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부검剖檢의 칼 맞을 것인가 부활復活의 칼 휘두를 것인가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4-27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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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정원 직원 “지금 국정원은 골다공증 환자”
    • 데탕트 기류 속 언론 공세에 무너져내린 美 CIA
    • 미국 처치특위와 국정원 과거사위
    • 서독 정보기관과 베트남 정보기관의 차이
    • 국보법 폐지, 해외정보처 신설= 對共수사권 폐지
    • 9·11테러로 정보기관 강화한 미국, 그러나 한국은…
    • 정보-운영 차장제 도입으로 국내-해외 차장제를 깨라
    • 미국은 CIA와 미국방부의 갈등으로 ODNI 만들어
    • 정보감찰관제 도입해 감독 강화해야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한국사회엔 냄비 속성이 있다. 불을 피우면 금방 끓어오르고, 불을 끄면 언제 끓었냐는 듯 금세 식어버린다. 이러한 속성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국가 안보와 관련한 분야에서까지 냄비 근성을 드러낸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지난해 7월, 1997년 대통령선거 직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주요 인사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이프, 세칭 ‘X파일’이 공개돼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의 연장선에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되고, 이수일 전 차장은 자살했다. 다른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김은성 전 차장이 추가 수사를 받게 됐다. ‘당연히’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소리가 쏙 들어가버렸다.

    국정원 개혁은 입법권을 쥔 국회가 국정원 관련법을 개정하거나 제정함으로써 시작된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공청회를 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정원 관련 법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연일 보도를 쏟아내던 언론도, 식당에 가면 “이 밥상 밑에도 도청기가 있는 것 아니야?” 하던 국민도 채 1년이 못 돼 관심이 식은 듯하다. 이제 개혁을 위한 시동을 걸었는데….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대체로 수사권 폐지를 국정원 개혁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은 외견상으로나마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자기 의견 표출은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소속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은 ‘신진보 리포트’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국정원의 수사권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정보위의 열린우리당 간사인 임종인 의원은 지난해 12월2일 열린우리당 의원 6명, 민노당 의원 9명, 한나라당 의원 1명과 함께 기존의 국가정보원법에서 수사권만 폐지한 ‘국정원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도 유사한 내용의 국정원 관련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야당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 3월23일 정보위 한나라당 간사인 정형근 의원은 같은 당 의원 18명과 공동으로 ‘국정원법 전부 개정안’과 ‘국가정보활동 기본법안’을 발의했다. 그가 내놓은 국정원법 개정안에는 국정원이 지금처럼 수사권을 갖는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기본법안에는 국내 13개 정보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는 정보협의회와 13개 정보기관을 감독하는 정보감찰관을 두는 등 정교하게 짜여 있다.

    여야의 법안 제출로 국정원 개혁 방향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국정원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고 싶다면 우리에 앞서 유사한 길을 걸은 선진국의 정보기관 개혁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통일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자본주의로 흡수통일한 독일과 공산주의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 사례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언론과 정보기관

    작금의 국정원 개혁 논의의 봇물을 터뜨린 것은 언론이다. MBC의 이상호 기자는 X파일을 입수했으나 통신보호기밀법 때문에 공개하지 못했다. 그 사이 ‘동아일보’ 서정보 기자가 X파일의 존재를 보도했고, 이어 ‘조선일보’ 이진동 기자가 X파일 녹취록을 입수해 실체를 보도함으로써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국정원이 동네북 신세가 되고 말았다. X파일 사건이 터지기 4년 전에는 ‘신동아’가 수지킴 사건을 보도해 국정원을 곤경에 빠뜨린 바 있다.

    언론과 정보기관은 정보수집 활동을 하면서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군사정권 시절이라면 정확한 보도를 했더라도 얻어터지는 쪽은 언론이다. 그러나 민주화한 세상에선 오히려 정보기관이 당하고 만다. 언론과 정보기관의 충돌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과 세계 최고의 언론이 모여 있다는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1974년 ‘워싱턴타임스’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해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 했다. 이 보도 직후 ‘뉴욕타임스’의 세이무어 허시(69·현재 ‘뉴요커’ 기자)기자도 대단한 특종을 기록했다. 허시 기자는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유명한데, 그는 베트남전 종군 당시 ‘베트남판 거창 양민학살사건’인 밀라이 마을 학살사건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1969년).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CIA(중앙정보국)가 미국인을 불법으로 사찰하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CIA와 FBI(연방수사국)는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정보기관이다. 세계적으로는 CIA가 유명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는 FBI의 힘이 더 셌다. CIA는 1947년 창설됐으나 FBI는 그보다 40년 정도 앞선 1908년에 설립됐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활약한 군 정보기관 OSS(전략정보국)에서 퇴역한 군인들로 구성됐다. OSS는 유럽과 동북아에서 주로 활동해왔으므로 CIA도 첨예한 냉전 상황이 펼쳐진 동북아와 유럽 등 국외에서 활동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단속했던 FBI는 미국 최고의 수사정보기관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FBI 국장을 맡은 이가 에드가 후버다. 후버 국장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8년간 FBI 국장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반세기 동안 FBI 국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점이 잡힌 신임 대통령은, 전임은 물론이고 전 전임 대통령 때부터 FBI를 이끌던 후버를 사퇴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후버 국장은 국외(國外) 정보기관으로 창설된 CIA가 빠르게 성장하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국외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미국인이 소련 등 적국에 협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CIA는, 이들을 내사하고 수사할 권한을 달라고 했다. 후버 국장은 이 요구를 일거에 꺾어버렸다. 거의 모든 정치인의 약점을 쥐고 있던 그는 국회의원들을 움직여 미국 내 수사권은 FBI만 갖는다는 안보법을 제정케 한 것. 그후 지금까지 FBI는 수사권을 독점해왔고 CIA는 수사권이 없는 정보기관이 됐다.

    NYT 허시 기자의 대폭로

    1973년 베트남전 휴전 때까지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CIA는 ‘그린베레’로 불리는 미 특전사와 함께 베트남에서 전선 공작을 펼쳤으므로 미국 내 반전주의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CIA는 반전주의자들의 통화를 감청하고 우편을 검열하는 방법으로 이들에 대한 파일을 만들었다. 때로는 반전주의자 집에 침입해 빼낸 자료로 파일을 보강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각국의 정보기관은 이보다 더한 공작을 했고 CIA는 전쟁에 참전한 조직이었으므로 이런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CIA의 이러한 활동은 법적 근거 없이 수사권 또는 내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명백한 위법활동이었다. 허시 기자는 수사권도 없는 CIA가 미국 내에서 정보 및 수사 활동을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기관의 통신감청을 염려해온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1975년 1월 상원에서는 프랭크 처치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정보활동에 관한 정부의 활동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the Senate Select Committee to Study Governmental Operations with Respect to Intelligence Activities)’라는 긴 이름의 특위가 구성됐다. 약칭 ‘처치 특위’다. 국민적 관심 덕분에 처치 특위는 CIA와 FBI, NSA(국가안보국, 감청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최대의 정보기관) 등 여러 정보기관에 많은 양의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했다.

    그로 인해 각 정보기관이 펼쳐온 공작과 불법행위가 공개돼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처치 특위는 조사 결과를 모아 1976년 4월 방대한 양의 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해체됐는데, 이 보고서에는 CIA가 쿠바의 카스트로를 비롯해 반미국가의 지도자를 암살하려고 한 충격적인 공작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CIA를 중심으로 한 미국 정보기관은 X파일 사건을 겪은 국정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처치 특위가 해체된 1976년 5월 상원이 정보위원회를 만들고, 1977년 7월엔 하원도 정보위원회를 설치해 CIA 등에 대한 감독과 통제에 나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의회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게 한 시대상황이다.

    1972년 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 사상 최초로 미중 정상회담을 열어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5월에는 소련과 훗날 ‘SALT-Ⅰ(솔트 원)’으로 불리게 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타결지었는데, 이로써 두 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이 갖고 있던 핵무기 중 일부를 해체했다. 이듬해 미국은 파리에서 베트콩 및 월맹과 베트남전을 정전하는 협상을 마무리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WTO(바르샤바조약기구)가 첨예하게 대립해온 유럽에도 ‘춘풍(春風)’이 불었다. 1972년 12월, 유럽 냉전의 양축을 이룬 서독과 동독이 불가침을 약속하는 역사적인 기본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핀란드를 중심으로 한 중립국들이 유럽의 긴장 완화를 위해 NATO와 WTO 가입국을 아우르는 제3의 조직 CSCE(유럽안보협력회의)를 만들려 했다(1975년 발족). 유럽에서도 냉전을 끝내고자 하는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된 것.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X파일을 만들어 보관해온 전 국정원 미림팀장 공운영씨,김승규 국정원장이 DJ시절에도 국정원이 도청했다고 고백함에 따라 구속된 신건·임동원 전 원장,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는 열전(熱戰)시대나 그 직후 냉전시대였다면 허시 기자는 밀라이 마을 학살사건이나 정보기관의 비리를 고발하는 폭로기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는 베트남전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미국민은 미중 정상회담 개최와 SALT-Ⅰ 타결, 베트남전 종식, 그리고 유럽에서의 동·서독 화해와 CSCE 출범을 냉전을 끝내려는 데탕트로 이해했다.

    이러한 때 구시대 정보기관의 행태를 폭로하는 기사가 터져나오자 국민은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처치 특위가 상상외로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CIA와 FBI의 갈등이라고 하는 근본적 문제에다, 국민은 냉전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데 정보기관은 냉전 시절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모순이 맞물린 가운데 구각(舊殼)을 벗기는 폭로기사가 나오자 미국 정보기관은 초토화된 것이다. 연구자에 따르면 이 시기 CIA 입사 지원자 수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정보기관의 미덕과 시대의 충돌

    이때의 미국 환경이 지금 한국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한국인의 욕구는 매우 높아졌다. 1990년 유럽을 무대로 한 냉전이 종식되고,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까지 열림으로써 한국에서도 ‘탈(脫)냉전을 추구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틈을 타고 언론이 수지킴 사건과 X파일 사건 등을 잇달아 보도하자 국민은 ‘타도 국정원’에 열광했다.

    수지킴 피살 은폐는 1987년 시작돼 탈냉전기 내내 계속됐고, X파일은 냉전이 끝난 1997년에 제작돼 지난해까지 존재해왔다. 국정원의 도청은 김승규 원장의 고백에 따라 국민의 정부에서도 계속돼 왔음이 밝혀져 국민의 비난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왜 국정원은 구시대의 껍질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일까. 전직 국정원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정보기관에는 정보기관 특유의 미덕(virtue)이 있다. ‘시킨 것은 하기 싫더라도 해내는 것’이다.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하는데, ‘꼭 이렇게 돌격하다 죽어야 합니까?’라며 자기 판단을 내놓는 병사가 있다고 치자. 이 병사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지만, 병사들이 저마다 자기 판단을 내놓기 시작하면 이 소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정보기관도 마찬가지다. 정보기관은 합법적으로는 안 되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상사가 하라고 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내는 것이 정보기관에서는 미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탈냉전 시대엔, 정보기관이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 밝혀지면 걷잡을 수 없는 비난을 받게 된다. 1970년대 중반의 미 CIA가 그러했고, 지금 국정원이 그렇다. 하지만 민주화가 안착되면 국민은 다시 정보기관의 미덕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 국민도 언젠가는 말이 안 되는 지시가 아닌 한 ‘까라면 까는 것’이 정보기관의 문화라는 것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정보기관은 고유의 미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국정원 직원들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 국정원 직원은 “X파일 사건 이후 국민은 ‘도청은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만약 국정원 직원이 미국 백악관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나 북한 주석궁에서 은밀하게 오가는 대화를 도청했다면 국민은 ‘훈장을 주라’며 환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도청은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도청과 해야 할 도청을 구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프간전쟁으로 데탕트 종식

    탈냉전과 함께 열리는 민주화 시대에는 능력보다 도덕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 1976년 치러진 제39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덕과 인권을 강조한 민주당 지미 카터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1977년 3월 카터 대통령은 그와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터너 제독을 CIA 국장에 임명해, CIA의 공작관과 방첩 전문 인력 820명을 해고하고 예산을 크게 축소했다.

    미국에는 CIA를 비롯해 15개의 정보기관이 있는데, 이중 CIA는 국방부 산하의 DIA(국방정보본부)와 함께 세계 안보 문제를 다룬다. 1979년 12월4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CIA와 DIA는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 침공 닷새 전 두 기관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 메모를 비공식 채널을 통해 교환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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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1591년) 일본을 다녀온 정사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보고했다. 서로 다른 내용의 보고가 올라와도 대처를 못하는데 하물며 정보기관이 전혀 감을 잡지 못하면, 관계자들은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정보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미국에서는 일거에 데탕트 분위기가 걷혔다. 냉전적 사고가 팽창해 필요 이상으로 소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소련과 오랜 협상을 통해 타결지은 SALT-Ⅱ가 상원에서 동의를 받지 못해 부결되고, 미국 체육계는 올림픽 정신을 어기면서까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는 등 미국사회는 ‘뒷북’ 치기에 바빠졌다.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카터는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완패했다. 공화당 정부는 데탕트 국면에 집착하지 않고, 훗날 ‘피스키퍼’란 이름을 얻은 신형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지금은 MD(미 사일 방어체제)로 재편된 SDI(전략방위구상)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81년 3월에는 CIA가 과거처럼 공격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직과 예산을 대폭 확충해줬다.

    이 시기 미국 정보기관은 ‘너무 나가’ 골치아픈 사건을 일으켰다. 이란혁명 때 이란서 잡힌 미국인 인질을 빼내고 의회가 지원을 금지한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하기 위한 공작을 NSC(국가안전보장회의) 반테러 담당관 주도로 펼쳤다가 니카라과 반군을 도운 것이 드러나 NSC의 올리버 노스 해병대 중령이 의회 조사를 받았다. 이는 공작 활동에서 욕심과 의욕이 앞서면 위법행위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소련은 세계적인 원유와 금 생산 국가인데, 특히 원유 판매 수입이 소련 정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을 때 소련은 비싸진 유가 덕분에 재미를 봤다. 레이건 정부는 미국의 메이저 석유사를 동원해 원유 생산을 고무하고 세계 최대의 금 생산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금 생산을 독려했다.

    그로 인해 유가와 금값이 폭락하자 소련의 재정이 빡빡해졌다. 아프가니스탄에 발목이 잡힌 소련은 신형 ICBM과 SDI를 개발하고 있는 미국을 따라잡기 힘들어졌으며 WTO 동맹국은 물론이고 역내 공화국에 대한 지원도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88~90년 헝가리 등 WTO 동맹국이 떨어져 나가고 이어 벨로루시 등 소련 내 공화국도 독립하면서 1991년 소련은 무너지고 말았다.

    CIA의 기반 흔들기 공작이 소련이라는 거함을 침몰시킨 것이다. 이는 ‘집안에서 사나운 개가 밖에서도 잘 싸운다’는 속담을 보여준 사례로 읽힌다.

    “10년 넘은 침체의 늪”

    미국 정보기관 변천사를 정리해준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CIA는 1970년대의 위기에서 벗어나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CIA는 시대와 불화함으로써 위기에 빠졌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다시 시대와 조화를 이루어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10여 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침체의 늪으로 빠져 골다공증 환자가 됐다”고 진단했다.

    한국 국회는 안기부가 군사정권 유지에 협조했다고 보고 김영삼 정부 출범 이듬해 안기부를 감독하는 정보위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기부는 김영삼 정부의 실세에 충성하는 주구(走狗)로 활동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가 X파일.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정보기관보다 정치기관으로 더 많이 활동한 안기부를 개혁하기 위해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양한다’는 부훈석(部訓石)을 대공수사국 뒷마당으로 던져놓고, ‘정보는 국력이다’는 새 원훈석을 세우며 대대적인 물갈이를 했다.

    이 물갈이 때 신상에 위기를 느낀 전 국정원 미림팀장 공운영씨는 X파일을 만들어 보관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국정원도 실세들과 결탁해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구속된 김은성 전 차장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때문에 2003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검찰청·경찰청·국세청 4대 권력기관의 보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국정원장은 대통령을 수시로 독대하지 못하고, 2주에 한 번씩 그것도 대통령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정보 보고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자살한 이수일 전 차장의 장례식.

    참여정부의 첫 국정원장인 고영구씨는 구조적인 방법으로 물갈이를 시도했다. 간부의 계급정년을 2년씩 단축해 4급(팀장) 이상 간부의 15.6%, 전체 직원의 6.1%를 줄였다. 그때까지 국정원은 각 도에 1급 지부장과 2급 부지부장이 있는 지부를 운영해왔다. 고 원장은 하는 일이 적은 부지부장 자리를 없애고, 광역시가 없는 도의 지부장은 2급으로 낮췄다. 부산· 대구·광주·대전·인천지부엔 그대로 1급 지부장을 두나, 제주·전북·충북·강원지부장은 2급으로 낮춘 것이다. 대공정책실과 경쟁해온 서울지부는 2급이 지휘하는 연락단으로 축소했다.

    그러나 보직을 잃은 요원들을 강제로 내보내지 않았다. 과거 강제로 쫓겨난 이들이 ‘국사모(국정원을 사랑하는 모임)’ 등을 만들어 부당 해고에 대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퇴진하거나 계급정년이 도래할 때까지 정보대학원 등 교육기관에 보냈다.

    사라진 용어 ‘對共’

    고 원장은 미국의 처치특위처럼 국정원 과거사를 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만들어 김형욱 피살 미스터리 등을 파헤치게 하고, 5대 비전-10대 중점 추진과제로 구성된 ‘국정원 비전 2005’를 만들어 추진하다 물러나고 김승규 원장이 취임했는데 그 직후 X파일 사건이 터져나왔다.

    X파일은 두 가지 파장을 몰고 왔다. 공운영씨는 “김대중 정부가 내쫓으려 했기에 혹시나 싶어 자료로 만들어 보관해왔다”고 밝혀 퇴직 위기에 몰린 국정원 직원들의 공감을 산 것이 한 파장이고, “국정원을 CIA처럼 수사권이 없는 국외 정보기관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 또 하나의 파장이다.

    반향이 컸던 것은 물론 후자였다. 일반 국민은 경찰 내에서 가장 파워가 센 곳으로 ‘수사’ 파트를 지목하지만, 경찰관들은 ‘정보’ 분야를 꼽는다. 비슷한 현상이 국정원에서도 일어난다. 국정원 직원들은 국내 정보활동을 하는 대공정책실을 가장 센 부서로 알고 있으나, 국민은 간첩사건을 수사하는 대공수사국을 최고 권력기관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국정원 개혁은 수사권 폐지 주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대공(對共) 수사를 아는 사람들은 김영삼 정부 이후 이 분야가 계속 약화돼왔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현상이 ‘대공’이라는 용어의 퇴출. 국정원 대공수사국은 안보수사국으로, 경찰청 대공수사단은 보안국으로, 기무사 대공처는 방첩처로 개명됐다. 전국 18개 지검(地檢) 중 16개 지검에 설치돼 있던 공안과도 ‘공안업무 지원팀’으로 축소되고, 600여 명이던 검찰의 공안 인력도 200여 명으로 감축됐다.

    국정원 안보수사국 요원은 1993년에 비해 23%가 감소했고, 같은 기간 경찰청 보안국 요원은 5216명에서 2541명으로 51%나 줄어들었다. 1998년 보안과를 둔 경찰서는 232개 경찰서 중 131개였으나 지금은 52개다. 3월17일 현재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는 8051명인데 이들을 담당하는 보안국 요원은 70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런 까닭에 경찰에서는 보안국을 정보국에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게 됐다.

    작금의 국정원 개혁 요구는 안기부 대공정책실에서 만든 X파일이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인데, 상당수 여당 국회의원은 안보수사국이 갖고 있는 수사권의 폐지를 국정원 개혁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안보수사국측은 “법원 판결로 확인된 대공 파트의 인권 침해 사례는 네 건뿐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수지킴 피살 사건 은폐이다.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과 구국전위 사건은 피의사실 공표로, 민혁당 사건은 변호인 접견권 침해로 패소했다”며 억울해한다.

    이들은 또 “미국은 역사적인 특수성 때문에 CIA가 수사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정보기관인 FBI는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으냐”며 안보수사국의 수사권 유지를 강조하고 있다.

    서독 BfV의 활약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 문제는 남북 문제와 연결돼 있으므로 우리에 앞서 통일을 이룩한 나라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973년 1월 베트남전 정전 이후 베트남에서는 수많은 공산당 프락치가 활동했다. 이중에는 196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쭝딘쥬와 사이공 경찰청장을 지낸 녹따오도 포함돼 있었으나 베트남의 정보기관은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은 월맹에 무력으로 흡수통일됐다.

    동독과 서독은 남북한이나 월맹-월남처럼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첨예한 냉전을 벌였다. 1966년 반공주의자 아데나워에 이어 독일 총리가 된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추진해 1970년 소련과 무력 불사용조약을 맺고, 1972년엔 동독과 불가침을 약속하는 기본조약을 맺었다. 1973년 정전협정을 맺은 베트남처럼 대립을 끝내고 협력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것.

    이때부터 동·서독 간에는 왕래가 인정돼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자 슈타시(Stasi)란 이름의 동독 국가보위부가 서독 이주자에게 간첩활동을 요구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독 요인을 포섭했다. 통일 후 발견한 슈타시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이 시기 동독 공작원을 했거나 동독에 협조한 사람은 무려 1만2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정보기관인 BfV(헌법보호청)와 수사기관인 BKA(연방수사청)는 손놓고 있지 않았다. 1963년 포르스트 서독 통일부 장관을 동독 내통 혐의로 체포한 전력이 있는 BfV와 BKA는 1974년에는 브란트 총리의 비서실장인 기욤을 체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76년 BfV는 연례 보고서를 통해 서독에서 활동하는 동독간첩은 1만1000여 명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통일 후 슈타시 문서를 통해 밝혀진 것보다 불과 1000여 명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였다.

    이 시기 서독 정부는 극좌 활동을 한 사람은 공무원에 임용하지 않는다는 ‘급진주의자 훈령’을 만들어 운용함으로써, 동방정책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사회가 친(親)공산화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국외정보기관인 BND(연방보안부)를 앞세워 서독 방송을 볼 수 있게 된 동독인들을 교묘히 자극해 민주화를 요구하게 하는 공작을 펼쳤다.

    기본조약 체결 후 동·서독은 힘을 겨루는 무력대결이 아니라, 사상이라고 하는 내공(內功) 겨루기 시합에 들어간 것이다. 이 시합을 오래할 경우 내공이 약한 쪽은 각혈을 할 정도로 심한 내상(內傷)을 입게 된다. 17년간 계속된 이 시합에서 동독은 안에서부터 멍이 들어 1989년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며 서독에 흡수통일됐다.

    ‘대공수사권 유지’ 찬성이 59.3%

    국정원에 수사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베트남과 독일의 사례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들은 “북방정책을 펼친 노태우 정부와 햇볕정책을 펼친 김대중 정부는 서독처럼 내부 방어책을 강화하지 않고 오히려 약화시켰다”며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정원의 인권탄압 수사에 몸서리를 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를 주장한다. X파일 사건으로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된 직후인 지난해 11월22일 한겨레는 국정원 수사권 폐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했다. 그런데 무려 59.3%의 응답자가 ‘그래도 국정원은 대공수사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응답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러나 국정원이 수사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수사권 폐지론자들이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수사권 폐지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법은 국정원이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야를 ‘형법의 내란죄와 외환(外患)죄’ ‘군형법의 반란죄와 암호 부정사용죄’ ‘군사기밀보호법에 규정한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한 죄’로 한정하고 있다.

    형법에 규정된 내란·외환죄에 대한 수사는 드물 뿐 아니라 워낙 큰 사건이라 검찰이 중심이 돼 다뤄야 한다. 군형법과 군사기밀보호법에서 규정한 죄에 대한 수사는 기무사나 헌병의 수사 영역이다. 따라서 국정원 안보수사국은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수사할 수밖에 없는데, 요 몇 년 사이 청와대와 여당에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국정원은 사실상 수사권을 상실하게 된다. 국정원 수사권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은 국민적 거부감이 큰 국정원 수사권 폐지 주장보다는, 인권 침해 시비가 있었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내 파트의 사찰과 공작

    재야 성향의 정치인들이 국정원 수사권 폐지를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치사찰’과 ‘정치공작’ 때문일 것이다. 국정원은 정당을 비롯한 국회와 행정부 공공기관 기업체 언론사에까지 정보관을 파견해 첩보를 수집한다. 이들이 수집한 첩보는 분석관의 분석 판단을 거쳐 정보로 생산된다.

    정부는 물론이고 비정부 기구가 하는 일까지 모든 것을 분석 판단하다 보니, 국정원은 음지에 있는 ‘또 하나의 정부’가 됐다. 양지에서 일하는 부처의 일을 ‘음지의 정부’가 분석하고 감시하니, 양지의 정부 사람들은 음지의 정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음지의 정부 사람들은 양지의 정부 사람들의 보안 상태를 점검하는 권한까지 가졌으니 이들의 행동은 ‘사찰(査察)’로 비쳐질 수 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만 해도 안기부는 총선이나 대선에 출마할 여당 후보를 위해 자체 예산으로 각종 여론조사를 했다. ‘A씨를 내세우면 야당 후보를 이기지 못하니 B씨를 내세워야 한다’는 조언을 해준 것이다. 여당 후보에게는 당선에 유리한 공약을 만들어주고 야당 후보의 약점도 알려줬으니, ‘정치공작’을 한다는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1990년 10월3일 분단 45년 만에 이룬 통일을 경축하는 독일. 독일 정보기관은 동·서독 평화관계 체결 때도 손을 놓지 않았다.

    정치사찰과 정치공작은 주로 대공정책실이나 서울지부 주도로 이뤄졌다. 대공정책실의 ‘대공’은 북한으로 정보가 흘러들지 않게 하려는 보안감사권 때문에 붙은 것이지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러나 이 글자 때문에 많은 사람은 수사권이 있는 대공수사국이 사찰과 공작을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리하여 나온 주장이 수사권 폐지와 대공수사국 해체였다.

    그러나 국정원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국정원 내에서 가장 큰 부서가 대공정책실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국정원이 국내 정보활동에 주력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CIA나 영국의 SIS(일명 MI-6), 독일의 BND처럼 그 나라를 대표하는 정보기관은 해외 활동에 주력하는데 국정원은 국내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니 이를 바꿔야 한다며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바꾸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해외와 대북 분야에 종사해온 국정원 직원 상당수가 동의한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정보기관은 수사권을 가질 수 없다. 수사권은 주권의 일부라 영토와 영해 밖에서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바꾸는 것은 국정원이 가진 수사권을 폐지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부 여당 의원들은 이 점에 주목해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정보차장-운영차장제 도입

    국정원측은 “대신 미국에서는 FBI가 있지 않은가. 2001년 9·11테러 이후 FBI는 NSB(National Security Branch, 국가안보단)를 만들어 국내 정보 활동을 강화했다. 또 연간 380억달러의 예산을 집행하는 조직원 18만명의 국토안보부를 만들었다. 체첸 사태를 겪고 있는 러시아도 국내 정보기관인 FSB(연방보안부)와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하는 연방통신정보국을 통합했다”며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만드는 안에 반대하고 있다.

    국정원을 해외전문 정보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관련해 주목할 것이 정형근 의원이 내놓은 국정원법 전부 개정안이다. 해외 정보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현재 국정원은 해외담당 차장을 선임이라고 할 수 있는 1차장에 임명하고 있다. 국내담당 차장은 2차장, 그리고 북한담당 차장은 3차장이다.

    그러나 해외를 담당하는 1차장의 힘이 2차장보다 강하다고 단언하는 국정원 직원은 없다. 한 소식통은 “육군에서 가장 클 뿐 아니라 참모총장이 잘 나오는 부대는 3군이지 1군이 아니지 않으냐”는 말로 1과 2와 3이라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음을강조했다. 국정원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 의원은 이러한 모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묘안을 제시했다.

    해외-국내-북한 지역별로 구분된 차장제를 없애고 정보-운영(공작)-과학기술이라는 임무 위주 차장을 두자고 제안한 것. 즉 1차장은 정보의 수집과 생산을 담당하는 정보차장이고, 2차장은 공작을 담당하는 운영차장, 3차장은 신호정보(SIGINT)와 영상정보(IMINT)를 주로 다루는 과학기술차장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정 의원의 제안은 미국 CIA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범죄도 국제화한 지 오래인데 정보가 국내와 국외로 나눠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이다. 이 때문에 CIA는 국외정보기관이지만 해외 거점뿐만 아니라 미국 내 50개 주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 FBI도 미국 내 지부는 물론이고 해외에 거점을 두고 있다. CIA와 FBI는 비중을 국외에 두느냐 국내에 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활동 무대를 국외와 국내로 한정하지 않는다.

    국정원 조직을 정보-운영-과학기술 차장제로 바꾸게 되면 공작 분야가 활성화된다. CIA를 비롯한 유수의 정보기관에서는 공작 분야를 우대하는데, 유독 국정원만은 공작 분야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공작 활동은 국외에서 하는 것이라 공작을 전담하는 차장을 두면 자연 국내파트가 축소되고 해외와 대북 기능이 강화된다. 공작 파트의 강화는 바로 국익 신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국내 정보와 함께 방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대공정책실과 대공수사국을 중시했는데, 이들은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므로 국민과 마찰을 빚어 왔다.

    정보협의회 신설 문제

    정 의원의 법안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국가정보기본법에 나오는 정보협력위원회의 신설이다. 정보협력위원회는 9·11 테러 이후 정보기관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미국이 채택한 ‘국가정보위원회(ODNI, 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와 흡사하다. 정보세계엔 ‘차단의 원칙’이 있어 부서끼리는 하는 일을 알려주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정보 교류는 아래 위로만 하고 수평으로는 하지 않는데, 이는 보안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원칙이다. 따라서 정보기관간에도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 관행이 생겼다.

    9·11테러 후 미국은 테러를 막지 못한 원인 분석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 몇몇 정보기관은 테러 징후를 포착했으나 자기 분야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필요한 기관에 알리지 않고 사장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9·11 테러 이전 미국의 15개 정보기관 대표는 CIA 국장이었다. CIA 국장은 나머지 14개 정보기관을 통솔하는 ‘중앙정보장’을 겸했지만, 실제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CIA는 대통령 직속기관이라 ‘국가정보기관’으로 불린다. 반면 나머지 14개 정보기관은 국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 행정부처에 속한 정보기관이라 그 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주로 다뤄 ‘부문정보기관’으로 불린다. CIA 국장의 직급은 청장(차관)에 해당하고 15개 부문정보기관장은 청장이나 국장(1급)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보기관회의를 하게 되면 15개 부문정보기관에서는 그 부처의 대표인 장관이 참석한다.

    CIA와 국방부의 갈등

    대통령 직속기구라고 해도 CIA 국장은 차관급이므로 정보기관 회의에 참석한 장관들을 쉽게 다룰 수 없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국방부 장관과의 관계였다. 국방부는 일반 부처가 아니라 육군부와 해군부 공군부를 거느린 ‘총부’ 개념의 부처다.

    국방부 밑에는 무관을 파견함으로써 CIA만큼 많은 해외지부를 갖게 된 DIA, 가장 많은 예산과 요원을 갖고 있는 NSA, 첨단 과학기술정보를 다루는 NRO와 NGA, 그리고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정보기관이 있는데, 이 기구들이 사용하는 정보 예산은 미국 전체 정보 예산의 70%에 달한다. 이 때문에 국방부 장관은 CIA 국장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미국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CIA 국장이 중앙정보장을 하던 제도를 없애고 대신 장관급 보직인 ODNI, 즉 정보위원회를 만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ODNI 위원장에 온두라스와 멕시코, 필리핀 대사를 지내고 1993년 은퇴한 존 네그로폰테를 임명하고, 부위원장에는 NSA 사령관 출신의 마이클 하이든 공군 대장을 임명했다. 그리고 ODNI에 각 정보기관이 갖고 있는 테러정보를 종합하는 ‘국가대(對)테러센터’와 대량살상무기(WMD)의 확산을 막는 ‘국가대(對)확산센터’ 등을 뒀다.

    정 의원은 이를 참고해 “한국도 정보협의회를 만드는데, 협의회 의장은 대통령, 부의장은 국정원장, 위원은 통일부·외교통상부·법무부·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의 안보정책실장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측은 “한국은 미국과 달리 국정원장이 부총리급이기 때문에 13개 부문정보기관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데 왜 옥상옥(屋上屋)을 만드느냐”며 정보협의회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 의원은 “옥상옥일 수도 있지만 시대 흐름상 필요하다. 또 대테러 업무 등을 강화하려면 정보기관간 협력이 필요하므로 이 기구가 있어야 한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은 국가정보협의회를 통해 정보 문제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통해 국방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 법안에서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정보감찰관제 도입. 여당은 국정원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감사와 감찰이 있어야 한다며 감사원이 국정원 예산을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원측은 물론이고 정보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어이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2003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사원은 국정원과 외교부 등을 감사했으나 ‘정보의 정’자도 모르는 행태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정보감찰관제 도입으로 감독 강화

    국정원 예산은 베일에 싸여 있다. 국방부와 법무부 행정자치부 등 부문정보기관을 둔 부처에는 국정원이 감독할 수 있는 정보 예산이 편성돼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안기부는 김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가 이끈 ‘나사본’의 자금을 관리해줬는데, 이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안기부는 공식적으로 받은 예산도 수십 군데 금융기관을 거쳐가며 돈세탁을 해서 사용했다.

    국정원에서는 기조실장의 통제하에 총무국 예산관이 돈을 만진다. 그러나 개개 정보비와 공작비는 해당 부서에서 편성해 요청하기 때문에 예산관조차 그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흑금성 사건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국장이 단장에게 전해준 공작비는 단장이 처장(과장)에게, 처장이 요원에게 전해줄 때마다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공작비는 영수증 없이 사용되는 것이라 중간에서 횡령해도 추적할 방법이 없다. 정보비 또한 영수증 없이 집행될 수 있는 것이 많아 국정원의 정통 재무통도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전직 국정원 간부는 “공작비와 정보비의 유용을 완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중에는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정보와 공작을 위해 다른 사업으로 책정된 예산을 전용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국정원에서는 돈 흐름을 쫓는 감사보다는 직무감찰을 강화하는 감찰관이 더 중요하다. 국정원의 사업과 돈 흐름에 대해서는 그래도 국정원이 가장 잘 아니, 국정원장은 믿을 만한 사람을 감찰실장과 감사관에 임명해 국정원을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국회 정보위 업무에 관여해온 한 인사는 “국회의 능력으로 국정원의 예산 전용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10년 가까이 이 일을 해온 우리도 못하는데 감사원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감사원의 국정원 감사에 대해 반대했다. 이런 까닭에 정 의원이 내놓은 정보감찰관 제도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의원은 “정보감찰관은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간부 중에서 뽑아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법안 내용을 설명했다. 정보감찰관은 대통령과 국회 정보위에만 보고하기 때문에 국정원장으로부터 독립해 국정원을 감사하고 감찰한다. 정 의원은 국회 정보위를 통한 국정원 감독을 정상화하려면 정보감찰관 제도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9·11테러를 계기로 정보기관의 활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했다. 반면 한국은 X파일 사건을 기화로 국정원의 불법 행위를 차단하는 개혁과 9·11사건과 같은 테러를 막기 위한 제도 개혁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창’만 들고 달리지만, 한국은 ‘창’과 ‘방패’를 함께 휘두르며 뛰게 된 것.

    미국에서는 테러 발생에 대비하기 위해 ‘PATRIOT법(일명 애국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테러 방지법을 만들면 국정원의 권세가 강해져 인권 침해가 심해질 것이라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당의 주력 세력은 “테러방지법은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나 국방장관 출신인 열린우리당 조성태 의원은 테러방지법을 빨리 제정해야 한다며 법안을 제출했다. 테러방지법 제정은 X파일 사건을 계기로 위축된 국정원이 국가안보기관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정상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국정원 개혁과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이 국회 정보위다. 미국의 정보위는 다선의 중진의원들로 구성돼 있으나 한국 정보위에는 초선 의원이 많아 정보 누설이 잦은 편이다. 일부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질의사항이 부족해 의원 보좌관이 정보위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보좌관 참석은 정보 누설의 폭을 넓힐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정보위를 다선 의원 위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쿠데타 했다고 군대 해체했나?”

    한 관계자는 “우리 군대가 총부리를 돌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고 해서 군에 대해 총을 놓고 훈련을 중지하라고 하진 않았다. 그런데 정보기관이 도청을 했다고 하자 정보기관 고유 업무까지 중지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알고 보면 국정원은 대단한 조직도 아니다. CIA는 카스트로 암살 공작이라도 준비했지만, 국정원은 김일성·김정일 전복 공작도 세워보지 못했다. 도청 문제를 계기로 국정원을 개혁한다면 불법은 차단하되 고유 기능은 신장하는 쪽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의 수사권을 폐지하고, 모든 도청을 하지 못하게 하며, 감사원 감사를 받게 하고,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고, 해외정보처로 개편하는 것이 과연 국정원을 정상화하는 방안일까. 아니면 수사권을 유지하고, 공작 부문을 강화하며, 정보협의회와 테러방지법을 도입하고, 부정을 막기 위해 정보감찰관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남북 화해를 거쳐 통일로 가는 시기 국정원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뽑아내는 방안일까. 선택의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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