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송가황조(宋家黃朝)’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6-03-06 1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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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작과 분열 거듭한 중국 근대사, 그 중심에 선 두 자매 이야기중국 4대 고도 중 하나인 난징은 아시아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시도한 쑨원의 중화민국 수도였다. 쑨원이 묻힌 거대한 묘가 있으며, 쑨원에 이어 중화민국 총통이 된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의 처소였던 ‘메이링 궁’도 있다. 쑹메이링은 쑨원과 결혼한 쑹칭링의 동생. 영화 ‘송가황조(宋家黃朝)’는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를 둘이나 배출한 송씨 집안 이야기다. 쑹칭링·쑹메이링 두 자매의 삶을 통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분열, 중국의 분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송가황조(宋家黃朝)’

    노동절에 베이징 톈안먼광장 쑨원의 초상 앞에 모인 인파.

    개인적인 선입견 탓일까. 난징(南京)에 들어서면 왠지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도시를 감싼 공기는 무거운 듯 느껴진다. 중국인들 중에도 ‘중국에서 가장 우울한 도시’로 난징을 꼽는 이가 있는 것을 보면 필자만의 선입견은 아닌 모양이다. 그 유명한 난징학살(1937)이 남긴 음산한 기운 때문인가, 난징 도처에 폐허가 된 채 널려 있는 역대 왕조의 유적 때문인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역사가 오랜 중국엔 오래된 도시가 많다. 그중에서도 여러 왕조에 걸쳐 도읍지였던 시안(西安), 뤄양(洛陽), 난징, 베이징(北京)을 4대 고도(古都)로 꼽는다. 여기에 카이펑(開封)을 추가하면 5대 고도가 되고, 항저우(杭州)까지 포함하면 6대 고도가 된다. 1988년부터 한 지리학자의 제안에 호응하여 7대 고도를 꼽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때는 은나라 도읍지 은허가 있는 안양(安陽)이 들어간다.

    남쪽의 도읍이라는 뜻의 이름에서도 짐작되듯 난징은 서쪽 도읍인 시안에 버금가는 25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동오(東吳)에서부터 시작해 동진, 남조, 남당의 수도였고, 주원장이 몽고족의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세웠을 때도 그 수도였다(후에 명나라는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다). 근대에 들어서는 청나라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홍수전(洪秀全)의 농민 반란군이 세운 태평천국의 수도였고, 아시아 최초로 근대 민주공화정의 기원을 연 쑨원(孫文)의 중화민국 수도도 난징이었다. 고대부터 1940년대 말까지 10개 왕조, 혹은 국가의 수도였다.

    물론 도시의 명칭은 그때마다 바뀌었다. 삼국시대에는 건업(建業)이라 불렸고, 명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에는 남도(南都)로, 태평천국 시기에는 천경(天京)으로 불렸다. 사실 난징은 지금도 수도이긴 하다.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에 그렇다. 타이완 국민당은 공산당에 져 대륙을 내주고 타이완으로 후퇴했지만 그렇다고 대륙의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영토가 북한을 포함하고 있듯이, 국민당에 있어 중화민국의 영토는 타이완 섬만이 아니라 대륙을 포함한다. 그들에게 대륙 본토는 언젠가는 돌아가 되찾아야 할 땅이며, 타이완은 임시수도이고 난징이 정식 수도인 것이다.

    난징의 과거는 찬란하지만 현재는 초라하다. 난징을 수도로 정한 국민당의 중화민국이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간 뒤 수도로서 난징의 역사는 끝났다. 하지만 수도의 지위를 베이징에 넘겨줘 난징이 초라해진 것은 아니다. 난징이 이렇게 된 것은 베이징 때문이 아니라 상하이 때문이다. 난징은 이제 더는 상하이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100여 년 전 상하이가 작은 어촌일 때, 난징은 베이징에 대비되는 중국 동남지역의 중심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도시였다. 그런데 중국 동남지역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으로서 난징의 지위는 100여 년 사이에 상하이로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난징의 곤혹스러운 위상

    요즘 난징의 위상은 말이 아니다. 난징은 분명 장쑤(江蘇)성의 성도(省都)다. 장쑤성의 남부에는 유명한 쑤저우(蘇州)가 있고, 우시(無錫)가 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보쉬(BOSCH)와 한국의 하이닉스 반도체가 공장을 짓는 등 자동차, 반도체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도시들이다. 그런데 이들 도시는 지리적으로는 장쑤성에 속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상하이권(圈)에 속한다. 그런 가운데 경제규모나 도시발전 면에서 난징을 위협하고 있다. 가난한 가장이 식솔을 잃듯, 쑤저우와 우시가 난징을 버리고 인근 상하이의 경제권으로 편입되면서 난징은 그 외곽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형국이다. 물론 난징의 번화가인 신제커우(新街口) 일대엔 세련된 고층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지만,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활력이 떨어진다. 태평천국의 몰락과 국민당 정부의 파탄, 난징대학살 등 난징이 겪은 근대의 어두운 역사가 활력을 앗아가버린 것일까.

    ‘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

    ‘송가황조(宋家黃朝)’

    영화 ‘송가황조’ 포스터.

    다른 곳과 달리 난징 여행은 죽은 자들을 기리거나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곳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의 무덤 효릉(孝陵)과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中山陵)을 둘러보고,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관람하는 것이 그렇다. 난징을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러한데, 난징의 역사가 거기에 있어서다.

    효릉과 중산릉은 난징을 상징하는 명산 쯔진(紫金)산에 있다. 효릉은 명나라 개국 황제의 무덤이니 규모가 클 수밖에 없을 터인데도, 중화민국이라는 근대 민주공화국의 초대 총통인 쑨원의 중산릉이 더 웅장해 보인다. 중산릉은 ‘국부(國父)’이자 ‘현대 중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쑨원의 자취를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2005년 4월에 타이완 국민당 총재인 롄잔(連戰)이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간 뒤 국민당 총재로서는 처음으로 대륙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난징 중산릉이다. 롄잔은 방명록에 날짜를 적으면서 ‘중화민국 94년, 서기 2005년 4월27일’이라고 적었다. 타이완에서 사용하는 연호를 쓴 것이다. 중화민국이 건재하다는 것을 쑨원에게 보고하려는 뜻이었을까. 롄잔이 방문하고 난 뒤 중산릉을 찾는 중국인이 더욱 늘었다.

    중산릉 입구에 서면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博愛(박애)’라는 금박 글씨가 적힌 큰 패방(牌坊)이 있는 광장에서 쑨원의 유체가 안치된 묘지까지 아스라하게 놓인 오르막 계단이 무려 392개다. 난징은 우한(武漢), 충칭(重慶)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더운 ‘3대 화로’로 불린다. 난징의 불 같은 여름 볕 아래 392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여간 곤욕이 아니다.

    ‘쑨원의 후계자는 나’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 ‘天下爲公(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이라고 적혀 있는 능문과 비정(碑亭)을 지나 ‘민족, 민생, 민권’이라는 쑨원의 삼민주의가 적힌 제당에 들어서면 백옥으로 만든 쑨원의 좌상이 있다. 그 좌상을 돌아 들어가면 쑨원의 유해가 안치된 묘실이다. 묘실은 원형이다. 묘실 천장에는 푸른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상징하는 중화민국 국기 ‘청천백일기’가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의 둥근 원으로 된 화강암 묘실의 한가운데 놓인 대리석 관에 쑨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대리석 관이 깊이 5m 아래에 있어서, ‘불경스럽게도’ 내려다보아야 한다.

    쑨원은 1925년 3월12일 59세의 나이(1866년생)로 베이징에서 숨을 거두고, 베이징 시산(西山)에 묻혔다. 쑨원은 난징에 묻히기를 원했다. 자신이 평생 염원하던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자신이 (임시)총통을 지낸 곳이 바로 난징이다. 그래서 쑨원은 자신이 난징에 묻히면 혁명의 정신이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의 바람대로 1929년 6월1일 쑨원은 난징에 묻힌다. 1926년 봄부터 1929년 6월1일 지금 자리에 안치되기까지, 이장 작업을 총괄하면서 쑨원의 묘소를 황제의 능처럼 웅장하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장제스(蔣介石)다. 장제스는 쑨원의 묘를 왜 이렇게 거대하게 꾸민 것일까.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애정과 쑨원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인가. 쑨원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인가.

    쑨원의 묘가 이장되던 날, 쑨원의 부인(사실은 두 번째 부인) 쑹칭링(宋慶齡)도 이장식에 참석했다. 당시 소련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장식에 참석하러 일부러 온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이장식에 참석한 쑹칭링의 표정은 내내 무겁고 어두웠다. 쑹칭링은 이장식이 진행되는 내내 장제스는 물론이고 국민당 간부들, 그리고 장제스의 부인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쑹메이링(宋美齡)과도 멀리 떨어져 다른 추모 행렬에 섞여 있었다. 그럼으로써 장제스가 주도하는 이장식에 참석은 하지만, 그것이 장제스를 쑨원의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공공연히 알렸다. 쑹칭링은 쑨원의 정신을 장제스가 아니라 자신이 계승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날 이장식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과, 쑨원에 이어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장제스의 부인으로써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쑹메이링 자매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돈, 나라, 권력을 사랑한 세 자매

    영화 ‘송가황조(宋家黃朝)’는 그렇게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를 둘이나 배출한 송씨 집안 이야기로 쑹칭링과 쑹메이링 두 자매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과정을 공산당과 국민당의 분열, 중국 분열의 상징으로 그리고 있다. ‘가을날의 동화’ ‘유리의 성’ 등을 감독한 장완팅(張婉停) 감독의 1997년 작품이다.

    ‘송가황조(宋家黃朝)’

    난징대학살 기념관

    “과거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

    영화 ‘송가황조’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돈을 사랑한 사람은 첫째딸 쑹아이링(宋愛齡), 나라를 사랑한 사람은 둘째딸 쑹칭링, 권력을 사랑한 사람은 셋째딸 쑹메이링이다. 큰딸은 갑부이자 공자의 후손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해 돈을 움켜쥐었다. 둘째딸 쑹칭링은 쑨원과 결혼해 쑨원의 이상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한평생 중국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셋째딸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함으로써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 권력과 정치를 제 손 안에 쥐고 흔들었다. ‘그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중국을 통치했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장제스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배후세력이 바로 쑹메이링이었다. 송씨 집안의 세 딸이 중국 근대 역사를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대단한 딸들을 키운 아버지가 쑹자수(宋嘉樹)다. ‘찰리 송’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이난다오(海南島) 출신인데 어려서 자바 섬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목사가 되어 귀국했다. 귀국한 뒤에는 제분업을 하기도 하고, 외국 기계를 수입해 중국에 팔기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인쇄소를 차려 성경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쑨원을 만나 쑨원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가 된다. 쑨원이 펴내는 정치 선전물을 자기 인쇄소에서 몰래 찍어주기도 하고,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쑨원과 쑹자수는 1894년 청 왕조 타도를 위해 뭉친 한 비밀결사에서 만났다. 이 둘은 청 왕조를 타도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고, 둘 다 미국에서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기독교인이어서 쉽게 친해졌다.

    영화에서 쑹자수는 개명한 민족주의자로 그려진다. 서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해 “서양인의 물건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면서 어린 딸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과 악기를 불태우도록 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움직이면, 세계를 움직일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딸들에게 들려주며 영어를 가르친다.

    큰 세상을 보게 하라

    하지만 실제의 쑹자수는 영화와 달리 중국에 서구와 같은 근대체제가 들어서기를 갈망했던 사람이다. 당시 쑨원을 지지하는 대다수 해외 화교 기업가도 그러했다. 이들은 쑨원이 염원하는 나라, 서구와 같은 민주공화정의 근대국가가 중국에 수립되면 자신들의 기업 활동이 훨씬 자유로워져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에게서 정치자금을 찬조받은 쑨원도 이 점을 강조했다. 쑨원을 후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가 많았다. 세 자매의 아버지 쑹자수도 그런 사람이었다.

    원래 쑹자수의 세 딸은 상하이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 다녔다. 큰딸 아이링이 13세가 됐을 때(1903) 아버지는 딸을 미국에 보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15세 때 대학에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더 똑똑한 딸은 13세에 미국에 가서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영화에서는 세 딸이 함께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고, 부두에서 아버지와 애틋하게 이별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은 큰딸 아이링이 혼자 먼저 미국에 가고, 둘째와 셋째는 4년 뒤(1907)에 간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둘째 칭링은 15세, 셋째 메이링은 10세였다. 메이링보다 세 살 위인 큰아들은 그때 이미 미국에서 하버드대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송가황조’ 신화를 두고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식들을 저렇게 키울 수 있을지, 그 교육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저마다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송가황조가 탄생한 가장 중요한 토대는 역시 어린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 넓은 세상을 체험하게 한 것이 아닐까.

    중국에 이런 풍속이 있다.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지 만 한 달이 되면, ‘만월(滿月)’이라 하여 큰 잔치를 연다. 만월에 하는 풍습 중에 ‘이과(移퉼)’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둥지를 옮긴다는 것인데, 외할머니나 외삼촌 집에 가서 며칠 묵는 것이다. 한 달밖에 안 된 아이를 밖으로 돌리는 이치는 이렇다. 아이에게 바깥세상을 보게 하고 견문을 넓혀서 담력과 식견을 지니게 하는 것. 한 달밖에 안 된 아이가 집을 떠나면 밤새 우는 것이 전부이겠지만, 자식은 밖으로 돌려야 고생도 하고 경험도 많이 쌓고 식견도 넓어져서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중국인의 교육철학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을 크게 키우려면 밖으로 내보내 큰 세상을 보게 하라, 송씨 가문의 성공 사례가 주는 메시지다.

    26년 나이 차 극복한 결혼

    ‘송가황조(宋家黃朝)’

    명절에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난징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

    영화에서 세 딸은 자매이지만 성격이 매우 다르게 묘사된다. 실제로도 그랬다. 큰딸 아이링은 계산이 빠르고 현실적이었다. 아이링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쑨원의 비서 노릇을 했다. 그러는 동안 쑨원이 아이링을 좋아했고 청혼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쑨원이 어떻게 생각했건 아이링은 쑨원에게 관심이 없었다. 쑨원은 아이링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다. 쑨원이 낭만주의자라면 아이링은 현실주의자였다. 쑹아이링이 보기에 쑨원은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적이진 못했다. 결국 아이링은 당대 최고 부자이던 쿵샹시와 결혼한다.

    셋째딸 메이링은 활달하고 사교적이고 야무졌다. 영화에서 장제스가 시안에서 붙잡혀 있을 때 시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해 장제스를 구출해낼 때의 모습은 여장부답다. 그후 미국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한 여성으로 기록되고, 명연설로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대미 외교는 순전히 쑹메이링 덕분이었다.

    둘째딸 칭링은 낭만적이고 순박하고 열정적이며 신념이 강했다. 언니 아이링이 결혼을 해서 쑨원의 곁을 떠나자 칭링은 언니를 대신해 ‘쑨원 아저씨’의 비서를 하겠다고 나선다. 당시 쑨원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쫓겨 일본으로 도망 와 있었다.

    1911년 10월10일 중국에서 ‘쌍십절’이라고 부르는 이 날, 신해혁명이 성공해 1912년 1월1일 새해 첫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쑨원은 임시총통에 취임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특히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던 실권자는 위안스카이였다. 서구 열강들도 위안스카이에 힘을 실어줬다. 쑨원은 하는 수 없이 위안스카이가 청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말한다. 쑨원은 위안스카이가 ‘마지막 황제’ 푸이를 폐위시킨 다음날(1912년 2월13일)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다. 총통으로 취임한 지 43일 만이다.

    쑨원에게서 총통직을 넘겨받은 위안스카이는 독재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공화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팽개치고 자신이 새로운 황제가 되려 한 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과감하게 제거해버렸다. 쑨원은 자신도 체포와 처형의 대상이 되자 1913년 일본으로 도망한다.

    과도기의 이중결혼

    혁명은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망 와 절망적 상황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쑨원에게 쑹칭링이 다가온 것이다. 언니 아이링 대신 쑨원의 비서를 자임한 칭링은 쑨원의 혁명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신봉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만나 사랑이 싹텄다. 1915년 10월25일, 인생의 겨울로 들어서는 남자 쑨원과 인생의 봄을 맞은 여자 쑹칭링은 일본에서 결혼을 했다. 쑨원이 49세, 쑹칭링이 23세였다. 나이 차가 무려 26년이다.

    당시 중국에선 이런 식의 결혼이 유행했다. 남자들은 대개 집에서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과 전통 방식으로 일찍 결혼을 했다. 그런 뒤 학교를 다니고 유학을 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연애를 했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룬 남자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가 루쉰도 그랬다.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17년 연하의 제자와 결혼했다. 첫째 부인은 베이징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루쉰은 상하이에서 새 부인과 살았다. 쑨원의 경우도 그렇다. 쑨원은 일찍이 집에서 정해준 동향 아가씨와 결혼해, 부인이 하와이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루쉰도 쑨원도 첫 부인을 두고서 자유연애를 해 새 부인을 맞았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유연애 바람이 불어 벌어진 과도기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연애가 유행이고, 미국 문명의 혜택을 받은 쑹칭링의 아버지라고 해도, 쑹칭링의 결혼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딸이 자기 친구와 결혼한다는 데 선뜻 동의할 부모가 있겠는가. 당시 상하이 언론이 두 사람의 관계를 대단한 스캔들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그만두고라도, 쑨원은 엄연히 본처가 있는 유부남이 아닌가. 더구나 쑹자수는 쑨원이 예전에 일본에 머물 때 일본 여자와 동거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쑨원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칭링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집에 가둔다. 하지만 칭링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쳐 쑨원과 결혼한다. 뒤늦게 결혼식장에 나타난 아버지가 “이 결혼식은 무효야”라고 외치지만 소용없다. 그것으로 부녀 사이는 끝이 났다. 쑹자수와 쑨원이 나눈 오랜 우정과 동지애도 그날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송씨 집안이 ‘황조’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결혼으로 돈과 나라, 권력이 세 자매와 연결되면서, 세 자매는 장차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대륙과 타이완으로 갈려 40년

    쑨원과 쑹칭링이 같이 산 기간은 불과 10년이다. 하지만 쑹칭링은 쑨원과 영원히 함께 살았다. 쑹칭링은 1981년 81세로 죽기까지 56년 동안을 혼자 살면서 쑨원의 정신을 지키고 계승했다. 쑨원과 같이 산 기간은 짧지만 평생을 쑨원의 정신과 함께 산 것이다. 두 사람은 인생의 동지이자 혁명의 동지였다.

    영화에서 쑹칭링은 임종 무렵 동생 쑹메이링을 찾는다. 쑹칭링의 집사가 전화국에 가 주미 중국대사관에 전보를 친다.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 급히 귀국 요망.’ 대륙이 공산화되고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간 뒤 중국 대륙 전화국에서 장제스의 이름을 불러보기는 처음이었다. 죽어가는 순간 동생을 찾지만 쑹칭링은 끝내 쑹메이링을 보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을 따라 대륙에 남아 부주석을 지낸 쑹칭링은 죽은 뒤, 명예주석으로 추대됐다.

    쑹칭링은 쑨원의 정신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탄압하는 국민당을 비판하고 공산당에는 우호적이었다. 쑹메이링은 타이완으로 가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하다가 1975년 장제스가 죽은 뒤 타이완을 떠나 미국에서 지냈다. 대륙과 타이완으로 갈려 떨어져 산 지 40여 년. 두 자매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는다. 메이링은 2003년 뉴욕에서 106세로 죽었다.

    쑹칭링과 쑹메이링 두 자매가 어긋나게 된 것은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하면서부터다. 장제스는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학교를 나온 군인이었다. 장제스는 192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쑨원의 집 파티에서 처음으로 메이링을 본다. 그 뒤 메이링을 향한 ‘작업’을 시작한다. 쑨원에게 메이링이 자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쑨원은 장제스를 무척 신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쑨원에게는 군사력이 절실했는데, 쑨원에게 충성을 맹세한 몇 안 되는 군인 중의 하나가 장제스였다. 쑨원은 거듭된 실패를 통해서 혁명에는 군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24년 6월16일에 광저우 황푸(黃?)에 군관학교를 연다. 쑨원의 생애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순간이었다. 쑨원은 그 초대 교장을 장제스에게 맡겼다. 쑨원은 그만큼 장제스를 믿었다. 쑨원이 생전에 이렇게 장제스를 믿었기에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는 자신이 쑨원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자부했다. 장제스가 난징에 거대한 중산릉을 세운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칭링은 장제스가 동생 메이링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쑨원에게서 전해 듣고 펄쩍 뛰었다. 장제스는 본처와 이혼한 뒤 기생 출신의 새 아내를 맞은 상태였다. 게다가 고향에도 기생 출신의 첩이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메이링을 아내로 맞는 데 성공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쑨원의 사진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1927년 12월1일이다.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가 4·12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쑨원이 성사시킨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무산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면서 국민당 최고 실력자가 되던 무렵이다. 그때 메이링의 언니 칭링은 갈수록 쑨원의 뜻을 거스르는 장제스를 역겨워하고 있었다.

    “결혼은 여자에게 가장 큰 도박”

    장제스와 메이링이 결혼하는 데 일등 공신은 세 자매 중 계산이 가장 빠른 현실주의자 쑹아이링이었다. 둘째 칭링이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하자 아이링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좋고 나쁜 게 없어. 남자는 강한 남자와 약한 남자만이 있는 거야. 장제스는 지금 중국에서 가장 유망한 청년이야. 장씨 집안의 권력과 송씨 가문의 명망, 쿵씨 집안의 재산이 합쳐진다면, 우리들은 중국에서 가장 강해질 수 있어.”

    메이링도 처음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결국 장제스를 택한다. 그러면서 결혼에 반대하는 칭링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장 큰 도박을 걸게 돼 있어.”

    ‘송가황조(宋家黃朝)’

    송씨 집안의 세 자매. 권력을 사랑한 쑹메이링, 돈을 사랑한 쑹아이링, 나라를 사랑한 쑹칭링(왼쪽부터).

    숲 속으로 난 중산릉 가는 길을 오르다보면 릉 입구에 못미처 ‘메이링 궁(宮)’이라고 하는 쑹메이링 별장이 있다. 숲 속에 푹 파묻혀 있다. 1931년에 장제스가 메이링을 위해 지은 것이다. 입구에 메이링이 타고 다닌 당시 최고급 미제 승용차가 서 있다. 미국 정부가 선사한 것이란다. 2층에는 침실, 집무실, 식당, 거실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욕실의 좌변기다. 어려서부터 완벽하게 미국식으로 갖춰진 집에서 자란 메이링의 처소답다.

    메이링궁을 둘러보다가 볼일이 급해 1층 마당 한켠에 허름하게 세워진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오랜만에 보는 정통 중국식 공중 화장실이었다. 칸막이도 없이 줄줄이 늘어앉아 일을 보는 악명 높은 중국식 재래 화장실이다. 1930년대 대혼란기에도 메이링의 욕실에는 최신 좌변기가 있었는데, 2006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인 지금, 별장 밖 화장실은 여전히 재래식이라니. 쑹메이링 별장을 중국인들이 ‘궁’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만했다.

    2층 거실 중앙 벽에는 예수 초상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성경책이 놓여 있다. 장제스와 메이링은 이 거실에서 늘 기도를 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 메이링은 장제스에게 세 가지 다짐을 받는다. 첫째, 메이링만을 사랑하겠다(이미 두 번이나 결혼하고 첩을 두고 있고, 기생집 출입이 잦은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장제스이니 이런 요구는 당연!). 둘째, 지금 부인과 이혼하겠다(기생 출신 둘째 부인을 버릴 절호의 기회!). 셋째, 기독교인이 되겠다(역시 목사의 딸!). 장제스는 메이링을 따라 기독교도가 된다.

    세 가지 역사적인 일

    메이링궁을 나와 버스를 타고 옛 중화민국 총통 관저, 즉 총통부(總統府)로 갔다. 쑨원이 43일간 임시 총통직을 수행할 때 묵은 곳이다. 총통부 입구에 있는 높다란 국기게양봉은 1949년 4월23일 이후 국기를 달아본 적이 없다. 난징이 공산당군에 함락된 뒤 중화민국 깃발이 내려온 뒤로, 중화민국 청천백일기도 중화인민공화국 오성홍기도 걸리지 않은 채 주인을 잃었다.

    쑨원은 이곳 총통부에서 43일간 생활하며 세 가지 역사적인 일을 했다. 첫째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쓰도록 했다. 둘째, 청나라 백성임을 상징하는 변발을 없앴다. 영화에서 세 자매의 아버지 쏭자수는 신해혁명이 성공한 뒤, 변발을 자르는 사람에게 국수를 사준다. 당시 중국인들은 혁명정부의 단발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루쉰의 ‘아큐정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변발을 자를 때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단발령에도 불구하고 아큐는 변발을 자르지 않는다. 대젓가락을 이용해 긴 변발을 둘둘 말아올린다. 아큐식 생존법이다. 지금은 혁명파가 득세하고 있지만 혁명파가 곧 물러가고 다시 복고의 물결이 밀려들지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니 일단 머리를 둘둘 말아올렸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 여차하면 변발을 풀어내릴 셈이다.

    과연 아큐와 같은 민중이 예상한 대로 쑨원의 혁명 정부, 민주공화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복고와 반동의 물결이 밀려든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민주공화제를 폐기하고 다시 봉건 황제제로 돌아가 자신이 황제가 되려 했다. 아큐처럼 변발을 자르지 않고 둘둘 말아올리는 것은 나라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수난을 당했던 쓰디쓴 경험에서 터득한 중국 민중의 생존법이다. 나라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늘 손해 보는 것은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변화를 거부하는 노예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위안스카이는 당시 중국 민중에게 그러한 노예 속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중국 천지에 아큐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대범하게 역사를 되돌리려 했던 것 아닐까.

    쑨원이 세 번째 벌인 역사적인 일은 문화 차원, 특히 패션 차원의 업적이다. 이른바 ‘중산복(中山服)’을 유행시킨 것이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즐겨 입는 옷의 원조가 바로 중산복인데,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인들의 정장이자 예복이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장쩌민까지 중국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중산복을 입었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 취임식 날 중산복을 입고 나왔다. 쑨원이 중산복을 입은 뒤 중산복은 동아시아 대학생들의 교복이자 혁명가들의 복장으로 유행했다. 중산복은 쑨원이 고안했다고 한다. 광둥 사람들이 입던 옷을 토대로 개조했다고도 하고 일본 교복을 토대로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위아래에 각각 호주머니를 단 것이 특징이다. 어떻게 이런 옷을 생각하게 되었냐고 사람들이 묻자, 쑨원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송가황조(宋家黃朝)’

    영화 ‘송가황조’는 어려서부터 신식 교육을 받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맹렬 여성으로 자란 송씨 자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청나라 전통 복장을 입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고 서양 양복은 너무 비싸서 중국인들에게는 이것(중산복)이 제격이다.”

    총통부는 원래 태평천국의 궁, 태평천국의 천왕 홍수전이 살던 천왕부였다. 이곳을 개조해 중화민국 총통부로 쓴 것이다. 옛날 홍수전이 살던 곳에 자신이 들어와 살며 쑨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태평천국은 농민혁명과 만주족 정부 타도를 내걸었지만 실패했다. 실패한 태평천국의 역사를 딛고 쑨원은 ‘제2의 홍수전’이 되려고 한 것일까.

    ‘제2의 홍수전’

    쑨원은 태평천국과 인연이 깊다. 쑨원은 광저우 출신인데 홍수전도 그렇다. 쑨원이 어릴 적 고향에서 공부할 때 스승 중의 하나가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한 전사였던 터라 어려서부터 태평천국의 용맹스러운 전투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원시공산주의와 홍수전이 나름대로 해석한 독특한 기독교 원리를 결합해 농민이 주인이 되는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겠다는 태평천국의 정신을 쑨원은 높이 평가했고, 일생 동안 홍수전을 찬양했다.

    쑨원은 태평천국이 지향하는 ‘균부(均富)’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는데, 이는 그가 ‘중국동맹회’(1905)를 조직해 그 조직 강령의 하나로 ‘땅의 권리(地權)를 평등하게 한다’고 규정한 것과 이어진다. ‘제2의 홍수전’이라 자칭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홍수전의 후계자로서 태평천국을 이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농민과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쑨원의 다짐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그 다짐의 절반은 장제스가 실현하고, 나머지 절반은 마오쩌둥이 실현한 것 아닐까.

    쑨원은 1924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을 성사시킨다. 이른바 1차 국공합작(1924∼27)이다. 1920년대 들어서 쑨원과 서구 열강들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서구 열강들은 중국을 마음대로 요리하고 이권을 챙기는 데 쑨원이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다. 서구 열강들을 신뢰하던 쑨원도 더는 서구를 신뢰하지 않고, 민족주의에 경도된다. 쑨원은 서구의 대안으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에 관심을 가졌다. 1924년 쑨원은 국민당을 개조하면서 ‘소련과 협력하고(聯俄), 공산당과 동맹을 맺으며(容共), 노동자 농민운동을 지원한다(勞農扶助)’는 3대 정책을 내놓는다. 쑨원이 국공 합작을 실현한 뒤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마오쩌둥도 이때 어엿한 국민당원이 된다.

    1차 국공합작은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가 1927년에 4·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해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축출하면서 끝난다. 쑹칭링은 쑨원의 국공합작 정신을 수호하고 실천하려 했다. 쑹칭링과 장제스, 쑹메이링이 대립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장제스는 외세에 맞서기 전에 먼저 국내를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를 토벌해 내부를 안정시켜야 외부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1937. 7월)한 뒤에도 장제스는 여전히 항일보다 공산주의자 박멸에 중점을 뒀다. 학생과 지식인들이 연일 시위를 벌이며 장제스를 압박했지만 장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장제스의 고집은 쑨원의 뜻을 거스르고, 국민당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결국 쑹칭링은 국민당을 탈당하고, 장제스가 눈엣가시인 쑹칭링을 살해하려 하면서 둘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영화는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처리했다.

    영화는 쑹칭링과 장제스, 쑹메이링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다가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 합작을 하고, 항일전쟁에 나서는 지점에서 끝난다. 2차 국공합작은 1936년 12월 장제스가 시안에서 붙잡혔다가 공산당을 지지하고, 항일에 나서겠다고 약속한 뒤 풀려난 것이 계기가 됐다. 영화 막바지에 첫째딸 쑹아이링은 전쟁이 지긋지긋하다면서 전투기를 기증하고 홍콩으로 떠난다. 둘째 칭링과 셋째 메이링이 나란히 서서 큰언니를 전송한다. 국공합작이 칭링과 메이링 두 자매의 합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

    물론 그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은 종전(終戰)과 함께 끝이 난다. 공산당이 승리해 쑹칭링은 대륙에 남는다. 쑹칭링은 공산당에 우호적이고, 중국의 운명을 담당할 세력이 공산당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비판을 당하기도 한다. 쑹칭링은 죽기 전에야 공산당에 가입한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을 따른다. 중국의 분열이자, 두 자매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합쳐진 지 오래되면 다시 나눠지는 것이 중국 역사의 법칙이라고 했는데, 결국중국 역사가 둘로 분열되고, 송가 황조는 해체됐다. 그런데 영화는 중국의 분열과 송가 황조의 해체를 보여주지 않고, 국공합작으로 인해 자매합작이 이루어진 지점에서 끝이 난다.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가족끼리 싸우지 말라’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 ‘중국인이 중국인과 싸우지 말라(中國人不打中國人)’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쑨원 전기로 유명한 시프린(Harold Z. Schiffrin)은 “쑨원에게 한 가지 한결같은 재주가 있었다면 그것은 실패하는 재주였다”고 지적했다. 그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거듭된 실패 속에서도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의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 작가 루쉰은 ‘실패한 영웅’ 쑨원을 ‘영원한 혁명가’라고 불렀다. 쑨원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쑨원이 생전에는 실패했을 망정 사후에 성공할 가능성은 아직 있어 보인다. 쑨원은 현재 중국 대륙과 타이완에서 공동으로 추앙받는 유일한 현대 영웅이다. 쑨원에 대한 이러한 공동의 추앙이 타이완 해협 양안(兩岸)을 잇는 심리적 가교와 정서적 유대의 고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마도 그 가교와 고리가 현실에서 실현될 때, 일찍이 국민정부의 성지였던 난징이 새로운 의미를 찾으면서 부활할지도 모를 일이다.

    ‘송가황조(宋家黃朝)’
    李旭淵
    ● 1963년 광주 출생
    ● 고려대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중국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 고급진수과정 수료
    ● 現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 논문 및 저서 : ‘중국 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동향’ ‘소설 속의 문화대혁명’ ‘개혁 개방 이후 전통 문화의 재평가와 변용’ ‘전환기의 중국 사회’1, 2(공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노신 산문선집’ 등


    물론 지금 타이완은 한편에서는 3차 국공합작이라 부를 정도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새로운 협력관계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독립파가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다. 독립파 인사들은 중국 역사가 아니라 타이완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면서 쑨원을 역사책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국부이지 타이완의 국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쑨원은 지금 중국 통일과 타이완 독립의 교차점에서 부유하고 있고,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영화 ‘송가황조’의 메시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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