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바보는 축구를 축구로만 본다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6-05-17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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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는 축구를 축구로만 본다

    축구를 통해 인생을 보고, 리더십을 발견한 책들.

    386세대, 아니 이제는 대부분 마흔 줄에 접어들었으니 486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어쨌든 이 또래들은 스포츠라고 하면 전두환의 3S정책부터 떠올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대학에서 “3S정책으로 국민을 우민화(愚民化)하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토론을 더 많이 한 덕분이다.

    전두환과 3S시대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로 대변되는 3S는 대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고 사회적 불만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교묘한 정치도구였다. 로마의 검투사 시합이나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처럼 말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1980년 컬러TV가 보급됐고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으며,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언감생심 1988년엔 올림픽까지 유치했다. 전두환, 노태우로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스포츠 코리아 만만세’가 계속된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이 그 시절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를 입은 호남을 연고지로 한 해태가 프로야구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했고, 88올림픽 기간에는 애써 무관심으로 우민화에 저항했다.

    문제는 필자처럼 태생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인간들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대학물을 좀 먹은 뒤에는 드러내놓고 “나, 해태 팬인데”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아주 무관심한 척하기는 더 괴롭다. 원초적 본능 탓이다. 군산이 고향인 아버지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팀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했고 덩달아 그 아들과 딸도 축구와 야구를 구분하게 된 순간부터 고교야구에 심취했으며, 김봉연 김일권 김성한 같은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대학야구를 더 재미있게 보고,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태 팬이 됐다.

    야구 시즌이 끝나면 더 바빠졌다. 김동광 박수교 이충희의 농구에 열광할 시간이 온 것이다. 특히 뒤로 제치듯 점프하며 쏘는 이충희 선수의 슛 동작이 미국 NBA의 마이클 조던을 알기 전까지는 최고라고 믿었다. 강만수 강두태 장윤창 선수가 활약하던 시절 배구는 또 얼마나 우리를 들뜨게 했던가. 그런 필자에게 전두환 군사정권의 유산인 3S니 우민화니 하는 것은 참으로 우울한 족쇄였다.



    3S의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그 뒤로도 한참, 2002년 월드컵이었다고 고백하겠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게 무슨 죈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3S로 국민의 머릿속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꺼림칙함을 떨쳐버리니 마음껏 스포츠에 열광할 수 있었다.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이 메달 따는 장면을 보고 또 보면 어떤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이 이룬 4강 신화에 코끝이 찡했던 국민은 정치꾼들이 그 덕 좀 보겠다며 야구에 빗대 상대를 비난했을 때 코웃음쳤다. 혼혈인에 대한 편견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하인스 워드 선수를 진정한 영웅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까지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고 보니 스포츠가 스포츠로만 보이지 않는다. 운동 경기는 인생의 축소판 아닌가. 덕분에 스포츠를 감상할 때도 이기고 졌느냐를 떠나 관전 포인트가 다양해졌다. 스타플레이어뿐 아니라 감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이 무렵이다.

    김인식 리더십 배우기 열풍

    2006 WBC에서 최고의 스타는 단연 김인식 감독이었다. 사람들은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이럴 때 쓴다는 것을 잘 안다. 김인식 감독이 보여준 믿음의 리더십을 배우려는 열기는 ‘야구를 경영하는 감독의 6가지 원칙-김인식 리더십’(고진현, 채움)을 화제의 책으로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마치 4강 신화를 예측이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에 이 책을 펴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책은 4강 신화 이전에 씌어졌기에 더 가치가 있다. 저자 서문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난해 한국사회에서 리더십에 있어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은 누구일까?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이 단연 첫손에 꼽힌다. 리더십론의 기본구도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결과 중심적이기 때문에 획득가치가 기대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게 보편적이다. 한국은 1등 지상주의가 판치는 사회다. 그런 가운데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리더십의 한가운데에 선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김 감독이 이끈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은 고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해 3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감독의 리더십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흥미로움을 뛰어넘어 고무적이다. 리더십론의 치명적 약점인 결과중심주의에서 마침내 벗어났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방증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WBC 4강이라는 결과 이전에 이미 지난해 김 감독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김 감독은 어깨부상으로 두 번이나 은퇴했던 지연규, 기아에서 방출된 김인철, 풍운아 조성민을 차례로 부활시켜 ‘재활의 신’으로 칭송받았다. 이 책의 목적은 재활의 신에게서 인생을 경영하는 지혜를 얻고자 한 것이지 4강 신화의 주역에게 승리의 비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다. 이쯤 되면 야구가 더는 야구가 아니다.

    한국 축구, 무엇이 달라졌나

    ‘김인식 리더십’은 2002년 히딩크 리더십 배우기 열풍을 연상케 한다. ‘CEO히딩크-게임의 지배’의 저자인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는 히딩크를 “나를 따르라”의 모세형 지도자라고 했다. 히딩크는 주입식 교육과 훈련에 익숙한 한국 선수들에게 “왜 이런 훈련을 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물어보라”고 가르쳐 한국팀을 단숨에 세계 4강으로 끌어올렸다.

    그로부터 4년, 한국 축구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런 궁금증이 필자를 엉뚱하게도 축구 책 기획자로 만들었다. ‘CEO히딩크’의 저자에게 또 한 권의 축구 책을 주문했다. ‘박지성 휘젓고 박주영 쏜다’(동아일보사)가 그것이다. 저자는 먼저 한국 축구의 현실을 이렇게 지적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 팬들의 허영을 ‘월드컵 4강’으로 채워줬지만 그가 가고 나자 한국 축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허탈감 속에 ‘작은 장군’ 아드보카트 감독이 다시 우리에게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그는 과연 한국 축구에 무엇을 가르쳐줄 것인가. 전투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인가. 아니면 꿈을 심어줄 것인가. 이제 한국 축구는 달라져야 한다. 신나는 축구, 신들린 축구, 흥겨운 축구를 해야 한다. 힘과 깡이 아닌 머리를 쓰는 축구를 해야 한다. 이영표나 박지성은 어쩌다 한 명씩 나오는 예외에 속한다. 박주영은 한국 축구의 미래다.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다. 그는 공을 둥글게 찰 줄 안다. 박주영의 축구에는 살기가 없다. 하지만 그런 박주영도 이대로 두면 다시 한국 축구의 ‘꼴통 구조’에 함몰된다.”

    아쉽게도 요즘 잔뜩 힘이 들어간 박주영의 축구를 보면 저자의 이런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듯하다. 박주영이 진정한 축구 천재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그러나 박주영은 아직 젊다. 시간은 그의 편이다. 다만 강호의 쓴맛을 봐야 진정한 고수가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한국 축구도 박주영만큼이나 젊다.

    장기형 축구 vs 바둑형 축구

    장기형 축구와 바둑형 축구의 차이를 아는가. ‘박지성 휘젓고 박주영 쏜다’는 어떤 축구 관련 책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글로 채워져 있다. 그중 한 꼭지가 ‘장기, 바둑 그리고 축구’다. 장기짝은 하나하나 역할이 있다. 축구선수들도 저마다 역할이 있다. 질풍처럼 달리는 차두리나 정경호는 장기판의 차(車),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미사일을 쏘는 설기현은 코끼리(象), 안정환과 이동국은 말(馬), 그리고 감독은 왕(宮)이다. 왕은 선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각자에게 포지션과 임무를 맡긴다. 2002년 히딩크 축구는 장기판 축구로 4강에 올랐다. 유로2004에서 그리스 또한 장기판 전략으로 철저한 수비축구를 펼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승을 했다.

    그러나 장기판 축구는 자칫 잘못하면 팀의 활기를 빼앗아간다. 이럴 땐 바둑알 축구가 필요하다. 바둑알에는 역할이 없지만 끊어지지 않고 연대해야 살아남는다. 바둑판에는 싸움터가 따로 없다. 바둑알이 놓이는 곳이 곧 싸움터다. 토털 축구가 바로 바둑을 닮았다. 진짜 강한 팀은 필요에 따라 선수들이 장기짝처럼 차(車)도 되고 말(馬)도 되고 포(包)도 됐다가 어느 순간 바둑알이 되는 장기+바둑의 축구를 한다. 박지성, 박주영만으로 가능할까?

    ‘박지성 휘젓고 박주영 쏜다’는 스타플레이어의 자서전도 아니고 월드컵 가이드북도 아니다. 다만 축구 생각만 하면 웃음이 터지고, 둥근 것만 보면 뻥 내지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축구 에세이다. 다 읽고 나면 백기완 선생이 “축구는 한(恨)을 내지른 것”이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된다.

    지난 겨우내 이 축구 책과 씨름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바보는 축구 속의 인생을 못 보고, 축구를 축구로만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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