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화가 자살사건 계기로 살펴본 미술계 계약 관행

화집 발간·갤러리 전시에 목맨 작가들, 울며 겨자 먹기로 작품 ‘기증’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6-04-10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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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자살사건 계기로 살펴본 미술계 계약 관행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려 했었다. 사회는 너무 냉정하다. 어느 곳에서는 人情이 꽃피고 있는데. 藝術은 나의 目的이었다…이제 서서히 한국화단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었는데…아버지의 죽음은 너희들 가슴에 한으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구나…집과 서울에 판화는 그대로 놓아두고 재판시 증거로 놓아둬라. 그리고 호수로 나오면…’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인 고(故) 오지호(吳之湖·1905~82) 화백의 차남이자 한국 구상미술의 거장 오승윤(吳承潤·65) 화백이 자살 직전인 지난 1월13일 아침 아들 앞으로 남긴 유서 내용 중 일부다. 오 화백은 유서를 쓰면서 자살 장소로 호수를 택한 듯했다. 그러나 아내가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발걸음은 호수가 아닌, 광주시 서구 풍암동에 있는 누나의 아파트(12층)로 향했다. 평소 격려를 아끼지 않던 누나 부부에게 “화집 제작과 전시회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괴롭다”면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현관문을 나섰다. 잠시 후 그는 이 아파트 화단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오 화백의 죽음으로 미술계가 술렁였다. 화가들은 “오 화백의 죽음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며 애도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려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명성과 권위를 지닌 노(老) 화백이 목숨을 내던졌을까. 3월5일 오 화백이 작품 활동에 매진했던 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유가족은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흔적이 있는 일기장과 ‘자살의 문턱으로 내몬 주범’이라면서 ‘계약서’를 펼쳐보였다.



    “이 계약서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것(계약서)만 제대로 지켜졌다면 남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밖에 모르던 순수한 남편은 뭘 따지는 법이 없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잇속을 챙기는 데 둔했다. 아마 남편뿐 아니라 대다수 예술가가 다 그럴 것이다.”

    부인 이상실(59)씨의 말이다. 1950년대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오 화백은 1970년대에 전남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선정돼 작품성을 알렸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1974년에는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오 화백은 1980년 교수직을 버리고 파리로 건너가 작품활동에 전념했는데, 그곳에서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五方色, 적·청·황·백·흑)’을 주조로 하는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유럽 화단은 그의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로 주목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오 화백은 1999년 6월 작품 ‘풍수’가 프랑스의 유력 미술잡지 ‘위니베르 데자르’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거장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평론가인 파티르스 드라 페르는 “오 화백의 작품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와 본심에서 우러난 진솔성을 가지고 있다”고 격찬했다.

    우리나라보다 유럽 화단에서 그 능력을 더 인정받았던 오 화백은 이승과 작별하기 며칠 전 박철환 변호사 등에게 쓴 편지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순진한 예술인이 없도록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시고 격려해달라. 아직 화집이 나오지 않았으니 사실상 계약은 무효다. 사회정의나 법의 정의로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했다.

    “사업가는 생각이 다르다”

    오 화백이 ‘계약서’를 쓰게 된 과정은 이렇다. 2002년 6월1일 오 화백은 ‘판화공’ 장석태씨로부터 화집제작사 Y미술 대표 J씨를 소개받았다. J씨는 오 화백에게 화집 제작을 권유했고 화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경비 1억원은 판화(원화를 복사해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의 저작권료(판화를 제작 및 판매할 때 작가에게 지급하는 대가)로 대신하겠다고 제의했다. 오 화백은 화집 제작에 흔쾌히 응했다. 화집은 이듬해 11월 완성하기로 했다. 이 모든 합의는 구두로 이뤄졌다.

    그러나 판화는 곧바로 제작에 착수한 반면 시간이 흘러도 화집이 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오 화백은 J씨가 애초부터 화집 제작에는 관심이 없고 판화 제작 및 판매독점권에 눈독을 들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2003년 2월5일 오 화백은 일기에 “J와 약속(구두로 계약한 것) 원점으로 돌릴 것. 사업가는 생각이 다르다”고 적었다.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오 화백은 J씨에게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것을 촉구했고 구두계약을 한 지 1년여가 흐른 뒤인 2003년 5월16일 두 사람은 뒤늦게 계약서에 서명했다.

    화집 제작은 2004년 3월30일 이전에 완료한다고 못박았다. 오 화백은 계약서대로 화집이 제작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프랑스 및 유럽 미술관계자들과 후배 화가 및 지인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약속된 날짜에도 화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오 화백은 ‘화집은 물 건너간 것 같고 (J씨가) 한정 없이 그림을 더 원하니 이러다가는 내가 당하는구나 싶다’고 당시 고통스러운 심경을 일기에 남겼다.

    “계약서에 준해 33점의 판화를 제작해야 하는데 이 또한 계약분을 초과해 42점(유화 37점, 드로잉 5점)을 제작한 것으로 안다. 남편은 그동안 52점(드로잉 8점 포함)의 작품을 J씨에게 건넸는데 이 가운데 아직까지 돌려받지 못한 작품이 27점(유화 19점, 드로잉 8점)이다.”

    부인 이씨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이러다 작품을 빼앗기는 게 아닌가 싶어 몹시 고민했다. 화집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2005년 2월 J씨가 같은 해 8월30일까지 화집 제작을 완료하겠다는 각서를 써주자 이 약속이 지켜지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유족들, 화집제작사 대표 고소

    오 화백이 고통을 받은 이유에 대해 유족은 “화집이 제때 발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시회가 이유 없이 연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J씨는 오 화백에게 국내 메이저급 화랑 중 하나인 ‘갤러리 현대(이하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제의했다. 화가들에게 ‘현대’에서의 개인전(또는 초대전) 개최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미를 갖는다. 그곳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화가들의 일생일대 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

    J씨는 2003년 7월 ‘현대’의 P사장을 오 화백에게 소개했다. 2005년 5월 P사장은 오 화백에게 “11월에 전시회를 개최한다”고 약속했다.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되자 오 화백은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각광받는 화가지만 우리나라의 중앙무대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았기에 “화집 문제는 다 잊어버리고 전시회 준비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는 시간이 아까워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전시회 출품작을 준비하던 오 화백은 전시회를 두 달여 앞둔 지난해 9월초 J씨로부터 “‘현대’ 개인전이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통보받은 후 충격에 휩싸였다.

    “남편은 그날로 붓을 꺾었다.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우울증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남편은 ‘현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을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만약 전시회가 연기된다면 ‘현대’측이 작가에게 통보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J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후 ‘현대’측에 전시회가 연기된 이유를 물어봤지만 딱히 이유를 말하지 않고 내년 4월에 하자고만 했다. 남편은 ‘P사장과 잘 알고 지내는 J씨가, 자신이 달라는 작품을 순순히 건네지 않자 전시회 개최를 막은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남편은 4월 전시회마저 열릴지 의문이라면서 심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의 P사장은 “(지난해 11월에 예정된) 전시회가 (올해 4월로) 연기된 것은 작가와 협의한 일”이라고 답했다. 오 화백이 세상을 뜬 지 열흘 후인 1월23일 J씨는 유족, 미술관계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화집 발간 과정은 오 화백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날 J씨는 생전에 오 화백이 자신에게 4300만원을 받았다고 밝힌 데 반해 7500만원(세금 공제 전)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유족의 얘기를 들어보자.

    “2002년 J씨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500만원을 남편에게 직접 건넸고, 이후 7차례에 걸쳐 은행계좌로 3500만원을 송금했다. 그러나 J씨가 350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 2003년 9월2일 남편은 ‘J씨로부터 수표로 300만원을 받았다’면서 은행에 입금했다. 이는 남편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계약일까지 화집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 계약은 원천 무효다.”

    유족은 오 화백이 Y미술측의 부당한 작품 요구와 화집 발간 지연, 전시회 연기 등으로 심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만큼 J씨가 도의적·법적 책임을 지고 보관한 작품을 모두 반환하고 화집 발간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J씨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자 2월6일 경기도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 Y미술을 사기와 횡령·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불공정 계약으로 피해 본 작가 많아”

    3월6일 J씨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오승윤 선생님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다. 오 화백의 작품 가운데 돌려주지 않은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모두 돈(7500만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나는 계약서대로 이행했다. 화집은 오 화백의 작품이 부족해 발간이 늦어졌을 뿐이다. 2006년 3월15일까지 화집을 제작하기로 오 화백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2003년 9월2일 오 화백에게 지급했다고 밝힌 3500만원 중 오 화백이 받은 돈은 300만원뿐이라는 유족 주장에 대해 “3500만원을 수표로 찾은 후 오 화백에게 전액 현금으로 지급했으며, 당시 오 화백은 1000만원에 대해서만 영수증을 써줬다”고 반박했다.

    필자는 3월8일 오후 5시 경기도 문산에 있는 Y미술 사무실에서 J씨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약속장소에 나타난 사람은 J씨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선임한 두 명의 변호사와 Y미술 직원이었다. J씨는 전화통화에서 “중요한 일이 생겨 만날 수 없게 됐다”며 “모든 진실은 법이 가릴 것이다.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겠다. (3월6일) 3500만원을 현금으로 오 화백에게 건넸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서도 노코멘트로 일관하겠다” 말하곤 입을 닫았다. 애초 그는 필자에게 현금 영수증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날 통화에서 “기자에게는 보여주지 않겠다. 법정에서 공개하겠다”고 딴소리를 했다.

    진실공방은 이제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미술계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오 화백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미술계의 전반적 풍토를 들여다봤다. 진실이 어떻게 밝혀지든 오 화백의 자살을 개인 차원에서만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작가들은 “화집 및 판화 제작시 불공정한 계약 탓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작가들도 작품 기증을 강요당하고 재산 피해를 입어 화병을 앓기도 한다는 것. 원로 화가 김모씨도 이런 일을 겪어 부부가 함께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작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술계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파헤쳐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갤러리 대관(貸館)과 화집 및 판화 제작, 저작권료와 관련해 ‘표준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처지를 ‘노예’에 비유해 눈길을 끌었다. 평론가에게는 좋은 평을 얻기 위해 굽실거려야 하고, 작품을 전시할 공간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상업 갤러리’ 관계자에게는 ‘찍히기 싫어’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약자인 작가는 부당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오래 전부터 미술계에 자리잡은 잘못된 풍토라는 것이다.

    대형 갤러리와 신인 작가의 ‘노예계약’

    미술 전시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개인전과 초대전이 그것이다. 통상 개인전은 대관료를 내고 전시회를 하는 반면 초대전일 경우 작가는 작품만 준비하고 도록(圖錄) 제작 및 오프닝 행사 등 전시회 전반에 걸친 비용은 갤러리측이 부담한다.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마친 L씨. 대관료와 그림 표구값 등을 포함해 1700여 만원을 들여 개인전을 열었다. 대관료 전액을 자신이 부담했기 때문에 그림 판매액은 100% 작가의 몫이다. 그런데 개인전을 마치자마자 갤러리측은 작가에게 소품 2점(전시가 500만원 상당)을 기증하라고 요구했다. L씨는 갤러리측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피와 살 같은 작품을 갤러리측에 건넸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전시회를 안 할 것도 아니지 않나. 만약 작품을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면 갤러리 관계자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다음 전시회를 할 때 갤러리를 빌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줬다. 나처럼 작품을 뺏기다시피 한 화가가 한둘이 아니다. 이것은 미술계의 오랜 관행이다. 자비를 들여 개인전을 연 작가들의 경우 작품이 팔리지 않아 손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다.”

    화가 자살사건 계기로 살펴본 미술계 계약 관행

    화랑이 즐비한 서울 인사동 골목.

    ‘가난한’ 중견 작가 K씨는 대관료를 지급할 돈이 없자 갤러리측과 협의해 대관료 대신 그림을 제공하기로 하고 개인전을 열었다. 이 화랑의 일주일 대관료는 500만원. K씨의 작품은 호당 30만원(20호 미만·전시가). 대관료로 17호에 해당하는 작품을 건네면 되지만 갤러리측은 40호의 작품을 요구했다.

    “대관료를 그림으로 ‘상계 처리’하는데, 이때 갤러리측이 제값을 쳐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갤러리는 작가의 작품을 반값에 가져간다. 이름 없는 작가에겐 대관료 대신 50호의 그림을 요구하고 웬만큼 알려진 작가의 경우 30호를 가져가는 것이 관례다. 갤러리측이 그림을 요구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작품을 준비하는 경우도 많다. 전업작가들은 개인전이나 초대전 등을 통해 작품을 팔아 물감도 사고 생활도 한다. 요즘 경기가 위축돼 그림을 찾는 고객이 줄어들어 작가가 먹고 살기 힘든데, 갤러리의 횡포가 여전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30여 년 동안 공방에서 일한 장모씨는 “교수와 중·고교 교사 등 일부 직업을 가진 작가나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작가들은 아예 전시회를 열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의 자존심을 짓밟히면서까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울 소재 유명 미술대학 75학번인 한 전업작가는 2년 전 모 아파트의 경비로 취직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인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붓을 놓고 아파트 경비로 나서게 된 것. 그의 주변 사람들과 동기들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실력이 뛰어나지만 눈에 띄는 작가로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입에 풀칠하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내비쳤다.

    전도유망한 젊은 조각가 D씨(97학번)도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그는 몇 차례 자비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연줄도 없고 돈도 없는’ 자신이 오직 실력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판단하고 미술계를 떠났다.

    갤러리가 전시회를 주최하고 그림 판매를 주도하는 초대전의 경우 갤러리와 작가가 체결하는 계약은 불공정의 극치라고 한다. 다음은 작품 활동 10년차에 접어든 K작가의 말이다.

    “초대전에서 그림이 팔릴 경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7(화가)대 3(갤러리)의 비율로 그림값을 나눠가졌는데, 외환위기 직전에는 갤러리의 비중이 ‘4’로 높아지더니 외환위기 당시엔 5대 5로 같아졌다. 현재는 일부 인기 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에게 5대 5 비율이 공식이 되었다. 신인 작가의 경우 갤러리측이 ‘7’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노예계약’에 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하고 작품을 팔아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있는 갤러리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작가는 미술협회에 등록된 1만5000여 명의 회원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K씨는 “작가들이 갤러리 등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이에 대응해 싸우려 하기보다는 몸조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에 미술계의 잘못된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시 K씨의 주장이다.

    “개인전과 마찬가지로 초대전에서도 갤러리측이 두 점 정도의 작품 기증을 요구한다. 그림 팔아서 절반 주고, 그것도 모자라 반(半)강요에 의해 그림까지 얹어준다. 어쨌든 작가는 갤러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건넨다. 힘없는 작가는 갤러리의 ‘봉’이나 다름없다.”

    반면 갤러리측 얘기는 다르다. 13년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양모씨는 “표면적으로 보면 마치 갤러리측이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초대전을 개최할 때 돈이 많이 든다. 도록을 만드는 비용이 적게는 200만∼300만원에서 고급으로 제작할 경우 700만~1000만원까지 든다. 그리고 전시회 오프닝 비용을 비롯해 갤러리 운영비와 인건비 등이 만만치 않다. 만약 작품이 팔리지 않을 경우 작가는 전시된 작품을 되가져 가면 그만이지만 갤러리는 손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전시회에서 작품이 많이 팔리지 않을 경우 작가가 갤러리측의 손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알아서’ 작품 한두 점을 내놓고 간다.”

    갤러리, ‘빽’ 든든한 작가 선호

    초대전과 관련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갤러리측이 초대전을 기획할 때 작품성 못지않게 작가의 친지와 학연·지연 등을 꼼꼼히 따져본다는 점이다. 작가의 인맥이 작품 판매에 적잖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재계 인사와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애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 서울 인사동 중대형 화랑 관계자의 말이다.

    “갤러리측에서는 정치인 등 이른바 ‘빽’이 든든한 작가를 선호한다. ‘빽’은 작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림 판매와도 직결된다. 일부 작가들은 영향력 있는 정치인에게 그림을 선물로 건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또한 미술계의 오랜 관행 중 하나다. 전·현직 정치인의 집에 유명 화가의 그림이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미술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시회가 있다. 몇 해 전 K씨가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그의 친형은 ‘실세 장관’이었다. K장관이 동생의 전시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눈도장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전시회에 몰려들었다. K장관이 동생의 작품 한 점을 구입하자 뒤따라온 사람들도 한두 점씩 그림을 구입했다. K씨의 개인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황리에 끝났다.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 한 중앙일간지 사진기자는 “몇 년 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 장군의 집을 방문했더니 비싸고 좋은 그림이 집안 곳곳에 즐비했다. 내가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장군의 부인이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햇빛이 들지 않게 두꺼운 커튼으로 유리창을 가린 그 방에는 그림이 상하지 않도록 습도와 온도가 조절돼 있었고 수많은 그림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장성 부부가 그림에 조예가 깊어 구입한 것인지, 아니면 선물로 받은 것인지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취재차 상류층과 유명인사의 집을 방문하면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다수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컬렉터(소장가)와 미술 애호가는 그리 많지 않다. 화랑가 관계자는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과 순수하게 작품을 즐기기 위해 구입하는 컬렉터, 그리고 기업 등이 주 소비층”이라며 “최근 강남의 주부들을 중심으로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구입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W아파트. 이 집의 식탁 옆 벽면에는 유명작가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구입가는 2000만원. 학부모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이 집을 찾은 8명 중 한 사람이 ‘작품’을 알아보고 “참 좋은 작품을 구입하셨네요” 하고 인사말을 건네자 또 다른 학부모가 이 그림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그림에 문외한인 다른 사람들은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관심 없는 척했지만 사실은 귀를 기울였다. 다음은 그 자리에 있었던 S(44)씨의 말이다.

    “작품과 유명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왠지 모를 소외감이 들었다. 고가의 그림을 소장한 그들이 어딘가 달라보였다.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나도 그 부류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림을 구입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대화도 통하고 ‘급’이 맞지 않겠는가.”

    그림값, 작품성보다 갤러리 ‘입김’으로

    화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류층 인사들 중에는 S씨와 비슷한 경험을 통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10여 년 전 국회의원을 지낸 변호사 남편을 둔 유모씨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150여 평 단독주택에 거주하던 유씨는 당시 그림에 심취해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비싼 그림으로 집안을 꾸미는 중이었다. 유씨가 그림을 사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남편의 동료 변호사 부인들과의 모임이 잦아지면서부터였다.

    S씨와 마찬가지로 모임에서 그림 때문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맛본 유씨는 인사동과 사간동, 평창동 등지의 화랑가를 자주 드나들었고 대형 갤러리를 통해 고가의 그림을 두 점 구입했다. 이후 갤러리측은 유씨를 VIP로 대접했다. 유씨는 갤러리 대표로부터 직접 “좋은 작품이 나왔으니 한번 들러라”는 전화를 종종 받았고 “다른 컬렉터와 만나는 자리를 주선하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당시 유씨는 그림 한 점당 수천만원을 주고 구입했지만 적정한 값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림 가격을 결정하는 첫째 기준은 미술품의 절대가치다. 즉 전문가의 안목이나 비평가의 비평에 따른 작품성이 중요하다는 것. 둘째는 작품 구입 수요가 얼마나 많으냐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보존상태와 제작연대, 재료, 희소성 등이 꼽힌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이러한 요건을 무시한 채 그림 가격이 갤러리 관계자들의 ‘입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아 갤러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납득할 만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그림 가격이 책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작가는 “예술가는 혼을 불어넣는 작품을 제작할 때 가장 행복하고, 그 다음으로 자신의 작품이 사랑받을 때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가족보다 그림을 더 사랑했다는 오승윤 화백.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고 싶었다’는 오 화백은 그 꿈을 접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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