. 따라서 군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대석사의 신도단체에 불과하던 창가학회는 도다 회장 취임 15년 만에 300만 회원을 갖는 전국조직이 됐다고 한다. 이 시기 도다 회장은 라디오를 이용한 통신교육 사업을 벌여 창가학회의 확대를 도왔다.

    창가학회가 빠르게 성장하자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가 대립각을 세우고 나왔다. 문예춘추는 우익 지향인데 반해 창가학회는 친공(親共)은 아니지만 반우익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자매지인 ‘주간문춘(週刊文春)’과 여타 우익 잡지들은 창가학회를 공격했다. 창가학회측은 ‘제3문명’ 등의 잡지를 동원해 ‘문예춘추는 군국주의를 지지했던 소설가 기쿠치 칸(菊池寬)이 만들었다’고 공격하는 폭로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폭로전에서 나온 자료를 근거로 1964년 한국 정부는 창가학회의 침투에 긴장했고 대구매일신문은 ‘창가학회의 정체’라는 시리즈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대립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데, 그 사이 일본 창가학회는 회원수를 무려 1000만명으로 확대했다.

    우익 잡지의 공격이 강화되자 창가학회는 정치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내부 조직인 문화부를 토대로 1961년 ‘공명정치연맹’을 만들었다가 1964년 공명당(公明黨)을 창당했다.

    1966년 공명당은 처음으로 참의원선거에 참여했다. 이 선거에서 공명당 소속 후보 9명이 당선함으로써 참의원 내 제3당이 되었다. 1967년에는 하원 격인 중의원선거에 참여해 25석을 차지했고 1979년 선거에서는 57석을 차지해 중의원에서도 제3당의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1969년 일어난 한 사건을 계기로 정교(政敎)분리를 선언하고 강령에서 종교색이 강한 조항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창가학회와 계속 협조하고 있다고 한다.

    공명당은 1993년 발족한 호소카와(細川護熙) 연립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처음으로 연립 여당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 후로는 원내 제1당인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연립여당의 일원이지만 공명당은 자민당의 우익 노선에 반대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주장하나 공명당은 반대한다.

    적잖은 분야에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공명당은 자민당과의 연합을 깨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야당으로 있는 것보다는 연립 여당 내에서 야당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는 진출하지 않아

    1958년 2대 회장인 도다가 사망한다. 창가학회는 혼란을 겪다가 공명정치연맹을 만들 무렵인 1960년 32세의 청년 이케다 다이사쿠를 3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케다 회장은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그해 10월2일부터 세계 순방에 나섰다. ‘평화’라는 키워드를 선점한 그는 동서 냉전이 첨예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평화라는 키워드 안에 환경보호, 교육, 문화, 이웃돕기 등 좋은 일이 거의 모두 포괄되었다.

    그 덕분에 창가학회는 세계로 뻗어갔다. 1960년대 초반 영남지방에 창가학회가 상륙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1975년 이케다 회장은 51개국에 나가 있는 창가학회 조직을 괌으로 불러들여 국제창가학회(SGI)를 만들고 회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일본 내에서 사이비 시비를 받던 창가학회는 세계적인 종교단체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잡았고, 이케다 회장은 일본보다 세계에서 더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1998년 경희대가 이케다 회장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한 것은 이러한 업적 때문이었다.

    현재 SGI는 190개국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원치 않는 나라는 진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이다. 이케다 회장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중국에는 ‘SGI를 진출시키지 않겠다’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약속했다. 이 선언이 오히려 중국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덕분에 이케다 회장은 중국엔 SGI가 없음에도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 수뇌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SGI는 북한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탈북자들에 대한 광포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 와 있는 중국 조선족은 적잖게 입신했다는 것이 한국 SGI측 설명이다.

    SGI의 비약적인 성장과 관련해 가장 궁금한 것은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SGI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헌금이나 시주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1년에 4일을 정해 ‘광포 부원 등록’을 받는데, 이때 광포 부원으로 등록한 회원이 광포 기금을 내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낸다. 이 광포기금이 문화회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자금과 이웃돕기 자금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SGI측은 광포 부원 중에는 건설업을 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 있지만 재벌급 광포 부원은 없다고 밝혔다. 또 일본에 있는 SGI 본부가 한국 SGI를 지원해주거나, 한국 SGI가 SGI에 돈을 보내는 일도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 SGI는 한국을 위한 SGI라는 이야기다.

    “독도는 한국 땅”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2005년 5월 15일 한국 SGI는 서울 잠실 운동장에서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를 갖고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한국 SGI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까. 한국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하던 지난해 5월15일 한국 SGI는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를 열고 ‘독도는 우리(한국) 땅’이라고 외쳤다. 이 행사를 전후해서 발행된 ‘주간신조(週刊新潮)’ 5월19일자와 ‘주간문춘’ 5월26일자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한국 SGI는 화광신문을 통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 국민의 감정을 거슬려 왔다며, 일장기를 태우는 반일 데모대와 별 차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케다 SGI 회장은 ‘한국은 일본에 문화 은혜를 준 나라라는 명확한 인식을 하고 있다’며 이케다 회장이 반일사상의 소유자인 듯이 기술하고 있다.…’

    ‘나라사랑 대축제 행사 도중에 대형 스크린에 독도의 영상이 비춰지자 객석에서는 ‘독도는 한국의 영토다’라는 제목의 매스게임이 펼쳐졌다. 일본에서 발생한 종교단체가 반일을 외치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주간문춘은 다른 호에서 ‘SGI가 한국에서 반일운동을 선동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SGI는 탈퇴한 회원이 많기 때문에 실제 회원은 120만이 아니라 30만명일 것이다…일본 SGI는 과격한 한국 SGI를 견제할 수 없는 것 같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SGI가 상대국 신자에게 각기 다른 말을 하게 된다면, SGI가 말하는 평화를 향한 대화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SGI는 일본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될 정도로 발전했다. 이러한 한국 SGI는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 SGI 시경술 부이사장은 “이제 각 종교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테러전쟁을 중지하고 어느 종교가 인류를 위해 더 많이 헌신했는지 견주는 인도적 경쟁을 해야 한다”는 말로 그 방향성을 내비쳤다.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세계 평화통일 가정연합 본부.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단 사람들은 자녀를 일본 유치원이나 일본 소학교(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아이가 (민족)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해 유치원이나 소학교 명부에 ‘통명(通名)’이라고 하는 일본식 이름을 올렸다. 유치원이나 소학교 1학년 때 학적부에 올린 이름이 대학을 거쳐 평생 불리는 이름이 된다. 또 일본 학교에서 일본어로 일본의 역사와 정신을 배우므로 민단계 3,4세는 대부분 한국말과 한국의 정신을 잃어버렸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에 한국 학교를 세웠다. 대표적인 학교가 도쿄의 한국 학교인데, 수년 전부터 이 학교는 매년 4~5명씩 게이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 대학 합격자를 배출하는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좋은 학교이건만 민단계 학생들은 한국어가 서툴러 웬만해선 이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

    도쿄 한국 학교를 채우는 학생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주재원 자녀이거나 통일교 활동을 위해 일본에 간 사람들의 자녀가 대부분. 어느 틈엔가 통일교는 일본 뉴커머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재일 한국인 사회를 장악한 것이다. 뉴커머인 통일교는 민단이 하지 못하는 일본 내 한국 지키기를 주도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불교와 신도(神道)의 세력이 강하고 기독교 세력은 약한 나라이다. 더구나 한국에 대해서는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어 한국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통일교를 믿는 일본인 수가 4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일본인 통일교 신자들의 헌금이 한국 통일교 활동에 도움이 될 정도라고 하니 그 위세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일본에서 뿌리내린 통일교의 위상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 달에 두세 차례씩 열리는 ‘평화통일 한국지도자 세미나’. 이 행사는 통일교측이 비통일교인으로부터 실비 조로 10만원을 받고 모셔가 세계평화와 남북통일 방안 그리고 통일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자리다. 통일교 가입을 전제하지 않는데다 비용 부담이 작아서인지 매번 수백명이 참여하는데, 이 행사 비용을 일본 내 통일교인들이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통일교인들은 민단과 총련계의 화합을 위해 두 단체 소속원 수백명을 동시에 한국으로 데려가 임진각 등을 구경시키며 화합을 강조한다.

    또 ‘지도자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순수 일본인 수백명을 한국으로 데려가 한국 문화를 알리고 통일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이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도 대부분 일본 통일교인들의 헌금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통일교는 도대체 어떤 철학과 교리를 갖고 있기에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통일교측 설명에 따르면 불퇴전의 용기와 정교한 원리 강의가 그 바탕을 이룬다고 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文鮮明, 86) 총재와 이 조직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선명씨는 평북 정주 태생인데 15세가 되던 해 그의 가족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천사가 하와를 타락시켰다’

    일제강점기 말기 청년 문선명은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를 마치고 고향인 북한 지역에 와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문씨는 목사 자격을 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때 이미 성경을 독특하게 해석하는 관(觀)을 갖게 됐는데, 이것이 훗날 통일교의 원리가 되었다. 그는 북한 땅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다 194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 공산체제를 건설했다. 이때 평양으로 옮겨간 문씨는 개척교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사법 당국에 검거돼 ‘사회질서 문란죄’ 등으로 두 번 옥살이를 했다.

    흥남감옥에서 그의 인생에서는 세 번째이고, 북한 체제에서는 두 번째인 옥살이를 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10월14일 유엔군이 흥남에 들어오면서 그는 흥남감옥을 나오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퇴각(1·4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참혹한 전쟁이 펼쳐지는 와중에 부산에 자리잡은 그는 통일교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원리원본을 집필했다. 이 원리원본이 시대 흐름에 따라 보완되면서 통일교의 근본 철학이 된다.

    그는 최초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써 사람은 선(善)을 지향하는 본심과 악(惡)을 지향하는 사심이 충돌 대립해 평화를 상실하게 됐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타락이란 성적(性的)인 타락인데 이 타락은 뱀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종’이 유도했다. 하나님의 종은 글자 그대로 ‘천사(天使)’인데,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인지라 하나님이 자녀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는 말을 듣고 전하는 능력이 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하와를 유혹해 성적 타락을 하게 했으므로, 하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하와는 본래 상대가 되어야 할 아담을 꾀어 관계를 가짐으로써 최초의 인류는 악의 원천인 사심을 갖게 됐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법도 있는 집안의 처녀 총각이 결혼식은커녕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육체관계를 가져 부모 대하기가 부끄러워 가출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녀가 부모 대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돼 돌아오려면 이들이 지은 죄를 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자녀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부모는 참사랑으로 자녀를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통일교는 자녀된 자는 자기 임의로 배우자를 골라 관계를 맺지 말고 정결한 몸으로 있다가 부모가 선택해준 이성과 결혼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보통의 부모는 하나님처럼 밝은 눈이 없어 자녀의 짝을 제대로 찾아줄 수 없으므로 깨달음을 얻은 문 총재가 짝을 찾아주고 문 총재가 부모로서 이들의 결혼을 축복해주는 합동결혼식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며 혼전 순결을 강조한다.

    혼전 순결과 가정 강조

    통일교가 화목한 가정을 이루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학 경전인 ‘대학’에서 말하는 ‘제가(齊家)’와 흡사한 면이 있다. 대학은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올바른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성의정심(誠意正心)’, 그리고 자신을 ‘수신(修身)’ 해야만 비로소 ‘제가(齊家)’할 수 있고, 제가한 자만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혼전 순결은 성의정심이나 수신에 해당하니,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다. 2003년 통일교는 순결한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사회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며, 가정당(家庭黨)을 창당했다. 그러나 가정당은 국회는 물론이고 광역 및 기초단체 의회에도 의원을 진출시키지 못 하고 있다.

    문 총재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전쟁을 아담의 자식인 카인과 아벨의 갈등에 비유했다. 성경은 ‘하나님은 카인과 아벨이 제물을 올렸을 때 아벨이 올린 것만 받았다. 그러자 마음이 상한 카인이 돌로 아벨을 쳐죽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편애가 살인을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왜 카인의 제물을 거부했을까.

    통일교는 ‘카인은 하와가 천사와 영적인 간음(姦淫)해서 낳은 자식을 상징하고,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결실체를 상징하므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을 따르더라도 ‘카인은 간음의 결과로 태어난 것일 뿐 그가 간음(악행)을 한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따돌림을 당해 그 결과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선 ‘카인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통일교는 이를 죄에 대한 업보로 해석한다. 업보는 죄를 지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간음이 왕따를 거쳐 살인으로 이어지듯 한번 업보를 지은 사람은 누대에 걸쳐 나쁜 업을 짓게 되고 급기야는 선한 사람을 해친다고 보았다. 문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는데, 악한 사람이 업보로 선한 사람을 괴롭힘으로써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통일교는 이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죽은 것으로 상징된 아벨이 부활해 형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살인한 자는 그것이 부끄러워 화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니, 살인을 당한 자가 일어나 살인한 자를 끌어안아야 평화가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어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과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통일교는 설명한다.

    전쟁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

    통일교는 북한이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도입해 전쟁을 일으켰으니, 공산주의가 곧 ‘하와를 꼬여낸 천사’라고 본다. 따라서 공산주의와는 끝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꼬임에 넘어가 한국을 공격한 북한 사람은 아담(한국)과 짝이 되어야 할 대상이니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문 총재가 작성한 원리원본에 들어있는 대략적인 철학이다.

    원리원본을 완성한 문 총재는 1954년 3월 서울에 올라와 그해 5월1일 성동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했다. 통일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주요 신도의 집을 원리강의소로 삼아 그가 깨친 사상을 전파했는데, 이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 매료돼 학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당시는 전쟁 직후인지라 도탄에 빠진 한국을 구해준 미국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대단했다.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일본 사가현 가쓰라시 나고야에 있는 한일해저터널 조사갱. 통일교는 한일해저터널을 반드시 완성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더구나 이화여대는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다. 당시의 부총장은 얼마 후 부통령이 되는 이기붕씨의 부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마리아씨였다. 학생들이 통일교에 빠져 학교에 나오지 않자 학교측은 교수를 보내 통일교를 조사하게 했는데, 이 교수가 원리 강의를 듣고 통일교에 들어가 버렸다. 비슷한 시기 역시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에서도 두 명의 학생이 통일교에 들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이화여대측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 이단 신앙을 한다는 이유로 통일교에 가담한 5명의 교수를 퇴직시키고 14명의 학생을 제적했다. 연세대도 교수 한 명을 퇴직시키고 학생 두 명을 제적했다. 1955년에 일어난 이대-연대 사건을 계기로 통일교는 이단 종교로 몰리기 시작했다.

    통일교측은 이 사건이 있은 후 “누군가에 의해 ‘통일교는 남녀 관계가 문란하다’ ‘피가름을 한다’는 등 교리에도 맞지 않는 악소문이 퍼졌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통일교를 보는 사회적 시각이 나빠져, 그해 7월 문 총재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부여된 죄목은 풍기문란죄가 아니라 병역법 위반. 문 총재는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나고 일부 신도만 병역법 위반 혐의 등이 인정돼 벌금을 냈다(이대에서 퇴학당한 학생들은 숙대로 편입해 졸업장을 받았다).

    최봉춘 선교사의 일본 밀항

    이대-연대 사건을 계기로 성장을 거듭하던 통일교는 주춤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인 1958년, 해외선교에 전력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이때 첫 선교지로 선정한 곳이 미수교국이자 당시로서는 북한 다음으로 국민감정이 나쁜 일본이었다.

    통일교측은 일본 선교를 일본어에 능통한 최봉춘(崔奉春, 80)씨에게 맡겼다. 당시 일본과는 국교가 없던 터라 최씨는 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해상보안청에 체포돼 한국으로 추방됐고 두 번째 밀항도 실패해 한국으로 쫓겨오게 되었다.

    세 번째 밀항 때도 체포됐는데, 그때는 누범자인자라 단순 추방이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때문에 한국인 밀항 범죄자를 가둬놓던 나가사키의 오무라(大村)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기발한 꾀를 냈다. 즉 간장 한 사발을 들이켜 고의로 배탈을 일으킨 것.

    그가 복통을 호소하자 수용소측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때마침 현재 일본 국왕인 아키히토(明仁) 황태자의 결혼식이 열렸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그는 창문을 통해 병원 을 탈출했다.

    이후 그는 니시가와 마사루(西川勝)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전도에 주력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지금의 일본사회와 달리 제국주의 시절 군국주의와의 투쟁에 앞장섰던 좌익이 큰 힘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한 최 선교사는 성경을 토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는데, 이것이 반공 노선을 견지한 여타 종교단체의 관심을 끌었다.

    입정교성회 간부 입교

    당시 일본에서는 재가(在家) 불교 신도단체인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立正퍏成會)가 선풍을 날리고 있었다. 입정교성회는 1938년 니와노 닛교(庭野日敬) 회장이 창립했는데, 창가학회와 마찬가지로 묘법연화경의 가르침을 따른다 (입정교성회의 현재 일본 내 신도수는 창가학회보다 적다고 한다. 입정교성회는 1979년 한국에 진출했으나 신도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는 반공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통일교와 상통했다. 니와노 회장은 비서실장 구보키 오사미(久保木修已) 등 여러 명의 제자를 보내 최봉춘씨의 원리 강연을 들어보게 했다. 그런데 이 만남에서 구보키 비서실장 이하 여러 명의 입정교성회 회원이 통일교에 빠져들었다. 알아보라고 보낸 사람이 아예 발을 담가버리자 입정교성회가 발칵 뒤집혀 구보키 오사미를 비롯한 통일교 가담 회원을 축출하게 되었다.

    일본판 ‘이대-연대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운 좋게도 사회적 탄압을 받거나 밀입국자인 최봉춘 선교사가 일본 검경의 추격을 받는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현재 통일교 일본회장을 맡고 있는 오야마다 히데오(小山田秀生, 65)씨도 이 무렵 통일교에 가담했다. 그가 통일교 신자가 된 경위도 드라마틱하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토(京都)에서 정토진종(淨土眞宗) 계열의 절을 가진 스님이었고 어머니는 예수회 신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도호쿠(東北)대 시절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운동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한류(韓流)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는데 오야마다 회장은 어떤 이유로 식민지에서 일어난 기독교(통일교)를 받아들인 것일까.

    “식민지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사상이 본토에서 나온 것보다 못 하라는 법은 없지 않으냐. 최봉춘 선교사는 일본 사람보다도 일본을 더 사랑한 분인데, 어찌 그런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어릴 적부터 일본 사회를 싫어했다. 우리 어머니 집안은 400여 년 전 규슈(九州)의 오이타(大分)현에서 예수교를 받아들였는데, 예수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때문에 외가는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고 한다. 외가는 일본에 대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배타적인 사고와 군국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일본은 외가를 박해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일본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큰 종교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만난 분이 최 선교사였고 이어 한국과 국교가 열린 1965년 일본에 오신 문 총재를 만나 이 사상만이 일본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오야마다 회장은 통일교 사상에 완전 동조해 문 총재가 맺어준 일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일본 통일교인들은 섭리상 한국은 아담을 상징하고, 일본은 하와를 상징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그 이유를 지질학에서 찾는다. 지질학 연구에 따르면 규슈와 남부 일본은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온 곳이라고 한다.

    하와의 책무는 남편인 아담을 도와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어머니 국가가 돼 아버지 국가인 한국을 도와 세계 평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일본 통일교인들이 말하는 섭리이다. 그러나 한일간에는 화합보다는 갈등의 역사가 반복돼 왔다. 통일교인들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일으킨 갈등이 많았다고 본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선진 문화를 갖고 건너온 ‘도래인(渡來人)’ 덕분에 일본 열도의 문물과 문명이 발달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 문명을 전달해준 한반도 사람들은 일본을 침략하지 않았다.

    물론 백제가 멸망한 후 나당연합군이 백제 세력이 옮겨간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 지역을 공격하려 했고, 고려 말에는 여몽연합군 일부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규슈의 하카타(博多) 지역에 상륙했다가 ‘가미카제(神風)’라고 하는 태풍이 불어 후속 지원부대가 몰살하는 바람에 퇴각한 사례가 있지만, 한반도 세력이 일본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 7년 전쟁과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침략하고 지배했다.

    이러한 역사를 통일교인들은 아담과 하와의 갈등으로 본다. 아담으로부터 생겨난 하와가 아담을 돕기는커녕 괴롭혔으니 그 업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 일본 통일교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아담이면서 아벨이기도 한 한국은 카인(북한의 공산주의)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둘로 쪼개졌다. 그러니 하와는 카인을 포용할 수 있도록 아담(아벨)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키고, 그 아담을 앞에 내세워 세계 평화를 이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륜으로 두 나라 엮는다

    이러한 섭리론을 갖고 있기에 일본의 통일교인들은 한국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일본 땅에서 일어난 분단’인 민단과 총련이 화합하도록 유도하는 일에도 앞장선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제대로 결합시키기 위해 일본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오고 반대로 한국 여성들이 일본으로 시집가는 ‘천륜(天倫)’을 엮고 있다.

    통일교는 천륜을 가장 강력한 인연으로 보고 있다. 부모 자식 관계나 형제 관계 같은 천륜은, 피치 못할 사건으로 등을 졌더라도 결국은 다시 맺어지는 관계로 보고 있다. 6·25전쟁 때 버렸거나 배신을 하는 등 갖가지 사연으로 등졌던 가족도, 수십년이 지나면 과거사를 잊어버리고 서로를 찾게 되는데, 바로 천륜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키려면 양국 교인끼리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천륜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통일교는 사업을 통해서도 한국과 일본을 맺으려고 한다. 규슈 서쪽에 있는 사가(佐賀)현 가쓰라(唐津)시에는 ‘나고야(名護屋)’라고 하는 작은 해안 마을이 있다. 이곳은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조선 침략을 위해 병사를 출병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도요토미는 일본 본토에 있는 나고야(名古屋) 출신인데, 조선 침략을 위해 이곳에 와 있을 때, 고향과 한자는 다르나 발음이 같은 .‘나고야’로 정했다고 한다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세계 평화통일 가정연합의 황선조 회장.

    나고야에서는 맑은 날 쓰시마(對馬島) 섬이 보인다. 나고야 항을 출항한 도요토미의 군은 쓰시마에 정박했다가 1592년 4월13일 부산포에 나타남으로써 7년 전쟁(임진왜란)을 일으켰다. 1981년 통일교는 나고야에서 쓰시마를 거쳐 한국의 거제도를 잇는 장대한 한일해저터널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다소 무모하게 들릴 뿐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통일교측은 실제적인 조사에 착수해 1993년 해저터널 건설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설계 구간 중 조사 갱 구간 400여m를 굴착했다. 하지만 양국 정부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지 못해 공사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다.

    통일교측은 “양국 정부의 승인만 얻으면 투자자는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다. 해저터널이 완성되면 중국-북한-한국-일본을 잇는 육로 관광이 가능해져, 한반도의 통일이 빨라지고 동북아는 유럽처럼 여러 나라를 동시에 여행할 수 있는 지역이 돼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교는 한일해저터널에 이어 러시아와 미국(알래스카)을 잇는 베링해 터널도 완성시켜 신대륙과 구대륙을 잇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통일교는 국경선이라는 장벽을 넘어 세계가 하나로 엮이면 싸움이 줄어들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다고 보고, 국경을 넘어서는 ‘초국가(超國家)’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과의 화해, 북한과의 화해를 추진해온 통일교는 요즘 세계적인 평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20세기는 세계 1·2차 대전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이 일어난 전쟁의 시기였는데, 이 전쟁은 대부분 정치 논리 때문에 일어났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제국주의 국가간 국익 충돌이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6·25전쟁과 월남전쟁도 이념의 탈을 쓴 정치가 일으킨 전쟁이었고,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냉전은 이념이 초래한 대립이었다.

    정치가 초래하는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이 출범함으로써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이념 대립에 의한 냉전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의 소련 붕괴로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데 21세기 초입인 2001년 9월 11일 테러전쟁이 일어났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응징하기 위해 테러 형태의 성전(聖戰)을 감행했고,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해 대(對)테러전 형태의 성전을 벌이고 있다. 통일교는 앞으로 인류를 참극으로 몰아넣는 전쟁은 종교 때문에 일어날 것으로 보았다. 종교는 하나같이 사랑과 자비와 평화를 강조하지만,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 집단에 대해서는 잔혹한 태도를 취한다.

    초종교 평화운동

    통일교측은 종교가 불러일으키는 무자비한 테러전을 없애려면 종교 간 장벽을 없애고 대화를 강화해야 한다며, ‘초종교(超宗敎)’ 운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이단 시비 때문에 여의치 않으므로 주로 미국을 무대로 초종교 운동을 펼친다. 즉 미국에 있는 UN 회의장을 빌려 종교정상회의를 연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종교간 이해를 확산시키고 있다.

    종교 화합을 위한 운동을 음지에서 지원하는 세력이 일본이다. 최근 통일교는 종교간 화해를 통한 ‘천주(天宙)평화운동’을 세계적으로 펼쳤는데, 이때 문 총재는 한국에서 운동을 일으키고, 그의 부인인 한학자 여사는 일본에서 이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한국은 아버지, 일본은 어머니 국가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부부가 한 마음이 돼 미국이라고 하는 ‘아들’을 움직이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초종교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뜻에서 통일교는 교회 간판 내리기 운동을 펼지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초종교 운동은 모든 종교를 통일해 통일교 하나로 모으자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이를 위해 국경을 넘어선 교차결혼으로 초국가 운동을 한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통일교의 황선조 회장은 그것은 기우라고 잘라 말했다.

    “사람을 포함한 만물은 피조물(被造物)이므로 그것을 만들어준 하늘이나 조물주 또는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만물은 존재할 가치를 갖고 있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횡적 관계를 갖고 있다. 동물이 식물을 먹고, 동물이 죽으면 식물이 분해된 동물을 섭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를 ‘상호의존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통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개성진리체이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해야 할 상호의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 바탕 위에서 평화운동을 펼친다. 통일교인만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것은 결국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9·11테러로 대표되는 종교분쟁을 불러온 원인이기 때문이다.”

    靈人體가 되어야 한다

    황 회장은 “세계 평화를 이루자는 거대한 운동을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인이 중심이 돼 펼치고 있다. 문 총재가 있는 한국에선 철학과 사상을 내놓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회인지라 돈을 내놓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오감(五感) 외에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영적 오감(靈的五感)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을 ‘영인체(靈人體)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영인체가 되기 위해선 순결을 지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한 ‘승공’, 가정당 창설로 대표되는 ‘순결한 가정 갖기’, 한일해저터널과 교차결혼으로 상징되는 ‘초국가 운동’, 종교간 장벽을 허무는 ‘초종교 운동’이 통일교를 이루는 키워드이다. 통일교는 이 운동을 이루는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다. 통일교측에 따르면 신자 수는 한국보다 일본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 SGI(창가학회) - “왜색(倭色)은 없다, 부처 마음 불러내면 여기가 극락”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한국SGI 본부

    지난 2월8일 저녁 7시30분쯤 방문한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서민 빌라(25평 정도)의 거실은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양복 차림이지만 서민풍인 장년, 가정주부로 보이는 40~50대 여성, 그리고 20대 대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추의 여지도 없는 탓에 일부는 방안에서 거실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모인 것일까.

    이방인(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베란다로 나가는 큰 창 위에 붙은 ‘ ○지구 △반 행복좌담회’라는 글귀였다. 행복좌담회라….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한 중년 부인(집주인은 아니다)이 율동을 유도하며 모임을 재미있게 이끌었는데, 그의 지적을 받은 사람들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아낸 자신의 사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오빠 가족과 함께 산다. 오빠가 사업을 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학비는 내가 벌어야 할 형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공부에 소홀해져 장학금을 놓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제목(題目-뒤에서 설명)’을 ‘창제(唱題-뒤에서 설명)’했더니 우리 과(科) 수석이 단과대 수석으로 옮겨가면서 나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세 아이와 함께 곰팡이가 핀 반지하 셋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좌절한 남편이 도박에 빠져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다. 내가 돈벌이에 나서자 남편은 그 돈을 빼앗아갔고 급기야는 숨겨놓은 생활비마저 훔쳐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수 없이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대신 창제를 거듭하며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을 위한 기원도 계속했더니 남편이 생각을 바꿔 다시 일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조만간 우리는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옮겨간다. 이제 우리도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박수)” 등등.

    행복좌담회

    이 모임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행사 마지막 과정으로 이 모임이 받드는 어본존(御本尊-불상은 아니다, 뒤에서 설명)을 모신 조그만 단(壇)을 향해 꿇어앉아, 떡시루 모양의 일본식 종을 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나직이 세 번 읊조릴 때였다.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 게쿄!”

    19세기 말 집강소와 접소에 모여 들던 동학의 모임이 이러했을까? 이 모임은 40여 년 전 한국에 상륙한 일본 불교 남묘호렌게쿄의 좌담회였다. 좌담회 도중 이들이 모시는 일본 승려 ‘니치렌(日蓮, 1222~1282)’ 대성인이 여러 차례 거명됐고, 니치렌 대성인이 한 말을 토대로 지혜와 용기를 나눠 갖자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좌담회에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모두가 토종 한국인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식 발음으로 일본식 어본존을 모시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남묘호렌게쿄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일본식 한자 발음에 가깝게 읽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은 일곱 음절이지만 남묘호렌게쿄는 여섯 음절”이라며, 일본식 한자음만으로 읽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산스크리트어 발음에 일본식 한자 읽기를 더하고 여기에 변화를 줘 새로운 염불을 만들어냈다는 설명이었다. 이들은 제목 창제를, ‘나무묘법연화경(이것을 제목이라고 한다)을 ‘남묘호렌게쿄’로 소리 내 읽는 것(이것을 창제라 한다)이라고 설명했다.

    교종(敎宗)이 우세하던 통일신라 말기 선종(禪宗)은 어려운 경전을 읽지 않아도 참선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만 반복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해 요원의 불길처럼 세를 넓혀갔었다. 그와 비슷하게 이 종교는 ‘남묘호렌게쿄’를 반복해서 부르면 원하는 것을 이루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한국인이 무려 12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체는 모든 회원 가정에 주간회보인 ‘화광(和光)신문’을 보내고 있는데, 이 신문의 발행부수가 55만부라고 강조했다. 한 가구를 3인으로 계산하면 120만 회원은 절대 허언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적잖은 한국인은 이 종교를 백안시해왔다. 일부 인사들은 남묘호렌게쿄를 남녀간 화냥질을 권하는 ‘남녀화냥지교’라고 빈정댔다. 화광신문은 애초 ‘성교(聖敎)타임스’로 창간됐는데(1991년 7월), 일부에서 “성교(性交)를 하자는 신문”이라고 악담하는 바람에 화광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1997년 7월).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표창패 수여

    한국에 상륙한 남묘호렌게쿄의 정식 이름은 ‘한국 SGI’ 또는 한국을 뜻하는 K를 붙여 KSGI로 적는다. SG는 ‘창가학회(創價學會)’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소카 갓카이’를 영어로 옮긴 ‘Soka Gakkai’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고, I는 국제를 뜻하는 ‘International’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제 창가학회 한국지부’인 셈. 한국 SGI의 대표자는 여상락(呂相洛, 67) 이사장이고, 세계 본부 격인 SGI의 회장은 일본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78)씨가 맡고 있다.

    한국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SGI라는 영어 이름 대신 창가학회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가치 창조’라는 뜻을 가진 창가(創價)가 노래를 뜻하는 ‘창가(唱歌)’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SGI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SGI가 소리 소문 없이 한국 서민층을 파고들었다면, 이케다 회장은 공개적으로 한국 상류층과 접촉해왔다. 이케다 회장은 경희대(1998년 5월)와 제주대(1999년 5월) 동아대(2002년 12월)에서 명예박사를 받았고, 경주대에서는 명예교수직을 수여받았다. 또 제주도와 강원도, 충남 부여시, 경북 포항시, 경남 통영시, 부산진구청 등 숱한 자치단체로부터 명예 도민증과 명예 시민증, 명예 구민증을 받았다.

    세를 넓혀가는 한국 SGI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들은 이케다 회장이 경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반대 시위를 벌였으나, 1년 후인 1999년 9월21일엔 이케다 회장에게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하며 신념을 관철해오신 사상에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현창패(顯彰牌)를 수여했다.

    한국 SGI도 여러 차례 표창을 받았다. 2000년 9월23일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SGI가 1999년 강원 엑스포를 통해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며 감사장을 수여했고, 2004년 5월14일에는 한겨레신문사가 ‘한국 SGI는 민주언론 한겨레 발전에 헌신한 공로가 있다’며 감사장을 주었다. 한국 SGI와 하부의 지방 조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사장과 표창패 현창패를 받았다.

    한국 SGI가 표창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토대청결 같은 환경운동, 각급 학교 도서관에 대한 도서 기증, 소년소녀 가장을 비롯한 불우 이웃 돕기, 노인 무료급식, 장애인 단체에 대한 김장 담가주기, 음악회와 무용회 등 각종 문화 예술 행사 지원 등, 누가 봐도 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치거나 지원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 종교단체로 등록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로 난항에 빠졌던 한일어업협정 개정에 동의함으로써, 일본측의 만기 연장 거부로 촉발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김대중씨는 유신 시절 일본에서 체류하다 한국으로 납치돼(1973년 8월8일) 왔을 정도로 일본의 실력자들과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왔다.

    한국 SGI는 1975년 6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조직을 모아 중앙사무국을 만들었으나 반일(反日) 정서가 팽배해 종교단체로 등록하지 못했다. 한국 SGI는 이 ‘비원(悲願)’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풀게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특사로 활약했던 박지원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던 2000년 4월15일, 한국 SGI는 문화관광부에 재단법인 형태의 종교단체로 등록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 SGI에 대한 이단 시비는 확연히 잠잠해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법인 등록 후 한국 SGI의 교세 확장이 주춤해졌다는 사실이다. 창가학회는 한일국교정상화(1965년)가 이뤄지기 전인 1960년대 초 고국을 방문한 재일교포들에 의해 전파됐다.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영남 출신이었으므로, 대구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는데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당시 창가학회는 ‘일련정종’으로도 불렸다. 일련정종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한다).

    일본 흔든 한국 통일교, 한국 뚫은 일본 창가학회

    여상락 이사장.

    영남지역에서 창가학회 회원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른 1964년 1월17일, 종교심의회를 연 문교부는 창가학회를 국수적인 집단이라고 판단하고 내무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고 1월21일 열린 국무회의는 창가학회 단속을 의결했다(1965년 2월27일 고등법원 판결문 근거).

    이 의결이 있기 전 이미 전국의 국제공항과 항만에서는 창가학회 관련 책자의 반입이 금지됐고 우체국은 일본 창가학회가 보내온 우편물을 반송했었다. 경찰은 창가학회 회원들이 좌담회에서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국무회의가 창가학회 활동을 단속하기로 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창가학회 대구지부 임시대표인 최규원(崔圭垣)씨가 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을 위반한 행정조치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고법이 ‘피고(정부)는 포교 집회와 간행물 반입 등을 금하게 한 조치를 취소하라’며 원고(창가학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측은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로써 대법원은 일제의 재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명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대법원은 ‘솔로몬의 지혜’ 같은 판결을 이끌어냈다. 1966년 10월25일 대법원은 ‘행정조치는 법적 근거를 갖고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가 한 조치는 법적 근거가 없었으므로 정부는 창가학회 활동을 규제하지 않았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이로써 정부는 범법자가 되지 않았고, 창가학회는 비록 승소하지 못했지만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은 창가학회의 정체에 대해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최씨의 근거지인 대구에서 특히 높았는데 1964년 1월말 대구매일신문은 ‘창가학회의 정체’란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이러한 보도는 창가학회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일조했다.

    삼일절과 광복절이 다가오면 민족지를 표방하는 한국 언론은 창가학회의 침투를 염려하는 내용의 기사나 사설을 게재했다. 그런데도 창가학회는 초스피드로 확장을 거듭해 100만 회원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한국 SGI는 2000년 종교재단으로 등록한 이후 교세 확장속도가 떨어져 회원수가 120만에서 멈칫거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 경희대 재학 시절(89학번) 학생운동을 했다고 밝힌 차경환 홍보부장은 “인도에서 일어나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도 오랜 시간 탄압받다가 이차돈이 죽은 후 세를 확대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지라 탄압을 받으면 오히려 광포(廣布, 포교를 뜻하는 SGI의 표현)에 도움이 된다. 탄압이 줄어들자 교세 확장이 더뎌지고 있다”라며 웃었다.

    마음 속 佛性을 불러낸다

    토종 한국인들은 왜 SGI에 가입하는 것일까. 한국 SGI는 회원이 되는 것을 ‘입신(入信)’이라고 표현한다. 부산 배정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84학번)를 졸업한 서진천씨가 밝힌 입신 경위이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를 따라 울산에 있는 절에 다녔다. 고 1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창가학회 회원이던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성불(成佛)시켜 드리겠다며 두어 시간 남묘호렌게쿄를 불렀다. 나도 좋은 뜻으로 알고 따라 불렀는데 얼마 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색이 희어지고 표정도 편안해져 있었다.

    그때서야 숙부께서는 ‘만물은 생사를 불문하고 불성(佛性)을 갖고 있는데, 그 불성을 끌어내는 것이 성불이다. 성불하게 되면 돌아가신 분일지라도 그 표정이 편안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 후 숙부께서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지만 일본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불교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년간 과연 이 단체의 주장이 옳은지 나름대로 검증해 보고 사실이라고 판단돼 입신했다.”

    한국 SGI 회원들은 하나같이 남묘호렌게쿄를 창제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남묘호렌게쿄를 소리 내 보면 비음(鼻音)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ㅁ과 ㄴ,ㅇ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 비음은 몸속으로 부드러운 파장을 전달한다. 요가 수련자들은 수련 방법의 하나로 반복해서 “옴~”음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비음이다.

    비음을 반복해서 내면 분노와 울분에 의한 긴장은 물론이고 너무 좋아서 생긴 긴장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기(氣) 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기라고 하는 에너지는 빛과 소리의 파장으로 전달되는데, 비음을 반복해서 내면 몸속으로 기 에너지가 소리와 파장의 형태로 퍼져나간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퍼진다는 것은 곧 잠재해 있던 생명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인데, 소리를 낸 본인은 물론이고 옆에서 듣기만 한 사람에게서도 일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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