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일촉즉발, 다시 찾아온 서해 꽃게잡이 철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05-16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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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라크라인 폐지하고 NLL 만든 미국
    • 한국, 구월산 부대 강제 철수에 격분
    • 푸에블로함 나포 사건으로 본 NLL
    • 북한, 해양법협약 논의 계기로 표변
    • 北 군사경계수역 설정은 무리한 주장
    • 중간선 도입하면 北에 불리할 수도
    • 기본합의서 준수가 NLL 변경 첫걸음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날이 따뜻해졌다. 5월이 되면 연평도 서쪽 수역엔 꽃게잡이 철이 시작된다. 꽃게를 잡기 위해 남북한 어선은 물론이고 중국 어선까지 몰려온다. 여기에다 해주항, 남포항 등 북한 항구를 출입하는 3국 상선도 이 곳을 지나므로 이들을 단속·관리하기 위해 남북한 해군 함정도 몰리게 된다. 이 과정에 어느 한쪽 함정이 ‘우연히’ 혹은 ‘고의적으로’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넘으면 잔잔하던 바다엔 격랑이 인다.

    1999년 6월과 2002년 6월, 이런 긴장은 포성(砲聲)으로 폭발했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북한 함정이, 2002년에는 한국 함정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올해도 서해 NLL상에서는 긴장의 파고가 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월2일 남북한은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1년9개월여 만에 장성급 군사회담을 열었으나, 북측이 서해 NLL 재조정 문제를 제기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남북 화해 무드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하는 서해 NLL은 도대체 어떤 선인가. NLL은 동해에도 있는데 왜 동해에서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서해 NLL은 어떻게 정해졌으며, 과연 해상분계선으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것인가. NLL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아이젠하워의 선거공약

    1952년 5월12일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맥아더 원수와 리지웨이 대장에 이어 제3대 유엔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유엔군은 공산군측의 제의(소련의 라디오 방송)를 받아들여 리지웨이 사령관 시절인 1951년 7월1일부터 공산군과 정전협상에 들어갔다.



    1952년 가을 미국에서는 제34대 대통령선거가 벌어졌다. 공화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맡아 승리를 이끌고 육군참모총장· NATO 사령관·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낸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로 밀었다. 당시 미국인들의 반공 열기는 대단했지만 수년 만에 다시 전쟁에 개입한 탓인지, 자신들의 아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피 흘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크(Ike)’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아이젠하워는 ‘I like Ike’라는 구호를 내걸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그가 제시한 핵심 공약 중의 하나가 6·25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루빨리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아이크의 우세는 선거 초반부터 분명했으므로 클라크 사령관은 정전협상에 박차를 가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러나 공산군측은 협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지루하게 협상을 끌고 나갔다. 공산군의 의도를 간파한 클라크 사령관은 1952년 9월27일 ‘한국방위수역’, 일명 ‘클라크라인’이라는 해상봉쇄선을 선포했다(‘지도 1’ 참조). 그리고 함정을 동원해 북한과 중국의 선박(군함 포함)은 물론, 제3국 선박도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공산군을 압박했다.

    미국은 이 라인의 적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유엔에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은 6·25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53년이 시작되자 정전협상이 진전돼 개략적인 정전 윤곽이 나왔다.

    협상 막바지에 이르자 공산군측은 클라크라인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고 유엔군은 이를 수용했다. 즉 정전협정 15조에 ‘어떠한 종류의 (해상) 봉쇄도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클라크라인 철폐를 약속한 것. 유엔군은 정전협정 체결 한 달 후인 8월27일 공식적으로 클라크라인을 해제했다.

    클라크라인과 서해 5도

    클라크라인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것은 이것이 NLL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NLL은 클라크라인 폐지 3일 후인 8월30일 선포됐다.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1’ ‘한국방위수역’, 일명 ‘클라크라인’.

    1952년 유엔군이 클라크라인을 설정한 것은 유엔군이 동·서해 양쪽에서 제해권을 장악해 공산군을 압박했음을 뜻한다. 유엔군은 ‘해면(海面)’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바다뿐만 아니라 동·서해상의 여러 섬까지 장악해 공산군을 압도했다.

    동해는 섬이 적은 탓에 원산 앞의 여도에 한국군 해병대가 들어가 있었다. 섬이 많은 서해에서는, 유엔군 사령부 역할을 한 미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의 통제를 받는 한국인 첩보조직 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 중 하나인 해상 고트 부대가 청천강 앞에 있는 대화도와 대동강 앞에 있는 초도까지 장악해 활동했다.

    해상 고트 부대장은 이연길(李淵吉)씨였는데, 그는 1997년 2월 북한 노동당 황장엽 비서를 망명시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당시 백령도는 해상 고트 부대와 김종벽씨의 지휘 아래 황해도 구월산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를 지원하는 후방 기지 노릇을 했다.

    “한국군 해상 북진을 차단하라”

    정전협정 제2조 13항 ㄴ호에는 ‘협정이 효력을 발휘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상대방 후방과 연해 도서, 그리고 해면에서 모든 군사역량·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정전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분계선인 한강 하구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해의 여도와 황해도의 구월산, 서해의 대화도와 초도 그리고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는 공산군의 후방이나 연해 도서에 해당했다. 정전협정대로라면 유엔군은 병력과 장비를 빼내 이 곳을 공산군측에 반환해야 했다.

    그런데 정전협정 문구엔 ‘연해 도서라는 용어는 본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 비록 일방이 점유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도서를 말하는 것이다’는 단서가 있었다. 또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및 우도의 도서군(群)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둔다’는 단서도 있었다. 이 단서를 앞 내용에 연결해 요즘 말로 풀면 이렇다.

    ‘바다에 있는 섬에 대한 영유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상황으로 되돌린다. 즉 38선 이북의 섬은 북한이, 이남의 섬은 한국이 영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38선 이북에 있는 대화도와 초도, 여도의 영유권은 공산군에 돌아가지만, 38선 이남에 있는 백령도 등 서해 5도의 영유권은 유엔군이 갖는다.

    서해 5도는 38선 이남에 있기 때문에 6·25전쟁 전에도 한국이 영유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도 유엔군측이 영유하고 있었으니, 설사 이 섬이 북한측 해안에 가깝다 하더라도 유엔군이 영유권을 갖는다. 그러나 이 5개 섬 외에 북한 연안에 있는 작은 섬은 38선 이남에 있다고 할지라도 북한이 영유한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 서해 5도는 한국의 섬이 될 수 있었다. 정전협정은 한반도와 섬이라는 ‘땅’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바다에 대한 영유권을 누가 갖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맹점이 있었다.

    그런데 정전협정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이 분노했다. 이들은 특히 ‘상대방의 후면에 있는 모든 군사역량을 철거한다’는 문구에 흥분했다. 상대방 후면에 있는 군사역량이란 상대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아군 부대를 말한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하던 유엔군은 1950년 초겨울 중국군의 참전으로 기세가 꺾이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미처 남한 땅에서 퇴각하지 못해 지리산에 숨어든 공산군이 활동에 들어갔다. 이에 북한군은 이현상을 사령관으로 한 지휘부를 보내 ‘남부군’이라는 빨치산 부대를 만들었다.

    1951년 1·4 후퇴가 일어나자 남부군의 위세가 매우 강해져 지리산 일대에 또 하나의 전선(제2 전선)이 구축됐다. 위기를 느낀 한국군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는 11사단(화랑부대)을 파견했는데, 2월10일 이 부대는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일으켜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해 11월16일 후방 상황이 악화되자 유엔군은 한국군 최정예 지휘관으로 인정받아온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고 정예 부대인 수도사단과 8사단, 그리고 후방부대인 서남지구전투사 등 3개 사단과 4개 전투경찰 연대로 구성된 ‘백 야전사(Task Force Paik)’를 만들어, 그 유명한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을 펼치게 했다.

    전투경험이 많은 백 사령관과 정예 사단은 효과적인 토벌 작전을 구사했다. 계절은 빨치산에게 더없이 불리한 겨울로 접어들었으므로 쥐잡기 작전이라는 완전 포위전을 펼치자, 빨치산은 식량을 구할 수 없어 맥없이 무너지고 이현상도 사살됐다(1990년 개봉돼 화제를 모은 영화 ‘남부군’은 백 야전사의 쥐잡기 작전에 몰려 섬멸돼 가던 지리산 빨치산을 그린 작품이다).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 2’ 1959년 발간된 북한의 조선중앙연감에 실린 황해남도 지도.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 등에 군사분계선으로 표현된 선이 그어져있다.

    이 때문에 정전협정 체결 때 한국 후방에서 활동한 공산군 세력은 전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군측은 전혀 달랐다. 김종벽씨가 이끈 구월산 유격대는 백령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았기에 정전 때까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접협정 체결은, 대다수 한국인의 눈에 한국이 장악한 땅을 원수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비쳐졌다.

    NLL로 덕을 본 북한

    이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올 것을 예견했기에 정전협상에 참여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키며 미국이 주도한 정전협상에 반발했다. 이 대통령은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한국군 단독으로 휴전선을 돌파해 북한 공산정권을 타도하고 두만-압록강선까지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계획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 바람에 어렵게 정전협정을 체결한 유엔군(미군)이 곤란해졌다. 북한군보다 이 대통령과 한국군부터 단속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국군이 북진을 한다면 그 루트는 구월산 유격대와 KLO 부대의 활동이 많던 서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동해를 통한 침투도 예상됐다.

    해상을 통한 한국군의 북상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자 클라크 사령관은 클라크라인 폐지 3일 후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는 절대 이 선을 넘어가선 안 된다”며 동해에는 북위 38도36분6초를 따라 북방경계선(NBL·Northern Boundary Line)을 긋고, 서해에는 지금의 NLL선을 그었다(유엔사는 1996년 7월1일 동해의 NBL을 NLL으로 개칭했으므로, 지금은 동·서해 모두에서 NLL선으로 불린다).

    이후 유엔군은 한국군이 NLL을 넘지 못하게 끊임없이 감시했고, 한국 수산당국에 대해서도 한국 어선들이 이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단속하라고 고지했다. 이로 인해 정전체제는 안착될 수 있었다. 해군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이던 북한으로서는 유엔군의 간접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시기 NLL이 북한에 유리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1959년 북한 중앙통신사가 발행한 ‘조선중앙연감’에 실린 황해남도 지도를 통해 간접 확인할 수 있다(‘지도 2’ 참조). 앞에서 설명했듯 정전협정은 섬에 대한 영유권만 밝히고 바다 분할은 확정하지 않았는데, 이 지도에는 서해 5도와 북한 사이의 바다에 군사분계선이 표시돼 있다.

    태도 돌변한 북한

    그 후로도 상당기간 북한은 NLL을 남북한 사이의 해상 군사분계선으로 여겼다. 1963년 5월 군사정전위 제168차 회의에서는 연평도 서쪽 NLL을 넘어온 북한 간첩선에 대한 총격전 문제로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이때 유엔사측이 “간첩선이 NLL을 침범했기 때문에 사격했다”고 강조하자, 북한측은 “우리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북한측의 주장은 북한이 NLL을 해상군사분계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1970년대 들어 북한은 태도를 달리했다. 당시 세계는 영해(領海)를 3해리로 할 것이냐, 12해리로 할 것이냐, 아니면 200해리로 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양강국은 3해리 영해를 지지했다. 이들이 바란 것은 넓은 공해(公海)였다. 해양강국은 주인 없는 공해를 마음대로 누빌 힘이 있으니 세계 모든 나라가 좁은 영해를 갖길 원했다.

    반면 많은 약소국과, 강대국일지라도 해군력이 약한 나라는 해양강국의 군함이 자국에 근접해 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12해리 이상의 넓은 영해를 지지했다.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해양력이 약했으므로 12해리 영해를 선택했다.

    정전협상에서도 공산군측은 연해수역(영해와 비슷한 뜻)을 12해리로 하자고 주장했고 유엔군측은 3해리로 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바다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지 못한 채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말았던 것. 클라크 사령관은 남북한 3해리 영해를 채택했다는 가정하에 서해에 NLL을 그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12해리 영해를 주장하는 나라(주로 약소국)가 늘어나자 북한이 이에 편승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곳이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엔 북한의 옹진반도가 있는데 이 곳을 기점으로 그은 12해리 선은 NLL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도 12해리 영해를 주장하는 것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러나 연평도와 소청도 사이의 거리는 무려 47해리나 되기에, 두 섬 사이로 북한 영해가 삐져나오게 된다. 이 시기 약소국들은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의 전신인 ‘경제수역’도 함께 주장했는데 북한도 이에 동조했다. 경제수역을 추가하게 되면 옹진반도로 인해 북한이 얻는 바다는 더욱 커지게 된다.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3’ 1977년 미 국무부가 중간선 개념을 도입해 만들어본 한국·북한·중국의 서해 분할선. 옹진반도 남쪽으로 북한이 차지하는 바다가 삐죽 나오게 된다.

    ‘지도 3’은 1977년 미 국무부가 중간선 개념을 적용해 한국 서해에 경계선을 그어본 것이다. 이 지도대로라면 한국의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는 서쪽에 고립되고, 인천항과 인천공항(영종도)이 있는 경기만 입구에 북한 수역이 놓이게 돼, 한국은 매우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다. 북한은 이를 염두에 두고 12해리 영해와 경제수역 도입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1973년 서해 5도 사태

    이러한 판단을 한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11월 사이 군사 위기를 일으켰다. 이른바 ‘서해 5도 사태’다. 그러나 이 시기 북한은 ‘중간선 개념으로 서해를 분할하자’고 하지 않고, 보다 강한 주장을 들고 나왔다. 즉 정전협정에 ‘서해 5도는 유엔군 관할하에 둔다’라고 돼 있는 것을 문구 그대로 해석해, “서해 5도는 유엔이 영유권을 갖고 있으나 그 섬이 있는 바다는 북한 영해와 경제수역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영유권을 현실화하기 위해 서해 5도 수역으로 군함을 파견함으로써 남북한 해군이 대치국면에 들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유엔군 교전규칙은 선제 사격을 금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쏘았을 경우 대응하는 것만 방어로 규정해 정당성을 인정했다. 북한 군함은 밀려오는데 한국 해군은 교전규칙 때문에 사격을 할 수 없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찾아낸 묘안이 ‘해상 박치기’였다. 한국 고속정은 북한 경비정보다 속도가 빨랐다. 해군은 이 점을 이용해 NLL을 넘어온 북한 고속정을 들이받는 공격을 했다. 100t짜리 고속정이 시속 60㎞ 내외(30노트)로 달려가 들이받으면 대단한 충격이 전해진다.

    양쪽 해군은 총은 쏘지 않고 들이받기만 하는 몸싸움에 들어갔는데, 압도적인 차이로 한국 해군이 이겼다. 이로써 서해 5도 사태가 종식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서해 NLL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수(死守)해야 하는 선’이란 인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영해와 경제수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모호했던 한국 영해

    이 시기 한국은 영해에 관해서는 그 어떤 법령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한국은 관습적으로 3해리 영해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국은 영해에 관한 법령을 갖고 있다가 없앤 경우였다.

    한국은 미군정 시기이던 1948년 처음으로 3해리 영해를 규정한 법령을 가졌다. 1948년 5월10일 미군정은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의 직무를 규정한 남조선 과도정부(미 군정청) 법령 제189호를 제정했는데, 이 법령 제3조 ‘가’항은 ‘북위 38도 이남 조선의 영해의 정의를 左와 如히(왼쪽에 있는 ‘나’항과 같이) 定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대한민국 영해를 38선 이남으로 한정했다.

    이어 ‘나’항에서 ‘영해라 함은 조선 해안에 沿在하는 각 항구, 정박지, 항만 및 기타 海口와 또한 연안선으로부터 해상 1海?(리-구) 又는 3?(마이루) 이내의 沿海域을 포함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영해가 해상 1海?이거나 3?임을 밝혀놓았다.

    여기에 쓰인 해리(海?)는 요즘 해상 거리단위로 쓰이는 해리(海里)와 전혀 다르다. 지금 쓰이는 해리는 nautical mile을 옮긴 것으로 1해리는 1852m다. 법령 제189호는 영문으로 된 것도 있는데 ,영문 법령에는 海?가 ‘marine league’로 적혀있다. 국문 법령에서 괄호 안에 든 ‘리-구’는 바로 marine league를 옮겨 놓은 것.

    영어사전을 보면 league는 ‘동맹’과 ‘연맹’이라는 뜻 외에 ‘미국과 영국에서는 3마일을 뜻하는 거리단위’라는 해석이 있다. 따라서 1 league는 3마일이 되는데, 그냥 league가 아니라 marine league이므로, 1海?는 3 nautical miles, 즉 3해리다.

    이 법령은 1海?(1 marine league)가 가져올 오해를 없애기 위해 바로 뒤에 한국어로 3?(지금 표현으로는 3해리), 영어로 3miles(지금 표현으로는 3nautical miles)이라고 부연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7월17일 한국은 제헌헌법을 마련하고, 8월15일 독립정부를 출범시켰다. 미군정이 끝나면 미군정 시절의 법령도 효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국가를 이끌어갈 여타 법령을 갖추지 못했기에 헌법 제100조에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규정을 집어넣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행 법령은 일차적으로는 미군정 법령이고 2차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법령을 뜻한다. 따로 영해법령을 제정한 사실이 없으므로 한국은 미군정 법령 189호에 따라 3해리 영해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5·16으로 영해법 사라져

    그런데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졸지에 한국은 영해가 없는 나라가 됐다. 1961년 7월15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끈 박정희 세력이 윤보선 대통령과 송요찬 내각수반 명의로 ‘구 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제736호)’을 공포한 것이 계기였다.

    이 특조법은 제1조에서 ‘구 법령이라 함은 1948년 7월16일(제헌헌법을 공포하기 하루 전날) 이전에 시행된 법령으로서 헌법 제100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 효력이 존속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했다. 이어 2조에서 ‘구 법령은 1961년 12월31일까지 정리하여 이를 헌법의 규정에 의한 법률 또는 명령으로 대치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3조에서 ‘전조(前條) 규정에 의하여 정리되지 아니한 구 법령은 1962년 1월20일로써 폐지한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했다.

    1961년 말까지 미군정 법령 제189호는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 대체되지 못했으므로 특조법 제3조에 따라 1962년 1월20일부로 자동 폐지됐다. 한국은 영해에 관해서는 그 어떤 법령도 갖지 못하고, 관습적으로 3해리 영해를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이 영해에 대한 법령을 다시 갖게 된 것은 1977년이다.

    그렇다면 정전협상 때 12해리 연해수역을 주장했던 북한은 영해 법령을 갖고 있었을까. 북한은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나라다. 첩보에 따르면 북한은 1955년 3월, 내각 결의를 통해 12해리 영해를 결정했다고 하나 이를 공표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해 5월 북한 수산상(수산부 장관)이 ‘(북한) 영해 안에서 (북한) 어선의 조업을 허용한다’고 밝혀 내부적으로 정한 영해 원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밝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58년 9월4일,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이 ‘영해 폭을 12해리로 한다’ ‘발해만을 내수(內水)로 하는 직선기선을 도입한다(발해만에 직선기선을 그어 그 안쪽 바다는 호수처럼 육지에 있는 내수로 보고, 이 직선기선 바깥 12해리까지를 영해로 한다는 뜻)’는 내용의 영해 선언을 했다.

    그로 인해 북한도 12해리 영해를 채택했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북한은 12해리 영해를 채택했음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1월23일 일어난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함 나포 사건이다. 푸에블로함이 출항에서부터 나포될 때까지 보인 행동은 NLL을 대하는 미군의 태도가 이중적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푸에블로함과 북한 영해

    이 배는 그해 1월11일 오전 5시 사령부로부터 ‘북한 연안으로부터 13해리 이내에는 접근하지 말라’ ‘원산에서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를 오가며 신호정보(SIGINT)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일본 규슈(九州)의 사세보(佐世保)항을 출항했다. 12일 자정 무렵 울릉도 부근 동해 NBL을 넘은 이 배는 13일 저녁 원산 동쪽 30해리의 작전수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한 해안을 거쳐 16일 블라디보스토크 14해리 수역까지 올라가 작전하다, 다시 청진·성진을 따라 내려오며 활동했다. 그런데 20일 마스트가 고장 나 일본 쪽으로 빠져나가 고치고, 원산 앞바다로 접근해 다시 작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22일 정오쯤 원산에서 11.8해리 떨어진 곳에서 작전하다 북한 경비정에게 발각돼 황급히 일본 쪽으로 도주했다.

    추격에 나선 북한은 다음날 미그기를 띄워 퇴로를 차단하고 경비정으로 하여금 사격하게 했다. 이에 푸에블로함이 백기를 게양함으로써 북한은 이 배를 나포할 수 있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영해를 침범했다는 사과를 받고 11개월 후 승조원만 석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이 12해리 영해를 채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한국 해군은 NLL을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미 해군은 참고만 할 뿐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은 관습적으로 3해리 영해, 북한은 내부적으로 12해리 영해를 주장하던 시점에서 서해 5도 사태를 겪은 것이다.

    1977년은 영해 문제와 관련해 세계적인 경향이 바뀐 해이다. 당시 유엔에서는, 나라마다 다른 영해 폭을 통일하자는 유엔 해양법협약 제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논의에서 많은 나라가 직선기선과 12해리 영해, 24해리 접속수역 그리고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의 도입을 지지했다(접속수역은 연안국이 밀수와 밀입국 사범을 단속할 수 있는 해역을 말한다. 밀수범과 밀입국 사범을 잡아야 할 경우 연안국은 영해 바깥 12해리까지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세가 기울자 대표적인 3해리 영해 지지 국가인 미국이 직선기선과 12해리 영해 제도를 도입했다. 메이지(明治) 시기 ‘3해리 영해’를 선언했던 일본은 관습적으로 3해리 영해를 주장해왔는데, 미국이 방침을 바꾸자 그해 5월2일 12해리 영해와 직선기선을 도입하는 아주 간단한 영해법을 제정했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움직임을 본 다음에 움직였다. 그해 12월31일 12해리 영해와 직선기선 제도를 도입하는 영해법을 제정한 것. 그러나 일본이 24해리 접속수역과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법률은 만들지 않았기에 한국도 그에 관한 법률은 만들지 않았다. 한국은 동맹국의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나갔는데, 이 시기 북한은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갔다.

    北, 200해리 경제수역 발표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 4’ 북한이 주장하는 직선기선을 근거로 작성한 동서해의 북한 군사경계수역과 경제수역 경계선. 서해5도가 갖는 한국의 경제수역은 표시하지 않았다.

    1977년 7월 북한은 200해리 경제수역 도입을 발표했다. 그리고 8월1일에는 “동해에서는 영해 기선으로부터 50해리까지를 군사경계수역으로 설정하고, 서해에서는 경제수역 전체를 군사경계수역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서해는 폭이 좁으므로 북한과 중국은 중간선을 따라 경제수역을 나눠야 한다. 서해에서 북한이 차지할 수 있는 경제수역은 넓지 않았으므로, 북한은 서해 경제수역 전체를 군사경계수역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이 발표가 있은 후 일본 의원단이 민간 어업협정을 협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북한은 휴전선 동쪽 끝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긴 직선기선을 긋고, 이 직선기선에서부터 12해리까지를 영해, 50해리까지를 군사경계수역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그로 인해 북한이 정한 군사경계수역에 대한 분석이 시작됐다. ‘지도 4’는 이를 근거로 만든 북한의 바다 주권선이다.

    군사경계수역(이하 군사수역)은 나라에 따라 방위수역이나 안보수역 또는 군사수역이라고 하는데, 방글라데시와 이집트 파키스탄 수단 베트남 등 16개국이 15에서 100해리 폭으로 선포한 바 있다. 군사수역은 그 성격이 영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된다.

    영해에선 연안국이 모든 주권을 행사하므로 다른 나라 배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바다는 국제적인 통항로이므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통항(通航)할 자유’는 준다. 어선이라면 사전 통보를 하고 조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어구(漁具)를 갑판에 올려놓고 연안국 영해를 지나갈 수 있다. 상선도 사전 통보 후 지나갈 수 있는데 연안국 영해를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군사경계수역은 제2의 영해?

    군함은 사전 통보를 하고 승인을 받은 후 작전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연안국 영해를 통항해야 한다. 잠수함은 사전에 통보하여 동의를 얻은 후 작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부상(浮上)해서 통항해야 한다. 이처럼 타국의 선박(군함 포함)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연안국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 영해를 통과할 수 있는데, 이를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이라고 한다.

    군사수역이란 무해통항권을 제한할 수 있는 수역을 말한다. 이 수역에서 타국 군함(잠수함 포함)은 사전에 연안국(북한)에 통보해 승인을 받은 후 이 수역을 통항해야 한다. 사전통보와 승인절차 없이 통항할 경우 연안국은 이 군함이 적대행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해 공격할 수 있다.

    1968년엔 푸에블로함 나포 사건이 있었다. 1969년 4월15일에는 북한 영공으로 접근한 EC-121 정찰기가 북한 공군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적이 있지만, 미국은 지금도 첩보함과 정찰기를 북한 영해(영공)에 접근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 군사수역을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한의 행동은 중국을 모방한 측면이 있다. 중국은 12해리 영해선언을 하기 직전인 1958년 6월12일, 발해만 입구에 ‘군사경고수역’, 양자강 입구에 ‘군사항해수역’, 대만이 포함된 북위 27도선 이남을 ‘군사작전수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군사수역 선포는 국제적으로 용인받기 힘들다. 오랜 논의 끝에 1982년 채택된 유엔 해양법협약은 접속수역 도입은 인정했으나 군사수역 도입은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이 서해의 경제수역 전체를 군사경계수역으로 선포했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에 하나 남북한이 NLL 철폐에 동의하고 중간선을 따라 서해를 분할한다면, 한국 군함은 북한의 군사경계수역을 빙 돌아서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를 출입해야 하니 이들 섬에 대한 방어가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지도 3’ 참조).

    현재 한국은 북한 함정이 NLL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대신 우리의 함정과 군용기도 북한의 군사경계수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펀치력’에서 자신이 있기 때문인지 군사경계수역을 무시하고 북한의 12해리 영해 밖으로 정찰기를 투입하고 있다. 장차 NLL이 철폐된다면 한국은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1982년 유엔 해양법협약이 채택됐을 때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북한은 모두 이에 서명했다. 유엔 해양법협약은 60개국이 국회 비준서를 기탁한 1994년 발효했는데, 북한을 제외한 세 나라는 국회 비준 동의를 받아 이를 기탁함으로써 정식 가입 국가가 됐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까지 국회 비준 동의를 받지 않아 정식 가입국이 되지 못했다.

    유엔 해양법협약은 연안국의 주권을 보장해준 만큼 다른 나라 선박의 무해통항권도 상당히 보장해준 것이 특징이다. 북한이 이 협약에 정식으로 가입하려면 군사경계수역을 철폐하고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선박에 대해서도 영해 내 무해통항권을 보장해야 한다.

    중간선 적용하면 동해선 북한이 손해

    북한은 그들에게 유리한 내용이 담긴 유엔 해양법협약에 왜 가입하지 않았을까. 이 협약은 폭이 좁은 바다에선 중간선 개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을 확정하라고 요구한다. 현재 백령도 서쪽의 NLL은 위도와 나란히 뻗어 나가는데,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경계선은 서북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다(‘지도 3’ 참조). 북한은 옹진반도 남쪽에서 넓은 경제수역을 얻는 대신 백령도 북서쪽 바다는 한국에 내줘야 하는 것이다.

    위도와 나란히 있는 동해 NLL도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 한국의 경제수역이 넓어진다(‘지도 4’ 참조). 동해 NLL은 북한에 유리하게 설정돼 있었기에 북한은 정전 이후 단 한번도 동해 NLL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없다.

    남북한이 바다를 분할하려면 선결해야 할 일이 있다.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이 바다를 분할한 과정을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과거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중국과는 6·25전쟁에서 싸웠지만 이 원한을 털고 두 나라와 바다를 분할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두 사례는 6·25전쟁 때 결사적으로 맞붙은 남북한이 바다를 분할하는 데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한일·한중 어업협정이 모델

    바다를 사이에 둔 대향국(對向國)끼리 바다를 분할하려면 먼저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해야 한다. 싸우지 않는 것은 외교관계를 맺어 평화롭게 지내겠다는 것인지라, 이 약속은 평화조약, 수교조약, 기본조약, 강화조약, 불가침조약 체결 등으로 불린다. 이 약속은 워낙 중요한 것이기에 양국 원수가 서명하고 양국 국민을 대표한 국회가 비준 동의를 해줘야 한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트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14년간 교섭한 끝에 1965년 2월22일에야 기본협정을 맺고 이어 양국 국회의 비준 동의서를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외교관계를 맺게 됐다(1965년 12월18일). 중국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1992년 8월24일 수교조약을 맺고 9월24일 정식 외교관계를 열었다.

    바다 분할은 이런 토대 위에 이뤄진다. 이때 필요한 것이 ‘동등한 룰’이다. ‘상대가 3해리 영해면 나도 3해리 영해’ 식으로 같은 룰을 적용해야 바다 분할이 이뤄질 수 있다. 또 유엔 해양법협약에 가입한 다음 이 협약을 근거로 바다를 분할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 과정을 밟아왔다. 1977년엔 일본-한국 순서로 12해리 영해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유엔 해양법협약에 가입할 수 있는 첫 번째 기반 구축이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5년 12월6일 한국은 영해법을 ‘영해 및 접속수역법’으로 개정해 접속수역 제도를 도입하고 직선기선 좌표를 발표했다. 한 달 후인 1996년 1월29일에는 국회 비준 동의를 받아 유엔에 기탁함으로써 유엔 해양법협약 가입국가가 됐고, 8월8일에는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도입하는 법을 제정했다.

    일본은 6개월 늦은 1996년 6월14일 영해법을 ‘영해 및 접속수역에 관한 법률’로 바꾸고 그 시행령에서 직선기선 좌표를 공개했다. 그리고 6일 후인 6월20일 국회 비준 동의를 받아 기탁함으로써 역시 유엔 해양법협약 가입국이 됐으며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도입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배타적 경제수역이란 연안국이 경제주권을 갖는 바다를 말하는데, 바다의 경제주권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어업권이다. 1952년 한국이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한 것은 배타적 경제주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이 라인은 효력을 잃고, 대신 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됐다.

    한일어업협정은 두 나라가 3해리 영해를 채택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직선기선에 의한 12해리 영해제를 인정하는 유엔 해양법협약이 발효됐으니 두 나라는 새로운 어업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998년 그리하여 신(新)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됐는데, 이 협정은 배타적 경제주권 중에서 어업 주권의 경계선만, ‘부분적’으로만 확정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는 두 나라가 어업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지 않고 ‘중간수역’을 도입한 데서 확인된다. 경계선이란 한번 그어놓으면 여간해선 바꾸기가 쉽지 않다. 또 어업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버리면, 장차 이 선은 두 나라 사이의 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을 긋는 근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어, 중간수역을 도입해 이를 피해간 것이다(‘지도 5’ 참조).

    한일 양국의 이러한 선택은 바다 분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더구나 두 나라는 독도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으므로 이 협정에 ‘영토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라는 단서를 달아 어업 경계선 협정을 어렵사리 마무리했다. ‘어중간한 분할’은 한중 어업협정과 중일 어업협정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 5’ 한국과 일본은 동해와 제주도 남쪽 바다 두 곳에 중간수역을 둔 어업협정을 맺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과 중국은 잠정조치수역을 두고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1958년 ‘12해리 영해’ 선언을 한 중국은 1992년 ‘영해 및 접속수역법’을 제정해 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한국과 수교하고 난 다음인 1996년 5월15일 그들이 정한 직선기선의 좌표를 공개했다. 이어 6월7일, 국회 비준 동의서를 기탁함으로써 유엔 해양법협약의 가입국가가 됐고 배타적 경제수역에 관한 법률도 제정했다.

    2000년 한중 양국은 오랜 협상을 벌여 한중어업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도 어업 경계선을 확정해야 하는 바다에 ‘잠정조치수역’을 둠으로써 확실한 분할을 피해갔다. 1997년 중국과 일본은 중일어업협정을 타결하며 잠정조치수역을 도입했는데, 한국과 중국은 이 전례를 따른 것이다(‘지도 5’ 참조).

    기본합의서=평화조약?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일본과 중국은 평화조약을 맺고 유엔 해양법협약에 가입했음에도, 경제주권 중의 하나인 어업권 경계 확정만, 그것도 중간수역이나 잠정조치수역을 도입해서 어중간하게 마무리했다. 경제주권에는 해양 광물자원 개발권도 있는데 세 나라는 이 부문은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북한도 이 전례에 따라 동해와 서해에서 바다를 분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싸우지 않겠다는 ‘평화조약’부터 맺어야 하는데, 평화조약 체결은 곧 정전협정의 실효를 뜻한다. 정전협정 실효는 NLL 실효로 이어지므로 북한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평화협정 체결에 있어 남북한은 전혀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1년 12월31일 남북한은 정원식 총리와 연형묵 총리가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이 합의서는 ‘남북 기본합의서’로 약칭되는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이라는 단어이다.

    화해의 대전제는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화해를 하면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으니,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은 같은 뜻이 된다. 기본조약과 평화조약, 수교조약은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합의서도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양쪽의 원수가 서명하고 국회가 비준했다면 이 합의서는 당장 구속력이 강한 평화조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석대표만 서명했기에 ‘기본조약(평화조약)’이 되지 못하고 ‘기본합의서’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합의서는 조약에 비해 구속력이 약하지만, 합의 내용을 잘 지키면 조약에 준하는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신사적으로 기본합의서의 내용을 잘 지킨다면 이 합의서는 기본조약(평화조약)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신사협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이 진정으로 정전체제의 산물인 NLL을 철폐하고자 한다면 기본합의서 내용부터 지켜야 한다.

    두 번째로 북한은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의 비준 동의를 받아 유엔 해양법협약에 정식으로 가입해야 한다. 그러나 이 협약은 군사경계수역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북한은 먼저 군사경계수역을 철폐해야 한다. 북한은 이 부문에서 ‘왜 남쪽이 설정한 NLL은 정전체제로 인정하고 북한의 군사경계수역은 인정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다.

    불가침 이행이 대전제

    이 문제는 기본합의서로 풀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기본합의서는 제11조에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문구가 있다. NLL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 경계선이므로, NLL을 바꾸고 싶다면 북한은 먼저 NLL을 준수해야 한다.

    기본합의서에는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가 있는데 이 부속합의서 10조엔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문구가 있다. 북한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한다’는 문구에만 집착해 NLL 변경을 주장한다. 하지만 전체 문장은 NLL을 변경하고 싶으면 NLL을 잘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로 북한이 진정으로 NLL 변경을 시도한다면, 중간선 원칙에 따라 동해와 백령도 북방에서 남북 해양경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경계선 설정은 군사경계수역 철폐를 전제로 하므로 북한은 한국 함정과 항공기가 북한 영해 바깥에 진출할 수 있고, 같은 이유로 북한 함정과 항공기도 한국 영해 바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北의 욕심, 南의 조심… NLL은 불안하다

    ‘지도 6’ 2000년 3월23일 북한이 발표한 서해 5개섬 통항질서와 그들이 주장하는 해상 군사분계선.

    그러나 1999년 북한은 반대로 갔다. 그해 6월 연평해전을 치른 북한은 9월2일 일방적으로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선포하고 이 수역을 지키기 위해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0년 3월23일에는 이 선언의 후속조치로 서해 5개 도서로 출입할 수 있는 두 개 수로(폭 2해리)만 열어주는 ‘서해 5개 섬 통항 질서’를 발표했다(‘지도 6’ 참조).

    그러나 북한은 동해에서는 다른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2005년 1월21일 동해 NLL 북방에서 가림해운 소속 화물선 파이오니아나야 호(2826t)가 조난됐을 때 북한은 한국 해경의 5000t급 경비함 삼봉호와 초계기 챌린저호가 사고 수역으로 들어가 수색하는 것을 허용했다(그러나 조난자를 구하진 못했다).

    북한의 선택에 달렸다

    같은 해 2월21일 러시아 포시에트에서 일본 니가타(新潟)로 가던 뗏목 탐험대 ‘발해 2005’가 동해 NLL 북방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도 북한은 삼봉호와 챌린저호 투입을 허용해, 한국인 탐험대원 4명을 구조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협조가 반복되면 NLL 재조정 문제도 쉽게 풀릴 수 있다.

    한국은 해양 문제에 관해 세계의 대세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의 눈치를 봐가며 조심스럽게 대처해왔다. 반면 북한은 유리할 때는 침묵하고, 불리하다고 판단될 때는 행동을 감행하는 욕심을 부려왔다. NLL 문제는 조심과 욕심 사이에 중간수역을 둘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도 서해 NLL에는 꽃게가 대풍일 것이다. 남북의 대치 강도가 높아지면 양쪽 어선의 출어는 제한될 것인데 이때 중국 어선들이 사실상의 공해인 이곳으로 몰려와 싹슬이 조업을 한다. 상대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사이 제3자가 꽃게를 쓸어가는 사태를 과연 남북은 두고보기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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