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요동치는 국제원자력체제, 한국의 딜레마

외면하면 기술지체, 섣불리 수용하면 원자력수출 낭패

  • 황주호 경희대 교수·원자력공학 joohowhang@khu.ac.kr

    입력2006-03-28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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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치는 국제원자력체제, 한국의 딜레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3월1일 인도 뉴델리 공항에서 만모한 싱 인도 총리를 만나고 있다. 이 방문을 통해 미국과 인도는 민수용 원자력협력협정을 완결지었다.

    3월2일 부시 미 대통령이 인도와 맺은 원자력협력협정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인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고 1974년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이후 원자력기술 이전 금지 등 각종 제재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미국이 인도를 인정하고 원자력협력을 시작하겠다는 것은, 이란이나 북한과 비교할 때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 주요한 쟁점이다.

    이러한 이중잣대를 사용하는 미국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약소국 처지에서는 당연한 측면이 있다. 억울할 수밖에 없다. 반면 생각해보면, NPT체제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이란과 북한이 핵개발을 시도하기 이전부터 제기돼왔다. 미국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NPT체제를 더 강화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와 관계를 개선하려는 방안으로 원자력협력을 들고 나선 것이 아닌가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미국이 꿈꾸는 더 강화된 NPT체제’의 정체다. NPT를 바탕으로 출범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세월 동안 핵사찰 제도를 꾸준히 강화해왔지만, 국제기구가 언제까지나 각국의 농축시도와 원자력발전,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무한정 막고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십수년 전부터 사용후핵연료를 국제적인 관리하에 두자는 제안이 나왔고, 최근에는 IAEA 본부에서 타당성 연구도 진행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기존의 농축과 재처리시설 외에 더는 시설을 건설하지 말자”고 제안하고, 미국 또한 유사한 안(案)으로 화답했다. 러시아는 이란에 대해 농축 서비스를 해줄 테니 농축공장 건설을 중단하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2월6일 미국이 발표한 ‘국제원자력 제휴(Global Nuclear Energy Partnership·GNEP)’ 계획은 이런 맥락에서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핵무기를 가진 다섯 나라와 일본이 파트너가 되어, 농축 재처리와 관련된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 조건으로 개발도상국에 적정한 가격의 원자력발전용 연료를 임대 공급하겠다는 것이 GNEP의 골자다. 사용후핵연료를 회수해 대신 처리해주는 방안이나, 소규모 원자력발전을 원하는 나라에는 10~15년간 연료교체가 필요 없는 원자로를 임대해 준 뒤 나중에 원자로를 통째로 회수하는 식의 구상도 포함돼 있다. GNEP와 관련해 새뮤얼 보드먼 미 에너지부 장관은 2007년 예산으로 2억5000만달러를 요구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 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많은 정치적·기술적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GNEP를 발표하기에 앞서 미국은 일부 해당국과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미국은 한국이 농축이나 재처리기술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고 이 계획에 필요한 일부 기술분야에서 미국과 장기간 협력해온 점을 들어 GNEP에 포함시키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1990년대에 원자력발전소와 핵연료 설계기술을 독자적으로 수립해 국내 원자력발전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해외수출을 바라보고 관련연구를 추진해왔다. 그런 까닭에 미국이 GNEP 계획을 발표하리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국내에서는 이에 참여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이를 잘 활용하면 한국에 득이 된다는 의견, 미국과 강대국들의 일이니 한국과는 상관없다는 견해, 이 계획에 동승하지 못하면 원자력 수출은 물론 앞으로 원자력을 이용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주장 등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GNEP에 거는 미국의 기대는 어떤 것이고, 유일한 자립 에너지인 원자력 주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이 선택해야 할 카드는 무엇인가.

    비상 걸린 에너지 확보 경쟁

    미국 에너지부는 전세계 유수의 에너지 관련 분석보고서를 참조해 해마다 전망보고서를 발간한다.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25년 사이에 에너지 소비는 60% 가까이 증가하고 증가량의 3분의 2가량은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소요된다. 일부에서는 2050년까지 에너지 소비가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언론에 등장하는 각국 정상들의 외교는 대부분 에너지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동중국해(海)와 사할린 가스전(田)을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갈등은 이미 신경전 수준을 넘어섰다. 대통령이 외국을 순방할 때마다 에너지협력이 주요 의제로 등장하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으며, 불공평하게도 지역적으로 편중해 존재한다. 즉 공간적으로 확보에 어려움이 있고, 양은 제한적이며, 시간적으로 빨리 수송할 수 있어야 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기 땅의 에너지원(源)도 지킬 수 없는 형국이다. 현재의 주요 에너지원인 석유가 묻혀 있는 중동은 힘있는 나라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는 가스는 러시아가 최대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으나, 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공급중단 사태를 보면서 러시아 가스를 공급받는 유럽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2006년 연두교서에서 “미국이 석유에 중독되어 있으며, 특히 중동 석유에 목을 매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신(新)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한편 1980~90년대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중단키로 하거나 발전소 폐쇄를 결정한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에서는 건설 재개를 주장하거나 추가로 발전소를 폐쇄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과반수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일에서는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연합(CDU) 소속인 헤세 주 지사가 “독일의 단계적 원자력발전소 폐쇄결정은 어떠한 이점도 없고 경쟁력 손실만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간 대세를 이루던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 대신 각국이 앞다퉈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자력의 어떤 특징이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국제 에너지 사정이나 정세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화석연료가 산화반응으로 미약한 에너지만 발생시키는 데 반해, 원자력은 조그만 양의 연료가 핵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한 가정이 1년에 필요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는 데 연필 굵기만한 연료 1cm만 있으면 충분하다. 석탄, 석유, 가스 등은 저장하는 데 엄청난 공간이 필요하지만, 우라늄은 10층 높이 건물만큼만 있으면 한국이 보유한 원자로 20기를 500년가량 가동할 수 있다.

    또한 우라늄 가격은 미국과 러시아가 핵탄두를 해체해 핵연료로 공급하는 2013년까지는 안정세를 유지하리라는 예측이 일반적이다. 캐나다, 미국, 호주, 아프리카 일부, 카자흐스탄 등 전세계에 분포해 지역적 편중성이 작다는 것도 강점이다. 다만 원자력을 이용하기 위한 연료설계와 제조, 원자로 건설과 운영, 안전운전 등에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아무 나라나 원한다고 쉽게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미래에도 원자력이 전기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내외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소비의 절대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므로 2025년경 원자력발전소는 현재의 430여기보다 60~80기가 증가하고, 2050년경에는 최대 400여 기가 늘어 총 1000기에 달하는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성장이 두드러진 중국과 인도는 2030년까지 30~40기의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도 원자력발전소 도입 시점을 2020년경으로 맞추는 등 원자력이 동아시아에서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일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는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 비율을 현재의 16%에서 25%로 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위해 700억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일본도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 비율을 약 4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현재 중국, 인도, 일본,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야심찬 계획을 들여다보면 2030년경 또는 이후에 이들 국가가 도입하고자 하는 원자로 형태는 현재의 경수로가 아닌 고속로임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미국, 일본이 2020년대에 상용 고속로의 실증을 계획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우랄 지역에 BN-800 고속로를 건설하기 위해 2006년 예산을 배정했다.

    문제는 사용후핵연료

    이렇게만 보면 원자력의 득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세계적인 원자력 강화 추세에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다. 바로 방사성폐기물의 처리 문제다.

    요동치는 국제원자력체제, 한국의 딜레마
    원자력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처리·처분할 방법을 강구해놓고 있지만, 사용후핵연료의 처리와 처분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각국이 처한 딜레마다. 2000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23만t에 달하는 사용후핵연료는 2020년이면 46만t으로 2배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원자력발전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2030년 이후에는 사용후핵연료도 비례해 증가할 것이므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사용후핵연료는, 잘 타는 우라늄(U235)을 농축해 금속튜브에 넣어 다발로 만든 상태로 원자로에 넣어 약 3년간 태운 후 원자로에서 빼낸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속에는 타다 남은 우라늄과 새롭게 태울 수 있는 플루토늄이 생성돼 있다. 대략 발전소 1기당 1년에 약 50다발(약 25t)씩 배출되며 높은 열과 방사능을 식히기 위해 일단 발전소 수조 속에서 보관한다. 사용후핵연료는 우라늄 가격이 비쌀 경우에는 재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지만 우라늄 공급에 문제가 없다면 골치 아픈 쓰레기일 뿐이다.

    사용후핵연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골치 아픈 존재다. 우선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은 원자력발전소나 연구용 원자로를 가진 약소국이 사용후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꺼내 폭탄을 만들까 노심초사한다. IAEA를 통해 사찰하지만 이란과 북한처럼 농축과 재처리를 강행할 때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그래서 GNEP계획처럼 강대국들끼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까지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용후핵연료 속에는 300년 후면 능력이 소멸되는 물질과 10만년이 지나야 소멸되는 물질, 타다 남은 우라늄이 뒤섞여 있다. 일반적인 재처리를 통해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꺼내 다시 태우면 연료 재활용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지만, 그래도 10만년이 지나야 능력이 소멸되는 물질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 40년간 미국과 유럽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와 지각활동을 감안, 지질학적 지식을 동원해 사용후핵연료를 인간생활권으로부터 수십만년 동안 격리할 수 있는지 연구해왔고, 그 결과 지층 깊숙한 곳에 매립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따라 사용후핵연료나 고준위폐기물은 심지층에 처분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개념이 됐다. 그러나 문제는 예상보다 복잡했다.

    유카산 처분장의 고민

    미국은 핵폐기물정책법을 제정한 지 20년 만인 2002년, 네바다 주 유카산을 사용후핵연료와 군사용 고준위폐기물의 처분장으로 결정했다. 2012년 운영 개시를 목표로 2005년 말까지 건설 인허가를 신청하려던 미 에너지부는 돌연 인허가계획을 중단하고 다른 방향을 모색한다. 관련법에 따라 2007년까지 새로운 처분장 계획을 내놓아야 했던 미국 정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비율로 원자력발전을 유지하려면 2100년경에는 유카산 규모의 처분장이 20개나 필요하다는 계산이 그것이다. 미국이 의욕적으로 발표한 GNEP에는 바로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은 원자력법에 따라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한 고준위폐기물만을 처분대상으로 본다. 1980~90년대에는 일부 사용후핵연료를 해외에서 재처리했지만, 1980년대 중반 약 25조원을 투자해 건설한 로카쇼무라 재처리공장이 2006년 준공됨에 따라 연 800t을 국내에서 재처리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은 사용후핵연료를 연 1500t 가량 발생시키고 있으므로 벌써 제2 재처리공장이 필요한 상태다.

    2000년에는 재처리 후 발생하는 고준위폐기물을 처분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 2030년 처분장 운영을 목표로 삼고 조직, 제도, 재원마련 및 관리방안을 정비하여 후보부지를 공모하고 있다. 일본이 재처리를 한다고 해도 고준위폐기물 발생량은 계속 누적되므로 제2, 제3의 처분장을 준비해야 한다. 결국 미국과 같은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경우 당초에는 재처리 후 고준위폐기물을 처분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으나, 1980년대 말 고준위폐기물 처분장 후보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큰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1990년 ‘바타이유법’을 제정한 이래 15년 동안 사용후핵연료 직접처분, 재처리 후 고준위폐기물 처분, 반감기(半減期)가 긴 핵물질을 변환해 중저준위 수준으로 만들어(장수명 핵종변환) 처분하는 방안 등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연구해왔다. 애초에는 2006년에 사용후핵연료 처리방안을 결정하기로 했지만, 국방용 원자력을 운영하는 프랑스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 세 가지 방안을 모두 순차적으로 채택해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사실상 ‘wait and see’를 사용후핵연료 처리·처분방안의 기조로 삼아왔다. 여건이 되면 재처리도 고려할 수 있다는 다소 미온적인 정책이다. 원자력법에 따르면 과학기술부와 산자부 장관이 합의해 사용후핵연료 처리·처분방안을 마련하도록 돼 있어 두 부처가 모두 만족할 만한 동기부여가 필수적이다. 현재 원자력발전소 수조에 저장 중인 사용후핵연료는 2016년 경에 저장용량이 포화될 것으로 보여 후속조치 마련이 시급한 현실이고, 장기적으로는 누적량이 2050년경 9만t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도 미국이 고민하는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경수로는 가고, 고속로가 온다

    앞서 미국이 발표한 GNEP의 목적을 주로 핵 비확산 측면에서 설명했다. GNEP에는 이러한 대외적인 측면 외에, 미국이 원자력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데 있어 결정적 장애물인 사용후핵연료 누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즉 미국은 1970년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금지한 이후 유지해온 정책방향을 30년 만에 바꾸려는 것이다.

    GNEP 계획에 포함된 ‘선진핵연료주기계획(Advanced Fuel Cycle Initiative·AFCI)’은 사용후핵연료에 포함된 우라늄과 고방사능 물질을 분리추출하고, 나머지 독성이 강한 물질은 핵연료로 만들어 태워버리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인 사용후핵연료 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다. 다시 말해 이 기술을 통해 사용후핵연료를 처리하면 그 부피와 독성을 저감시킬 수 있어서, 2100년까지 미국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용후핵연료를 유카산에 마련한 처분장에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도되다가 미국의 재처리계획이 중단되면서 축소 수행돼온 것들로서 그 중요시설(EBR-II)이 아이다호 주에 있는 국립연구소(INEL)에 마련돼 있다. 본격적으로 추진하면 실증(2011년)과 상용화에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기술은 고독성 물질을 연소하는 것인데, 이는 고속중성자를 이용하는 원자로, 즉 고속로가 담당한다. 고속로 기술은 1951년 미국의 EBR-Ⅰ이 세계 최초로 원자력발전에 성공하면서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개발해왔다. 이후 원자력발전에 경수로가 도입되고 우라늄 가격이 안정됨에 따라 경쟁력을 잃었으나, 일본과 프랑스에서는 미래의 원자력기술로 보고 계속 개발해왔다.

    고속로는 원래 타지 않는 우라늄(U238)을 원자로 내에서 잘 타는 물질인 플루토늄으로 바꾼다고 해서 ‘고속증식로’라고 한다. ‘증식’은 타서 없어지는 것보다 새로운 만드는 물질의 양이 더 많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핵 비확산의 관점에서 보면 전세계에 플루토늄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므로 좋은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고속로는 설계에 따라 증식이 아니라 연소만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AFCI에서 요구하는 고속로는 증식로가 아니라 연소로다. 연소는 새로운 연료물질을 만들어내지는 않지만 독성이 강한 물질을 연료로 태우면서 나오는 열로 발전도 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일본의 발 빠른 움직임

    전세계에서 이제까지 23기의 고속로를 건설, 운전했고 5기가 계획 중이다. 일본이 고속로에 투입한 비용은 관련기술까지 포함해 약 28조원으로 이미 원형로 ‘조요’와 실증로 ‘몬주’를 갖고 있으며, 이제까지의 결함을 개선한 새로운 고속로 개념설계를 끝내고 실증로 건설 준비를 마쳤다. 프랑스 또한 원형로 ‘피닉스’, 실증로 ‘슈퍼 피닉스’에 이어 2020년경에 4세대 개념의 고속로를 건설하겠다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밝힌 바 있다.

    미국은 GNEP 계획에 더해 2014년에 연소를 위한 실험로를, 2023년까지 100만kw급 모듈형 상용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이 비중 있게 검토해온 고속로의 형태는 소듐냉각로(Sodium-cooled Fast Reactor·SFR)인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은 민주당 소속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추진 중이던 고속로 계획을 철회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민주당으로 교체되면 이 계획이 백지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고속로 계획이 클린턴 행정부 후반부에 구상한 ‘4세대 원자력발전시스템(Generation-IV Nuclear Generation System·GEN-IV)’ 개발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전망은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 또한 GNEP가 제안한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비전은 정권을 떠나 궁극적으로 미국이 필요로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획기적인 대안이 없는 한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든 바꾸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세대 원자력발전시스템 개발계획은 4세대 국제포럼(Gen-IV International Forum·GIF)으로 발전했으며 안전성, 경제성, 핵 비확산성, 폐기물 최소화를 미래 원자력 시스템의 요구조건으로 놓고, 2030년을 목표로 다양한 원자로 개념을 공모하여 가장 가능성이 있는 여섯 종류를 공동 연구한다. 2000년 설립 후 미국, 일본, 프랑스, 우리나라 등 9개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장기간의 기술 로드맵 개발을 마치고 2005년에 국가간 협정을 맺은 바 있다.

    2006년 2월에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이 소듐을 사용하는 고속로 개발에 대한 시스템 약정을 맺었으나, 한국은 이 약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은 4세대 원전 시스템 개발계획에서 개발하는 신기술이 GNEP를 구현하는 데 직접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한국은 이 약정에 대한 태도를 너무 늦지 않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GNEP는 핵연료 공급국 이외의 국가는 농축과 재처리를 못하게 하고 대신 공급국이 핵연료를 임대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한국에 골치 아픈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므로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오산이다. 앞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당장 지금까지 누적된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해결할 길이 없다. 핵연료를 공급국 카르텔에서 사와야 한다면 우리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고 멈추는 것도 그들 손에 달려 있게 된다.

    수출을 생각하면 더욱 난감해진다. 예를 들어 동남아 어느 나라가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데 한국이 입찰에 나섰다고 하자. 공급국에서는 원자로와 핵연료를 일괄 제시할 수 있지만, 한국은 원자로를 줄 테니 연료는 따로 알아서 구입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구매자는 당연히 일괄 제시하는 공급국의 발전소를 택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일본은 이미 지난해 후반부터 발빠르게 미국과 GNEP를 놓고 논의해온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일본 도시바는 최근 54억달러의 거금을 주고 미국의 원자로 건설회사 웨스팅하우스를 낙찰받았다. 한국도 미국 주도의 새로운 원자력 체제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깊이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믿을 만한 비전

    2005년 한국의 에너지 수입총액은 667억달러로,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총액(595억달러)보다 많다. 석유 순수입이 358억달러, 석탄이 52억달러, LNG가 87억달러에 이르다 보니, 당장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것 같지는 않다. 반면 원자력발전이 과연 지속성을 갖고 있는지 묻는다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사용후핵연료는 직접 처분하거나 재처리 후 고준위폐기물로 처분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를 확보하는 문제로 20년간 난항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술적으로 안전하다 해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동치는 국제원자력체제, 한국의 딜레마
    黃柱鎬
    ● 1956년 부산 출생
    ●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졸업, 미국 조지아 공대 박사(핵공학)
    ● 원자력연구소 선임연구원, 미국 샌디아 국립연구소 객원연구원
    ● 산업자원부 방폐장부지선정위원회 위원
    ● 現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 논문 : ‘Dismantlement and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of DPRK Nuclear Facilities’ 외


    사용후핵연료를 직접 처분하겠다고 결정한 뒤 20년간 고생해서 겨우 유카산 처분장을 얻었지만, 2100년까지 유카산 규모의 처분장이 20개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 앞에 미국의 정치가들은 난감해 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확보하면서 사용후핵연료 정책에 대한 논의는 공론화를 통해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점치기는 어렵다. 현 정권이 후반기로 들어선 상황이고 보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문제를 누구도 선뜻 책상 위로 올려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간 나라들의 예에서 보면 국민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이 원자력을 계속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사용후핵연료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국민이 믿을 만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루기에는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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