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개척한 ‘미국 정신’의 요람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3-06 18: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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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청교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 호에 오른 청교도들. 피난의 길은 험난했지만 신앙과 신념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플리머스에 당도한다. 순수한 종교적 이념공동체를 추구한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미국의 정신으로 추앙받는다. 초기 청교도인의 일상과 민주주의 정신을 담은 메이플라워 서약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자.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순례자 청교도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조성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담배 재배에 성공해 자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에 자극받아 신대륙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던 1620년, 일단의 영국 청교도들이 일찍이 존 스미스가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한 신대륙 북쪽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대왕정을 꿈꾼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청교도 박해가 심해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거쳐 라이덴으로 피신한 무리의 일부였다. 이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달픈 유랑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후세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순례자 조상(Pilgrim Fathers)’이라고 불린 이들은 숱한 난관을 딛고 마침내 자신들이 소망하는 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이 건설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제임스타운이나 뒤에 세워지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신념이 남달리 투철했기에 일찍부터 미국 정신의 요람으로 선양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경제적 부의 추구와는 무관한 순수한 종교적 이념공동체였다. 메이플라워 서약,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 추수감사절 등 이들 순례자에 얽힌 일화가 오늘날 미국의 국민적 신화로 널리 회자되는 것도 이념의 순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건설된 지 70여 년 만인 1691년, 플리머스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흡수통합되고 만다. 그러나 굳건한 청교도 정신과 법률, 교육, 자유, 도덕의 중요성에 대한 이들의 확고한 믿음은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를 계도하는 삶의 원리가 되고 있다.

    ‘America’s Hometown’

    플리머스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은 2004년 8월 초순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열린 소로(Thoreau) 연례학회에 참석한 후 하버드-옌칭연구소에 잠시 머무르던 중 짬을 냈다. 연전에도 플리머스를 찾은 적이 있지만, 일정에 쫓겨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은 터에, 마침 그 무렵 읽고 있던 소로의 ‘케이프캇’(Cape Cod, 1865)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겹쳐지면서 길을 떠나도록 재촉한 것이다. 플리머스를 거쳐 순례자들의 첫 기착지인 케이프캇 해안 일대를 돌아보고, 내친김에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의 첫 무대인 뉴베드퍼드를 들러 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인근 렌터카 업소에서 차를 빌리고 간단한 행장을 꾸려 아침 일찍 케임브리지를 출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복잡한 보스턴 시내를 벗어나니 하늘이 한결 더 푸르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고향인 퀸시를 왼편으로 끼고 40여 분 달리니 어느새 플리머스다. 보스턴 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플리머스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미국 청교도 문명의 시발지로서 플리머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시에서 발행한 안내서에는 ‘미국의 본향(America’s Hometown)’으로 적혀 있다. 아담한 시가지의 중심으로 들어서서 해안가 쪽으로 내려가니 곧바로 청남색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서 바닷가 쪽으로 메이플라워 호가 보이고 이어 그리스 신전 모양의 플리머스 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차를 세우고 플리머스 록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플리머스 항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넘실대는 대양을 앞에 두니 여름 햇살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서고, 멀리 부서지는 파도의 물보라 또한 햇빛을 받아 번쩍이니 눈부셔서 잠시 시공을 초월한 듯한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항 여기저기에 요트들이 떠 있으나, 태양이 작열하는 바닷가에서 으레 느껴지는 자연의 원시적 야성을 어쩌지는 못했다.

    정신을 압도하는 자연의 야생적 원시성을 고전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불렀거니와, 나는 이런 숭엄한 기분 속에서 플리머스 식민지를 이끈 불세출의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가 남긴 ‘플리머스 식민지 역사(Of Plymouth Plantation)’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목숨을 내건 고난의 항해 끝에 신대륙 해안가에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낯선 세계의 황량한 풍경에 압도당한 그의 심경이 참으로 인상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머리에 남아 있는 구절이다.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이주를 준비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고 광막한 바다를 건너왔으나, 여기에는 그들을 맞아주는 친구도 없고 비바람에 시달린 몸을 풀고 활력을 되찾을 숙소도 없었다. 그리고 찾아들 집도 없었으며, 도움을 청할 집이나 마을 같은 것은 더더구나 있을 리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다만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황량한 황야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비스가 산처럼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 황야를 내려다보면서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살펴봄으로써 희망을 지필 수 있는 산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건너온 바다가, 이제 그들을 문명 세계로부터 절연하는 장애물이요 심연이 되어버린 그 광막한 바다가 보일 뿐이었다.

    400년 전 삭풍이 몰아치는 이 황량한 바닷가에서 브래드퍼드를 휘감은 비장한 숭엄미를 통해 빛나는 것은 결국 청교도로서 그의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다. 180t에 불과한 작은 목선에 의탁해 대서양을 건너오게 한 그 치열한 신앙의 실체는 무엇인가. 브래드퍼드 일행으로 하여금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이방을 전전하다가 급기야 이곳 신대륙 땅,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거친 황야’로 찾아오게 만든 신념과 결단의 본질은 무엇인가.

    소명감과 선민의식

    이 물음은 물론 청교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원론적 질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왜냐하면 여기에 이 순례자들을 이끈 원동력이 무엇인지 꽤 분명히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주위를 살펴볼 비스가 산도 찾아볼 수 없다는 한탄이 바로 그것이다. 비스가(Pisgah) 산이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와의 계시로 등정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봤던 산이다. 다시 말해 브래드퍼드는 고난에 찬 그들의 순례 여정을 이스라엘 종족의 애굽 탈출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신(神)의 선택을 받아 애굽 땅을 탈출해 가나안에 정주한 이스라엘 종족처럼 그들 또한 신대륙에 기독교 복음의 왕국을 건설하라는 소명을 받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이곳 신대륙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이 순례 청교도들의 뜨거운 신심의 근원은 바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 부름 받은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따라서 신이 어떤 곤경에서도 그들을 인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고난과 시련은, 느헤미야가 그렇고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오히려 선택받은 증거로써 그들의 소명감을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 뿐이다.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이런 소명의식을 ‘황야로의 심부름(errand into the wilderness)’으로 표현한 바 있다. 밀러에 따르면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 식민지 건설은 수세기에 걸친 숱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이뤄내지 못한 참다운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세우라는, 다시 말해 종교개혁 운동을 완수하라는 신의 엄숙한 심부름으로 비쳤다. 밀러는 본래 이 소명의식이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고자 한, 존 윈스롭을 주역으로 한 매사추세츠 만 식민자들에게서 두드러지고, 플리머스 순례자들의 경우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내몰린 타율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비전의 순수성에서는 오히려 플리머스 식민자들이 앞선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자들이 국교회에 남아서 내부 개혁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완수하자는 온건한 입장이었던 데 반해 플리머스 순례자들은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교회와 분리해 그들 자신의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랑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 과격한 분리주의 원칙으로 인해 이들에겐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는 낙인이 찍혔고, 국교회는 물론 같은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이런 시련을 순교자적 자세로 받아들이고 신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매진했다. 시련이 오히려 그들의 소명감과 선민의식을 더욱 깊게 한 것이다.

    스크루비 청교도들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듬해인 1621년부터 1657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0번이나 지사로 선출됐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지사로 선출되어 종신토록 식민지의 지도자로서 순례자 회중을 이끌었으니 스스로를 모세에 견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대서양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1588년,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요크셔의 오스터필드에서 태어났다. 주민이 200명가량이던 이 소읍에서 브래드퍼드가는 농토를 제법 많이 소유한 유족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어머니가 개가하자 브래드퍼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여섯 살 때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개가한 어머니 집으로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도 사망해 고아가 되고 말았다.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메이플라워 호. 순례자 청교도들은 플리머스에 상륙하기에 앞서 이 배에서 메이플라워 서약에 서명했다.

    그에게 삶의 전기는 열두 살 때 친구 소개로 집에서 8마일 떨어진 뱁워스 교회에 참석하면서 찾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청교도 개혁사상을 처음 접했을 뿐 아니라 평생의 동지이자 후원자로서 플리머스 식민지를 함께 이끌어갈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를 만난다. 브루스터는 청교주의 운동의 온상인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네덜란드 주재 영국 대사를 수행한 경력이 있는 식견 넓은 사람이었다. 브래드퍼드는 브루스터의 격려로 라틴어를 배우는 한편 그의 서재에서 책을 빌려 폭넓은 독서를 하면서 청교주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제임스 1세가 등극하면서 국교회의 정화를 부르짖던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잇따르자 뱁워스 교회의 목사 리처드 클라이프턴은 목사직을 사임하고 만다. 뱁워스의 회중은 멀리 게인스버러의 교회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1607년 결국 스크루비(Scrooby)에 있는 브루스터의 집에서 모임을 열고 클라이프턴 목사를 초빙한다.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의 모체가 되는 스크루비 분리주의자 그룹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1607년 가을, 청교도 탄압이 더욱 노골화하면서 그 여파가 마침내 비밀리에 모임을 갖던 스크루비 그룹에까지 미쳤다. 브루스터가 요크셔 교회위원회에 소환된 것이다. 이 무렵 런던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청교도가 투옥되고 일부는 처형당했다. 교회와 왕권을 통합해 강력한 왕정(王政)을 세우고자 한 제임스 1세는 교회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것이다. 요크셔 국교회의 심문을 받은 브루스터는 다행히 투옥되지는 않았으나 불복종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스크루비 회중은 결국 영국 내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예를 좇아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민주주의와 반지성주의

    주지하듯 영국 국교회에 대한 청교도들의 개혁 요구는 처음에는 예배 의식의 방법과 절차 같은 사소한 문제였다. 청교도들과 국교도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거의 일치했다. 그들은 신앙이 인간 삶의 중심이고, 나날의 생활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미하는 데 바쳐져야 하며, 죄의 멍에를 걸머진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린 대속의 은총에 의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하고, 기독교도는 오직 복음서의 가르침을 삶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신학적 신념도 공유했다. 국교도와 청교도 모두 근본적으로 프로테스탄트였던 것이다.

    종교의 근본에서 별반 차이가 없던 국교도와 청교도는 교회의 구성과 조직 문제에서는 의견이 달랐다. 이 의견 차이는 17세기 초에 이르면서 신학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국교회는 대주교를 정점으로 한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고수한 데 반해 청교도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교회를 모델로 삼아 수평적 평등 관계에서 각기 독자성을 지니고 회중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 조직을 원했다.

    국교회의 위계적 질서와 주교의 감독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청교도들은 성경을 삶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권위로 삼았다. 그들은 성서가 교리, 예배 의식, 교회 조직·제도와 같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모든 문제, 곧 정치·사회적인 이슈는 물론 의식주를 포함한 삶의 제반사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그 교훈과 수범 및 일반 원리를 담고 있다고 봤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를 담은 성스러운 경전이라는 것을 국교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성서에 담긴 하느님의 교훈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더 중시했다. 청교도들의 성서직역주의를 경계한 국교도들은 성서에 담긴 하느님의 계시는 주로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하는 것이고 그 밖의 세속적인 문제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성경의 권위에 관한 국교도와 청교도의 견해 차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난다. 청교도들은 신의 계시를 진정으로 인지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메마른 이성적 이해만으로는 부족하고 한걸음 나아가 그로 인한 내적 갱생, 곧 회심(conversion)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청교도 개혁주의에는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의 씨앗뿐만 아니라 이성의 계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반(反)지성주의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고, 따라서 현상적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 세력과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는 혁명적 급진성이 잠재해 있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제임스 1세나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에게 청교도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비쳤음은 당연한 것이다.

    느슨해진 신앙, 네덜란드에 同化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플리머스 록이 안치된 그리스식 건물.

    새로운 환경에서 참신앙을 되찾자는 열망에서 결정된 스크루비 회중의 네덜란드 이주는 그러나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1607년 말, 일행은 가산을 정리한 후 배를 수소문해서 동쪽 와시 강변의 보스턴 항에서 출국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행은 떠나기도 전에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선장이 밀고했기 때문이다. 클라이프턴 목사, 리처드 로빈슨 부목사, 브루스터 등 중심인물들은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한 달 뒤 출소한 이들은 애초의 결정대로 다시금 네덜란드행(行)을 기획했다. 이듬해 봄, 일행은 배를 수소문해 다시 이주 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문제가 생겨 일부는 떠날 수 있었으나 나머지는 해안에 억류되고 말았다. 얼마 뒤 풀려난 나머지는 각자 개별적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1608년 8월, 클라이프턴 목사 일가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것을 끝으로 마침내 이주가 완료됐다.

    스크루비 회중의 암스테르담 생활은 비참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직물 길드를 비롯해 여러 일자리에 취업했으나, 농사일만 해온 이들로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 저임금에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암스테르담에 먼저 이주한 다른 청교도 집단과의 분쟁도 잦았다. 1609년 지도부는 숙의 끝에 형편이 나은 라이덴으로 이주하기로 한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지 9개월 만이었다. 100여 명의 회중 중 일부만 암스테르담에 남고 거의가 라이덴으로 이주했다. 라이덴에서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안정되고 경제적 형편도 나아졌다.

    그러나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지도부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느슨해지고, 특히 아이들의 경우 네덜란드 문화에 동화되어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런 우려와 함께 소강상태였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스크루비 지도부는 마침내 네덜란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스크루비 지도부는 우선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를 통해 특허장을 받기 위해 교섭했다. 제임스 왕은 이들이 청교도 과격파인 것을 알고 공식적인 특허장을 교부하지 않았다. 대신 버지니아 식민 당국의 지시에 잘 따른다면 이주를 묵인할 수는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행은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는 없었다. 다시금 유력 인사를 통해 교섭을 벌인 끝에 마침내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북쪽으로 100마일 정도 떨어진 허드슨 강 어구에 식민을 허락하는 특허장을 얻어냈다.

    다음으로 이주비 조달이 문제였으나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해결됐다. 런던의 해외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이 신대륙 정착에 성공하면 7년 뒤 재산을 반분하는 조건으로 재정후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스크루비 회중은 이들의 후원으로 180t급 메이플라워 호와 60t급 스피드웰 호 두 척의 배를 빌릴 수 있었다.

    마침내 신대륙으로

    1620년 7월 21일, 이주자들은 정든 라이덴을 떠나 인근의 델프츠헤이븐 항에 모여 드디어 이주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스피드웰 호를 타고 영국의 사우스햄턴 항에 들러 항해 준비를 한 다음 메이플라워 호에 분승해 신대륙으로 출항했다. 라이덴의 첫 이주자 53명을 포함, 모두 120명이 두 배에 나눠 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스피드웰 호에 물이 새어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회항해 수리한 뒤 다시 출발했으나 여전히 문제였다. 결국 스피드웰 호로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행은 메이플라워 호에 옮겨 탈 도리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일부는 승선을 포기했다.

    이윽고 9월16일 메이플라워 호가 출항했다. 일행은 모두 102명. 라이덴 출신의 순례자, 이른바 ‘성도(Saints)’가 41명, 런던에서 모집한 ‘이방인(Strangers)’이 61명이었다. 이처럼 메이플라워 호로 대서양을 건넌 첫 이주자 중 숫자상으로 보면 순례자가 소수였고, 더욱이 원래의 스크루비 출신은 브루스터 부부와 브래드퍼드 3명뿐이었다.

    소수이면서도 스크루비 회중이 그들의 비전을 관철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뜨거운 신앙심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복음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꼽아야 하리라. 그러나 모든 일이 종교적 열정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식민지 경영은 실로 복잡한 일이다. 거기에 브래드퍼드의 탁월한 지도력과 실무적 수완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카튼 매더는 ‘미국의 위대한 기독교도 열전(Magnalia Christi Americana)’에서 브래드퍼드에 대해 네덜란드어는 물론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하고 만년에는 히브리어까지 배우려고 한, 학구적이고 신학적 문제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브래드퍼드가 남긴 ‘플리머스 식민지 역사’를 보면 그는 신실한 청교도이면서 또한 대단히 실무적이고 영악스러운 양키임이 판명된다. 그는 정치 지도자이자 노련한 외교관이었고, 정신적 사제였으면서 유능한 사업가였고, 작가이면서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난세일수록 지도자의 중요성은 큰 법이다. 존 스미스란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제임스타운이 살아남을 수 있었듯이, 플리머스 또한 브래드퍼드의 영도력으로 난경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메이플라워 서약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플리머스 록. 순례자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할 때 처음 밟은 바위로, 신대륙에 도착한 해인 ‘1620’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런 상념에 빠져 나는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메이플라워 호를 구경하기 위해 부둣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운 날씨인데도 구경꾼이 제법 많았다. 여기 전시된 메이플라워 호는 엄밀한 고증에 따라 1957년 복원된 것이다. 설계는 미 해군 선박설계사인 윌리엄 A. 베이커가 맡았으나,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배는 영국에서 영국산 목재로 건조됐다. 복원된 메이플라워 호는 1957년 영국 데번 항을 출발해 이곳 플리머스까지 시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배 이름이 ‘Mayflower II’인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름 그대로 5월에 피는 핑크빛 산사나무 꽃이 뱃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표를 사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존 스미스의 초상과 그가 그린 뉴잉글랜드 지도가 걸려 있다. 이어 메이플라워 서약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미국 최초의 정치 협약서로 이름 높은 메이플라워 서약은 실상 우연의 산물이다. 이주자들이 특허장에 명기된 허드슨 강 어귀에 예정대로 당도했더라면 이 문서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플라워 호가 당도한 곳은 허드슨 강 어귀로부터 북쪽으로 약 225마일 떨어진 케이프캇의 해안가, 지금의 트루로(Truro) 부근이다. 1620년 11월20일 금요일, 영국을 떠난 지 66일 만이었다.

    예기치 못한 조류나 바람 때문에 목적지와 다른 곳에 도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해도(海圖)를 통해 방향이 잘못됐음을 확인한 선장은 배를 돌려 케이프캇 해안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허드슨 강 연안의 예정된 정착지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케이프캇 연안은 암초가 많고 파도가 거친 곳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메이플라워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난파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오랜 항해로 사람들도 지쳐 있었다. 선장은 매서운 추위와 거센 파도를 동반한 겨울이 다가옴을 염려했다.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북으로 돌려 케이프캇 북단 지금의 프로빈스타운 항 근처에 닻을 내렸다.

    예정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지도부는 결국 인근에서 정착지를 물색하기로 했다. 이런 방침이 알려지자 이주자들 사이엔 ‘특허장에 명시된 목적지 밖이니 그것에 더는 얽매일 필요가 없고, 따라서 회사에 대한 의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당황한 지도부는 모두를 결속시키는 행동지침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서둘러 서약서를 작성했다. 그 골자는 첫째, 식민의 목적이 기독교 복음의 전파와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있으며, 둘째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약정해 ‘시민적 정치체제(civil body politic)’를 조직하고, 셋째, 공동체의 복리를 위해 제정된 규율과 법령에 복종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민주주의 시원

    서약이 구속력을 가지려면 다수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지도부는 신분에 상관없이 일행에게 모두 서명하기를 권했다. 그 결과 41명이 서명했는데, 그중에는 하인 신분의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14세 미만의 어린이와 여자는 제외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점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겠으나, 최하층인 노예가 서명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문서가 그토록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통치체제의 개요를 밝혔다는 점에서 소박하긴 하나 일종의 헌정(憲政) 문서다. 더욱이 그 통치기구의 정당성이 피치자의 동의에 있음을 밝혀 민주주의의 원리를 천명했다. 메이플라워 서약을 ‘독립선언서의 선구’라고 하는 까닭이다.

    더 구체적으로 메이플라워 서약은 두 가지 중요한 이념적 전통을 잇고 있다. 첫째는 청교도 회중교회주의의 기반인 기독교의 성약 개념이다. 둘째는, 이에서 연원하여 훗날 홉스나 루소 등 계몽사상가에 의해 구체화된 사회계약 개념이다. 결국 플리머스 청교도들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성약 개념을 변용해 사회적 관계의 틀을 삼은 셈인데, 이들의 생각과 실천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그나 카르타와 마찬가지로 메이플라워 서약의 역사적 중요성도 훗날에 가서야 비로소 인식된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1802년, 순례자 집단의 메이플라워 서약을 “사변적인 정치철학자들이 정부가 정통성을 얻는 유일한 길로 상정한 사회계약이론이 완벽하게 구현된 인류 역사상 유일한 사례”라고 상찬한 바 있다.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원주민 호버목의 집터.

    메이플라워는 호는 전장 106.5피트, 폭 25.5피트, 흘수선(선체가 물에 잠기는 한계선)이 13피트에 3개의 돛대를 갖춘 작은 범선이다. 선실 안을 둘러보며 그 비좁음에 새삼 놀랐다. 상갑판과 선창 사이에 낀, 천장이 낮은 이 좁은 선실에서 100여 명의 승객이 두 달이 넘는 항해 기간 내내 함께 기거했다. 게다가 배는 늘 풍랑에 흔들렸고 상갑판에 들이친 차가운 바닷물이 아래로 새어들기 일쑤였다.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짐작된다. 일행이 겨울을 나면서 무더기로 죽어간 것도 이런 고통스럽고 불결한 환경 속에서 심신이 쇠약해진 탓일 것이다. 항해 중 사망자는 1명에 불과했으나, 플리머스 상륙과 더불어 병자가 속출하고 사망자는 늘어만 갔다. 브래드퍼드가 비탄에 잠겨 기록하고 있듯이, 12월에 6명, 1월에 8명, 2월에 17명, 3월에 13명이 죽었다. 겨울을 넘기고 나니 지사로 선출한 카버를 포함해 절반이 죽고 50명 남짓만 살아남았다.

    신화가 된 플리머스 록

    메이플라워 호를 보고 나서 바로 옆의 플리머스 록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플리머스 록은 순례자 조상들이 이곳에 상륙할 때 처음 밟은 바위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식 주랑으로 둘러싸인 모래바닥에 머리를 내민 타원형 바위에는 지금도 ‘1620’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그러나 브래드퍼드의 ‘플리머스 공동체의 역사’도 그가 공동 저자로서 생전에 출판한 ‘모트의 이야기’(1622)도 미국인들이 신성시하는 이 바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플리머스 록이 신화화한 것은 독립혁명 직전이다.

    1741년 플리머스 시는 항구에 부두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토머스 폰스(Thomas Faunce)라는 95세 노인이 항구로 달려나와 순례 조상들이 밟고 상륙한 뜻 깊은 바위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노인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바위의 유래를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이런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바위는 ‘조상의 바위(Forefathers’ Rock)’로 불리게 됐고, 시당국도 바위를 비껴 선창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바위를 보존했다.

    독립혁명이 발발하면서 사람들은 바위를 시내 광장으로 옮겨 자유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다. 바위를 소에 비틀어매 들어올리자 두 동강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영국과의 분리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해 바위를 더욱 신성시했고, 이때부터 미국 전역에 ‘플리머스 록’으로 알려지게 됐다. 1824년 시 당국은 광장에 놓여 있던 바위를 갓 문을 연 순례자 박물관 앞으로 옮겼다가 1880년에 원래의 해안가로 되돌려 두 바위를 합치고 바위에 ‘1620’이라는 연대를 새겨넣었다.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식 주랑이 들어선 것은 1920년, 정주(定住) 300 주년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세우고 건사하는 일은 경제나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특히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을 지닌 이질적인 집단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근대 이후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강렬한 이념, 동일한 운명공동체로 상상할 수 있는 정체성이 요구됐다. 이런 이유로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 국민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근대 국민국가는 내적 통합을 확인하고 정당화할 국민적 에토스를 종종 문화의 창달을 통해서 혹은 역사의 신화화를 통해서 충족하고자 했다. 이런 과정에서 특정한 지방의 설화(說話)가 국민적 신화로 재구성되거나 역사의 편편상이 국가 정체성의 원천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플리머스 록의 신화야말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에 역사의 신화화 과정이 수반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이리라.

    원주민들과 공존공영

    플리머스 청교도의 일상을 엿보길 원한다면 방문자는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을 찾을 일이다.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은 시내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지점에 조성된 일종의 민속촌 같은 곳이다. 1627년 무렵의 순례자 생활상을 재현해놓은 이곳에 매년 40만의 방문자가 찾아온다고 안내서는 적고 있다. 왜 1627년일까. 그해에 플리머스 청교도들은 런던 상인조합의 지분을 사들여 완전한 자치의 길을 열고, 이와 함께 정착민들에게 더 많은 자영 토지와 가축을 분배함으로써,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에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방문자센터에 들러 안내서를 얻은 다음, 숲 속으로 난 트레일을 따라 걸으니 맨 먼저 호버목(Hobbamock)의 집터가 나온다. 호버목은 왐파노억(Wampanoag) 부족의 추장 마사소이트(Masssoit)가 청교도들을 위해 파견한 조력자 겸 통역자였다. 집터에는 짚풀과 나무껍질로 엮은 반원형의 움막 한 동이 있고, 그 옆의 천막에서는 원주민이 불을 피워 음식을 장만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인디언의 생활상을 함께 재현해놓은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수가 많지 않던 순례자 청교도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주변 인디언 부족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나 매사추세츠 만의 청교도들이 원주민과 끊임없는 갈등상태에 있었던 데 반해, 이곳 순례 청교도들은 정착한 지 한 세대가 넘도록 인디언과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이 점은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전통이 서로 다른 민족집단끼리의 공존공영을 강조하는 오늘의 다문화주의 정신에 비쳐볼 때 특기해 마땅한 일이다.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순례자 청교도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했던 왐파노억 인디언.

    사실 브래드퍼드 일행이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선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그들이 당도하기 얼마 전 이 지역 일대에 천연두가 돌아 인디언 부족이 거의 절멸한 뒤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근에서 가장 큰 부족인 왐파노억은 북쪽의 나라간세츠 족의 침공을 염려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적의 침공을 백인 이주자들과 연합해 막아낼 수 있기를 내심 바랐다.

    이처럼 양자의 합치된 이해가 이들이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긴 하나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한 지사 브래드퍼드의 지도력과 외교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평화는 쉽사리 깨졌을 것이다. 가령 브래드퍼드는 추장 마사소이트가 병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문병하고 그의 병을 치료해주도록 했다. 그 뒤로 원주민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추수감사절의 유래

    유능한 통역자를 만난 것도 이주자들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첫해 겨울을 가까스로 넘긴 이주자들 앞에 놀랍게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디언이 나타난 것이다. 메인 주 인근에 살면서 그곳으로 고기를 잡으러 나오는 영국인 어부들로부터 영어를 배운 사모셋(Samoset)이었다. 그는 곧 순례자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스콴토(Squanto)를 소개했다.

    스콴토는 이 지방 출신으로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끌려가 2년을 지내다 온 탓에 사모셋보다 영어가 능숙했다. 이주자들은 스관토를 통해 비로소 주변 정세를 소상히 파악하고 적절한 생존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정착한 지 불과 4개월 만인 이듬해 3월 순례자들이 왐파노억 족과 평화협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스콴토의 중재 덕분이었다.

    협약의 주내용을 보면, 서로 상해를 입히지 말 것,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상대에게 보내 처벌할 수 있도록 할 것, 서로 물건을 훔치지 말 것, 훔친 물건에 대해서는 변상할 것, 상대방이 전쟁을 겪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서로 도울 것 등이다.

    순례자들은 이듬해 가을 제법 풍성한 가을걷이를 할 수 있었다. 스콴토를 비롯한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고 낚시 같은 실제적인 생활 기술을 익힌 덕분이었다. 그들은 신에게 감사하는 축제를 열고 도움을 준 인디언도 초대했다. 놀랍게도 추장 마사소이트가 90명의 인디언을 대동하고 나타나 사슴 다섯 마리를 선물로 내놓았다. 그들은 옥수수와 함께 대구, 메기, 거위고기를 마련해 환대했다.

    혹자는 백인의 지배와 침탈을 미화한다고 비판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중요한 축일의 하나인 추수감사절은 바로 이 교환(交驩)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처음에는 크랜베리 소스도, 호박파이도, 칠면조도 없었다. 산발적으로 행해지던 추수감사절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공식적인 축일로 지정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817년 뉴욕 주가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이어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의 넷째 목요일을 공식적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함으로써 전국적인 축일로 지켜지게 됐다.

    호버목의 집터를 지나 얼마쯤 걸으니 마름모꼴의 방책에 둘러싸인 순례자 마을이 보인다. 마을은 중앙 십자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마침 커다란 목창을 든 병사들이 분열과 열병 의식을 보여준다. 순례자들은 인디언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으나 늘 동원체제를 갖추고 군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으로 브래드퍼드는 기록하고 있다. 집집마다 뾰족한 기둥으로 담장을 쳤는데, 이 또한 언제 있을지를 인디언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청교도 신앙공동체 근거지 플리머스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마름모의 서쪽 꼭지점 부근에 있는 성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의 성루로 올라가니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풍경을 즐길 여유는 없다. 성루 중앙의 하늘을 향해 뻗쳐 있는 큰 대포가 사뭇 위압적이기 때문이다. 1622년 원주민이 제임스타운을 급습, 400여 명의 식민자를 살해한 사건을 전해듣고 방어를 강화한 결과라고 한다.

    하늘을 향한 신념은 숭고한 것이었으나 그 실현을 위한 현세의 삶은 이처럼 살풍경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들 순례 청교도들의 삶만 그러하랴. 인생은 어디에서나 이념과 현실의 줄타기 곡예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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