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일 벌이지 않고 쉬는 게 난세 수습 첫걸음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6-04-11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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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진시황(秦始皇·기원전 259~기원전 210)은 여러 나라가 할거하던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선구자이자 중국 문화권 최초의 통일제국 창건자였다. 개인적 선악시비의 평판을 초월해 그가 역사에 특기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한 해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본격화해 6국(韓·魏·楚·燕·趙·齊)을 각개격파로 정복할 때까지 17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이로써 500여 년 춘추전국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은 ‘영웅’이 됐다. 통일제국 진은 진시황 사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는 분단국가의 통일 여정에서뿐 아니라 통일국가의 멸망 과정에서도 중요한 시사적 교훈을 후세에 남겼다.

    우선 춘추전국의 통일 과정을 보자. 6국이 멸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진시황의 무력을 첫손에 꼽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6국을 멸망시킨 주체는 6국 왕조와 신하 자신이었다. 그들은 전쟁 내내 ‘바보들의 행진’만 거듭했다. 침략자를 욕하는 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엉터리 지도자를 추대하고 맹종해온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멸망 전야의 정치현실에 절망, 책임을 느끼고 멱라강에 투신자살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진시황은 무력행사 이전에 항상 외교와 모략을 선행함으로써 희생을 극소화하는 동시에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개혁, 또 개혁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동방 진출을 본격화했을 때 이에 맞서 총동원 체제로 저항한 나라는 조(趙)와 초(楚)뿐이었다. 두 나라는 면적과 인구 등 모든 면에서 덩치가 가장 컸으나 지도부가 어수룩해 온 나라에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나머지 나라들의 지도부는 부패와 무능, 기회주의에 찌들어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다. 전국시대 6국의 공통점은 간단명료하다. 한결같이 개혁에 실패한 국가라는 사실. 6국의 무지몽매한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욕심만 챙겼을 뿐 유능한 개혁 인재의 등용을 외면하거나 방해했다.



    그에 반해 진은 지도부의 확고한 개혁의지 아래 생기와 의욕이 넘쳐흘렀다. 상앙(商?) 이래의 개혁 성공과 그 지속은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증대’를 확신하게 했고, 천하를 향한 ‘개방적 인재등용’의 길을 열었다. 진나라와 6국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향후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지를 예언하고 있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출현시킨 진제국은 고대 중국 문화권에선 최초로 중앙집권적 전제 군주제하의 통일 관료국가였다. 이는 중국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특기될 만한 ‘대사건’이었다.

    중국은 현재 한(漢)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을 아우르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자 13억명을 거느린 세계 최다 인구 국가다. 국토의 총면적은 960만㎢로,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계 3위. 중국은 이러한 양적 거대함 이상으로, 문화와 국민 자질의 질적 우수성 때문에 세계의 이목을 끈다. 이미 중국인은 나침반·화약·종이·활자 인쇄술이란 4대 발명품으로 인류문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은 또 어떤가. 오랜 ‘정체의 잠’에서 깨어난 발랄한 기상으로 온 나라가 약동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중국의 ‘초강대국’ 진입은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관점에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한(漢)민족 고대사에 기록된 맹목적인 혼란과 불안의 연속, 즉 난세(亂世)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는 주(周) 왕조에서 시작되고 춘추전국시대에 갈피를 잃은 종법제(宗法制·문벌주의)와 분봉제(分封制·할거주의와 당파싸움, 지역감정 등)를 전국적 범위에서 타파하고 일소했다. 그 대신 군현제(郡縣制)와 율령제(律令制)를 실시했다. 이는 중앙에서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 임명해 지방에 파견하고, 법률과 규칙 및 특명에 따라 일하게 하는 참신한 제도로,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관찰되는 한(恨)풀이, 분풀이식 인사나 사찰, 정보정치에서 비롯된 정실 인사와는 판이했다.

    진시황은 통일과 동시에 법과 규칙,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특히 문자 표기의 통일을 이룩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국어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로마자 표기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정리해 후대 교육에 기여하는 것과 같았다.

    공(功)이 더 큰 ‘희대의 폭군’

    진의 통일은 한(漢)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대하고 국가의 경계선을 명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백성에게선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외적을 막기 위한 국방관념도 정착됐다.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축조하다 중지된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연결해 비록 토성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면모를 갖춘 것도 바로 이즈음. 만리장성은 그후 명(明) 왕조 때 벽돌 등으로 개축됐다.

    진시황은 산업과 경제의 중앙집권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경제력을 수도권으로 집중시켜 일부 야심가들의 지방할거를 예방한 것. 지방의 부호들은 자신들의 수공업 시설을 정리해 서울로 이사를 와야 했다. 또한 각지의 목축업자와 광산 개발자 등 신흥재벌을 중앙으로 초청해 상여(賞與)를 베풀면서 조정의 의식이나 회의 등에 참석케 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한 지방 관료에겐 이를 그의 치적으로 인정했다. 변방의 이민을 장려하고, 이주민에 대한 보호에도 노력했다. 오늘날의 광둥성과 랴오닝성 지역에 농부들을 처음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케 한 주인공이 바로 진시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 대한 호칭이 ‘차이나’ 또는 ‘시나’로 표기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진(秦=Qin 또는 Chin)이 중국을 대표해 그 존재를 세계에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위대성은 그만큼 크다. 특히 마오쩌둥 이후 현대 중국에선 진시황의 역사적 역할을 유난히 높게 평가한다.

    사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과 조선 왕조는 진시황을 형편없이 폄하했다. 그는 항상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됐으며, 그의 학정은 중국의 발전을 지연 또는 추락시킨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한 ‘격하작전’에는 유학자들이 선두를 섰으며 관계(官界)의 위선적 왕도(王道) 정치론자들이 합세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의 통일 정치에는 분명 공(功)과 과(過) 양면이 있다. 하지만 공이 더 컸다는 게 현대 중국인의 시각이다.

    진시황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매번 노력으로 돌파한 난세의 정복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박해했거나 반대한 자들은 모조리 죄인으로 단정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혼란과 난맥 속의 시대 환경에서 기강을 확립하고 질서를 정립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강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15년을 넘기지 못했다. 짧은 정권수명은 독재와 강권, 그리고 정보정치의 공통적 말로이지만, 진제국의 멸망은 진시황의 개인적 실정(失政)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계속되는 난세에 지치면서 살아남은 한국인은 흔히 ‘어디를 바라봐도 제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없다’고 개탄해왔다. 피로곤비(疲勞困憊)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동원보다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춘추전국 말기의 중국인 또한 그러했다. 옥스퍼드대가 펴낸 사전 해설에 의하면 ‘난세(turbulent days)’란 ‘정신 차릴 수 없는 돌연한 변화와 혼란의 연속, 그리고 국론 분열에다 드물지 않게 터지는 폭력사태가 거듭되는 세월’이라고 씌어 있다. 간명하고도 빈틈없는 설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열된 상태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태평성세의 안거낙업(安居樂業)을 보장하려면 새로운 ‘건설’에 앞서 우선 ‘휴식’부터 부여해야 한다.

    독일 통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독 헌법 체제로의 흡수’라는 형식으로 격동 없는 휴식을 우선 선택한 것. 한마디로 독일의 통일정치는 ‘보살핌의 정치’였다. 그것은 흡수 통일의 중심인 서독이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사회복지가 결합된 사회국가(Der Sozial staat)였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선군(先軍) 정치의 전국적 확대를 의미했다. 곳곳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으며 천정부지의 세금부담 증대, 징수와 징발의 남발, 무자비한 징용과 징병의 강행 등 서민들로서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을 계속 강요했던 것이다.

    천하통일 15년 만에 ‘천하대란’

    막다른 절망은 최후의 용기를 부르는 법.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로 즉위하자(기원전 210년), 천하대란의 여명은 새롭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은 죽어서도 전쟁을 꿈꾼 것일까?

    기원전 209년 7월 장마철에 징병돼 북쪽으로 끌려가던 농촌 청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소문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으며 삽시간에 퍼졌다. 9월에는 벌써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등의 세력이 등장했다.

    진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천하통일 후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항우와 유방 간의 초한(楚漢)전쟁이 벌어져 3년을 끌었다. 진의 통일제국은 또다른 천하대란으로 이어지면서 합계 6년간의 난세를 초래한 셈이다.

    진의 통일이 난세 수습에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방이 창건한 한(漢) 왕조는 국민이 갈망해온 시대적 요청인 태평성세를 이룩했다. 그 비결은 바로 ‘국민과 더불어 휴식한다’는 이른바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실천이었다. 이는 이미 왕조 초창기에 정책 기조로 확립된 것이었다. 한 왕조는 새 일을 벌이지 않았으며, 말 바꾸기를 하지 않았다.

    서구의 현대 학자들은 ‘정치학의 어머니는 역사’라고 단언한다. 또 역사적 교훈을 존중하는 중국의 전통적 문장학에서는 ‘옛일을 말하면서 오늘의 시사 문제를 평론한다’는 이른바 ‘담고론금(談古論今)’을 중시한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뒤이은 진시황의 통일천하 전후사는 21세기 남북통일을 앞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적 교훈을 던져준다. 시대환경의 변천과 입지조건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자타(自他), 고금(古今)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유사한 과오는 언제든 되풀이될지 모른다.

    오스트리아의 경험

    일찍이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회고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에서 배운다지만, 나는 남의 경험에서도 배우기를 즐겼다”고 갈파했다. 한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기성찰’도 중요하지만 ‘주변관측’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야 할 시점이다. 반도국가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외교적 자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분단이 타율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듣기에만 흐뭇한 ‘자주통일’ 구호에 현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고대 중국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이뤄졌다. 당시 통일에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뿐이었다. 중심 국가로서의 종합국력 증대, 특히 무력의 강화와 민심(民心) 장악이 바로 그것. 민심의 장악은 통일국가의 난세수습과 국정안정 과정에 있어 필수 조건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과 미국의 군사적 점령하에 분단됐던 독일어 사용국 오스트리아의 통일 과정을 분석해보자. 우선 그 나라의 좌우 정치인들은 ‘외세의 작용’이라는 분단 현실을 직시하고 성급하게 ‘자주통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무렵 미·소·영·불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전범국가인 독일제국과 같은 국가라는 의미에서 징벌적 성격의 ‘분할점령’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독일제국을 약화하기 위해 중립국으로의 분리 독립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좌우 정치세력은 진정한 자주통일을 위해 한길에서 협력했다. 즉, 속으로는 자치능력을 배양하면서 밖으로는 외세를 자극하지 않고 체면을 세워줬고,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세련되게 적응하는 ‘솜씨’를 보였다. 그들은 일단 연합국과의 협상 대상을 단일화하기 위해 좌우 합작을 형성했다. 완전한 통일·독립에 앞서 사실상의 단일 정권을 수립한 것.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애호 중립의지’를 한결같이 홍보하고 또 법제화했다. 외교에서는 주변 세력의 어느 일방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자세를 고수해 모든 이해 당사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

    이렇듯 슬기롭고 자주적인 정치환경 적응 능력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통일·독립은 1955년 5월 ‘1+4’의 합의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광복 직후의 남북한은 제각기 ‘일변도 외교’와 ‘사상투쟁’의 고집스럽고도 우매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복수(複數)의 외세에 의한 민족해방이라는 희비 쌍곡선의 현실을 몰각하고 있었던 것.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광복 직후, 냉전체제 돌입 직전의 시점에서 남북통일의 첫 번째 기회를 놓친 셈이다.

    독일인의 지혜

    그렇다면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독일의 국토분단은 애초에 복수의 외국 군대에 의한 분할 점령이라는 징벌적 의미가 컸으며, 독일의 재통일은 동서독 쌍방 주변국들의 한결같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후 미소의 ‘동서 냉전’이 표면화하면서 쌍방이 각기 자국 점령지역을 군사동맹의 전초 기지로 이용했다.

    그러다 1989년 12월3일, 드디어 경천동지의 역사적 전환이 도래했다. 소련의 붕괴 기운과 동구의 대변혁을 배경으로 지중해의 말타 섬에서 회동한 미소 정상이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하의 동독과 미국 조종하의 서독은 각기 냉전시대의 이용 가치를 상실했다. 나아가 주변국들에 대한 ‘무해성’만 보장된다면 독일 통일도 마다할 바 아니라는 국제정치의 통념이 묵시적으로 성립됐다.

    냉전 종식을 전후한 이러한 국제적 환경을 양독(兩獨) 정치인과 국민은 슬기롭고, 또 침착하게 이용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 개혁), 동구의 대변혁(자유화, 민주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서산낙일(西山落日), 냉전의 종식과 같은 객관적 통일조건의 성숙에 대해 양독 정치인들은 영토론과 민족주의의 포기, 주변국들에 대한 전방위적 친선외교로 응대했다.

    우선 동독의 통일운동은 소련의 의심과 반발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동구 각국의 보편적 개혁운동과 보조를 맞춰 나갔다. 처음에는 통제된 계획경제의 관료주의적 비효율성을 문제 삼다가, 점차로 민주화·자유화 요구를 부각시켰다. 군중 동원에서도 결코 정당이 서둘러 표면에 나서지 않고, ‘연대(連帶)’나 ‘시민 포럼(Forum)’을 앞세웠다. 객관적 조건 형성을 보아가면서 점차로 통일운동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확대해나간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한편 서독의 경우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사회복지에 걸친 3위 일체 ‘사회국가’ 건설이라는 통일조건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매력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독일의 통일은 ‘2+4(분단 쌍방에 더해 미·소·영·불)’의 납득과 합의조인에 따라 햇볕을 봤다. 1990년 10월3일의 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해방’의 이름으로 분단된 나라의 통일이, ‘징벌’ 대상국가의 통일보다도 더 늦어지는가. 왜 동북아의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는 냉전의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도래한 통일 기회를 놓쳐야 했던가. 당시의 시대 환경이 독일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쌍방에 걸쳐 단결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즉 민족적 구심을 만들어낼 지혜와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부터 나무라야 할지 모른다. 한편으론 정치세력의 기득권 고수와 이기주의적 타산, 서민층의 지도자 선출 오류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 분석일 따름이다.

    우리 겨레의 자치능력 부족과 같은, 이런 분석의 밑바닥에는 거듭된 민족적 비극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역사’가 가로놓여 있다. 이는 현재도 우리 모두가 딛고 서야 할 문제점이기다. 또한 그 이상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반도국가가 처한 지정학적 조건이다. 즉 해륙(海陸) 쌍방의 열강 대국들이 각기 이 반도를 바라보면서 간직해온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이다. ‘역사’는 민족공동체가 잊지 못할 전쟁과 평화, 문화와 교류, 국책과 관행에 얽혀 있다. 한편 ‘좌표’는 개인의 처지와 인간관계처럼,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국제 관계에 결부되어 있다. 자타의 그 주체적, 객관적 조건이 얽히고설켜 한반도의 역사는 불행을 거듭해온 것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적 대결로 점철됐던 동서냉전은 확실히 사라졌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에도 일반 중국인과 러시아인은 북한의 편의를 돌보는 일이 마치 자기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거꾸로 이런 역사의식과 좌표인식은 남한 동포들에게도 살아 있다. 비록 늘 자각하진 않더라도 잠재의식 속에 건재하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작동한다. 고정불변은 아니겠지만 바로잡히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2+4’의 현실 인식과 자주정신

    1945년 8·15광복은 잠깐 동안의 환희에 이어 오랜 기간의 고통과 비애를 맛보게 했다. 만약 앞으로 도래할 남북통일마저 그 모양으로, 순식간의 감격에 이은 새 난세의 개막과 더 큰 희생의 전란을 초래한다면 이 민족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부푼 기대가 실망으로 돌변하여 새로운 부조리와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을 상상하면 그 불행의 질과 양은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견된다.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은 서울 거리.

    그러한 ‘마이너스 사태’의 발생을 예방하려면 이미 언급했듯 통일 직후의 정책 기조가 ‘휴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보살핌과 조정의 정치가 필요하다. 민심이 통일에 기대하는 바는 난세 수습과 태평성세이기 때문이다. 절대 ‘새 건설의 시작’이니 ‘주체혁명’, ‘과거 따지기’ 등을 선행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인권유린과 기아(飢餓)정치의 ‘주체’가 통일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대국적인 동질화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이때 집권세력과 정치인의 자질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 동서에 걸쳐 사심 없는 ‘공익 우선’의 경향이 뚜렷했다. 서독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동독 인민에 대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통일 비용을 서슴없이 감내했다. 동시에 동독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조국통일을 위해 그들의 권력, 지위, 특권, 체면 등 온갖 것을 주저 없이 내놓으면서 희생을 감수했다. 지도자 선출에서도 오류란 없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 또 이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외교적 필요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그 답은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반도국가의 내부단결과 자위태세가 만만치 않아서, 이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시도가 자신들에게 막대한 지출·희생을 요구할 때다. 중국 수(隋)제국의 양제(煬帝) 후반기 한반도가 바로 그런 시기. 다음으론 해륙 쌍방의 외세가 국경 밖에서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세력균형을 설정할 때, 예를 들면 구한말 러·일 대결과 청·일 대결 국면 당시의 한반도와 같은 경우다. 그 외에 주변 강대국들이 각기 내란이나 분규에 바빠서 반도 진출에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주변 경합 세력 중 어느 일방의 침략이나 독주를 방관하지 않을 세계적 규모의 감시·견제가 가능할 때 등이다.

    한편 한반도에는 안보를 넘보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감시망이 있어야 한다. 위기의 도래에는 항상 선행하는 조짐이 있다. 모든 위기는 ‘관계’에서 조성되기 때문이다. 그 조짐을 제때 감지하기 위해선 동물의 촉각처럼 식견에 바탕을 둔 통찰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안보가 위협당했을 때는 항상 위험신호가 있었다. 대륙 혹은 해양의 열강 중 어느 하나만이 반도에서 독주하면 우리나라는 그 종속국이 되든지 또는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면치 못했다.

    또한 반도에 들어선 복수의 외세가 경합했을 때 우리 조국은 그들의 싸움판이 되거나 국토 분단을 모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반도국가의 정부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일변도 정책을 일삼으면, 소외된 다른 쪽의 개입 욕구를 부채질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일방 세력의 안보 정책에 위배되거나, 그 명예 내지 가치관을 손상하는 감정외교는 절대금물이다. 유사시에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응징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 ‘자주성’이니 ‘중개’니 하면서 전시효과에 분주하다가는 분규에 말려들어 발뺌하기가 어려워지고 국제적 빈축을 사기 쉽다. 실속 없는 허영외교에 들뜨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정치병법’ 등


    독일의 통일조건 형성에서 으뜸으로 중시된 것은 ‘2+4’의 납득이었다. ‘2’란 분단 쌍방이고, ‘4’란 미·소·영·불이었다. 환언한다면 독일 통일은 서독의 흡수력 있는 내실 갖추기와 동독의 현실직시 등 지혜로운 민족의 자체 대응력과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현실의 파악과 순응 등 국제 환경에 슬기롭게 적응해 낸 합작품인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근 100년 민족사에 깃들인 겨레의 비원은 요컨대 ‘난세 수습’이었다. 곧 신뢰의 인간관계와 안정된 사회생활의 영위였다. 그리고 최근에 들려오는 ‘6’이란 결국 ‘2+4’가 아니던가. 오직 그 성원들과 객관정세의 유동성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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