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공존’의 섬, 보르네오

‘슬픈 열대’와 ‘기쁜 열대’ 사이

  • 정호재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6-04-11 10: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공존’의 섬, 보르네오
    케이블 TV로 CNN, BBC, 블룸버그 같은 국제 채널을 보다 보면 아시아 국가들의 이미지광고가 시선을 끈다. 그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파란 바다와 원시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쌍둥이 빌딩을 함께 보여주면서 ‘Truly Asia’란 구호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레이시아 광고다. 국가명 안에 이미 아시아라는 어미가 있어 ‘말레이시아가 진짜 아시아!’란 구호는 누구 귀에라도 쏙 들어오게끔 잘 만든 카피다.

    물론 말레이시아의 ‘Truly Asia’ 주장에 반발할 나라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절반 이상을 떠안고 있는 거대한 땅, 저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50여 국가를 놓고 아시아의 진수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면 ‘Truly Asia’라는 구호가 허풍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우선 말레이 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자. 아시아 대륙의 중심이 아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지만 대륙과 해양이 맞닿는 전략적 요충지다. 인도양과 남지나해를 연결하는 이 해상로는 근대 이후 실크로드를 능가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인정받아 다양한 문명이 소통하는 장이 되었다.

    문명의 척도라 할 만한 종교만 살펴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종교는 이슬람교지만 이전부터 힌두 문명과 불교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왔다. 16세기 이후부터는 동서양 무역상인들이 집결하면서 중국의 유교 사상과 서구의 기독교 사상까지 유입되어 복합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인구 구성을 봐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다양한 인종이 모자이크처럼 분포해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말레이민족이 60%, 중국 화교가 25%를 차지하고, 아시아의 또다른 한 축인 인도-파키스탄계 사람도 9%나 된다. 이뿐 아니라 원시 자연림 속에는 아직도 문명화를 거부하는 80여 소수민족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며 연방의 한 축을 이룬다.



    또한 이 땅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일본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까지 끌어안고 있다. 아시아의 역동적 경제를 상징하는 싱가포르와 독특한 석유왕국 브루나이도 말레이시아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구성원이다. 따라서 말레이시아가 아시아 문명의 중심은 아니라 할지라도 서구인들에게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다종다양한 아시아적 가치를 모자이크처럼 만끽할 수 있어 ‘Truly Asia’라는 수식어가 과장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라파 치과 의료봉사단

    “말라리아 약은 빼먹지 않고 복용했나요?”

    1월28일,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인천공항. 20여 명의 치과 의료봉사단이 동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산더미 같은 진료도구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이들의 최대난제는 장비 이동. 허허벌판에 치과병원을 개설하려면 발전기에서 각종 거치대, 그리고 수백명분의 치기공 재료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 한 개의 가방이라도 분실하면 치료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를 책임진 이들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치과의사와 치기공사, 간호사들로 구성된 치과 의료봉사단의 정식 명칭은 ‘라파 치과 의료봉사단(단장·성낙훈, 이하 라파봉사단)’. 1996년 창립 이래 매년 자체 경비만으로 미얀마, 몽골, 러시아, 필리핀, 사할린, 베트남 등지에서 24회에 걸쳐 무료 진료를 펼쳐온 의료봉사단이다. ‘라파 선교단’이라는 또다른 명칭이 보여주듯, 선교도 이들의 활동 목적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는 한의사까지 합류해 종합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코타키나발루는 동말레이시아(보르네오 섬) 사바 주(州)의 주도(州都)다. 지금은 인구 30만, 5성급 호텔이 즐비한 국제적 관광도시지만, 10년 전만 해도 판자로 만든 허름한 수상가옥이 다닥다닥 들어선 낙후된 어촌에 불과했다. 최근 보르네오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투자가 몰리기 시작한 데다 인근에 골프장이 밀집해 있어 레저 신천지로 주목받고 있다. 다른 동남아 관광지와 대별되는 점은 이슬람권 국가이다 보니 흥청대는 유흥가가 없다는 점.

    인천국제공항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는 정확히 5시간이 소요됐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을 살펴보니 나이 지긋한 단체여행객보다는 30대 후반의 부부 여행객이 더 많아 보인다. 코타키나발루는 최근 초·중학생들의 조기유학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이곳 국제학교가 영어와 중국어를 함께 가르치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코타키나발루(현지인들은 줄여서 ‘KK’로 부른다)에서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라와스까지는 버스로 3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라와스는 사바 주가 아닌 이웃 사라와크 주에 위치한 인구 3만의 소도시다. 부연하자면 라와스는 사바 주와 사라와크 주, 그리고 브루나이 왕국과 인도네시아 국경에 둘러싸인 경계지역인 셈이다. 봉사단은 왜 하필 이 지역을 택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죠. 우선 말레이시아가 회교국가지만 동말레이시아는 기독교 인구가 적지 않습니다. 이곳 원주민인 룬바왕(Lunbawang)족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했죠. 이곳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와 장로 부부께서 치과봉사를 부탁했습니다.”(이형순 부단장)

    원주민의 친구, 오정면·문달님 부부

    사바 주와 사라와크 주 경계에 당도하자 검문소가 나타났다. 연방제를 택한 말레이시아는 주마다 왕이 따로 있어 각 주는 완전히 다른 나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검문소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라와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현지 경찰이 버스에 따라붙으며 경찰서로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 최근 한 외국 여성이 이곳에서 납치당한 사례가 있어 외국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말레이시아는 아세안(ASEAN)의 선두국가답게 높은 치안수준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페닌슐라’, 즉 서말레이시아에 한정된 얘기다. 남한만한 크기의 사라와크 주는 인구가 200만에 불과한 원시 밀림지역이라 외국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는 버스에서 내려 산악자동차로 갈아타고 산길로 들어선다. 2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를 질주하고 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멜라라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서울에서 보르네오 섬의 오지에 도달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이곳까지 길 안내를 맡은 오정면 장로는 “원주민 거주지 근처에 천막을 세우고 임시 병원을 세울까 했는데 운 좋게 이곳 멜라라 캠프에 병원을 차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며 밝은 표정으로 숙소를 안내했다.

    경북 상주에서 농사를 짓는 오정면(71)·문달님(69) 부부는 지난 20년간 동남아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벌여왔다. 부부가 보르네오 섬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농민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동남아 원주민들의 열악한 현실을 접하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싹튼 것. 그 후 부부는 농사를 끝낸 동절기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을 돌며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올해도 유기농사를 지어 거둔 수익금 25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들고 어김없이 보르네오 섬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껏 오씨 부부가 동남아 각지에서 벌인 일은 다양하다. 농업기술이 모자라는 원주민 마을을 순회하며 유기농법을 전수했고, 원주민의 문화 속에 배어 있는 마약을 퇴치하기 위해 애를 썼다. 또한 심장병과 구순구개열(언청이) 치료를 위해 한국에 데려와 수술시킨 아이도 7명이나 된다. 수술비용만 1억원이 넘었다. 수술비가 모자라면 결혼해 독립한 6명의 자녀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종교계와 의료계를 설득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이런 활동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현지어를 익히는 데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말레이어, 이반족어, 중국어 등 7가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

    룬바왕族의 환골탈태

    차량에 부착된 내비게이터는 이 캠프의 위치가 해발 1000m 고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도 부근에서는 방향감각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데다, 낯선 산길을 2시간이나 질주했으니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도 하늘에선 찬란한 은하수가 쏟아져 내려 캠프를 감싸고 있었다.

    ‘공존’의 섬, 보르네오

    기독교를 통해 교육과 문명을 받아들여 말레이시아 주류사회에 편입한 룬바왕족.

    날이 밝고 나서야 멜라라 캠프가 밀림 속에 위치한 일종의 호텔형 리조트임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을 절벽과 밀림이 휘감았고, 계곡을 타고 내려 꽂히는 거센 물살에 눈과 귀가 멍멍해졌다. 까마득한 밀림에 봉사팀 모두 아득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오지에 리조트가 건설된 연유가 궁금했다. 벌목을 위해 기업이 밀림 한가운데 길을 뚫었는데, 길 주변에서 온천이 발견됐고 때마침 이 지역 출신으로 벌목회사에서 관리자로 일했던 부유한 원주민이 노후대책의 일환으로 본격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여기까지 관광객이 얼마나 찾아올지는 몰라도 밀림 한가운데 자리잡은 덕분에 의료봉사단이 원주민을 불러모아 단체진료하는 데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받게 됐다.

    오지에서 생활해본 사람은 깨끗한 물과 전기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더구나 의료봉사에서 이 두 가지는 필수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간이천막에서 고난도 수술을 치르곤 하던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올해 봉사여행은 최적의 환경이라며 봉사단원들은 기뻐했다.

    이곳 운영자인 알프레드 빠단(53)씨는 룬바왕족 출신 원주민이다. ‘원주민’이라는 어감과는 상반되게 그는 대학을 졸업했을 뿐 아니라 투표권도 갖고 있는 어엿한 말레이시아 시민이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시민’보다 ‘OO부족 출신’이란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고유한 부족언어가 존재하고 부족민끼리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보다는 부족 정체성이 신분의 나침반이 된다.

    룬바왕족은 보르네오 북부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원시부족 가운데 하나다. 현재는 4만명가량이 보르네오 섬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경제수준이 매우 높다. 아직도 대다수 원주민이 채집경제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빠단씨가 고등교육을 받고 거창한 레저사업을 벌이는 것을 보면 룬바왕족의 역사에 극적인 반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빠단씨에 따르면 룬바왕족과 클라빗족은 보르네오 원주민(‘오랑아슬리’·당초 이 땅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부족이다. 아직도 원시적인 삶이 주류를 이루는 이 땅에서 기독교는 교육과 보건, 그리고 현대화를 의미한다는 것.

    빠단씨의 증조부 시절, 그러니까 1930년대 말 호주와 영국 선교사들이 원주민 기독교화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맨 처음 룬바왕족이 외래문명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받고 이 지역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과거에 룬바왕족은 술을 좋아하는 더럽고 게으른 부족이었다고 해요. 개와 밥그릇을 함께 쓸 정도였다니까요. 그리고 이웃 부족과 전쟁을 벌여 상대방의 목을 베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반복해왔어요. 물론 지금도 그런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부족이 보르네오에는 적지 않습니다.”

    회교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지만 보르네오 섬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는 예상외로 기독교를 믿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사라와크 지역은 기독교(35%)와 원시종교(30%), 그리고 이슬람교(25%)가 ‘황금분할’을 이룬다. 국교(國敎)가 이슬람인 나라에서 복합종교 지역이 생긴 데는 복잡한 역사가 숨어 있다. 우선 페닌슐라에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라카 왕조가 오랜 기간 존재했지만 보르네오 섬에는 뚜렷한 문명을 지닌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국이 본격적으로 동남아 지배에 나서자 1841년 보르네오 섬에도 변화가 생겼다. 브루나이 술탄이 제임스 브룩이라는 젊은 탐험가를 라자(왕)로 임명한 것. 이후 브룩 일가는 3대 100여 년에 걸쳐 원주민 위에 군림하며 사라와크 주를 지배했다. 그 여파로 선교사들이 백인 왕의 보호 아래 비교적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원시 채집생활 고집하는 뻔안족

    진료 첫날.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100여 명의 원주민이 캠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한눈에 봐도 교육과 보건의 혜택에서 소외된 원시부족이었다. 추장은 “인도네시아 국경에서 무려 사흘을 걸어 이곳에 당도했다”고 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뻔안(Punan)족. 평균신장이 150cm 내외로 남녀 할 것 없이 자그마한데다 귀에는 큰 구멍을 내고 장신구를 끼워놓아 여타 부족과 쉽게 구분됐다. 보르네오 섬의 토착부족으로 5∼9가족이 40∼50명씩 소그룹을 이뤄 밀림에서 원시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총인구는 1만명을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부터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돼왔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연구기록은 상당수 있지만, 이들이 폴리네시아인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확실한 기원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뻔안족 여성은 평균 13세에 결혼해 4∼6명의 자녀를 갖는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런 원시부족을 국가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학교와 병원을 짓고 거주지를 만들어주는 노력을 벌여왔지만, 이들은 그저 자연환경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 좋았는지 정부의 혜택을 거부하고 조상의 방식대로 살고 있다.

    어린이들의 치아는 비교적 건강하지만 20대를 넘긴 ‘중년’들은 똑같은 위치의 앞니 4∼5개가 빠져 있다. 전세계 오지의 원주민들을 접해본 경험 많은 치과의사들이지만 놀라운 증상이 아닐 수 없었다. 치과의사들은 이들의 치아가 불량한 원인에 대해 몇 가지 추정을 했다. 도구가 발달하지 않아 앞니를 사용하는 노동을 많이 했을 것, 시고 단 열대과일을 많이 먹었을 것, 동물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독침의 독이 이를 상하게 했을 것….

    계절 변화 없어 나이 몰라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됐다. 상식대로라면 의사와 환자에겐 정확한 의사소통이 필수다. 치과는 다른 진료에 비해 직관적으로 환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번 진료여행의 단장을 맡은 성낙훈(63) 박사가 그 중간고리 노릇을 했다.

    성 박사는 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후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말레이시아 정부 초청으로 콸라룸푸르 국립병원에 파견돼 일한 전력이 있다. 우리도 치과의사가 부족하던 시절에 말레이시아에 의사를 파견한 것도 놀랍지만, 당시 빈국이던 한국의 치과의사를 8명이나 초청한 말레이시아의 결단도 진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덕분에 성 박사는 자연스럽게 말레이어를 구사했고 이는 원주민들의 진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뻔안족의 언어를 룬바왕족이 말레이어로 번역하는 이중번역의 수고도 곁들여졌다. 수많은 언어가 공존하는 정글에서 3∼4가지 언어 구사는 자연스러운 생존능력에 속한다.

    예상대로 환자들의 영양과 치아상태는 불량했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40세 정도. 더 놀라운 것은 이름은 있어도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는 점이다. 계절이 변하지 않는 적도 부근에 사는 원시부족이니 나이를 셀 방법이 없었는지 모른다. 주민등록과 같은 국가 시스템이 전무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치과병원 전체가 이동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모든 진료가 이뤄졌지만, 태반은 썩은 이 제거에 집중됐다. 틀니가 꼭 필요한 이가 있으면 환자의 구강을 본떠 사흘 안에 재빨리 틀니 제작에 들어갔다. 틀니를 만드는 치기공사가 셋밖에 되지 않아 3일 내내 철야 작업을 감내해도 100여 개가 최대치다.

    한 치과의사가 틀니 작업을 반복하다 불현듯 큰 소리로 말했다.

    “턱뼈구조가 비슷해서 이웃끼리 바꿔 끼워도 문제가 없겠어!”

    실제로 원주민의 얼굴은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다. 소규모 패밀리 간에 근친상간이 반복되다 보니 턱뼈까지 비슷해졌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수술 도중 한 아이의 입에서 피가 많이 흘러내리자 아이 엄마가 하늘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원시종교의 주술행위였다. 그는 아이의 입에 손을 대고 큰소리로 주문을 반복했다. 정령을 믿는 원시부족 사회에서는 피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게 주위의 설명이었다.

    이튿날 산악자동차를 빌려 타고 라와스로 향했다. 도시에서는 새해를 맞아 중국인 특유의 요란스러운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가 앞에는 새해를 축하하는 ‘新年快樂!’ 문구가 내걸렸고, 몇몇 젊은이는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용춤을 췄다. 쇼핑센터에서는 드라마 ‘대장금’ 주제가가 중국어 버전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한류 붐이 일었다고 들었는데, 그 중심에 우리와 문화가 비슷하고 경제력이 뒷받침된 화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듯하다.

    동말레이시아에서는 어느 도시를 가나 말레이인과 원주민은 소수에 속하고 60% 이상은 화교로 채워진다. 이 비율은 동말레이시아 거의 모든 도시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다.

    ‘공존’의 섬, 보르네오

    라파 치과 의료봉사단의 보르네오 원주민 의료봉사활동.

    18세기 말레이시아의 주석광산과 보르네오의 고무나무가 서구사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영국인들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애초 말레이인들의 생산성은 돈에 눈이 먼 영국인 지배자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다. 결국 보르네오 개발을 위해 멀리 광둥성에서 중국인들을 이주시키는 프로젝트가 강행됐다.

    계약노동자로 일한 이들 중국인은 계약기간이 끝나자 미련 없이 인근 도시로 옮겨 상권을 개척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차이고 문명의 저력이다. 보르네오에 살던 원주민들은 도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화교들에게 주도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원주민들이 화교들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지니려면 앞으로 몇 세대가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독자적 근대화’

    최근에는 원주민 출신들이 변화한 말레이시아 상황에 맞게 적절한 직업을 찾아 도시에 거주하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룬바왕족이 그 대표적 사례다. 룬바왕족은 4만명이 채 안되는 소수민족이지만 이들 가운데 변호사가 7명이나 되고, 의사나 국회의원, 해외에서 말레이시아를 대표해서 활동하는 국제적 인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알프레드 빠단씨의 매제인 마이클 로보(49)씨는 이 지역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떨어진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영국 런던에서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한, 한마디로 이 지역과 부족을 대표하는 엘리트 지식인이다. 그의 저택은 라와스 시내에서 화교들의 집을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다.

    “40년 전 제가 학교에 가려면 꼬박 닷새를 걸어 라와스까지 와야 했어요.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마침내 런던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룬바왕족 출신 최초의 변호사인 그는 영국에 더 머물 수도 있었지만 부족과 가족을 위해 일찍 귀국했다고 한다. 그의 성공에 힘입어 적잖은 수의 후배가 해외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점진적으로 룬바왕족은 정글을 벗어나 도시에 정착했고 이제는 룬바왕족이 자체적인 경제권을 형성하고 지역의 화교 세력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이뤄냈다. 비록 기독교라는 외부의 힘을 빌렸지만 3대가 지나자 독자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모델이 도출된 것이다.

    그럼에도 동말레이시아는 페닌슐라에 비해 형편없이 낙후돼 좀처럼 변화의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동말레이시아가 연방정부와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주장도 흘러나온다. 로보씨는 “동말레이시아의 산림과 석유자원 개발 수익의 95%가 연방정부의 몫이고 5%만이 사라와크 주에 돌아간다. 원주민의 재산은 원주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원주민이 이 같은 생각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대로 저개발이 원주민 인권 보호에 효과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원이 워낙 많고 인구가 적다 보니 아직까지는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00개의 틀니 선물

    정글에서 4일을 보냈다. 치과봉사활동 마지막 날이 되자 의사들의 손길도 바빠졌다. 100여 개의 틀니를 만들자 모든 재료가 바닥을 보였다. 뻔안족 환자들에게 틀니를 선사하자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거듭 감사의 인사 표시를 했다. 그들은 꼬박 사흘간을 인근 산속에서 야영하며 틀니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마지막 날에는 이곳 출신 정치인 넬슨 바랑(50)씨가 캠프를 찾아왔다. 그는 잘 생긴 한국인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룬바왕족은 한국인과 체형, 얼굴형이 비슷하다. 빙하시대에 한반도에 정착한 남방계가 이곳 보르네오를 거쳤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룬바왕족 출신인 바랑씨는 사라와크 주 하원의원으로 쿠칭(사라와크 주의 주도)에서 대학을 마친 후 고향땅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쿠칭과 KK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녀들이 훗날 룬바왕족 혹은 자신들과 흡사한 클라빗족과 결혼하기를 바랐다. 말레이인은 종교가 달라 싫고, 중국인과 결혼하면 우리 색깔이 아예 없어져버릴 것 같아 두렵다”는 것.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오랑우탄과 함께 사는 오랑아슬리 사람들, 특히 뻔안족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밟힌다. 나이도 모르고 호적도 없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아이들. 13세에 아이엄마가 되고 40세에는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 이들은 수천 년간 압도적인 자연환경에 눌려 문명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진 채 살아왔다.

    비록 제도적인 보호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레이시아에 사는 원주민들은 행복한 축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여타 국가의 소수민족처럼 이민족이나 도시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짐을 챙겨 코타키나발루로 떠나려는데 뻔안족 추장이 야생사슴 뿔 2쌍을 들고 찾아왔다. 감사의 표시로 주는 선물인 줄 알았으나 그들도 나름대로 경제생활을 하고 있었나 보다. 300링기트(약 9000원)를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을 방문한 수많은 정부관리, 선교사, 인류학자들을 접하면서 자신들이 채집한 곰의 웅담이나 사슴뿔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습득했고 돈을 사용하는 법도 차근차근 배워온 것이다.

    한 세기 전 아마존 밀림을 방문한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문명에 의해 그들만의 삶의 완전성을 파괴당하는 원시부족의 현실을 보며 ‘슬픈 열대’라고 칭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들의 이웃 부족인 룬바왕족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 반해 현대적인 삶을 무시하고 원시적 공동체만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정글의 삶을 버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국가를 학습하는 것이 꼭 슬픈 일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