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중고생 임신, 모텔 유람, 동성애…영화로 읽는 신세대의 性

“섹스? 솔직하고 재밌어야죠, 아름다운 건 시시해요”

  • 이승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jda@donga.com

    입력2006-03-06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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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파란 아이들이 모텔에서 나오는 걸 보며 끌끌 혀를 찬 적이 있습니까? 오랜만에 큰맘 먹고 자녀와 함께 영화관에 갔다가 얼굴이 화끈해져 돌아온 적은 없는지요.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영화에서 성(性)이 빠지면 신세대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이제 신세대에게 성은 놀이이자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세”라고 열을 올리기 전에 이‘망할 놈의 세상’의 정체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중고생 임신, 모텔 유람, 동성애…영화로 읽는 신세대의 性
    “말세야, 말세.”

    2004년 9월 개봉된 한국 영화 ‘돈텔파파’는 기성세대로부터 딱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여자고등학교 화장실에서 한 여학생이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앙, 아앙~” 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집니다. 여고생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장면이 휙 바뀌어, 이 ‘엄마’ 여고생은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갓난아이를 소쿠리에 담아 아기의 ‘아빠’가 다니는 한 고등학교 교실로 보냅니다. 그것도 ‘퀵서비스’를 통해서 말이죠.

    놀라지 마십시오. 이 영화는 성인용이 아닙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당당히 ‘전 연령 커버 가능 오르가슴 무비’라는 해괴한 선전문구까지 내걸었죠.

    이번엔 지난해 1월 겨울방학을 맞은 고교생들을 겨냥해 개봉한 영화 ‘몽정기 2’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17세 여고생들이 모인 반에 ‘꽃미남’ 봉구가 교생으로 옵니다. 봉구를 두고 ‘백세미’와 ‘오성은’이라는 두 여고생이 신경전을 벌입니다. 서로 ‘내것’이라고 말이죠. 결국 백세미는 오성은에게 이런 내기를 제안합니다. “만약 네가 학교 축제 때까지 교생과 섹스를 하면 내가 교생을 포기하겠다”고 말이죠.

    아직 초경을 경험하지 못해 친구들로부터 ‘애’라고 놀림받던 오성은은 단짝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교생과 성관계를 맺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역시 ‘15세 이상’ 관람등급을 받은 ‘몽정기 2’는 이런 이야기 줄기 외에도 갖가지 ‘진기명기’를 보여줍니다. 여고생은 생리대를 뒤집어 착용하는 바람에 난감한 사태에 빠지고, 어떤 여고생은 콘돔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대며, 이에 질세라 ‘꽃미남’ 남자 교생은 발기가 될 때마다 방귀를 뽕뽕 뀌어대고, 남자 담임교사는 여제자의 몸을 바라보며 침을 흘립니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노골적으로 고교생 관객을 노리고 나올 수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건 앞의 두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영화는 당초 타깃으로 한 신세대가 대거 극장에 몰려들면서 손익분기점을 넘어섰죠. 이쯤 되면 세상을 탓하기 전에 이 ‘망할 놈의 세상’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세대의 성의식을 알지 못하면 신세대를 사로잡을 문화상품이 나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제 신세대에게 성(性)은 놀이이자 문화입니다.

    #‘연애술사’의 성공비결 : 모텔을 공략하라!

    지난해 극장가는 ‘웰컴 투 동막골’의 800만 관객 돌파라던가, 박찬욱 감독이 이영애를 단독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성공이라던가 하는 화려한 이슈들이 지배했습니다. 이 때문에 물밑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일어난 엄청난 이변 하나가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았죠. 그건 바로 영화 ‘연애술사’의 대성공입니다.

    지난해 5월 조용히 개봉한 이 영화는 ‘1주일 만에 간판을 내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한 달이 넘도록 ‘롱런’하면서 관객 12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고작 27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같은 날 개봉된 한국형 블록버스터 ‘남극일기’를 누르는 기적 같은 성적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남극일기’는 무려 90억원의 제작비를 들이고, 전체의 70% 이상을 뉴질랜드 설원에서 촬영한 작년 상반기 최고 기대작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커다란 덩치와 공격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개봉 첫 주 무려 6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입소문이 퍼진 2주째부터 관객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가늘고 길게 가던 ‘연애술사’에 덜미를 잡혔죠.

    중고생 임신, 모텔 유람, 동성애…영화로 읽는 신세대의 性

    최신식 모텔 전시장을 방불케 한 영화 ‘연애술사’. 모텔과 몰카라는 신세대의 은밀한 관심거리를 동시에 건드림으로써 흥행에 성공했다.

    송강호, 유지태라는 국내 최고의 배우가 ‘투톱’으로 나선 ‘남극일기’에 비하면 ‘연애술사’의 캐릭터는 초라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로배우 연규진씨의 아들인 남자 주인공 연정훈은 한때 주가가 한참 올랐지만, 영화 개봉 직전인 지난해 4월 미녀 탤런트 한가인과 결혼하고 난 뒤 연예인의 생명이랄 수 있는 신비감을 급속도로 잃으면서 인기 하락세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연정훈의 파트너로 나선 박진희는 사실 연정훈만큼이나 연기파이지만, 영화 데뷔작인 ‘여고괴담’ 이후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었죠. 그 스스로 “이번 영화도 (흥행이) 안 되면 이민 가겠다”고 했을 정도이니까요.

    그럼 ‘연애술사’라는 다윗은 어떤 전략으로 골리앗과 같은 ‘남극일기’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젊은이들의 성의식과 연애담을 노골적이라고 할 만큼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희원’(박진희)이라는 미술교사가 있습니다. 성형외과 의사와 만나고 있는데, 결혼까지 고려하고 있죠. 약간의 속물근성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순진하고 예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희원 앞에 아주 오래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 ‘지훈’(연정훈)이 나타나 급한 소식을 전합니다. 두 사람이 과거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던 광경이 ‘몰카’(몰래카메라)에 찍혀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는 거죠. 몰카에 찍힐 당시 초짜 마술사이던 지훈은 유명한 마술사로 성장해 있습니다. 바람둥이인 건 여전하고요. 두 남녀는 희원의 수첩에 남아 있는 ‘사랑의 기록’을 유일한 단서로 삼아 과거 ‘순례’했던 모텔을 찾아다닙니다. 몰래카메라를 색출하기 위해서죠. 그러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선 아니나다를까, 다시 사랑이 싹틉니다.

    모텔과 몰카

    자, 문제를 내겠습니다. 역시 ‘15세 이상’ 등급을 받은 이 영화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뜨거운 관심을 갖는 것 하나와, 진정 두려워하는 것 하나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첫 질문에 대한 답은 ‘모텔’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몰카’입니다.

    모텔과 몰카는 젊은이들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모텔은 가고 싶은데 몰카는 두려우니까요. 이 영화는 이렇게 젊은이들의 성문화 속에 자리잡은 온탕과 냉탕을 동시에 건드리는 고도의 전략으로 그들의 마음을 훔친 것입니다.

    ‘연애술사’에는 특별한 액션장면이나 명확한 선악구도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스펙터클이 펼쳐지죠. 그 스펙터클의 정체는 바로 최신식 모텔의 내부 전경입니다. 이 영화 속 모텔 장면은 대부분 대구에 있는 한 최신식 모텔에서 촬영됐습니다. 이 모텔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죠.

    가장 충격적인 건 내부 구조입니다. 욕실 문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침대가 있는 룸에서 욕실과 샤워부스가 훤히 들여다보이죠. 오로지 ‘급한 일’을 보기 위한 변기만 살짝 간이벽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욕실이 더 이상 ‘내밀한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벽돌을 쌓아두거나 커튼을 쳐 연인과 슬쩍 키스도 나눌 수 있었던 1980, 90년대 대학가 카페들이 최근 사방이 유리로 된 커피 전문점으로 변신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키스를 안 하고 살까요? 물론 그렇지 않죠. 과거 어둠침침한 카페가 제공하던 이런 기능 중 일부는 1990년대 후반 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비디오방’ 혹은 ‘DVD방’이 그 자리를 떠맡고, 나머지는 첨단 모텔들이 차지했죠. 많은 젊은이에게 모텔은 더는 음습한 공간이 아니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놀이공원’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입니다.

    일단 시설이 최첨단입니다. 공기 방울이 나오는 ‘월풀’ 욕조와 비데는 기본이고요, 매끈한 피부를 위한 연수기와, 물이 안개처럼 나오는 최첨단 샤워기도 모텔의 필수장비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컴퓨터와 DVD는 물론이고, 140개 위성 채널이 나오는 42인치 PDP 혹은 LCD TV는 자랑거리도 못 되죠.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한 방에 2대씩 설치되어 있어, 연인끼리 들어와 서로 인터넷에 접속해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복합 놀이공간인 거죠.

    4만원에 인터넷, 영화, 섹스, 목욕까지

    중고생 임신, 모텔 유람, 동성애…영화로 읽는 신세대의 性

    성에 눈뜬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몽정기 2’(위)와 고교생의 임신을 소재로 한 ‘돈텔파파’는 청소년을 겨냥한 ‘15세 관람가’ 영화지만 어른이 보기에도 낯 뜨거운 장면들이 등장한다.

    얼마 전 한 대학생은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모텔이요? 애들, 조금만 친숙해지면 어렵지 않게 손잡고 들어가요. 일단 컴퓨터 게임하고, 무료로 제공되는 이온음료를 마시면서 위성 채널로 영화를 한 편 봐요. 홈 시어터에 5.1채널이 제공돼 소리도 빵빵해요. 보고 나면 샤워를 해요. 샤워하고 나면 ‘부비부비’를 하고요. ‘부비부비’ 끝나면 거품 목욕을 마치고 난 뒤 룸에서 피자를 시켜 먹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모텔을 나와요. 4, 5시간 쯤 제대로 데이트하는 셈인데 4만원밖에 안 들어요. 4만원으로 목욕하고 ‘부비부비’하고 영화 보고 인터넷 게임도 하고 음료수도 먹고 할 수 있나요? 오히려 모텔이 엄청 싸요.”

    여기서 ‘부비부비’는 ‘섹스’를 일컫는 신세대의 용어입니다. ‘부비다’에서 유래한 말인데, 나이트클럽에서 남녀가 몸을 서로 비비면서 추는 춤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죠.

    ‘연애술사’를 촬영한 대구에 있는 이 모텔은 ‘201호’ ‘310호’ ‘412호’ 하는 식으로 방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방마다 시적(詩的)인 느낌의 고유명사로 된 이름이 붙어 있죠. 이런 네이밍(naming)을 통해 과거 여관이 풍기던 칙칙한 이미지를 산뜻하고 열린 이미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방 이름은 이렇습니다. ‘아, 먼로여’ ‘베르사이유의 장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남녀상열지사’ ‘잘 익은 앵두’ ‘애틋한 진달래’…. 각각의 룸은 이름 컨셉트에 어울리게 실내구조, 벽지, 가구가 다 다릅니다.

    놀랐다고요? 놀라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용할 때마다 마일리지가 쌓여서 이를 ‘무료 대실’ ‘샴페인 서비스’ 같은 다양한 서비스와 연계해 사용할 수 있죠. 게다가 여자끼리만 4, 5명씩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무슨 소풍 가냐고요? 맞습니다. 정말 소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텔 관계자에 따르면, 여자친구들끼리 생일에 피자, 맥주, 케이크 등을 모텔에 싸와서 실컷 수다 떨고 먹고 영화 보고 놀다가 산뜻하게 샤워하고 나간다는 거죠. ‘모텔’이 그야말로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가 됐다고 해야 할까요.

    모텔 사용후기와 공동구매

    인터넷 문화가 만개한 요즘은 모텔 마니아들이 모여 결성한 ‘모텔 투어’라는 인터넷 카페까지 등장했습니다. 이 카페에는 전국 최첨단 모텔들에 대해 상세한 소개와 함께 해당 모텔을 이용해본 사람들의 리뷰, 즉 ‘사용후기’까지 친절하게 속속 올라옵니다. 이런 카페를 통해 젊은이들은 모텔 룸을 싼 값에 공동구매하는 ‘삶의 지혜’도 발휘합니다. 모텔 업주들은 이 카페에 자기 모텔에 관한 불평이 실릴까봐 전전긍긍하죠.

    군 복무 중으로 보이는 남자친구와 함께 지난 여름 서울 신촌의 한 모텔을 다녀온 여성이 룸 곳곳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모텔 이용후기와 함께 인터넷에 올린 글을 한번 읽어보시죠.

    “안녕하세요. 오늘은 남친(남자친구) 복귀 바로 전날이네요. 영화 보고 코엑스몰 좀 돌다가 신촌에 왔습니다. 원래 10시 딱 맞춰서 들어가야 되는지 알았는데, 시간이 좀 남아 9시50분쯤 갔더니 입실이 되더라고요. 저희가 묵은 방은 특실이었어요. 방에 딱 들어가자마자 왼쪽으로는 컴퓨터 방이 있고요. 오른쪽 끝으로 침대, 보이시죠? 침대 바로 맞은편으로 욕실이 있어요. 오른쪽 반투명 유리가 욕실 유리예요. 들어가서 살짝 돌면 바로 침대~. 저흰 푹신한 이불이 좋은데 여름이라 다들 이렇게 얇은 이불인가 봐요. 욕조예요. 안타깝게도 1인용이고요. 들어가자마자 바로 앞에 있어요. (중략) 에이컨을 틀었는데도 무척이나 덥더라고요. 추위를 잘 타는 남친이 덥다고 할 정도면 말 다했죠. 방은 상당히 조용했고요. 오전 11시까지 실컷 자다가 아쉬운 맘에 시간을 연장하려고 전화했더니 그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더욱 놀라운 건 최신식 모텔의 요금 계산 시스템입니다. 과거 후미진 골목에 자리잡은 여관에서는 “3시간 지났어요, 이제 나가야죠!” 하는 여관 여주인과 “아줌마, 단골인데 1시간만 더 있다 나갈 게요” 하는 손님의 실랑이가 벌어지기 일쑤였는데요. 이런 광경은 이제 인간미 풍기는 아름다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최첨단 모텔에는 대개 ‘에누리’라는 게 없습니다. 철저한 무인 정산 시스템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30분 단위까지 계산해서 출입문 옆에 있는 정산기에 돈을 집어넣어야 모텔에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정산하지 않은 채 휙 나가버리면 어쩔 거냐고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경우엔 아예 출입문이 열리지 않아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으니까 말이죠. 최신식 모텔의 이러한 시설을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지 비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애술사’란 영화가 요즘 젊은이들의 풍경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왕의 남자’의 대성공 : 동성애를 갖고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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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 장생과 공길, 그리고 왕 연산이 벌이는 안타까운 삼각애정을 담은 ‘왕의 남자’는 젊은 층으로 하여금 동성애를 ‘즐겁게 갖고 놀도록’ 한 영화다.

    한국 영화로는 세 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는 외줄 위에 위태롭게 선 두 남자 광대가 나누는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랑의 언어로 끝을 맺습니다.

    장생 : 넌 죽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프냐? 양반으로 나면 좋으련?

    공길 : 아니, 싫다!

    장생 : 그럼 왕으로 태어나면 좋으련?

    공길 : 그것도 싫다! 난, 광대로 태어날란다.

    장생 : 이년, 그 광대짓에 목숨을 팔고도 또 광대냐?

    공길 : 그래, 이놈아. 그러는 네 놈은 뭐가 되련?

    장생 : 나야 두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공길 : 그래!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보자!

    여기서 ‘맞춰본다’는 표현은 중의적입니다. 마음을 맞춰본다는 형의상학적인 의미 외에도, 성기(性器)를 맞춰본다는 세속적인 의미를 더불어 갖고 있죠. 결국 이 세상에서 남자와 남자로 태어나 미처 못다 이룬 사랑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맞춰보자’는 가슴 절절한 표현이죠.

    두 남자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 그리고 마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왕 연산(정진영)이 벌이는 안타까운 삼각애정을 담은 영화 ‘왕의 남자’는 젊은층으로 하여금 동성애를 ‘즐겁게 갖고 놀도록’ 만든 최초의 한국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동안 동성애는 한국 영화에서 ‘다수의 논리에 짓밟혀 희생되는 소수자의 권리’라는 다소 구호적인 성격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왕의 남자’는 동성애라는 소재를 ‘남자와 남자가 벌이는 사랑’이라는 특별한 인식의 단계를 넘어 ‘믿음과 운명을 함께하는 두 대상이 애절하게 나누는 교감’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그 지평을 넓혔죠. 이 영화를 본 젊은이들은 영화 속 공길과 연산이 나누는 키스를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간 금기(禁忌)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동성애를 양지로 끌어내어 이를 즐겁게 해석하고 또 그 해석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세태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10년 전에 나왔더라면 대단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여장 남자’ 역을 맡은 이준기는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어 다음 영화에 캐스팅되는 데에 큰 애를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누구도 이준기에게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나 촌스러운 행위로 여겨지니까요. 오히려 이준기는 “오빠, 너무 멋져요” 하는 10대 소녀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에 힘입어 벼락 인기를 얻었고, 다음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는 ‘왕의 남자’에서 받은 출연료 3000만원의 10배에 가까운 개런티를 받게 되었습니다.

    ‘왕의 남자’ 속 동성애는 영화를 떠나 다양한 파생효과를 양산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만들어진 ‘왕의 남자’ 팬 카페에는 이 영화에서 장생과 공길이 나눈 동성애를 확대 재생산한 팬픽(팬들이 상상으로 쓴 소설)이 수십 건 올라와 있죠. 이 카페에 회원으로 등록된 4만명에 가까운 누리꾼(네티즌)들은 장생과 공길이 나눴을 법한 사랑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의견을 나눕니다. 다음은 이 카페에 ‘그들의 이야기’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으로 올라 있는 팬픽의 한 대목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싸움소가 미친 듯이 달려온다. (공길은) 있는 힘껏 좁은 동굴로 장생을 밀어넣고 자신도 들어간다. 장생이 들어오니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다. “헉헉헉.” 공길의 가쁜 숨이 장생의 가슴에 전해진다. 간지럽다.

    “크크크크.”

    “넌 웃음이 나와?”

    “아니, 그러니까. 크크. 너 숨 좀 가만히 쉬어. 간지러워 죽겠어.”

    공길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그것으로 다시 대화는 중단. 어색하기 그지없다. 기를 쓰고 도망 다녔던 놈과 동굴 안에서 찰싹 달라붙어 있는 꼴이 되었다. (중략) 순간 장생이 공길을 덥석 안아 올린다. 공길을 안자 그가 서 있었던 만큼의 여유가 생긴다. 앉을 수 있겠다. (중략) 양반 집에서는 노비 두 놈이 싸움소를 끌고 도망갔다고 난리가 난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밤이 오자 둘은 서로 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공길과 장생. 둘 다 수년 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다. 불편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 만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따뜻해….

    이 같은 팬픽을 실제 동성애적 취향의 소산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본질을 한참 빗나간 것입니다. 여기서 동성애란 소재는 일종의 유행 같은 존재입니다. 한때 조직폭력배를 중심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가 극장가를 주름 잡았듯, 젊은이들은 ‘왕의 남자’ 속 동성애를 하나의 즐거운 놀이문화 소재로 공유하죠.

    비단 ‘왕의 남자’만이 아닙니다. 최근 5인조 가요 그룹 ‘동방신기’를 소재로 한 팬픽 중에는 동물병원에서 일하게 된 멤버 믹키유천이 수의사인 시아준수(동방신기의 리더)와 사랑에 빠진다는 코믹 스토리가 올라와 있습니다. 책으로도 나온 히트작 ‘가시연’은 동방신기 멤버 중 유노윤호와 영웅재중의 사랑 이야기를 농도 짙게 묘사했습니다. 잠시 들여다볼까요.

    다시금 붕어처럼 벙긋거리는 내 입술 가까이, 그의 고개가 낮춰진다. 나의 작은 목소리를 경청하려 귓가의 모든 감각을 깨우고, 내 목소리를 기다린다. (중략) 결국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가 떨궈진다. 그는 그런 나를 끌어안았다. 보살핌이 절실하게 필요한 나의 작은 몸뚱이를 제 심장에 적신다.

    “결혼하자.”

    그의 목덜미에 파묻힌 내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중략) 너는 내 가시마저 사랑해야 할 나의 아름다운 남자.

    아이돌 스타들의 동성애를 상상해 소설로 쓰는 이 같은 팬픽 문화를 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심리묘사라기보다는 선정성에 기댄 통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일부에서는 ‘야오이(남성 동성애 만화의 일본식 통칭)’ 문화가 젊은층에 확산되는 양상을 우려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에게 동성애는 더는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니,주노’의 새로운 시도: 중학생의 임신

    여고생의 임신으로 끝날 리가 없습니다. 지난해 2월에는 급기야 15세 여중생의 임신과 출산을 다룬 영화 ‘제니, 주노’가 개봉됐죠. ‘한국 영화가 갈 때까지 다 갔다’는 비난과 ‘학교의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는 옹호론이 맞서면서 이 영화의 블로그는 그야말로 불이 났습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에 ‘12세 이상’으로 등급신청을 낸 이 영화는 예상 외로 ‘18세 이상’ 등급을 받은 뒤, 재심 신청 끝에 어렵사리 ‘15세 이상’으로 최종 결정됐습니다.

    이 영화에는 사실 ‘야한’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전교 5등을 하는 ‘제니’란 여중생이 잘나가는 학생 게이머 ‘주노’의 아이를 갖게 되고, 결국엔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출산을 강행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는 제니가 속옷 차림으로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 외에는 노골적인 성애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자기 집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몽땅 털어내 임신한 제니에게 몰래 갖다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주노의 모습을 아름답게 비추죠. 이 영화 제작사측은 “중학생의 임신은 이제 더는 숨길 일이 아니며, 그들의 임신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자는 이 영화를 혹독하게 비판한 리뷰 기사를 쓴 다음, 한 남자 중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습니다.

    “전 이제 중3이 되는 학생입니다. 전 영화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여자친구는 지금 (임신) 2개월째입니다. 작년 4월에 만나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몇 번 (성행위를) 안 했는데 11월 말에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범생이 아니어서 모범생까진 모르겠는데요, 보통 좀 논다 하는 애들은 거의 다 (성행위를) 해봤습니다. 옆 반에는 반장도 (성행위를) 했습니다. 요샌 다 비디오방이나 집에서 부모님이 없을 때 만나서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애가 많지는 않지만 전체의 20~30%는 하는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무섭기도 하고 여러 가지 걱정이 먼저 났습니다. 그래서 낙태도 생각해봤는데 무엇보다 아기도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 저희 나이에 애 낳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선 저희가 어린 나이로 여겨지지만, 제 인생 정도는 제가 챙길 줄 안다고 봅니다. 지금 방학기간인데 전 나중을 위해서 공부하면서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임신을 나쁘게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메일을 받은 기자는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냈습니다.

    중고생 임신, 모텔 유람, 동성애…영화로 읽는 신세대의 性

    중학생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로 화제가 된 영화 ‘제니, 주노’는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신세대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이 영화 제작사는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니, 주노’가 현실을 반영하는 이유는 뭘까요.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제니, 주노’는 상업영화이기 때문이죠. 저는 영화가 현실을 당연히 반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영화가 현실을 부풀린다고도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의 홍보문구대로 ‘아기수호 감동 프로젝트’라는 예쁜 이름 아래 더 많은 중학생의 출산이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죠. 영화가 정말로 현실을 100% 반영한다면 제니와 주노가 평생 아이 뒷바라지를 하며 늙어가면서 후회하는 모습은 왜 보여주지 않는 걸까요.”

    그런데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개봉 후에 벌어졌습니다. 개봉 전부터 뜨거운 세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제니, 주노’가 막상 개봉하자, 가장 믿었던 관객인 고교생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순수제작비(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23억원을 들인 이 영화는 최소 120만명은 관람해야 손해를 면할 수 있는데, 개봉 열흘이 지나도록 관객 20만이 채 안 되는 저조한 흥행성적에 머물고 말았죠. 제작사 쪽에선 “뚜껑을 열어보니 고등학생만 되어도 이 영화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2세 이상 관람가’가 나왔어야 했다”고 푸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기성세대의 걱정이 오히려 ‘순진’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10대의 임신을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며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더라도 요즘 신세대가 이 영화를 외면한 건, 다음과 같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 영화요? 재미없대요.”

    정말 무서운 10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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