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동-서해 잇는 3大 횡단축 개발해 산업·레저 복합벨트 만들자”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2006-03-29 1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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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2 쿠데타 세력 50억 요구에 “100억이라도 줄 테니 영수증 달라”
    • “전두환 장인 청탁 거절해 괘씸죄 걸렸다”
    • 감옥서 책 3000권 독파, 한겨울 냉수마찰로 몸 다지며 재기 다짐
    • “행정중심복합도시는 태안반도에 세워야”
    • 헬기 타고 다니며 충북 보은군 개발 프로젝트 관여
    • “성산대교부터 임진강 합류 지점까지를 서울 시민 휴식공간으로”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커피숍. 김철호(金澈鎬·68) 명성그룹 회장과 마주앉은 시간이 83분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돌연 “더 이상 인터뷰를 안 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혹스러웠다.

    발단은 ‘수기(手記)통장’에서 비롯됐다. 손으로 썼다는 의미의 수기통장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이 명성그룹을 해체하는 데 이용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있지도 않은” 통장이다. 명성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면 으레 ‘수기통장’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실수였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김 회장의 불쾌감은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 와서 진실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냐”며 역정을 냈다. 그는 기자에게 그때껏 녹음한 인터뷰 내용을 모두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워낙 완강한 태도여서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명성 사건의 진실

    20년 전 사라진 명성그룹의 총수를 만나려고 한 계기는 지난해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도국제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김철호 회장 얘기를 들었다. 송도에 거대한 운하 공사가 시작되는데, 김 회장이 안상수 인천시장에게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는 것. 그의 ‘운하 건설론’이 재미있었다.

    “과거 한국은 육지에서 바다(세계)로 나가야 했지만, 미래에는 세계인이 바다에서 육지(한국)로 들어온다. 그 시대를 준비하려면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운하가 필요하다.”



    이 한마디에 안 시장은 그날로 운하 공사를 지시했다.

    그뒤 김 회장에 대해 취재해보니 세상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전남도청, 강원도 동해시 등의 지방자치단체는 지역개발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를 강사로 초빙했고, 충북 보은군수는 그를 헬기에 태워 120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보여주며 개발계획을 의뢰했다. 기업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설교통부와 청와대 실무자들도 그를 만나 의견을 경청했다. 유승권 도시마케팅 사장이 운영하는 ‘도시마케팅포럼’은 그를 회장으로 추대, 그가 지금껏 닦아온 국토 개발 노하우를 활용할 방안을 찾고 있다. 마치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처럼 바빠졌기에 김 회장은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어떤 얘기를 하고 다니기에 아직도 그의 입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1년여를 끌면서 겨우 마주한 자리는 그렇게 엉망이 됐고,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한 달여 후. ‘신동아’ 4월호 마감을 나흘 앞둔 3월11일 오전 8시, 김 회장은 뜻밖에도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다시 약속시간을 잡아줬다. 이틀 뒤인 3월13일 우리는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끝내지 못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인터뷰의 초점은 그가 그리고 있는 미래 한국의 레저산업에 맞춰졌지만, 명성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자리마저 망칠 수 없어 기자는 아무 말 없이 4쪽짜리 기사를 그에게 건넸다. 정치 분야의 인터넷 논객으로 잘 알려진 독고탁씨가 정리한 명성 사건의 진실에 관한 글이었다. 지난해 ‘5공화국’이란 TV 드라마에 명성 사건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실체를 파악하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한 독고탁씨가 취재해 쓴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글을 읽은 뒤 김 회장은 “이것이 명성 사건의 실체이자 진실”이라고 확인했다. 다음은 필자의 동의를 얻어 간추린 주요 내용이다.

    세 가지 ‘괘씸죄’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1983년 명성그룹이 해체될 때 언론은 김철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씨를 이용해 각종 이권 사업에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취재한 결과) 사실은 달랐다.

    이규동씨측에서 사람을 넣어 명성그룹과 이씨를 연결했고, 이씨는 명성컨트리클럽을 자주 왕래하며 (김 회장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김 회장에게 이씨 소유의 땅 25만평을 명성에서 고가로 매입해주거나, 아니면 명성컨트리클럽 같은 골프장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김 회장은 골프장 개발 전문 인력을 투입해 조사한 결과 골프장으론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냈다. 이에 25만평을 당장 고가로 매입할 수 없다는 점을 이씨측에 완곡하게 전달했으나, 이게 ‘괘씸죄 1호’로 찍히는 계기가 된다.

    그후 12·12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사가 김 회장을 찾아와 정치후원금 50억원을 요청한다. 그 자리에서 김 회장은 “50억원이든 100억원이든 줄 테니 회계처리할 수 있도록 영수증을 달라”고 요청한다. 며칠 뒤 높은 곳에서 전화가 왔다. “없던 일로 하자”는 것. 이게 ‘괘씸죄 2호’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국세청 직원을 대거 투입해 명성을 세무사찰한다. 당시 명성은 양평 올림픽레저타운 540만평, 설악 레저타운 110만평, 용인 컨트리클럽 70만평 등 제주에서 설악에 이르기까지 관광명소 15군데와 해양관광시대를 겨냥해 동해안 화진포, 속초, 울릉도, 남해 한려수도, 부산 수영만, 통영, 여수, 거문도, 흑일도, 서해 무창포, 천리포, 남양 등의 레저타운 부지 2000만평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세청의 세무사찰 결과, 명성 보유 부동산의 미래 가치만 공인해준 꼴이 됐고 결국 ‘세금 탈루 추징금 17억원 징수 처벌’로 결론짓는다. 1차 세무사찰이었다. 이후 1년에 걸쳐 안기부와 보안대 요원의 감시와 공작이 이어지고 제1금융권과 거래가 힘들어지자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담보로 제2금융권과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리고 이를 횡령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1993년 12월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과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가 공동으로 조사한 ‘명성사건 조사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선 국세청 조사결과 사채가 김철호 ‘개인계좌’로 입금됐고, 그를 과세 대상자로 지목했다는 부분. 이를 바탕으로 법원은 그를 횡령죄로 판결했다. 그러나 시민연합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채자금이 수수된 은행계좌는 명성그룹 산하 각 법인의 은행 거래계좌가 확실했고, 그 계좌를 통해 정상적으로 수익금과 거래대금이 입출금됐다. 보고서는 “국세청이 법인계좌와 개인계좌를 혼동한 것은 자연인과 법인격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체계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법인체의 대표이사가 법인체의 계좌에서 법인체에 소요될 자금을 출금하는 행위가 어째서 횡령이 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4대 일간지에 ‘강호 제현께…’ 광고

    또 하나 납득할 수 없는 사실.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의 김 대리가 개인적으로 ‘수기통장’을 통해 돈을 모아 그 스스로 사채 운용을 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 당시 김 회장은 “그것은 김 대리 개인의 비리이지 명성과는 상관없다”며 사채업자 박기서와 김 대리의 대질신문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채업자 박기서는 그가 보관한 부동산권리증서, 주식 등 사채 담보물을 김 대리에게 맡기고 급하게 해외로 출국, 조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연히 검찰이 출국 정지시켰어야 할 인물을 버젓이 해외로 나가도록 했다는 것은 명성 사건의 또 다른 진실이다.

    김철호 회장은 2개월 동안 24시간 감시당하는 절박한 상황과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각종 탄압,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다 못해 1983년 7월31일자 4대 일간지에 ‘강호 제현께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낸다. 명성그룹을 해체하려는 전두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인데, 이것이 ‘괘씸죄 완결판’이다.

    김 회장이 구속되고 2주가 지나도 명성그룹 계열사들이 부도가 나지 않자 청와대는 극도로 당황한다. 회사 중역들을 검찰로 불러 부도를 내도록 강요했다. 김 회장의 부인을 체포영장 없이 2주간 불법감금, ‘자식들을 생각해 부도처리하도록 남편을 설득하라’고 다그쳤다. 국보위 악법으로 만들어진 회사정리법을 명성사건 처리과정에서 개정까지 해가며 명성주식 98%를 완전 소각시키고도 법원이 ‘법정관리개시결정’을 못하자 부채를 재산의 두 배가 되도록 조작했다.

    그가 키운 명성은 주인을 잃은 채 한화로 넘어갔고, 한화콘도로 이름을 바꾼 뒤 오늘에 이른다.

    김 회장은 17년2개월형을 선고받고, 9년7개월간 복역했다. 그는 재기하기 위해 감옥에서 새벽 3∼4시까지 책을 읽었고, 한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그가 감옥에서 읽었다는 책은 3000권. 감옥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두바이를 보라

    1995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김 회장은 태백산 일대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고, 대한생명을 인수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놓기도 했다. 모두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한 번 날개가 꺾인 그에게 재기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인터뷰 제의를 한사코 거절한 것도 “뭔가 이뤄놓고 나서 말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의 관광레저산업을 이끌 미래 인재를 위해 조언해달라는 기자의 설득에 김 회장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최근 한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레저관광 산업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많지만 정부의 뚜렷한 방향 제시도 없고, 기업들도 엉거주춤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정부가 1970∼80년대에 유행한 국토 개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기업도 마찬가집니다. 전자나 자동차, 철강산업은 세계 시장을 보고 경쟁했어요. 그러나 레저업계는 세계 시장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고, 수요마저 국내 시장으로 한정하고 있어요.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말이죠.

    중동의 두바이를 보세요. 사막을 갖고 있어도 싱가포르 같은 관광물류 중심도시를 꿈꾸며 과감하게 투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20∼30년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지금쯤 한국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개발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문제지만, 현재 시중의 유동자금이 400조원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돈을 부동산 개발로 끌어들이면 됩니다. 그러자면 부동산 투자의 개념을 바꿔야죠.

    사실 땅이나 아파트를 사서 5년 이상 묵혀놓으면 몇 배가 오른다는 것이 부동산 투자의 전부였잖아요. 이젠 국내외 관광객이 즐길 만한 복합레저도시를 세우고, 여기에 투자할 수 있도록 400조원의 물꼬를 터주자는 거죠. 그렇게 하면 전자산업보다 더 많은 국부(國富)를 창출할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결단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우린 그동안 머뭇거리기만 했어요.”

    -관광레저도시로 개발하면 좋을 곳은 어디라고 봅니까.

    “이미 조성돼 있는 곳이 많아요. 예를 들면 경기도 시화호를 중심으로 제부도와 대부도,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충남 서산간척지, 그리고 전북 새만금은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면 국부 창출에 기여할 수 있어요. 대부도와 제부도는 3000만평에 달하고, 서산간척지는 4650만평이나 됩니다. 새만금은 담수호를 빼고 8000만평을 만들겠다고 정부가 발표했는데, 더 이상 갯벌을 막지 않아도 3000만평은 당장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국과 인도가 부상하는 대륙시대에 서해안 일대의 개발은 꼭 필요해요.”

    농토는 외국에서 구할 수도

    -레저산업의 관점에서 중국의 부상(浮上)은 한국에 기회일 것 같습니다. 수많은 중국 관광객을 유인하려면 서해안 개발은 필수겠죠.

    “중국의 발전 경로를 보면 1980년대 홍콩에서 1990년대는 푸둥, 2000년대는 산둥과 랴오둥반도, 보하이(渤海)만 쪽으로 옮겨가고 있어요. 이쪽과 마주보는 서해안 지역을 개발해야 합니다. 중국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춰야죠.”

    -새만금 간척지 개발의 경우 시민의 반대가 심합니다.

    “나도 갯벌을 막는 것은 반대합니다. 1998년으로 기억하는데요. 새만금 간척지를 14km쯤 막았을 때 당시 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을 찾아갔어요. 진 장관은 내가 무슨 사업을 부탁하러 온 줄 알았지만, 나는 새만금 얘기를 꺼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진 장관에게 ‘공사를 중단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진 장관이 ‘그럼 대안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요. 그래서 ‘중단하면 대안이 있습니다. 군산 공업단지와 연계된 물류, 산업, 해양관광을 아우르는 복합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때 감사원도 농토로 만들려면 10조원 이상이 들어가야 한다는 보고서를 낸 시점이었죠. 그랬더니 진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께 보고하겠다고 그러더군요. 결국 그 보고는 무산된 것 같아요.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잖아요.”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원래 새만금은 농토를 확장하기 위한 공사였습니다. 복합도시가 목적이 아니었는데요.

    “이젠 농토의 개념을 국내에 한정할 까닭이 없어요. 필요하면 동남아나 중국 땅을 사면 됩니다. 동남아에서 1억평쯤 확보하면 새만금 전체를 막아 얻는 땅보다 넓죠. 갯벌을 막아서 농토를 확장한다는 계획은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아요. 차라리 그곳에 바이오, IT, 우주산업이 들어갈 수 있는 복합도시를 만드는 게 좋습니다. 농토를 만들기 위해 5조원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과 산업도시를 만들기 위해 5조원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미래를 생각했을 때 달라요. 국가 발전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지역적이면서 세계적인

    -시화호 인근의 대부도와 제부도는 어떻게 개발하면 좋을까요.

    “근래 제부도와 대부도에 가보니까 철탑이 빼곡히 들어서 있더군요. 철탑의 전기선로는 해저에 충분히 설치할 수 있는데, 산야를 망쳐놨어요. 서울을 포함한 중부권에 2000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을 이들의 휴식공간으로 개발하겠다고 구상했으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레저타운’이나 ‘리조트’라 하지 않고, 계속 ‘복합도시’라고 하시는군요.

    “1990년대 중반에 태백산 일대 2730만평을 개발하겠다고 하면서 이름을 ‘고원관광휴양도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시 지자체에선 ‘왜 도시라는 단어를 쓰느냐’고 물었어요. ‘앞으로 레저지구는 자족도시가 돼야 한다’고 답해줬습니다. 지난해 기업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설교통부와 청와대 실무자들에게도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다양한 기능이 복합적으로 어울리는 도시를 창조해야 한다’고.

    내가 1982년 양평에 540만평의 올림픽 레저타운을 개발하려 했을 때 그 도시에 12가지 기능을 넣었어요. 콘도, 호텔은 물론이고 슬로프 24면 스키장, 72홀 골프장, 디즈니랜드 같은 놀이시설, 50만평의 종합병원도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병원은 청정지역이니까 예방의학 측면에서도 각광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어요. 또 7만8000평에는 지금 서울 삼성동의 코엑스(종합전시장) 같은 쇼핑몰을 구상했어요.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이 여기서 전시되고, 도소매가 이뤄지고, 수출계약이 바로 이뤄지는 곳이죠.

    그러던 차에 미국 디즈니랜드 임원들이 명성을 방문했어요. 일본 도쿄에 디즈니랜드를 만든 뒤 한국에도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찾은 거죠. 8시간을 함께 회의하면서 내가 구상하는 양평 종합도시 계획을 말해줬어요. 그랬더니 왜 병원을 짓느냐고 궁금해하더군요. 실제로 병원을 설계한 독일의 호스피타리아 그룹도 처음엔 깜짝 놀랐거든요. 자기네들도 5만평 부지의 프랑스 병원을 지은 게 최대였는데, 50만평에 병원을 짓는 건 처음이라고요. 디즈니랜드 임원들에게 ‘놀이기능만으론 단조롭다, 병원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도 환상의 세계를 그리면서 돈을 버는데, 우리보다 더한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웃더군요. 그때 병원은 치료뿐 아니라 실버타운의 목적도 있었어요.”

    -지금 한창 뜨고 있는 실버타운을 그때부터 구상한 것이군요.

    “지금의 실버타운은 개념이 잘못됐어요. 한국의 실버타운은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함께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손자는 스키 타고, 아버지는 골프 치고,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사는 타운으로 가서 만나는 것이죠. 할아버지를 의무적으로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니라 놀러가는 곳이죠.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과 정서가 달라요. 그쪽은 혼자서 조용히 책 읽으면서 노후를 보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 유배됐다고 생각해요.”

    취미가 ‘국토 순례’

    -지자체마다 지역을 개발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내놓고 있습니다. 여러 지자체 공무원을 상대로 강연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떤 방향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역적 특색을 갖추면서도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겠다는 계획과 확신이 서야 합니다. 충북 보은군을 예로 들어볼게요. 지난해 보은군수께서 ‘입지를 충분히 검토하라’며 나를 헬기에 태워 120만평의 토지를 보여줬어요. 실무진과 검토한 결과, 보은을 휴양도시로 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보은’ 하면 속리산이고, 산에는 큰 사찰이 많아요. 정적인 느낌이 들죠. 휴양도시는 정적이면서 편안함을 줘야 합니다. 고찰(古刹)은 마음에 평온을 줘요. 여기에 걸맞게 가야죠. 게다가 소나무가 유명해요. 솔향기는 치료에 좋다고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쿠바식 유기농법으로 향내 나는 식물을 심기로 했어요. 청정지역에서 재배하면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습니다.”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그룹 해체 전, 설악 명성콘도 기공식에 참석한 김철호 회장 부부.

    -지역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내가 늘 강조하는 것이 국내용으로 개발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계인이 와서 놀래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민족은 분명히 그럴 자질이 있어요. 유럽이나 미국 관광객에게 사찰이나 서원을 구경시키면 ‘이럴 수가 없다, 산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불국사 대웅전에 올라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축대가 쌓여 있는데, 양옆에 석주를 세워놨어요. 축대와 가파른 계단이 주는 엄청난 중압감을 석주가 상쇄해줍니다. 인간을 배려한 것이죠. 경남 양산의 통도사에 들어가려면 4km를 걸어가야 하는데, 중간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고 길옆으로는 진달래가 피어 있어요. 이건 사람을 유인하는 거죠. 우리 조상은 놀라운 심미안이 있었어요. 선인들의 솜씨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언제부터 전국을 유람했습니까.

    “내가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1기 출신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공학 수업 마치면 고고학 수업을 듣기 위해 경희대로 뛰어가기도 했고, 오페라와 연극 보는 시간을 벌려고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웠어요. 대학 1학년 때부터 주말이나 방학 때면 국토를 순례했어요. 그때 역사 공부에 흠뻑 빠졌는데, 역사에 나오는 현장을 찾아가보는 게 취미였어요. 이것이 나중에 국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레저관광그룹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전국의 명산, 사찰을 둘러보면서 정말 아름답구나, 대단하구나 감탄했어요.”

    여담이지만 그는 뭐든 ‘남들이 하지 않은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서울대 진학을 포기하고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1기로 입학한 것부터가 그렇다. 명성그룹을 경영하던 시절, 명성식품은 국내 최초로 생즙과 스포츠 드링크를 판매했다. 명성전자는 실리콘밸리에 진출해 성공한 황규빈 텔레비디오 회장의 도움을 받아 국내 최초로 컴퓨터를 들여와 시판하기도 했다. 나스닥에 상장해 갑부가 된 황 회장은 김 회장의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동기생이다.

    비무장지대 ‘선토피아 프로젝트’

    -레저관광산업이 낙후하게 된 제도적 결함은 없습니까.

    “건축법에 문제가 있어요. 온천장이든 콘도든 건설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택지를 조성해야 합니다. 불도저로 편평하게 밀어서 축대를 쌓아야 하죠. 그래야 인가를 내주고, 은행이 대출해줍니다. 경사진 곳을 보존하면서 건축하고 싶다고 하면 허가를 내주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보면 명산의 대찰은 전부 불법건물이죠. 법대로만 한다면 산지가 70% 넘는 우리 강토의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개발할 수 없어요. 공장이나 주택을 짓는 것은 가능하지만 관광레저도시는 안 돼요. 국회나 정부가 국토 개발 관련법을 정비해줬으면 좋겠어요. 지자체도 경우에 맞는 조례를 만들어야 하고요.”

    -행정도시 건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균형발전 차원에서 행정도시를 만든다는 데는 찬성합니다. 그러나 연기·공주(2150만평)에 조성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곳보다는 태안반도가 낫습니다. 대륙시대에 내륙으로 들어가기보다 바다를 접한 곳으로 나와야죠. 게다가 태안반도엔 공적자금으로 회생한 현대건설이 4650만평의 서산간척지를 갖고 있어요. 이건 국가 것이나 다름없죠. 거기에 행정도시가 서면 연기·공주보다 두 배 이상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어요. 토지 수용할 필요도 없고, 주민들이 분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어요. 땅 투기 걱정도 없고요. 바다를 끼고 있으니까 해양관광도시로도 개발이 가능합니다. 도시는 생물과 같아서 100년, 200년 계속 생장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런 토대가 구축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서해안 개발 등 해안개발 사업도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해양 관광산업은 어떤 방향으로 개발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서해와 동해를 잇는 횡단 개발이 이뤄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부권의 태안반도를 청도와 문경, 영주와 안동을 거쳐 청해 쪽으로 연결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서해에 놀러온 해외 관광객이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의 문화·음식·생활문화를 맛 볼 수 있고, 청정한 동해도 즐길 수 있어요. 이뿐입니까. 내륙의 지역 특산물이 바다로 연결돼 바로 수출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교류하다 보면 지역 갈등도 완화될 겁니다. 이게 균형발전이죠. 지자체가 뭘 해야 할지 답이 나오잖아요.

    하롱베이, 캄보디아 개발해야

    부활 날갯짓하는 김철호 명성그룹 회장

    20년 뒤엔 세계를 순람하며 시를 쓰고 싶다는 김철호 회장.

    이게 중부지역 축이라면 남부지방 축은 새만금을 시작으로 무주, 진안, 대구, 영천, 왜관, 성주, 포항으로 연결해야 해요. 북부지방 축은 인천, 임계, 거진, 화진포로 연결합니다. 마지막 축은 통일을 대비한 거예요. 내가 1998년 5월 정부에 ‘선토피아(태양의 땅) 프로젝트’를 제출한 적이 있어요. 비무장지대(DMZ)를 중심으로 남쪽 3000만평, 북쪽 3000만평을 개발해서 자유도시, 평화도시를 짓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한반도에 반드시 통일을 준비한 미래도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죠. 여기에서 남북정상회담이나 세계 평화회의를 개최하면 좋겠죠. 세 번째 축이 ‘선토피아’를 관통하는 겁니다.”

    -김 회장께서 그리는 서울의 미래 상도 궁금합니다. 요즘 서울시장 선거 후보들이 서울을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난개발로 복잡한 서울을 세계적인 도시로 육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울은 한강이 보배예요. 1980년에 글을 쓰면서 ‘강(江)의 옷은 다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직접 보고 실망했지만 파리 센강의 미라보 다리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한강에 산업지구를 연결하는 다리는 20개 넘게 만들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다리는 없어요. 한강이 헐벗고 있는 거죠. 근사한 다리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개발이 덜 된 지역이 성산대교부터 임진강이 합수되는 곳까지에요. 이 지역의 한강은 폭이 매우 넓어요.

    여기를 서울 시민이 즐길 수 있는 문화관광 도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철조망을 걷어내고 둔치도 화려하게 만들어야죠. 냉전논리로 국토를 보면 안 돼요. 이곳에 수십명이 몰려서 한꺼번에 걸어다닐 수 있는 큼지막한 다리도 놓고요. 호주 하면 시드니이고 거기에 오페라하우스가 있잖아요. 여기에도 그걸 만들 수 있어요. 한국의 관문인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이곳을 보면 외국인이 감탄할 겁니다. 여기가 미래의 서울이에요. 그곳에서 서해 낙조를 보면 환상적일 거예요.

    아울러 서울을 개발할 때 꼭 주의할 것은 그린벨트만은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엄격하게 관리해야 해요.”

    -국내 개발뿐 아니라 해외 개발에도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요. 한국의 인력과 기술을 갖고 개발할 수 있는 해외 도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지난해 해외 관광비용으로 150억달러가 나갔습니다. 이건 그냥 쓴 돈이죠. 이제는 우리가 외국 땅을 개발하고, 그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은 물론 외국 관광객도 맞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겨울일 때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을 개발해야죠. 남태평양 쪽, 그러니까 파푸아뉴기니나 뉴질랜드에 신도시를 건설하면 좋을 겁니다. 한국이 여름일 때 겨울을 즐기고 싶다면 유라시아 대륙의 바이칼 호수를 찾는 거죠. 호수의 3분의 2를 관장하는 부랴트 공화국과 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개발하면 괜찮을 겁니다. 또 다른 여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는 베트남의 하롱베이나 캄보디아를 개발할 수 있어요. 지금은 법으로 1000만달러 한도에서 투자할 수 있지만, 올 7월부터는 규제가 풀린다고 하니까 의지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고, 외화도 벌 수 있어요.”

    -한국의 레저산업을 이끌 미래의 인재들에게 어떤 소양을 갖춰야 할지 조언을 하신다면.

    “내가 회장으로 있는 마케팅포럼을 통해 인재 육성의 계획을 구상 중이에요. 첫 번째로 갖춰야 하는 소양은 진실과 성실이 바닥에 깔린 서비스 정신이에요. 이 정신이 깔려 있는 사람에겐 큰 기회가 옵니다. 당대의 힐튼도 처음엔 여관 사서 시작한 사업 아닙니까. 월트 디즈니라는 만화 그리는 사람이 디즈니 왕국을 만든 것 아닙니까.

    “큰아들이 내 業 이을 듯”

    그리고 우리 강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르고 세계의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요. 우리 것의 가치를 인정했을 때 눈이 트입니다. 그러면 세계가 보이죠. 마지막으로 땅을 대하는 태도가 성실해야 해요. 떼돈을 벌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예전에 수천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지만 단 한 평도 판 적이 없어요.”

    -마케팅포럼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습니까.

    “송도신도시 관련해서 안상수 인천시장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도시마케팅 전문가인 용인대 황태규 교수를 소개받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이루려고 했던 많은 부분을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지난해 인천자유구역청장과 행정도시 추진단장이 발제자로 참가한 도시마케팅포럼 창립 세미나, 행정구역 개편 논의, 그리고 국회가 주최한 도시마케팅전략 세미나 등에서 실질적인 지역 개발전략을 발표하는 데도 함께했어요. 신승플래닝의 유승권 사장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지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해외출장비를 지원해줬습니다. 이들이 (주)도시마케팅을 설립했고, 도시마케팅포럼을 만들어 나를 회장으로 추대한 겁니다. 현재 도시마케팅포럼엔 100여 명의 회원이 있어요. 지자체 선거 이후 도시마케팅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고요. 회원들의 아이디어와 연구 성과가 한국에서 실행될 겁니다.”

    -아들 셋을 두셨는데,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을 아들은 없습니까.

    “큰아이는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금융학 석사를 마쳤어요. 이 아이가 지금 내 일을 거들고 있어요. 둘째는 영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일합니다. 막내는 곧 공부하러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고요. 내가 유럽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들이 모두 그쪽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림 그리고, 문학에 빠지고

    -앞으로 10년 뒤 김 회장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훗날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으면 좋겠습니까.

    “10년 후보단 20년 후에 뭘 하고 싶을지 말하고 싶어요. (감옥에 있을 때) 시인이 됐는데, 가슴 깊은 내면적 열정으로 시인이 됐어요. 내자(內子)는 수필가이고요. 20년 뒤엔 세계를 순람하며 문학에 심취하고 싶어요. 내가 시를 쓰고 서예를 하면 내자는 그림을 그리고요. 세상이 평가해준다면, 국토를 사랑했던 기업인, 관광레저를 통해 국부 창출의 가능성을 보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국내 최초의 레저관광그룹을 꿈꾸다 꽃을 피워보지 못한 김철호 회장. 그를 실패한 영웅으로 동정하거나, 혹은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평생을 쏟아부은 레저산업에 대한 노하우와 식견은 지금이라도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됐으면 싶다. 어느 언론인은 칼럼에서 한국 경제를 살릴 기업가의 모형을 찾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발한 사업가, 김철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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