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꼬리빵즈’를 아십니까?

망국의 설움, 고구려 기상 함께 품은 ‘중국판 조센진’

  • 정연수 강릉대 강사·국문학 bich42@naver.com

    입력2006-04-11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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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빵즈’를 아십니까?

    꽈배기 모양의 빵 ‘마화’의 또 다른 이름이 꼬리빵즈이다.방망이(방즈)로 다듬이질하는 데서 꼬리빵즈란 말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꼬리빵즈’란 말을 들어봤는가. 꼬리빵즈는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조선족을 비하해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쓰던 ‘조센진(朝鮮人)’과 같은 경우다. 즉 중국 땅에서 중국인(여기서는 한족을 뜻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조선족)에게 붙여진 서러운 이름이라 하겠다.

    조선족들은 꼬리빵즈라고 불릴 때마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한국인에게는 낯선 단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문학작품, 역사서, 신문, 인터넷, 논문 등에서는 꼬리빵즈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곤 한다.

    외국어이니 꼬리빵즈의 발음이 다양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한자어 표기마저 각양각색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해석에서도 중국 전문가로 자부하는 이들조차 의견이 제각각이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한국사 바로 보기-고구려·백제·신라는 한민족인가’(경향신문, 2004. 10)라는 글에서 ‘고구려 새끼’로, ‘한국사 이야기 3’과 ‘한국사 이야기 4’(한길사, 1998)에서는 ‘고려의 종(高麗奴)’으로 풀이했다. 김일훈은 ‘중국 여행 여적’(이슈투데이, 2000)에서 ‘속국놈’으로, 제주산업정보대 서성봉 교수(중문학)는 ‘호가호위(狐假虎威)’란 글에서 ‘고려거러지새끼’로, 조선족 문인 김월의는 ‘고구려의 미래를 지키려면 오늘과 역사를 함께’란 글에서 ‘고려거시기놈’으로, 이혜선은 논문 ‘유치환 시에 나타난 민족의식’(동악어문학회, 1996)에서 ‘망국민과 거지를 합친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주중 한국대사관 외교관 출신의 강효백은 저서 ‘중국인의 상술’(한길사, 2002)에서 “‘빵즈’란 ‘남의 봉이 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솔직하고 화끈한 자’를 의미한다. 대개 산둥 사람들이 이러한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소개했다.

    중국 어느 사전에서도 뜻풀이를 찾을 수 없는 꼬리빵즈, 그 말을 쓰는 한족이나 듣는 조선족이나 어원이나 유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꼬리(高麗, 예전에는 고려를 ‘고리’로, 고구려는 ‘고구리’로 부름)’가 조선족을 뜻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빵즈’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꼬리빵즈의 어원과 유래를 더듬어보는 것은 조선족뿐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삶과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일 통역 담당한 고려인

    꼬리빵즈의 어원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상의 공개토론, 직접 면담, 설문조사 등의 방법을 병행했다. 조선족 사이트인 ‘모이자닷컴’(moyiza.net) 토론방에서 ‘꼬리빵즈의 어원 및 유래에 관한 토론을 희망합니다’는 제목으로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이 시작되자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접속했고, 그 뒤 ‘조선족마당’(bud21.com)이란 사이트에 토론 내용이 옮겨지면서 꼬리빵즈의 뜻을 모르던 한국인들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꼬리빵즈의 실체 알기’는 조선족과 한국인 모두에게 흥미 있는 주제였던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중국의 선양(瀋陽), 옌볜(延邊), 산둥(山東),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는 조선족과 한족을 대상으로 직접 면담했고, 랴오닝(遼寧)성 조선족사범대 한국어학과 김춘련 교수의 도움을 얻어 조선족 대학의 교직원, 조선족 및 한족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방쯔(棒子)’는 막대기라는 뜻을 갖고 있어 꼬리빵즈가 ‘고려막대기’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하는 연결고리로서의 막대기라는 뜻이다. 선양사범대 중국어과의 한 교수(조선족)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반도와 산둥성의 연해 도시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이 함께 뒤엉켜 살아야 했습니다. 세 나라 국민이 한 공간에 섞여 사는 상황에서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의 통역은 양국 말을 다 할 줄 아는 조선족의 몫이었지요. 하지만 조선족은 통역을 하며 때로 말을 꾸미거나 왜곡해 일본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부추겨 원성을 샀고, 당시 일본이 만주를 침략해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족은 조선족을 가리켜 고려막대기, 즉 꼬리빵즈라고 부르며 경멸하고 적대시했지요.”

    일제강점기 전후, 조선인이 중국에 대거 이주하던 시점에 꼬리빵즈란 말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중일간 연결고리로서의 막대’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 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두고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따라 그 뒤에는 일본인이 쳐들어온다’는 생각으로 적대시했다. 이 때문에 독립투사들도 일본의 앞잡이라 오해받는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조선족을 가리키는 꼬리빵즈 외에 산둥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산둥빵즈’란 말이 있다. 산둥 사람들 중에도 조선인처럼 일본말을 배워 일본인과 중국인의 통역에 나선 이가 많아서라는 견해와, 산둥 사람들의 처지가 조선족과 비슷한 데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청나라 말기에 위하성이 쓴 ‘계림구문록’이란 책에 “혁철인(赫哲人) 집집마다 꼭 산둥빵즈를 고용해 집 재산과 가무를 돌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둥 사람들은 중국 전통의 병기인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가지고 다니며 위험할 때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로 삼았는데, 특히 관자(管家·집안 관리해주는 사람)를 맡으며 몽둥이를 들고 무리지어 다녀 산둥빵즈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고구려인의 기상

    꼬리빵즈가 조선족이 물건을 어깨에 걸머져서 나를 때 즐겨 이용하던 멜대나 조선족 여인들이 사용하던 빨랫방망이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족 남자들은 멜대 외에도 지게막대기 등 막대기를 즐겨 들고 다녀 조선족 하면 으레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거나 지게막대기를 손에 잡고 일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가리켜 꼬리빵즈(고려막대기)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 한족 여자들이 빨래할 때 빨래판을 쓰거나 비벼서 빠는데 조선족 여자들은 빨랫방망이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지린(吉林)성 투먼(圖們)시에 살았던 박영애씨는 “한족들은 풀 먹이는 옷감이 없었지만 우리는 옷에 풀을 먹여야 했다. 빨래가 마르고 난 뒤에도 밤낮없이 다듬잇방망이질을 했으니 중국인들 눈에도 별달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빨랫방망이 때문에 꼬리빵즈란 말이 생겨났다”고 증언한다.

    한편 일부 조선족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중국(당시 수나라)과 마지막 전쟁을 할 때 여자들이 빨랫방망이까지 가지고 나가 싸운 데서 꼬리빵즈라는 말이 생겼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방(幇)’이란 무리라는 뜻으로 주로 사람 패거리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인데, 꼬리빵즈는 고려패거리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중국인은 못난 사람, 싫은 사람의 무리를 얕잡아 부를 때 ‘방’을 쓴다는 점에서 이 단어 도 비하의 뜻을 내포한다.

    역사학을 전공한 랴오닝성 조선족사범대의 심모 교수는 이 표현이 고구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됐다고 한다. “중국은 고구려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놀라곤 했다. 고구려인은 강한 결집력으로 항상 무리지어 다녔고 힘도 세서 인접한 나라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여기서 ‘고구려 무리가 온다’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것.

    또 닉네임 ‘홍산도’라는 조선족 네티즌은 인터넷 사이트 모이자닷컴에 올린 글에서 “산둥 사람들과 조선족이 하나같이 잘 뭉친다는 의미에서 ‘빵즈’가 붙여진 것이 맞다”며 “‘고려패거리’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용맹한 고구려 병사의 몽둥이

    실제로 꼬리빵즈라는 말을 모르는 한족에게 그 의미를 물었을 때 ‘방(幇)’의 의미를 떠올려 ‘고려패거리’로 생각는 사람이 많았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내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네 사람의 악질 중앙간부를 중국 ‘4인방(四人幇)’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탤런트 3인방’ ‘과학계 3인방’ ‘바둑 신예기사 4인방’ 같은 좋은 의미로 ‘방(幇)’을 쓰지만 중국에서는 주로 패거리라는 나쁜 의미로 쓴다.

    꼬리빵즈가 용맹한 고구려 병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고구려몽둥이 혹은 고구려방망이(棒子)의 뜻을 담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용맹한 고구려 병사는 중국인에게 늘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실제 많은 한족이 “옛날 고구려는 대단했다”며 이 어원에 수긍했다.

    모이자닷컴의 닉네임 ‘별찌’(지린성 안투현)는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고구려 때 중국과 변경을 두고 충돌이 잦았는데, 고구려 병사들이 육모방망이(방쯔)를 들고 싸우는 것이 무척 용맹하고 날렵해 중국 병사들이 고구려 병사를 부르는 대명사였다’고 가르쳤다”고 소개했다. 닉네임 ‘고려청년’(산둥성 옌타이시)도 “한족은 전의를 상실하면 오합지졸이 되곤 했지만 고구려인은 결집력이 대단해 꼬리빵즈라는 말은 한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며 “한국에서 ‘당나라 군대’라는 말이 조롱의 뜻으로 쓰이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꼬리빵즈’를 아십니까?

    한복을 차려입고 거리축제를 벌이는 옌볜 동포들.

    응답에 참여한 많은 조선족이 부모나 조부로부터 꼬리빵즈는 고구려몽둥이에서 유래한 말이라 배웠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에는 조상의 정체성을 우호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주관이 개입돼 있다는 비판도 있다. 고구려의 기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지만, 이면에는 타민족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서러움과 중국 내 소수민족이 겪는 차별을 고구려 조상의 정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위안이라는 것이다.

    꼬리빵즈가 용맹한 고구려몽둥이의 뜻에서 조선족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어휘로 전락한 것은 민족 몰락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고구려의 기상을 기리며 살아가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이 살아 있다는 흔적이기도 했다.

    한반도 끝 방망이 모양의 나라

    소수는 꼬리빵즈가 중국에 간 조선사절단이 휘두른 몽둥이 또는 한반도 지형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한다. 또 속어 ‘똥자루’가 어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2002년 ‘베이징저널’에 소개된 ‘꼬리빵즈(高麗棒子)’라는 글에는 “옛날 조선인들이 종주국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러 가는 도중 마적들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중국 조정에서 조선사절단에게 접근하는 중국인을 몽둥이로 족칠 수 있는 특권을 줬다. 그러나 사절단이 이를 악용해 중국 양민까지 족쳤기 때문에 조선인을 ‘꼬리빵즈’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있다.

    한반도의 지형이 방망이 모양이라 그렇게 불렀다는 견해는 중국의 영토 확장욕과 연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대륙 기질을 지닌 중국인은 중국 대륙의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한반도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망이나 꼬리 정도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한 조각쯤으로 보고, 고구려 역사까지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 주장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시각이 이를 방증한다. 땅에 대한 욕심을 포장한 중화세계의 명분하에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의 의식이 표출된 말이 꼬리빵즈라는 것이다. ‘한반도는 중국이 쥐는 방망이’라는 뜻이다.

    한편 단순히 ‘방쯔(방망이)’의 의미를 확장해 머리 없는 방망이란 뜻으로 쓰다가 거기서 머리 없는 자루, 고려자루, 고려똥자루 같은 속된 표현으로 변질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배배 꼬인 듯 움츠렸던 삶

    꼬리빵즈는 배배 꼬인 튀김 음식인 ‘마화’에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있다. 중국의 신장(新疆) 위구르족 자치구에서는 꽈배기 같은 튀김인 마화를 꼬리빵즈라고 불렀다. 마화, 즉 꼬리빵즈의 꼬인 형상과 조선족의 삶이 비슷해 조선족을 마화라 불렀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중일전쟁과 같은 열강의 패권 다툼이 있을 때마다 튀겨져 배배 꼬인 꽈배기 신세가 되는 조선족의 삶을 빗댄 표현이다. 다음은 독립투사 양세봉 장군의 조카인 양이복씨가 마화 꼬리빵즈 때문에 겪은 일화다.

    “1963년부터 1970년까지 7년 동안 위구르족 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생활했어요. 그때 상하이에서 온 하향지식청년들이 마화를 사면서 꼬리빵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뒤돌아보며 ‘지금 나를 욕했나?’ 하고 다그쳐 물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마화를 그렇게 부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북 지방에서는 꼬리빵즈가 조선사람을 욕하는 말이라고 알려줬지요. 1982년 상하이에 갔을 때 이 일이 생각나 상하이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봤어요. ‘마화를 꼬리빵즈라고 부르냐?’고. 그렇다고 하더군요.”

    양이복씨는 조선족이 배배 꼬인 물건을 잘 만들고 잘 써서 붙은 별명이라 해석한다. 조선족은 짚신, 닭둥지 등 꼬아서 만든 생활용품을 많이 사용했으며, 배배꼰 똬리를 머리에 얹어 물건을 날랐다.

    중국의 대도시에서 막노동하는 사람들이나 시골에서 온 촌뜨기를 빵즈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조선족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꼬리빵즈라 불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의 ‘빵즈는 방쯔(膀子)’로 노동일 하는 사람 외에도 천한 일을 하는 사람, 촌뜨기라는 어감도 지니고 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은 ‘도포(道袍)’라는 시에서 “가라면 어디라도 갈 꼬리빵즈”라고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 바 있다. 꼬리빵즈라는 말에 얽힌 조선족의 일화에선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살아가야 했던 한민족의 설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옛날 소학교 때는 꼬리빵즈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어요. 영화를 보러 친구들과 차를 타고 시내로 갈 때면 차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어요. 우리가 말을 하면 혹시 누군가 조선족인 줄 알고 꼬리빵즈라고 욕할까봐 두려웠던 거죠.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어요. 또 한족 부락을 지날 때는 마구 뛰어갔어요. 우리가 꼬리빵즈라는 걸 알면 돌멩이를 던지면서 ‘꼬리빵즈’라 소리치며 쫓아왔어요.”(김춘련, 선양시 조선족 사범대 교수)

    “조선족은 누구나 한번쯤은 꼬리빵즈란 욕을 들어봤을 거예요. 일제치하에서는 나라를 잃고 남의 땅에 빌붙어 사는 신세라 그런 욕을 밥 먹듯 듣고 다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어요. 이민 3세인 나도 어린 시절 늘 한족 아이들과 조선족 아이들이 패로 나뉘어 산둥빵즈, 꼬리빵즈 해가며 싸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월의, 다롄(大連))

    국력 따라 변하는 의미

    중국인은 한민족이 이주하던 초기부터 조선족을 꼬리빵즈라 부르며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중국인은 일제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 하물며 독립군까지 일본의 앞잡이로 여기던 상황이었다.

    조선족은 한족한테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이민족으로, 또 소수민족으로 겪어야 했던 수모는 조선족을 더욱 위축시켰다. 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은 치욕일 뿐 아니라 정체 모를 두려움의 원인이기도 했다. 꼬리빵즈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지 않고 대응해 같이 욕을 하다 보면 폭력적인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는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살았는데, 한족 아이들과 조선족 아이들이 늘 싸웠다. 조선족 아이들이 먼저 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들이 우리를 꼬리빵즈라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면 우리는 ‘산둥빵즈, 마이타이(더럽다)’라고 반격하곤 했다.”(조선족마당 닉네임 ‘춘’)

    “꼬리빵즈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무척 나빴어요. 꼬리렌 하면 괜찮은데, 꼬리빵즈라고 하면 우리를 멸시해서 욕하는 말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었죠. 그렇게 부르면 쫓아가서 패줬어요. 대학에 다닐 때 한족들이 꼬리빵즈라고 할 때마다 대판 싸웠죠. 지금도 누가 날더러 꼬리빵즈라 하면 싸워요.”(조모씨, 선양시)

    한족들이 꼬리빵즈라고 놀려댈 때마다 옌볜 지역에서는 “니 쌔쓰개 아이야(옌볜 방언, 너 미친놈 아니야?)” 라고 맞받아 쳤다. 또는 ‘중궈주(中國猪·중국돼지)’, ‘칭궈빵즈(淸國棒子·청나라빵즈)’라는 말로 분한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 청인이 ‘꼬리빵즈!’라고 하자 ‘똥되놈 새끼!’라고 응수하는 장면이 있다. ‘칭궈빵즈’라고 맞받는 것은 중국의 옛이름 청나라(淸國)가 ‘가난한 나라(窮國)’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조선족보다도 못사는 한족사람이라고 되받아치며 설움을 달랜 것이다.

    꼬리빵즈의 애환을 담은 노래도 만들어졌다. 2002년 7월에 결성된 조선족 무명가수 ‘2mc’의 노래가 조선족 사이트를 타고 울려 퍼진 것이다. 다음은 노랫말의 일부이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 손목 잡고 / 두만강 건너실 때 겨울이었어 /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렸어 / 쌩쌩 차가운 칼바람 속에 강가의 / 어둠 속에 얼어붙은 나룻배 / 하얀 눈 위로 가지런히 찍혀지는 / 크고 작은 발자국 / 무서운 어둠을 가로 질렀어 / 한숨짓고 뒤돌아보며 눈물을 / 흘리셨어 그리고 힘내 걸으셨어 / 하지만 남겨둔 게 너무 많으셨어 / 그리고 꼬리빵즈 되셨어 / 만주땅에 꼬리빵즈 되셨어 / 세월이 흘러갔어 왔어 내가 왔어 /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 교포? 동포? 나는 차이나 메이드인 차이나”(‘MADE IN CHINA’)

    최근에는 꼬리빵즈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이 작고 못사는, 중국의 속국에서 당당하게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로 그 위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한족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족뿐 아니라 중국 내 거주하는 한국인에게도 ‘한선족’ 또는 꼬리빵즈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자랑스러운 이름 꼬리빵즈

    한국에 유학 온 왕월(한족, 지린성 투먼시) 씨는 “조선족만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한국인, 조선인(북한),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 등 전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꼬리빵즈라 부른다”고 말했다. 꼬리빵즈가 조선족과 한국인을 폭넓게 부르는 용어로 변하면서 원래 담고 있던 경멸의 의미가 희석된 것이다.

    꼬리빵즈에는 분명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와 드높은 기상, 그리고 그 후예인 조선족과 한국인의 민족혼이 깃들어 있다. 동북공정, 고구려사 왜곡 등의 문제를 놓고 한중 간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는데, 꼬리빵즈의 어원 고찰은 중국인이 조선인의 뿌리를 고구려라고 인정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꼬리빵즈’를 아십니까?

    인터뷰에 응한 한족들과 함께한 필자(오른쪽에서 두 번째).

    꼬리빵즈의 어원을 찾는 과정에서 한민족의 민족공동체적 특성과 멜대와 빨랫방망이를 즐겨 사용하던 생활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인은 한민족이 자신들과 다른 독특한 생활 문화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꼬리빵즈라 불렀다. 이는 한민족은 한국을 떠나 어느 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더라도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왔다는 것을 입증한다.

    꼬리빵즈의 어원을 중국과 일본의 통역이라는 연결막대기로 볼 경우 쓰임새가 달라질 수도 있다. 오늘의 꼬리빵즈는 남과 북을 잇는 통일의 꼬리빵즈로 변화할 것이다. 통일을 기약하며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한반도의 현실 속에 중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꼬리빵즈와 폐쇄적인 북한 당국과 친분을 맺고 있는 꼬리빵즈(고려막대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꼬리빵즈는 이제 설움의 이름을 벗고 새 역사 속의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야 한다. 중국 내 200만 조선족은 13억의 중국인 틈바구니에서 문화혁명 기간에 숱한 수난을 겪었음은 물론 사회 안정기에도 출신의 한계 때문에 신분 상승의 제약을 받고 있다. 심지어 한중 수교 후에도 여전히 양국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1992년 옌볜 조선족 자치주 김종국 주임이 조선족의 정체성을 조사했을 때 70% 이상이 자신의 조국은 중국이라 답했다. ‘중국은 조국, 한국은 고국’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이들의 복잡하고 고단한 삶을 짐작케 한다.

    조선족 학자 정판룡은 조선족을 중국으로 시집온 며느리에, 옌볜대 김관웅 교수는 북조선의 과목(果木)에 옌볜의 돌배를 가접시킨 사과배에 비유했다. 이 모든 논의는 조선족의 삶이 지닌 특수성을 대변한다.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조선족의 입지는 더욱 애매해졌다. 조국으로 부르는 중국과 고국으로 부르는 한국과 조선(북한을 지칭)이 있어 ‘세 부모를 섬겨야 할 형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선족 작가 허련순은 소설 ‘바람꽃’에서 조선족을 가리켜 “바람이 불어온 곳과 바람이 자는 그 곳, 두 세계 중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람꽃”이라고 했다. 실제로 조선족 중 한국에 왔다가 “당신은 중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에 배신감을 안고 돌아간 이가 한둘이 아니다.

    최근 10여 년간 한국 중소기업이 중국에 진출하고 많은 한국인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중국의 경제를 만만히 보아왔다. 수천년 동안 중국의 위세에 억눌려왔던 한국은 1900년대 후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중국보다 우월한 듯 행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 석학이 “우리가 중국을 우습게 여긴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단 30여 년 동안일 뿐이다”라고 진단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중국인은 중국이 한국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인 특유의 느긋한 대륙 기질이자 루쉰이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중국인의 대표적 특성으로 내세웠던 정신 승리법일지도 모른다.

    중국은 지구상에서 미국을 견제하고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꼽힌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얻은 약간의 경험과 기억으로 중국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미국, 일본, 독일의 한국 동포를 가리켜 재미교포, 재일교포, 재독교포라고 하면서 유독 중국의 동포는 조선족이라 부른다. 물론 중국에서 조선계열 소수민족을 조선족이라 칭하기 때문이라지만, 이 호칭 뒤에 그들을 얕잡아보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 한국에서조차 조선족을 비하하는 뜻을 담아 꼬리빵즈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을 찾아온 꼬리빵즈는 정겨운 딱친구, 짜개바지 친구와 이별하고 그들이 힘들 때 도움을 준 조국 중국을 떠나는 아픔을 감수하며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끊임없이 살길을 찾아 유랑하는 꼬리빵즈의 설움은 조선족뿐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설움이며, 그들의 유랑은 한민족 전체의 유랑이다. 우리는 조선족이 군식구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공동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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