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독신의 탄생’

금욕의 두 얼굴

  •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ja1405@chol.com

    입력2006-05-17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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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신의 탄생’

    ‘독신의 탄생’ 엘리자베스 애보트 지음/이희재 옮김/해냄/780쪽/3만원

    성(性)은 원초적 에너지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을 빼고 생명이 생명일 수 있을까. 생명이 생명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이치를 통해 세계는 지금 여기까지 왔다. 특별한 재앙이 없는 한 생명권은 모든 생명의 본질적 요소다.

    그런데 다른 생명과 달리 인간사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바로 인위적인 금욕(禁慾)이다. ‘독신의 탄생’에서 애보트는 그것을 독신으로 표현한다. ‘독신의 탄생’의 원제는 ‘A History of Celibacy’. 여기서 ‘Celibacy’엔 독신이란 뜻과 금욕이란 뜻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 어디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현실의 일부로 버티고 있는 독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금욕을 영혼과 교감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가. 자발적 독신과 비자발적 독신은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독신의 탄생’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이다.

    ‘모든 문명은 에로스의 억압’

    그리스의 신들은 종종 방탕했다. 대부분 혈기가 넘쳐흘러 여기저기서 뭇 여성을 유혹하고 유혹당했다. 그런 중에 독신을 고집한 신들이 있다. 물론 여신들이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사냥과 동물의 여신 아르테미스. 애보트는 묻는다. 왜 이들은 독신을 고집했을까.

    “아르테미스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독신을 요구하고 또 장려했다. 가령 아르테미스와 흡사하면서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아마존(Amazon)이라는, 활쏘기에 능한 여인족(族)은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경멸했다.”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마존의 여전사들, 그리고 잔 다르크까지, 이들은 모두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을 표방한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전쟁터에서 힘과 판단력과 용기로 두각을 나타낸 존재들이다. 애보트가 묻는다. 이들의 독신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여성이 결혼과 모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켜야 하는 아이들을 줄줄이 안고 집안을 지키면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날개옷을 입을 수 있을까.

    애보트는 독신이면서도 ‘가정의 수호신’으로서 화로를 지키면서 알뜰하고도 아름다웠던 헤스티아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한다. “결혼한 여자는 모두 자기 남편의 화로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므로 헤스티아가 올림포스 산을 꿋꿋하게 지키는 길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모든 문명은 에로스의 억압이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워야 하는 일을 억압하지 않고 여성이 어찌 전사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종교가 금욕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이성과 가정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그 에너지를 온전히 영혼을 정화하는 데 쓰고자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종교는 왜 금욕을 강조할까

    애보트에 따르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을 긍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결을 강조하고 성을 죄악시한다.

    “금욕과 결혼이라는 문제는 신자들에게 발등의 불이었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낫다’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발언은 여자 앞에서 약해지는 남자의 모습과 결혼의 실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혼을 인정한 것은 욕정을 견디느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지, 결혼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거룩한 신의 아들이라는 ‘동정녀의 잉태’는 성을 불결한 악으로, 성에 대한 무지를 순결로 인지하게 만들었다. 순결은 죄악 세상에 속한 인간이 천사로 사는 길이었다. 더구나 복음서의 예수는 혈육에 대해 무심했다. 그것은 독신이 비극이 아니라 성스러움의 징표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성에 대해 부정적이었을까. 애보트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탄압이 일상적인 폭군의 억압에 대항하면서 혈연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동체를 일구었던 힘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손이 아니라 영적 구원이었으므로. 순결과 금욕에 대한 긍정은 피타고라스, 영지주의, 스토아학파 등의 금욕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 기독교는 수도원, 수녀원 같은 대안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성모경배 사상을 심화해 나갔다는 것이다.

    금욕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금욕은 기독교의 금욕과 의미가 다르다. 이들 종교는 집착과 소유욕을 고통의 원인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집착과 소유욕을 끊어버리기 위한 노력에서 금욕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금욕은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의 고통을 종식하고, 신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영적 해방, 즉, 해탈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금욕은 결혼한 여자가 아내와 어머니로서 져야 하는 짐을 벗겨줌으로써, 공부를 하거나 학자가 되거나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금욕이 핵심적 가치가 되면서 정통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그리스도교까지 한편으론 여성을 요물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성녀로 숭배했다. 금욕을 선택한 여자에겐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준 것이었다. 사실 성과 가족에 대한 관심은 우리를 끊임없이 땅으로 인도한다. 금욕을 통한 독신은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게 함으로써 영적인 관심을 가지게 하는 기반이 될 거라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종교공동체를 단단하게 다지는 중요한 믿음체계가 된다.

    물론 금욕과 관능을 동시에 상징하는 시바(Shiva)를 존경하는 힌두교는 관능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금욕을 부적절한 것으로 여기는 재가기(在家期)가 있다. 재가자로 살면서 부부는 성교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영혼의 성숙을 위해 성을 즐기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자신의 의지력을 테스트했듯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금욕으로 정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금욕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금욕을 통해 정액에 담긴 소중한 생명력을 아껴서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해탈의 길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금욕이라는 것이다.”

    정결한 고독이 가져온 여유

    문제는 비자발적인 금욕이었다. 근대사회에서 특히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혼전순결, 하인과 하녀의 금욕, 가난해서 결혼을 못한 총각의 금욕, 수감자의 금욕, 이들에게 금욕은 고역이었다.

    “지금도 매일 6000명의 소녀가 음핵을 절단당하고 있으며, 순결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아까운 목숨이 죽어 나가고 있다. 이렇게 혼전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행되는 악랄한 행위는 거의 일방적으로 여자만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자발적 금욕에 대해 애보트는 분명히 보람보다 희생이 훨씬 크다며 부정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금욕의 역사를 넓게 돌아보고 있는 애보트는 금욕 그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상황에 따라 금욕은 분별 있는 희생일 수도 있고, 악랄한 고역일 수도 있으며 목숨을 지키는 수단일 수도 있고, 영적 계시를 얻는 수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금욕을 빼면 그는 금욕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어 자칫 금욕과 독신을 권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해체를 겪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후기자본주의 시대는 독신이 꼭 금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시대에 독신은 옮긴이 이희재의 말대로 활발한 성적 활동을 하기에 더 유리한 조건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값어치가 있다.

    도처에서 성적 이미지의 융단폭격을 맞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에 주변으로 밀려난 금욕이 결코 많은 이가 생각하듯 가련하고 쓸쓸하거나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애보트의 생각이다. 그는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금욕은 신체적 강인함과 지구력을 끌어올리고 집중력과 지력을 연마하는 수련의 길이었음을. 그가 어떤 금욕과 어떤 독신을 긍정하는 것은 그 자신의 체험에서 연유한 것이기에 단단하고 유연하다.

    “한때 나도 성에 탐닉하고 몰두한 사람이지만,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정결한 고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독립과 평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깊이 빠져들었을 때 느꼈던 질투심이나 소유욕에서 해방되니 홀가분하다. 살림에 대한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나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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