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독일 십자공로훈장 받은 최정호 교수의 쓴소리

“통일 앞당긴 독일의 非통일정책, 非통일 조장하는 한국의 통일정책”

  • 최정호 동아일보 객원대기자, 울산대 석좌교수 chchoe@hanmail.net

    입력2006-06-05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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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객원대기자인 최정호 교수가 한독 관계에 기여한 공로로 5월4일 독일 정부가 주는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최 교수는 훈장 수여식 답사를 통해 ‘독일 통일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독일은 비(非)통일정책을 통해 통일을 앞당긴 반면, 한국에서는 사회 일각의 통일지상주의가 오히려 비통일을 조장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의 답사 전문을 싣는다.
    독일 십자공로훈장 받은 최정호 교수의 쓴소리
    친애하는 줄리아와 미햐엘 가이어 대사, 경애하는 친지들.

    저를 위해 이런 소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또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를 같이해주신 모든 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 자주 만나보고 싶어도 쉽지 않은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니 저는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제가 늘 되씹어보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일정의 사람들만이 초대되어 있는 하나의 만남이다.” 독일의 의사이자 작가인 한스 카로사의 말입니다.

    지난번 이미륵상(賞)을 탈 때도 고백한 바와 같이 저는 허영심이 많아서 상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독일 훈장을 타게 되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아니, 진작 탄 줄 알았는데 겨우 이제야 타느냐”고 사뭇 측은하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독일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비록 좋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남들도 들으라고 작지 않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입니다. 독일은 말하자면 제 젊은 날의 첫사랑, 곧 ‘유겐트리베(Jugendliebe)’였습니다.

    저는 1951년 6·25전쟁의 와중에 독일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저는 1908년부터 북한에서 선교사업을 벌여오던 독일 베네딕트 교회의 신부, 수녀, 수사들이 발간한 합동보고서 ‘북한에서의 운명(Schicksal in Korea)’을 40회에 걸쳐 신문에 번역 연재하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독일 십자공로훈장 받은 최정호 교수의 쓴소리
    1908년부터 원산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해오던 그들은 1945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김일성 체제하에서 6년 동안이나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마침내 독일 본국으로 송환되자 그들의 체험을 이 합동보고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 번역의 연재가 바로 제가 처음 부른 독일에 대한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51년 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5년 후 1960년부터 저는 독일에 건너가 다시 공부도 하고 특파원으로 일도 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자를 향해 독일을 위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1960년대 말 고국에 돌아온 뒤에도 신문사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같은 테마의 노래 부르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 20세기가 끝나가면서 저는 대학에서 정년퇴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사랑의 노래를 부른 독일은 주로 20세기 후반기의 독일, 통일 이전의 독일, 그리고 통일이 된 뒤에도 베를린으로 천도(遷都)하기 이전의 이른바 ‘본 공화국(Bonner Republik)’입니다.

    분단이 서독 발전 걸림돌 안 돼

    그럼 이제부터 독일에 대한 제 사랑의 노래를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불러보고자 합니다. 저는 독일의 제2공화국, 특히 1949년부터 1999년까지의 ‘본 공화국의 50년’이 1000년 독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가장 아름다운, 가장 생동적인, 그리고 가장 생산적인 시대로 보고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정신으로나.

    독일 십자공로훈장 받은 최정호 교수의 쓴소리

    최정호 동아일보 객원대기자가 독일 정부가 주는 십자공로훈장을 받고 미햐엘 가이어 주한 독일대사와 악수하고 있다.

    본의 제2공화국보다 정치적으로 더욱 민주화하고 대외적으로 더 많은 우방에 둘러싸이고 경제적으로 더욱 복지를 누리고 정신적 도의적으로도 더욱 활기가 넘친 독일의 다른 역사시대가 또 있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본 공화국은 또한 수많은 ‘위대한 독일인’을 배출했습니다. 아데나워 수상의 ‘서방정책(Westpolitik)’의 완성과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Ostpolitik)’의 태동을 다같이 현지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제 기자생활의 행운에 속합니다. 우리는 1달러에 4마르크 20페니히 하던 독일 돈이 10년도 못 가서 1달러에 2마르크 이하로 떨어지는 ‘라인 강의 경제 기적’도 그 시절에 목도하였습니다. 전후 독일의 학술·예술 등 풍요로운 문화 분야의 활력에 관해서는 시간 사정 때문에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리되고 정치 이념 체제가 분열돼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본 공화국’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국토분단의 극복보다 민족분리의 극복을 위해 예측 가능한 미래의 통일을 단념하면서 추진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非)통일정책’이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는 것은 현대사의 절묘한 역설입니다.

    같은 분단국가이면서도 한국은 독일과는 판이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서독이 그때까지 있었던 통독성(Gesamtdeutsches Ministerium)을 없애버린 바로 그 해(1969)에 한국은 그때까지 없었던 국토통일원을 비로소 신설하고 그때부터 반세기 동안 민관, 여야 막론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합창해오고 있으나 통일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정책이 ‘비통일’을 조장하고 있다고도 보겠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지식인,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의 ‘통일지상주의’를 더욱 고조시키고 그것은 다시 최근에는 한미간의 동맹보다 남북간의 민족공조를 우선한다는 ‘신민족주의’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통일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이들 ‘사이비 진보적’ 지식인들은 일종의 세속적 ‘원죄론’을 신봉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오늘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노정되는 모든 문제, 이 시대의 모든 비리와 부조리, 비극과 불행은 남북한의 분단이라는 ‘원죄’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담론의 핵심 개념이 ‘분단시대’ 또는 ‘분단체제’라는 말입니다(같은 분단국가인데도 통일 이전의 독일에서는 그러한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통일이 이뤄져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분단은 악(惡), 통일은 선(善)이라는 이런 단순화된 도식에는 통일만 되면 자유와 평등,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미래의 정토(淨土)가 약속돼 있다는 신앙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이 만병통치 단방약 아니다

    제가 독일 현대사에 감사를 빚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소극적인 차원에서는 통일을 선취한 독일이 통일은 곧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의 단방약(單方藥)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의 ‘베를린 공화국’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는 통일 이전의 독일 제2공화국은 분단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시대를 열었다, 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제의 ‘본 공화국’을 통해서 예시해주었다는 점입니다.

    본 공화국은 베를린 공화국을 위한 전단계이거나 예비단계, 또는 임시적인 과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기완결적인 훌륭한 역사시대였습니다. 저는 오늘의 대한민국도 분단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대시대를 열어놓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역사학자 레오폴트 랑케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 신(절대자) 앞에 직접 선다.”

    이처럼 ‘유겐트리베 독일’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오는 동안 어느덧 저도 머리가 벗어져가는 노인이 돼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날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예순을 훨씬 넘긴 뒤에도 피셔 디스카우가 계속 첫사랑과 ‘젊음의 시름(Junges Leiden)’을 노래한 슈만, 슈베르트의 리트를 부르고, 그걸 60~70대의 노인들이 콘서트홀에 가 앉아서 듣는 것이 독일 문화의 일상이요, 그것이 또한 독일적 젊음의 원천이라고 어느 외국의 관찰자가 쓴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독일 십자공로훈장 받은 최정호 교수의 쓴소리
    崔禎鎬
    ●1933년 전북 전주 출생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서베를린자유대학 박사(철학)
    ●성균관대·연세대 교수, 울산대 석좌교수
    ●한독포럼 의장
    ●국민훈장 모란장, 체육훈장 맹호장, 이미륵상 등 수상
    ●저서 :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한국의 문화유산’ 등


    그러고 보면 70이 넘어서도 아직껏 철없는 유겐트리베 독일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저도 어느새 어지간히 ‘독일화(獨逸化)’한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제 사랑은 다분히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했고, 그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대사로 한국에 온 미햐엘이 그러한 제 초라한 모습을 측은하게 생각했는지 이번에 독일연방공화국 쾰러 대통령께 알려서 이런 과분한 훈장을 타게 됐으니 기쁘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늙었지만 짝사랑한 신세는 면한 기운으로 앞으로도 계속 좋지 않은 목소리로라도 독일을 위한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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