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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자살사건 계기로 살펴본 미술계 계약 관행

화집 발간·갤러리 전시에 목맨 작가들, 울며 겨자 먹기로 작품 ‘기증’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화가 자살사건 계기로 살펴본 미술계 계약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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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는 생각이 다르다”

오 화백이 ‘계약서’를 쓰게 된 과정은 이렇다. 2002년 6월1일 오 화백은 ‘판화공’ 장석태씨로부터 화집제작사 Y미술 대표 J씨를 소개받았다. J씨는 오 화백에게 화집 제작을 권유했고 화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경비 1억원은 판화(원화를 복사해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의 저작권료(판화를 제작 및 판매할 때 작가에게 지급하는 대가)로 대신하겠다고 제의했다. 오 화백은 화집 제작에 흔쾌히 응했다. 화집은 이듬해 11월 완성하기로 했다. 이 모든 합의는 구두로 이뤄졌다.

그러나 판화는 곧바로 제작에 착수한 반면 시간이 흘러도 화집이 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오 화백은 J씨가 애초부터 화집 제작에는 관심이 없고 판화 제작 및 판매독점권에 눈독을 들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2003년 2월5일 오 화백은 일기에 “J와 약속(구두로 계약한 것) 원점으로 돌릴 것. 사업가는 생각이 다르다”고 적었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오 화백은 J씨에게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것을 촉구했고 구두계약을 한 지 1년여가 흐른 뒤인 2003년 5월16일 두 사람은 뒤늦게 계약서에 서명했다.

화집 제작은 2004년 3월30일 이전에 완료한다고 못박았다. 오 화백은 계약서대로 화집이 제작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프랑스 및 유럽 미술관계자들과 후배 화가 및 지인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약속된 날짜에도 화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오 화백은 ‘화집은 물 건너간 것 같고 (J씨가) 한정 없이 그림을 더 원하니 이러다가는 내가 당하는구나 싶다’고 당시 고통스러운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계약서에 준해 33점의 판화를 제작해야 하는데 이 또한 계약분을 초과해 42점(유화 37점, 드로잉 5점)을 제작한 것으로 안다. 남편은 그동안 52점(드로잉 8점 포함)의 작품을 J씨에게 건넸는데 이 가운데 아직까지 돌려받지 못한 작품이 27점(유화 19점, 드로잉 8점)이다.”



부인 이씨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이러다 작품을 빼앗기는 게 아닌가 싶어 몹시 고민했다. 화집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2005년 2월 J씨가 같은 해 8월30일까지 화집 제작을 완료하겠다는 각서를 써주자 이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유족들, 화집제작사 대표 고소

오 화백이 고통을 받은 이유에 대해 유족은 “화집이 제때 발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시회가 이유 없이 연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J씨는 오 화백에게 국내 메이저급 화랑 중 하나인 ‘갤러리 현대(이하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제의했다. 화가들에게 ‘현대’에서의 개인전(또는 초대전) 개최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미를 갖는다. 그곳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화가들의 일생일대 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

J씨는 2003년 7월 ‘현대’의 P사장을 오 화백에게 소개했다. 2005년 5월 P사장은 오 화백에게 “11월에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약속했다.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되자 오 화백은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각광받는 화가지만 우리나라의 중앙무대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기에 “화집 문제는 다 잊어버리고 전시회 준비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시간이 아까워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전시회 출품작을 준비하던 오 화백은 전시회를 두 달여 앞둔 지난해 9월초 J씨로부터 “‘현대’ 개인전이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통보받은 후 충격에 휩싸였다.

“남편은 그날로 붓을 꺾었다.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우울증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남편은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을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만약 전시회가 연기된다면 ‘현대’측이 작가에게 통보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J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후 ‘현대’측에 전시회가 연기된 이유를 물어봤지만 딱히 이유를 말하지 않고 내년 4월에 하자고만 했다. 남편은 ‘P사장과 잘 알고 지내는 J씨가, 자신이 달라는 작품을 순순히 건네지 않자 전시회 개최를 막은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남편은 4월 전시회마저 열릴지 의문이라면서 심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의 P사장은 “(지난해 11월에 예정된) 전시회가 (올해 4월로) 연기된 것은 작가와 협의한 일”이라고 답했다. 오 화백이 세상을 뜬 지 열흘 후인 1월23일 J씨는 유족, 미술관계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화집 발간 과정은 오 화백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날 J씨는 생전에 오 화백이 자신에게 4300만원을 받았다고 밝힌 데 반해 7500만원(세금 공제 전)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유족의 얘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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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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