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위작 논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의 심경 토로

“그림값 거품 빠져야 아버지 그림 제대로 평가받는다”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6-05-02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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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작 논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의 심경 토로
    300,000,000,000원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되는 돈일까? 읽기 편하게 쓰면 ‘3천억원’인데, 보통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액수다.

    그런데 이 돈은 한 개인이 소장한 3000점에 육박하는 박수근, 이중섭 두 화가의 ‘가짜그림’ 값의 총액을 최소한으로 어림잡은 액수다. 현재 두 화가의 그림은 한 점에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에 거래되고 있다. 최근 그림 경매에서 거래되는 두 화가의 호당 가격으로 치면 6000억원이 넘을 수도 있다.

    다음은 박수근·이중섭 가짜그림 사건 일지를 요약한 것이다.

    ▲2005년 3월 : 이태성씨(이중섭 차남), 이중섭예술문화진흥회 설립(회장·이중섭 부인 이남덕 여사).

    ▲3월2일 : 이태성씨, 이중섭 50주기 기념사업 추진 위해 미공개작 8점 서울옥션 통해 공개.



    ▲3월16일 : 서울옥션 경매서 ‘아이들’(3억1000만원) 등 4점 낙찰.

    ▲3월22일 : 이태성씨 내한 기자회견에서 경매 출품작은 유족이 50년간 소장해온 것 중 일부라고 주장.

    ▲3월30일 : 한국미술품감정협회, ‘물고기와 아이’ 등 경매 통해 팔린 작품 4점에 대해 위작(僞作) 주장.

    ▲4월7일 : 이태성씨, 도쿄에서 기자회견 열어 ‘물고기와 아이’ 진품 주장.

    ▲4월22일 : 양측, 한백문화회관서 열린 세미나 참석. 한국미술품감정협회측은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이 이태성씨에게 가짜그림을 건넸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에 수사 촉구.

    ▲4월22일 : 박성남씨(박수근 장남)가 호주에서 급거 귀국해 김용수씨가 소장한 박수근 그림은 가짜라고 주장.

    ▲4월25일 : 김용수씨, 이중섭 그림 650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50여 점 공개, 박수근 그림 200여 점도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나중에 약 1800점으로 늘어남). 이태성씨, 한국미술품감정협회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제기.

    ▲5월4일 : 박성남씨, 김용수씨를 같은 혐의로 고소.

    ▲5월11일 : 이중섭 유족, 도쿄에서 기자회견 열어 이중섭 그림 150점 소장 주장.

    ▲5월13일 : 김용수씨, 박성남씨와 감정협회를 상대로 무고, 명예훼손 등으로 소송 제기.

    ▲6월9일 : 서울중앙지검, 위작논란 이중섭·박수근 그림 수십점 감정 의뢰 발표.

    ▲10월7일 : 서울중앙지검 형사 7부, 전문기관 감정 결과를 토대로 58점 위작이라고 발표. 아울러 “이중섭 화백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 일부가 실은 위작”이라고 주장해 이태성씨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소속 감정위원들에게 무혐의 처분.

    ▲10월7일 : 김용수씨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박성남씨도 무혐의 처분.

    ▲10월 : 김용수씨 서울중앙지검의 무혐의 처분에 불복해 서울고검에 항고

    ▲2006년 4월3일 : 서울고검 형사부, 김용수씨의 항고 기각. 김용수씨 변호인은 대검찰청에 재항고하겠다고 밝힘.

    ‘한국 현대미술사상 최대 위작사건’

    위작 논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의 심경 토로

    박수근 화백(왼쪽 사진)의 가짜그림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아들 박성남 화백.

    일지에서 보듯이 사건수사는 막바지에 이른 느낌이다. 4월4일 오전, 필자는 서울에서 보낸 팩스 한 장을 받았다. ‘이중섭·박수근 가짜그림 고소사건’ 때문에 한국에 머물고 있는 박성남(59)씨가 보낸 것인데, 내용은 ‘법률신문’ 4월4일자 보도였다.

    서울고검 형사부(오병주 부장검사)는 2일 고 이중섭 화백의 차남 태성(56)씨와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이 고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그림 58점을 위작이라고 판정한 서울중앙지검의 결정에 불복해 제기한 항고를 기각했다. 오 부장검사는 “지난해 서울중앙지검이 의뢰한 서울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과 종이 탄소연대측정 결과를 뒤집을 만한 반증을 찾을 수 없었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했다. 2004년 10월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는 태성씨와 김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가짜라고 주장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한 사건에서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고 김 회장이 소유한 두 화백의 그림 2740점을 압수했다.

    2005년 6월,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시드니를 방문했다. 처음으로 시드니를 방문한 선생은 한 차례 문학강연을 한 다음, 호주 원주민(애보리진)의 생활상을 알아보는 등의 일정을 보냈다. 그런데 박완서 선생이 시드니에서 꼭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의 서양화가 중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박수근 화백의 장남 박성남씨였다. 그는 20년째 호주에 거주하면서 대를 이어 그림을 그리는 중견화가다.

    박완서 선생의 데뷔작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 ‘나목(裸木)’이다. 이 소설엔 6·25전쟁 통에 미군 PX에서 만난 박수근 화백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연유로 박완서 선생과 박성남씨는 허물 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오랜 만에 해후한 두 사람이 시드니 동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센테니얼파크를 둘러보던 중 성남씨가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박수근·이중섭 가짜그림 사건 얘기를 꺼냈다.

    신문에서 그 뉴스를 접했다는 박완서 선생은 “가끔 일어나는 가짜그림 사건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큰 사건이었냐?”면서 놀라워했다. 성남씨는 “사건 초기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한국 현대미술사상 최대의 위작사건이었다”고 했다.

    센테니얼파크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호숫가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박수근 화백의 빈한한 생애를 회고하면서 요즘 천정부지로 치솟는 박 화백의 그림값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박완서 선생은 “소설 ‘나목’은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옥희도라는 화가의 작품으로 화상(畵商)들만 돈을 버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쓴 소설이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필자는 ‘신동아’ 2005년 2월호에 ‘박수근 화가 3代가 부르는 무구(無垢)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박수근-박성남-박진흥(33)으로 이어지는 화가 3대기를 썼다. 그 기사가 나간 후, 20년 가까이 한국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박성남씨가 급하게 한국을 방문했다. 박수근·이중섭 가짜그림 사건 때문이었다. 박씨가 가짜그림 소장자인 김용수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하고, 박씨는 김씨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

    나는 왜 김용수씨를 고소했나

    필자는 박씨가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인터뷰를 요청해 사건의 진상과 검찰의 조사과정을 자세하게 전해들었다. 박씨가 직접 쓴 ‘왜 김용수씨를 고소했나?’라는 제목의 글도 읽었다. 그중의 일부를 요약하고, 그 글을 쓴 시점 때문에 미흡한 부분을 그와의 인터뷰로 보충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터뷰는 시드니에서 이뤄졌고 그가 한국에 체류할 때는 국제전화를 이용했다.

    2005년 4월21일 이른 아침, 시드니에서 그림을 구상하고 있던 나는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송향선 감정위원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박성남씨, 아버님이 그렸다고 주장하는 그림이 200점이나 나타났어요. 이중섭 화백의 그림도 수백점이나 소장하고 있다는데 내가 보기엔 모두 가짜입니다. 내일 설명회가 있으니 꼭 서울에 오셔야 합니다. 박성남씨가 이태성씨를 살려내야 합니다.”

    아버지의 미공개 작품이 200점이나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다음날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먼 여행 끝에 서울 평창동 소재 한백재단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중섭 위작사건’ 관련 설명회가 열리고 있었다. 설명회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태성씨가 김용수씨로부터 가짜그림을 건네받아 옥션에 출품했다는 의혹 때문인 듯했다.

    이중섭 선생의 차남인 이태성씨의 발언을 들었다. 도무지 끝을 알 수없는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이태성씨는 미로에 빠져버린 어린아이처럼 허둥대는 것 같았다. 순간, 내 심정을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똑같은 처지의 유족으로 이 질곡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의혹의 한 가닥을 잡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위기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내가 좀 난처해져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대가의 2세’로서 그가 겪었을 고초를 짐작하거니와 또 한국 근대미술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선친들의 위작사건에 휘말린 이태성씨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이중섭과 박수근의 미공개 작품이 한 점이라도 더 발견된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다. 문화유산이 넉넉지 못한 우리 미술계의 자산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자산이 처음에는 박수근의 작품 200여 점으로 시작해 450여 점, 700여 점으로 늘어났다가 압수수색을 할 때는 1000여 점이나 더 발견됐다. 마지막에는 이중섭, 박수근을 합해 2700여 점으로 늘어났다.

    작품의 진위 를 따지기 전에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도록 유족은 무엇을 했으며 미술계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설명회장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저들이 저토록 당당하게 나올 수 있도록 방치한 나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2004년 8월의 이중섭·박수근 미발표작 추진위원회 결성, 전시 및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두 분의 미공개 작품을 세상에 알려 미술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들은 박수근 40주기와 이중섭 50주기인 2005년과 2006년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추진위원장으로 김용수 고서화협회 명예회장이 추대됐고, 그를 중심으로 미공개작 전시 이후 전시관 건립, 다양한 문화사업 전개 등의 당찬 계획도 발표됐다. 그 많은 작품이 진품이라는 검증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유족으로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1965년 5월6일 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40주기 이틀 전인 5월4일에 김용수씨를 고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자꾸 망설여졌다. 아버지 같으면 고소는커녕 그들을 용서하고 설득해서 일을 바로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설명회장에서 처음 만난 이태성씨를 기억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중섭 선생이 즐겨 그리신 당신 아들이다. 화가가 작품 속에 담고 싶어했던 아들처럼 살아 있는 아들 또한 이중섭 선생의 생생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살려낼 방법은 고소밖에 없었다. 김용수씨가 소장한 이중섭, 박수근의 그림이 인사동 고서점에서 동시에 구입한 것이라고 했으니 박수근의 그림이 가짜로 판명되면 이중섭의 그림도 자동적으로 가짜가 되고 이태성씨의 고뇌도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 5월4일,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忍苦의 세월

    박성남씨는 1986년,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혼자 호주로 이주했지만 영주권 문제로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더욱이 장남과 차남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한가족이 한국, 호주, 인도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시드니에서 한동안 청소부로 일하며 그림을 그렸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죽기 살기’로 그림에 매달렸다. 아버지 박수근도 직장생활 때문에 평양에 혼자 살면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박수근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박성남씨는 “아버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화풍을 말하는 게 아니고, 화가로서의 투철한 작가정신과 성실한 삶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위작 논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의 심경 토로

    호주에서 만난 박성남 화백과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박수근 화백 그림의 위작사건에 깊은 우려와 안타까운 심경을 나누었다.

    박성남씨는 “올해 내 나이가 59세다. 아버지께서 51세에 작고하셨으니 세상을 살아온 나이로 따지면 내가 더 많다. 이젠 아버지와 겨뤄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겨뤄보고 싶다는 박수근 화백은 국내 언론보도(‘이코노믹 리뷰’ 2006년 2월24일자)에 따르면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작가들 중 미술시장에서 갖는 프리미엄, 즉 ‘이름값’이 가장 높은 화가’이다. 박수근 화백에 이어 김환기, 장욱진 화백의 순으로 매겨진 ‘이름값’은 서울옥션이 최근 경매 100회를 맞아 그동안 미술작품의 가격 변화와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및 그 영향력에 대한 통계적 분석의 결과다.

    ‘이코노믹 리뷰’는 “박수근은 프리미엄 430으로 압도적 선두이고, 김환기가 192, 장욱진 158, 도상봉은 100이다. 이는 미술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변수인 크기·재질·시간 등이 모두 같다고 전제할 때, 특정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즉 같은 재료로 그린 같은 크기의 작품일 경우, 도상봉의 작품이 100만원이라면 박수근의 작품은 430만원이라는 의미다. 낙찰금액 기준으로도 박수근이 46억6170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2위는 24억6780만원의 김환기였다는 게 서울옥션의 분석”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2006년 2월23일 경매에서 박수근의 1960년대 작품 ‘시장의 여인들’(28×22cm)이 박수근 작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9억1000만원에 팔렸다. 종전 최고가 기록은 지난해 12월 서울옥션에서 9억원에 낙찰된 ‘시장의 여인’(30×29cm)이 갖고 있었다. 이 기록은 박수근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한국화가 전체의 기록이다.

    필자는 박성남씨에게 다음과 같은 우문을 던져보았다.

    -아버지의 그림값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됐는데.

    “솔직히 그 대목은 무척 혼란스럽다. 여름철에는 러닝셔츠와 흰 고무신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셨는데, 지금은 그림값이 ‘억, 억’ 하는 인물이 됐으니…. 그러나 후손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아버지 그림 가격의 거품이 빠졌으면 하는 것이다. 전쟁의 혼란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선함과 정직함’을 그리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아버지의 그림은 한국의 가장 아픈 시절을 담은 ‘시대의 초상화’다. 아버지가 그린 사람 중에 하다못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 아버지가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질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전에 물어본 얘기지만 한 번 더 묻겠다. 후손들이 소장한 아버지의 작품은 없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몇 차례 ‘박수근 유작전’을 열어 모두 팔았다. 당시엔 호당 5000원이었다. 그 돈으로 쌀을 샀고, 학비를 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랬다.

    아무런 생활대책이 없던 어머니는 우리 형제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서 아버님의 작품관리에 매달릴 수 없었다. 자녀들이 그림에 재능을 보여도 말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의 작품 몇 점만 갖고 있었어도 20년 가까이 외국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아버지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건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다. 그렇게 큰 재산이 있었다면 형제간의 우애도 지금처럼 원만치 않았을 것이고, 무척 게으르게 살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가는 적당히 가난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난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도 가난하지 않았다면 서민의 모습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이중섭 선생의 경우도 흡사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과 박수근은 우리의 사람이다. 현대를 지탱해주는 근대예술의 소중한 예술인맥이며, 우리가 지나온 근대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반듯하게 지켜내야 할 공동재산이다.”

    -김용수씨가 소장한 가짜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처리돼야 한다고 보나.

    “다시 말하지만 김용수씨가 수집한 박수근 그림 1700여 점은 모두 가짜다. 불태워서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중의 일부는 가짜그림의 제작, 유통과정의 사례로 보관하고 전시했으면 좋겠다. 그 일은 유족이나 미술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고 사법기관의 협조가 필요한 대목이다. ‘예술테러’를 분쇄하자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이중섭 선생의 가짜그림도 마찬가지다.”

    박씨는 이태성씨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 정도로 조심스럽다. 그는 언젠가 필자에게 “이태성씨가 상처 받는 게 내가 상처받는 것만큼이나 아프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돕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지난해 4월 이태성씨에게 어떤 말을 했나.

    “난생 처음 만난 그를 끌어안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를 포옹하면서 속으로 울었다. 그의 얼굴에서 깊은 고뇌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통역을 통해 ‘이태성씨, 사랑합니다’라고 했더니, 이태성씨가 ‘나중에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더 이상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박씨는 고소사건 처리를 위해서 서울에 체류하고 있다. 아울러 호주로 이주한 이후 20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전시회를 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5월25일부터 코엑스 전시관에서 열리는 국제아트페어(K·I·A·F, Korea international art fair)에 참가한다. 상문당화랑의 주관으로 아트페어 30번 부스에서 최근작 20여 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20년 만의 전시회

    “이번에 전시될 작품은 모두 2005년 1월 이후에 한국에서 그린 그림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층(層)-빈 나무(裸木)’ ‘층-빈 그릇’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내가 청년작가 때부터 그린 층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소재가 서울 풍경이다 보니 그동안 호주에서 그려온 호주의 한가로운 풍경이 아닌 다원화된 현대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선 긋기’가 모든 게 복잡하게 엉켜버린 현대사회와 잘 조응(照應)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작 논란,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의 심경 토로
    尹泌立
    ● 1954년 충남 부여 출생
    ● 호주 Miller College of NSW(TAFE) 졸업
    ● 한국 ‘시문학’, 호주 ‘MEANJIN’지로 등단
    ● 저서 : 시집 ‘부끄러운 시들’(공동) ‘시드니 랩소디’,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 2001년 WCP문학상 수상


    그가 ‘층’에 천착하면서 ‘선 긋기’를 해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7년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박성남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작업(Work)’에 이미 ‘선 긋기’가 나타났으니, 무려 28년 동안이나 이어져온 작업이다. 아니, 사실은 ‘선 긋기’가 그보다 훨씬 전인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얻은 영감이기에 무려 40년이나 된 그의 평생작업이다. 하여, 박성남씨는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 ‘선 긋기’를 가지고 아버지의 작품과 겨뤄보고 싶은 욕망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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