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특전사, 외인부대, 전쟁, 익스트림 스포츠… ‘ 극한’이 나를 미치게 해요”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6-03-13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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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챌린지컵 대회에서 24시간 달리기, 철인3종경기, 100km 카누, 100km 크로스컨트리를 모두 완주하며 우승한 한국 최고 철인 김연수씨. 특전사 출신으로 2년 동안 프랑스 외인부대에 근무하며 각종 지옥훈련은 물론 실전까지 체험한 그의 남다른 이력이 눈길을 끈다.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24시간 달리기, 철인3종경기(수영 3.9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 100km 카누, 100km 크로스컨트리…. 이름만 들어도 기가 질리는 철인 종목 코스를 모두 완주하는 ‘울트라 철인경기’가 있다. 지난해 처음 열린 챌린지컵 대회(www.challengescup.com)가 그것. 이 대회에 9명의 철인이 도전했지만, 한 명만이 완주, 우승을 차지했다. 김연수(金淵水·29)씨다.

    김씨는 지난해 3월 열린 24시간 달리기에서 155.3km를 뛰었다. 6월 제주도 성산 앞바다에서 치러진 철인3종경기는 13시간17분20초 만에 완주했다. 10월 충남 당진 앞바다에서 열린 100km 카누 레이스에서는 23시간54분7초 동안 바다와 사투를 벌였다. 12월 평창에서 열린 마지막 종목 100km 스키크로스컨트리는 11시간9분36초. 그나마 고통이 가장 짧은 종목이었다.

    가히 한국 최고의 철인으로 불릴 만한 그는 이력도 이채롭다. 한국을 대표하는 특수부대 특전사와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라고 하는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다.

    서울 목동운동장에서 만난 그는 175cm, 75kg의 단단한 체격에 구릿빛 피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태권도, 유도, 검도, 특공무술 등 무술실력이 합쳐 12단이라고 했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달리고 허들을 넘는다. 오후엔 권총사격 연습도 한다. 3월에 있을 경찰특공대 특채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특공대는 쉽게 합격하지 않겠냐”고 하자 고개를 가로젓는다. 40여 명을 뽑는데 지원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는 것. 게다가 지원자 대부분이 무술 고단자나 특수부대 출신이어서 한 종목만 실수해도 바로 탈락이라고 한다.

    “지원자 대부분이 체력 테스트는 거의 만점일 거예요. 문제는 사격이죠. 사격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통장 잔고가 바닥나 걱정이에요.”

    사격연습장에서 권총 실탄사격을 하는 비용이 10발에 2만원이니 부담이 클 듯하다.

    312km 한반도 횡단 마라톤 완주

    챌린지컵 대회를 화제로 꺼냈다. 가장 힘들었던 종목은 100km 카누였다고 한다.

    “꼬박 24시간을 쉬지 않고 노를 저었어요. 밥도 노를 저으면서 먹었죠.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어요. 특히 결승점을 앞두고 밀물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잠시 쉬면 뒤로 밀려나고, 체력은 완전히 바닥났고…. 그런 상황에서 한 시간 넘게 씨름하다 결국 완주했죠.”

    철인3종경기에서는 마라톤을 하던 중 발목이 접질렸다.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끝내 완주했다.

    챌린지컵 대회 종목처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를 ‘익스트림(extreme·극한) 스포츠’라고 한다. 대표적인 종목으로 강릉에서 강화도까지 한반도를 횡단하는 312km 마라톤이 있다. 중간에 쉴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있다. 72시간 내에만 들어오면 된다. 하지만 땀이 완전히 식으면 다시 뛰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걸으면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 먹는 것도 걸으면서 해결한다. 횡단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은 김씨를 포함해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관령을 넘을 때 가장 힘들어요. 졸면서 가다가 방향감각을 잃어 다시 강릉 쪽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요. 더구나 일반 마라톤 대회처럼 경기하는 동안 차량 통행을 막는 것도 아니어서 졸면서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김연수씨는 지난해 열린 챌린지컵 대회에 참가해 유일하게 4종목을 모두 완주했다.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물론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체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싸움에도 순서가 있어요. 처음엔 몸의 근육이 완전히 풀려 붕 뜨는 느낌이 들다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면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와요. 그걸 이겨내면 이번엔 무릎이 아프고, 그 다음엔 발이 아파요.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것도 지나면 이번엔 추위와의 싸움이 시작되죠.”

    그런데도 계속 뛰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에겐 ‘미친 짓’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싸움을 즐긴다. 나른함과 권태, 일상의 지루함, 존재감 상실로 헤맬 때 그렇게 뛰면 자신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근육이 끊어질 것 같아도 악으로 계속 뛰면서 모든 걸 분출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완주하지 못해요. 그렇게 극한 상황을 이겨내면 쾌감이 찾아옵니다. 이런 것도 해냈는데 무슨 일을 못해내겠느냐는 자신도 생기고요.”

    김연수씨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데 마음이 끌린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춘기에 접어들며 공연히 부모에게 반항심이 생기고, 사회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면서 오토바이에 빠져 폭주족이 됐다. 1년이 넘게 학교에서도 포기할 정도로 원 없이 망가져보니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방황해서 얻어지는 게 뭔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대학에 진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자마자 훈련이 고되기로 유명한 특전사를 자원했다. 그 이유가 김씨답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상근예비역 판정을 받았어요. 시골에선 군인보다 지역 상근예비역을 먼저 충원하는데, 젊은이가 얼마 없으니까 그때 신체검사를 받은 사람 모두 상근예비역 판정을 받은 거죠. 군 생활을 안 하면 모를까, 이왕 하려면 ‘빡세게’ 해야지 하는 생각에 특전사를 자원했어요.

    주위에서 다들 특전사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왜 갔다 오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나’ 싶었어요. 도전하다 능력이 안 돼 포기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1998년 특전사 하사관으로 입대해 707부대에서 스나이퍼(저격수)로 근무하던 그는 1년 후 6대 1의 경쟁을 뚫고 간부사관시험에 합격, 장교로 임관했다. 그 후 주변에서는 장기 복무를 권했지만 2002년 중위로 전역했다. 프랑스 외인부대에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외인부대 사병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다들 말렸죠. 장교로서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는 게 아깝다고요. 그렇다고 외인부대가 떼돈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거든요. 프랑스에 있을 때는 월 180만원, 해외에 파견됐을 때는 월450만원가량 받았어요. 소문처럼 봉급이 많진 않아요.”

    프랑스 외인부대를 선택한 건 돈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라고.

    평균 경쟁률 15대 1

    레종 에트랑제. 1831년 창설된 프랑스 외인부대는 170여 년 동안 3만5000회 이상의 전투를 치른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다. 지금도 프랑스 외인부대 자원입대소엔 하루에도 몇 명씩, 일주일이면 수십 명의 지원자가 찾아온다.

    “전세계의 ‘깡다구’깨나 있는 젊은이들은 다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돼요. 야쿠자, 마피아 출신도 있고, 살인혐의를 안고 온 범죄자도 있어요.”

    외인부대는 자원한다고 다 입소가 허락되는 게 아니다. 그와 함께 자원한 32명 중에서 훈련소인 교육연대에 입소한 사람은 3명뿐이었다. 평균 경쟁률이 15대 1이라고 한다.

    입소하려면 체력검사, 적성검사, 정밀신체검사, 신원조회 등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탈영병이나 살인자가 아닌 이상 과거를 묻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가명을 쓰도록 권장한다. 적성검사는 각 나라어로 번역되어 있어 프랑스어를 몰라도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

    가장 까다로운 게 정밀신체검사다. 우리 병무청 신체검사보다 훨씬 정밀하고 엄격하다. 가령 과거에 뼈가 부러진 곳이 있다면 지금은 완전히 아물었다고 해도 불합격이다. 그렇게 통과한 사람만이 ‘루즈’라고 해서 머리 깎고, 군복 입는 교육연대에 입소할 수 있다. 여기서 6개월 동안 정식 외인부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프랑스 외인부대엔 60∼80명의 한국인이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입소한 40여 명 중 한국인은 혼자였다. 탈북자가 한 명 지원했는데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돌아갔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북한 사람이 1년에 한두 명씩 지원을 한대요. 그런데 입소하고서도 6개월 훈련을 마친 뒤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개방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훈련 내용은 한국 훈련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훈련 강도가 좀더 세긴 하지만 대한민국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것.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서인지 다들 출신국가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요. 저도 한국인이 저 혼자라 제가 못하면 한국이 못하는 게 되니까 나태해질 수가 없었죠. 게다가 한국 특전사 출신이란 게 알려지면서 ‘스페셜 코만도’라는 별명까지 붙었어요. 한국과 특전사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했고, 훈련에서 대부분 1등을 했어요.”

    일본인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던 그였으나 외인부대에서는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힘이 됐다고 한다.

    “한 달 반 정도 유격훈련을 받아요. 매일 통나무를 들고 뛰고, 맨땅을 박박 기는 거죠. 훈련이 끝나고 저녁 먹기 전에 외줄타기, 턱걸이 같은 간단한 게임을 하는데 국가 대항전으로 해요. 거기서 1등을 하면 1주일 동안 맨 먼저 밥을 먹고 식당청소도 열외가 되는 상당한 혜택이 주어져요.

    하루는 벤치프레스를 어느 팀이 더 많이 하나 시합을 했는데, 저와 일본인 두 명이 한팀이 됐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하고 일본 친구들도 기본은 해주어서 우리가 우승했죠. 훈련 교관인 세르종(중사)들이 우리 셋을 무동 태우고 식당까지 갔으니 신이 났죠. 일본 친구들도 ‘아시아의 기(氣)를 세웠다’며 좋아하고.”

    외인부대의 상징 ‘케피 블랑’

    6개월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면 프랑스 4성장군이 직접 ‘케피 블랑(백색 군모)’을 씌워준다. 비로소 정식 외인부대원이 되는 것이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케피 블랑을 쓰면서 사병, 부사관, 장교의 3개 군번을 지닌 드문 경력의 소유자가 됐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부대원이 8000명에서 1만명으로 7개 연대와 1개 특수중대로 구성된다. 훈련이 끝나면 성적 순으로 가고 싶은 연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김씨는 훈련성적은 최고 수준이었지만 프랑스어가 서툴러 그가 원하는 제2공수연대에 갈 수 없었다. 제2공수연대는 훈련이 혹독하기로 악명 높지만 그만큼 자부심도 강해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제 차례가 됐을 때는 이미 정원이 다 찼더라고요. 그래도 ‘제2공수연대가 아니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버텼어요. 결국 제 훈련성적을 높이 평가한 지휘관이 제2공수연대에 갈 수 있게 해줬어요. 제2공수연대는 부대원이 1000여 명인데 한국인이 5∼6명 있어요.”

    그는 코르시카 섬에 있는 제2공수연대 제2전투중대에 배치됐다. 주로 산악작전을 펼치는 부대여서 제2공수연대에서도 훈련이 가장 힘들다는 곳이었다.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김연수의 ‘울트라 철인’ 도전 인생

    프랑스 외인부대 근무시절.



    우리 특전사와 외인부대 공수연대를 비교하면 내무생활 군기는 특전사가 훨씬 세다. 하지만 훈련은 외인부대 공수연대가 더 힘들다고 한다. 유럽 군대이다 보니 훈련이 끝난 이후의 사생활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자기 임무만 마치면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것. 그런데 그 임무라는 게 만만치 않다고 한다.

    “청소, 서류 정리, 옷 다림질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특히 유럽은 전통을 중시해서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와 파티가 많아요. 그때마다 군복을 입어야 하는데 흰색이라 뭐가 조금만 묻어도 다시 빨고 다려야 해요. 옷 한 벌 다리느라 1주일이 금방 가요. 한국군 군복 다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돼요. 한 번 입고 나면 빨고 다려야 하니까 거의 매일 다림질을 하는 셈이죠. 그러다 보면 새벽 1시에 자는 건 보통이에요.”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훈련이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었다고 한다. 한국군의 훈련이 대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검열과 평가 위주의 훈련인 데 비해 외인부대의 훈련은 철저하게 실전(實戰) 중심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은 사격할 때 미리 표적 위치를 알려주고 여기에 몇 발, 저기에 몇 발 쏘라고 하잖아요. 외인부대는 그렇지 않아요. 정글 코만도 훈련을 할 때면 하사관들이 미리 표적을 숨겨놔요. 이동하면서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면 적에게 노출된 것이 되어 낙제점을 받아요. 그리고 휴식 중에 갑자기 훈련용 수류탄이 터지기도 하는데 거기서 나온 하얀 가루가 옷에 묻으면 죽은 걸로 되어 낙제점을 받아요. 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거죠.”

    행군할 때도 한국군은 50분 걷고 10분간 휴식한다. 반면 외인부대는 상황에 따라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걷다가 쉬다가 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행군을 하다 낙오하면 의무대 차량으로 후송되지만 외인부대는 그런 게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스스로 끝까지 목적지에 가게 만든다. 실제 전투상황에서는 그게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외인부대의 모토는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이다.

    “외인부대에는 부대마다 특성에 맞는 특수훈련이 2∼3개씩 있어요. 제2공수연대에서는 BAM(암벽등반 & 클라이밍)과 BSM(산악스키훈련)이 있어요. 그리고 아프리카 가봉에 파견될 때 정글 코만도 훈련을 받아요. 세 가지 모두 4주 훈련과 1주일 평가 테스트로 진행되는데, 30∼40%가 탈락할 정도로 어려운 훈련이에요. 대신 통과하면 자랑스러운 마크를 군복에 달게 되죠.”

    BAM 훈련은 해발 4000m 이상의 알프스 산악 고지대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하면서 암벽등반과 클라이밍의 모든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 종일 암벽을 타는데다 마지막 5주차에는 3박4일 동안 잠도 거의 못 자고 하루에 몇 십km씩 산악 고지대를 이동하는, 한마디로 지옥훈련이라고 한다.

    BSM 훈련은 겨울에 알프스 베이스캠프에서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하면서 스키를 신은 채 산을 오르내리는 산악공수훈련이다. 특히 눈 속에 사람 하나가 겨우 걸어갈 정도로 좁은 길을 3m 정도로 깊게 판 후 그 속에서 선 채로 쪽잠을 자고 다시 훈련을 받는 고된 훈련이 2박3일 동안 이어진다.

    시체 옆에서 자고 밥 먹고…

    그는 실제 전투에도 참가했다. 외인부대는 아프리카 가봉에 베이스캠프를 차려놓고 부대별로 돌아가며 4개월씩 순환근무를 한다. 그러다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발발해 투입요청이 오면 참전한다.

    “내전에 쉽게 끼어들지는 않아요. 내전이 확산될 것으로 판단될 때 개입하죠. 가장 먼저 제2공수연대가 투입되고, 전쟁이 더 커지면 다른 연대가 투입돼요. 프랑스 정부는 그 대가로 석유 등을 받는 거죠.”

    가봉에 있는 동안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곳도 전시지역이다. 병사들이 일과가 끝난 후 이따금씩 베이스캠프를 나와 한국으로 치면 이태원 같은 곳으로 술을 마시러 가는데, 옆을 지나던 민간인이 갑자기 칼로 찌르거나 집단폭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러니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도,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도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의 부대가 가봉에서 철수하기 한 달 전쯤, 코트디부아르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정글에서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데 무전이 오더니 지휘관이 서둘러 병사들을 트럭에 태우고 정신없이 달렸다. 베이스캠프에 들어서자 연병장엔 이미 모든 무기가 정열되어 있었다.

    “지휘관들의 지시에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어요. 총과 탄창, 방탄복과 방탄모자가 지급되고…. 전쟁이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뿐 뭘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 대기하던 중 새벽에 사이렌이 울렸다. 출동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곧바로 헬기에 몸을 실었다. 출동준비를 하고 대기할 때는 짜증이 났는데 출동하니까 흥분됐다.

    코트디부아르에는 두 달 정도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이라크전쟁 상황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게릴라전, 시가전 양상이라 언제 어디서 총알과 포탄이 날아올지 몰랐다. 달리던 차에서 갑자기 퍼붓는 총알을 맞고 뒤통수가 깨져 죽은 병사도 있었다. 김씨 바로 옆에 있던 전우는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팔을 관통했다.

    “길을 가다 보면 발에 차이는 게 시체예요. 머리가 깨진 시체, 내장이 터진 시체…. 행군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일어났는데 옆에 시체가 있었던 적도 많아요. 처음엔 충격이 컸지만, 며칠 지나니까 옆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밥이 넘어가더군요.”

    행군하다 총소리가 나면 본능적으로 대응사격을 했다. 두려움을 느낄 여유도, 뭔가를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스트레스와 긴장만 극에 달해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선 생명의 존엄성을 따질 수 없어요. 시체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고, ‘나도 죽으면 그냥 죽는 거지’ 싶어요. 처음엔 그런 제가 두렵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두려움조차 없어졌습니다.”

    그는 솔직히 자신이 사람을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전투 중에 상대 병사가 자신이 쏜 총알에 맞아 죽었는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뿐이었다.

    전장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기에 회의는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내전에 참가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이젠 경찰 특공대다!

    외인부대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언어 문제라고 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아 어이없는 일을 당하기도 하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한다.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는 동양인을 상대로 장난치고 이용하곤 하죠. 저도 많이 당했어요. 훈련하다 잘못되면 제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거예요. 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설령 눈치로 뭔가 억울한 상태라는 걸 느껴도 프랑스어를 못하니까 해명할 수도 없고요. 결국 저 혼자 연병장 돌고, 화장실 청소하고 그랬죠. 훈련소에서는 물론이고 자대 배치를 받고서도 처음엔 그랬어요.”

    특히 러시아 후배 하나가 그를 자주 괴롭혔다고 한다.

    “참다 참다 하루는 그 친구를 내무반으로 부른 후 문을 잠가놓고 반쯤 죽여놓았죠.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나오니까 지휘관들도 모른 척해주더라고요. 워낙 거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싸움이 잦은데다, 특히 동양인들은 언어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다는 걸 아니까 웬만한 싸움은 눈감아줍니다.”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고 전우애가 쌓이지 않아 이런저런 문제로 티격태격하지만, 같이 훈련을 받으며 뒹굴고 총알이 쏟아지는 전투를 치르다 보면 ‘우리는 외인부대’라는 끈끈한 정이 쌓인다고 한다. 그래서 전역한 후에도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서로 연락하며 우정을 나눈다.

    외인부대는 처음 입소할 때 얼마 동안 근무할지를 정한다. 6개월 훈련만 마치고 돌아갈 수도 있고 3년이나 5년 근무를 선택할 수 있다. 5년 이상 복무하면 프랑스 영주권을 주기 때문에 대부분 5년 근무를 희망한다. 15년 이상 근무하면 연금이 나온다. 하지만 김씨는 2년 만에 전역을 신청했다. 들어올 때부터 이미 다음 목표로 경찰특공대를 지원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 인생 계획은 서른 살까지 모험을 하고 그후엔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예요. 특전사도, 외인부대도, 익스트림 스포츠도 다 모험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죠. 제 적성에도 맞고 생활인으로 살기에도 좋은 게 경찰특공대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저는 2년 만에 외인부대에서 받을 힘든 훈련은 다 받았어요. 전투에도 참가했고요. 그래서 영주권을 따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 한국에 돌아가 경찰특공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2005년 초로 예정된 경찰특공대 특채시험을 보기 위해 2004년 가을 귀국했다. 그런데 그 해 시험이 취소되는 바람에 1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이번에 떨어지면 내년에 또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3극점 탐험, 마라톤 그랜드 슬램

    “특전사가 국가를 위해 일하는 곳이고, 외인부대가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곳이라면 대(對)테러 업무가 주임무인 경찰특공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곳이잖아요. 제게 꼭 맞는 직업이라고 믿어요.”

    고등학교 때 방황하던 그에게 한 교사가 “너는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보라’는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그는 “경찰특공대에 들어가 여자 경찰특공대원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50대 이후에 다시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가 50대 이후에 할 모험은 두 가지다. 3극점(에베레스트, 남극, 북극) 탐험과 극한 마라톤 그랜드 슬램(사하라 사막 마라톤, 중국 고비 사막 마라톤, 칠레 아타카마 고원 마라톤, 남극 마라톤)이 그것.

    “보통사람은 돈을 퍼다주며 당신처럼 살라고 해도 못 살 것 같다”고 하자 김씨는 외인부대 모병소 현관에 붙어 있다는 문구를 알려주었다.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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