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마음에 봄이 오다, 고목에 꽃이 피다

  • 강병주 KBJ골프트레이닝센터 대표

    입력2006-04-28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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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봄이 오다, 고목에 꽃이 피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골프 코치는 참으로 재미있는 직업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골프를 ‘가르치지만’, 사실은 학생에게서 배우는 게 많다. 골프에 대한 열정, 진지한 자세에서 인생에 대한 철학이나 삶에 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셈이다.

    필자가 코치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다.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열정이 넘치고 순수한 마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거꾸로 얘기하면 세상물정을 모르고 감정적으로만 덤벼서 항상 좌충우돌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소개를 받고 필자를 찾아온 학생 한 분은 머리에 흰 눈이 내려앉은 지 오래된 노신사였다. 모 재벌그룹 총수의 친구이자 전직 은행장이라고 했다. 문제는 86세에 이른 그분의 나이. 골프가 아무리 점잖은 스포츠라지만 그래도 ‘운동’이라, 가르치는 사람 처지에서는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배우는 사람의 나이가 쉰만 넘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강사나 학생이나 모두 고생스럽기만 한 경험을 여러 차례 한 까닭이었다.

    노년의 학생과 수행비서가 열심히 이야기를 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못 하겠다고 솔직히 얘기해야 하나. 소개받고 일부러 찾아오신 분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텐데….’ 이런저런 걱정이 가득한 필자의 머릿속은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려달라”는 그분의 주문사항을 듣고 나니 더욱 어지러워졌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솔직히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이는 노인의 드라이버 비거리를 무슨 재주로 늘린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고목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언제 극락으로 갈지도 모를 나이에 친구와 어울릴 수 있도록 드라이버의 비거리를 늘려달라니, 인간의 욕심은 참으로 끝이 없는 모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나이든 학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하고 또 지혜로웠다. 그전까지 나는 오직 방법과 기술만을 가르치는 ‘골프 엔지니어’였지만, 이 노인 학생을 상대로 레슨을 하면 할수록 더 넓은 의미의 ‘골프 코치’로 거듭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가 학생에게 골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생에게서 골프와 인생의 자세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비거리를 늘리겠다는 그분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물리적인 기능을 향상시키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법한 새로운 목표를 정해 도전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내 마음대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속 깊은 목표였다.

    노년의 학생은 이미 골프 구력이 40년이 넘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오랫동안 골프를 쳐온 분이니, 도대체 무엇을 가르칠 수가 있었겠는가. 코치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학생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학생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기본에 충실하게 접근하는 것뿐이었다. 그분 또한 손자뻘 되는 코치의 말을 경청하려 노력했다. 코치의 말은 한귀로흘려듣고 오로지 자기생각만을 고집하는 학생이 많다 보니, 그분의 그러한 자세는 내 마음속 깊이 남았다.

    사실 골프라는 운동에는 비법이 없다. 부단한 자기노력과 반성, 그리고 배움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도전만이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어줄 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진리인 셈이다.

    어떤 학생이 오든 나는 별수없이 알고 있는 ‘기본 중의 기본’만을 이야기한다. 비록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 노인학생과 레슨을 하는 동안 나는 그 ‘기본 중의 기본’이 가진 힘을 절감했고 학생과 코치가 어떻게 서로를 경청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이후로 필자는 동료들에게 자칭 ‘시니어 골프 레슨 전문’이라고 큰소리치곤 한다. 묘하게도 그후부터 시니어 골퍼를 가르치는 일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50대에 접어든 중년 골퍼들은 “늙으니 골프가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골프를 즐기는 데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 단지 특출한 기술을 배우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뿐이다. 몸보다는 마음의 나이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골프는 급속도로 대중화하고 있지만 그에 견주어 골프문화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드에 넘쳐나는 막무가내식 골퍼들은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남이야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든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필자는 어김없이 연습장에 나와서 묵묵하고 성실하게 드라이버를 준비하던 그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학생을 생각한다.

    골프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와 함께한 시간이 남겨준 묵직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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