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블랙이글’ 故 김도현 소령 순직 20일 전 최후의 육성 인터뷰

“나보다 나이 많은 비행기… 나는 늘 죽음을 안고 산다”

  • 이남훈 자유기고가 freehook@hanmail.net

    입력2006-06-09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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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급 안 받아도 좋으니 50세까지 비행하고 싶다”
    • 순직 하루 전, 아내에게 하트 무늬 커플 잠옷 선물
    • “블랙이글팀은 티코를 타며 쏘나타 성능을 낸다”
    • 사고 위험 상존…“조종사 아내들은 에어쇼 구경 절대 안 해요”
    • ‘낭만 청년’…죽음을 논하면서도 자유롭고 맑았던 눈
    ‘블랙이글’ 故 김도현 소령 순직 20일 전 최후의 육성 인터뷰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도현아!…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우리 동기생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김도현 소령님, 사랑합니다.”

    5월8일 오전 10시30분.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제8전투비행단 강당에서 진행된 블랙이글팀 고(故) 김도현(33) 소령의 영결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공군사관학교 동기생의 조사(弔詞)는 흐느낌으로 얼룩져 반 이상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어 공군 군악대의 장중하면서도 엄숙한 추모 연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영현(英顯) 퇴장식이 거행됐다.

    그의 유해가 국립현충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자 세 살배기 아들 태현이는 아빠가 늘 하던 대로 “필승-!”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했다. 이 아이가 그 경례의 진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참으로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버스의 시동 소리는 유족들의 슬픔을 떠안은 듯 낮고 무겁게 울렸다. 김도현 소령이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공군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천국의 기지’를 향해 영원한 비행을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고가 나기 불과 20일 전인 지난 4월14일, 블랙이글팀을 취재하면서 만난 김도현 소령. 그의 선한 웃음, 겸손한 어투, 그리고 그와 술자리에서 나눈 인상적인 대화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동기생들이 한결같이 ‘참모총장감이다’라고 입을 모을 만큼 뛰어난 한 조종사의 죽음. 탁월한 비행실력은 물론 선후배의 신뢰까지 한몸에 받았기에 그의 순직은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이제 김 소령에 대한 추모의 심정으로 그와의 짧은 만남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그 순간엔 상상도 못했지만, 필자는 그의 마지막 육성을 전해줄 최후의 인터뷰어였다.

    공군사관학교 달력 모델



    김도현 소령은 30대 초반이지만 탁월한 비행실력을 지닌 조종사였다. 김 소령은 공군사관학교(44기) 생도 시절 매학기 우등상을 받았으며, 전체 생도 가운데 4등으로 졸업해 합참의장상을 받기도 했다. 임관 후에는 성적 우수자에게 주어지는 민간대학 위탁교육 과정 대상자에 선발돼 고려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대학에 비교하면 총학생회장과 같은 전대장 생도를 맡는 등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으며,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구보 할 때는 힘들어하는 동기생의 총기를 대신 들고 부축하며 뛴 경우가 여러 번이라고 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5번이나 완주했을 만큼 체력이 뛰어난 그였지만 “비행만큼은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한다”고 했다. 외모도 출중했다. 공사 생도 2학년 때이던 어느 여름날. 전 생도에게 운동장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지휘장교가 생도들에게 모두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발 상태를 점검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집합을 시킨 이유는 사관생도를 대표할 모델을 찾기 위해서였다. ‘미남’을 찾아 살피던 장교는 김 소령을 지목했고, 그는 얼마 후 공군사관학교 홍보 캘린더의 모델이 돼 있었다.

    김 소령을 만나던 무렵 필자는 공군본부 정책홍보실의 협조를 받아 공군을 주제로 한 단행본을 집필하고 있었다. 공군의 ‘멋과 매력’을 공군 내부의 시각이 아닌, 외부 작가의 객관적 시각으로 조명해보자는 취지였다. 무려 20여 개가 넘는 부대와 그 부대원들을 취재해야 하기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블랙이글은 공군의 매력을 취재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이전까지 블랙이글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에어쇼를 하는 특수 비행팀’이라는 게 전부였다. 조종사를 만나본 적도, 전투기나 훈련기에 앉아본 적도 없었기에 그들의 삶과 세계는 그저 화려한 수식어로만 전해지는, 박제 같은 이미지에 불과했다.

    죽음 부른 ‘轉禍爲福’

    블랙이글팀을 만나러 간 때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안내를 해주던 블랙이글팀 대장 김진호 중령이 홍보 동영상을 먼저 보라고 권했다. ‘뭐, 그저 그런 홍보 동영상이겠거니’하며 브리핑실로 들어섰지만 막상 화면 속으로 빠져드니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전통 국악의 힘찬 리듬을 배경으로 한 블랙이글팀의 육중하면서도 압도적인 비행은 ‘하늘의 퍼포먼스’ 그 자체였고, 조종사들은 하늘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이었다. 그들의 비행이 보여주는 날쌔면서도 유려한 곡선, 멋스러운 웅장함은 비록 화면을 통해서지만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동영상을 보고 나서 대원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9명의 블랙이글팀 대원 중 2명은 일명 ‘항생(항공생리)’이라고 불리는 훈련에 들어갔고, 사무실에는 김도현 소령(당시엔 대위)을 비롯, 김창성 소령과 임한일 대위가 있었다. 방금 화면으로 본 그 아름다운 비행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건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대뜸 막연한 질문부터 던져봤다.

    -블랙이글팀이 그렇게 좋아요?

    “있으라면 평생 있고 싶죠, 하하….”

    누군가를 정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김도현 소령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이것이 그에게서 들은 첫마디였다. 자연히 인터뷰는 그에게 집중됐다. 블랙이글 근무기간은 3년. 하지만 블랙이글을 향한 그의 애정은 3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란 걸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블랙이글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오게 됐습니까.

    “블랙이글은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멋있기도 하고, 최정예 조종사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까 꼭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2004년 하반기에 블랙이글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영광이었죠. 하지만 막상 ‘한번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듣는 순간,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를 해야 했습니다. ‘아, 내가 왜 축구를 했을까…’ 하고요. 그 무렵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비행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후회 정도가 아니라 한이 맺히더군요. ‘이제 블랙이글에 들어가는 꿈은 끝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블랙이글이 저를 기다려준 겁니다. 덕분에 더 무리하지 않고 다리가 온전히 나은 뒤에 블랙이글에 들어왔어요. 제 인생에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맞은 것 같습니다.”

    전화위복. 하지만 지금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전화위복이 아니었다. 김 소령이 사고를 당한 직후 블랙이글팀 김태일 소령은 “내가 (블랙이글에) 오라고 그랬어, 내가…”라며 눈물을 뿌렸다. 차라리 그때 ‘우린 널 기다릴 수 없다, 제 몸 하나 관리 못하는 조종사는 필요없다’고 매몰차게 잘랐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비록 ‘꿈’이 깨진 좌절 속에 방황하더라도 젊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그것도 결혼기념일에 이세상과 결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을.

    의리의 청년

    김 소령이 블랙이글에 들어온 것은 필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비행을 좋아했다. 공군은 대략 중령급인 45세 이후에는 비행 일선을 떠나 정책부서로 옮기는 게 관행. 하지만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술자리에서 김 소령은 “월급을 안 줘도 좋으니까 50세까지라도 비행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활인으로서 비행을 한 게 아니라, 그는 비행 그 자체를 좋아했다. 마음껏 하늘을 날던 그 자유의 시간들이 그에게 무한하면서도 순수한 욕망을 불러일으켰을 터.

    -블랙이글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2005년 2월에 배속됐으니 이제 1년 조금 넘었죠.”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하던 블랙이글인데, 실제로 해보니까 어떤가요.

    “군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지만 이렇게 남자답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곳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의리와 믿음으로 똘똘 뭉친 남자의 세계죠.”

    ‘블랙이글’ 故 김도현 소령 순직 20일 전 최후의 육성 인터뷰

    언론에 최초로 공개되는 故 김도현 소령의 마지막 인터뷰 때 모습.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자신, 생도 시절부터 ‘의리의 청년’이었다. 늘 동기생과 선후배들을 보듬는 따뜻한 사내였다. 비행훈련 과정에서는 일부 생도들이 탈락하기도 한다. 체력과 비행실력에서 자질이 부족하면 조종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동기 중에서도 비행훈련 중에 도태될 위험에 처한 생도들이 있었다. 조종학생장이던 그는 중대장을 찾아가 동료들을 구제해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비행실력에 관한 문제는 절대 정(情)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동기생 3명은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김 소령은 그날 저녁 동기생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만취했다. 그리고 마셔댄 술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조종학생들은 비행 중 중대한 실수를 하면 주말에 외출을 못하는 ‘금족’ 처벌을 받기도 한다. 이때 가장 난감한 것이 식사. 주말에는 부대 내 식당이 배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소령은 금족 처벌을 받은 동기생을 위해 끼니마다 앞장서 식사를 날라다주곤 했다. 그리고 늦은 밤이면 자책하고 있을 동료를 생각해 소주와 안주를 몰래 들고 나타나 어깨를 토닥여주기도 했다.

    이런 면모는 추락사고 당시 그가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은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당시 비행기 추락지점과 에어쇼 관람객들 사이의 거리는 불과 1.8km. 고속 비행 중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도달하는 거리다. 유족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 소령은 탈출을 위한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비행기와 민간인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생사를 건 그의 치열한 마지막 전투는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불꽃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인터뷰 도중 담배를 피우려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조종사들도 우루루 따라나왔다. 그러더니 저마다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조종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줄 알았다. 뜻하지 않은 ‘흡연 인터뷰’가 계속됐다.

    입어보지 못한 커플 잠옷

    -하늘에 있으면 늘 긴장상태겠군요.

    “에어쇼나 전투임무 훈련비행을 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지만, 일반비행을 할 때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감탄하기도 해요. 한번은 강원도 정선 상공을 날고 있었는데 너무 예쁘더군요 ‘이 다음에 가족들이랑 놀러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즐거워했죠.”

    김 소령은 그 얘기를 하면서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김 소령. 사랑하는 가족과의 정선 여행은, 그렇게 하늘에서의 즐거운 다짐으로 영영 끝나고 말았다.

    그가 부인 배태안씨를 만난 것은 고려대 경영학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을 때였다.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면 꼭 공군기지 근처로 와서 동기생들에게 애인을 소개하며 자랑하곤 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 애정표현엔 서툴렀지만, 주말이면 가족들에게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어주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의 김밥 솜씨는 아내보다 나았다고 한다.

    블랙이글팀의 일정상 출장이 잦았기에 집을 비우는 날이 허다했다. 그래서 늘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순직 전날인 5월4일, 그는 어렵사리 하루 휴가를 냈다. 다음날인 어린이날은 그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에어쇼 때문에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전날 휴가를 내고 경남 고성의 공룡박물관에 들러 오랜만에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날 김 소령은 몰래 결혼기념일 선물을 준비했다. 하트 무늬가 새겨진 커플 잠옷. 하지만 그는 그 예쁜 잠옷을 아내와 함께 입어볼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아내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1∼2m 간격으로 곡예비행

    인터뷰를 하던 날 저녁, 블랙이글팀과 술자리를 가졌다. 부대 내 장교식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대장 김진호 중령과 3~4명의 팀원이 함께했으며 국내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박지원 대위도 합류했다. 필자의 맞은편에 박지원 대위가 앉았고, 그 오른쪽에 김도현 소령이 자리를 잡았다.

    -긴장 속에 비행을 하다 보면 위험한 상황도 많이 겪겠군요.

    “윙크를 하면서 비행하는 경우도 많아요(그는 코믹하게 윙크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행 중에는 햇빛도 비행을 방해하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직사광선이 들어오니까 땀이 많이 나서 눈으로 흘러내려요. 그런데 땀을 닦을 여유조차 없거든요.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연신 윙크를 하면서 비행하는 거죠. 동료 하나는 비행 중에 산소마스크가 터진 적도 있어요. 물론 당장 숨을 못 쉬는 건 아니지만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블랙이글’ 故 김도현 소령 순직 20일 전 최후의 육성 인터뷰

    故 김도현 소령이 “나보다 두 살 더 많다”고 표현한 A-37.

    -곡예비행을 할 때 비행기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됩니까.

    “1∼2m쯤 돼요.”

    입이 딱 벌어졌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200km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1∼2m간격을 유지하며 이리저리 곡예운전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도 아찔한 일인데, 하물며 시속 600km로 곡예비행을 하는 비행기들의 간격이 1~2m라니. 그러니 조종사에게 단 0.001초의 판단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동료까지 죽일 수 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을 매일 함께하다 보니 블랙이글 조종사들 간의 신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을 수 있는 최고의 믿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비행을 하겠다는 용기조차 낼 수 없다.

    그렇기에 블랙이글은 최고의 정예 비행사만을 선발한다. 중등 및 고등 비행훈련 과정에서 성적이 상위 3분의 1 안에 드는 조종사만이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팀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가차없이 대상에서 제외한다. 비행실력은 물론 성품도 최고가 아니면 선발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김 소령의 얼굴에도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도 공연을 해봤습니까.

    “우리는 해외에서 공연할 수가 없어요. 제가 제일 공연을 해보고 싶은 곳이 제주도인데, 그것도 못해요. 제주도까지 날아가서 공연할 수 있을 만큼 기름을 많이 넣을 수가 없거든요.”

    “조종사들은 모두 로맨티스트”

    -비행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아서 그런가요.

    “그렇죠. 블랙이글팀의 비행기인 A-37은 35년 전에 생산된 기종이에요.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 비행기를 매일 몰고 있어요. 정말, 두 살이나 더 많네요(웃음). 저나 제 동료들은 늘 죽음을 안고 살아요….”

    -그렇게 낡은 비행기로 어떻게 그런 예술 같은 비행을 하죠?

    “이탈리아의 한 비행전문가가 ‘한국의 블랙이글팀은 티코를 타고 쏘나타와 같은 성능을 낸다’고 한 적이 있어요. 비행기 자체의 성능을 보자면 F-16이나 팬텀기에 비해 A-37은 정말 티코급이죠. 하지만 이 비행기로 보여주는 에어쇼는 수준급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도 에어쇼 홍보 팸플릿을 만들 때 블랙이글 사진을 많이 쓴다고 들었어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블랙이글팀이 안타깝게 여기는 사실의 하나는 A-37이 순수 국내기술로 만들어진 비행기가 아니라는 것. 김진호 대장은 “우리 손으로 만든 국산 비행기로 에어쇼를 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본의 특수비행팀 ‘블루 임펄스’만 해도 자국 생산기종인 T-4로 에어쇼를 하고 있다. 하지만 블랙이글팀이 국산기로 에어쇼를 할 날도 멀지 않았다. 국내 기술로 개발한 T-50 고등훈련기가 실전 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

    ‘블랙이글’ 故 김도현 소령 순직 20일 전 최후의 육성 인터뷰

    “아빠 언제 와?” 故 김도현 소령의 아들 태현군이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애타게 찾고 있다.

    -일반비행도 만만치 않은데, 위험한 에어쇼를 업으로 삼고 있으니 가족들의 걱정이 크겠군요.

    “그럴 수밖에요. 블랙이글 조종사의 아내들은 에어쇼 하는 걸 절대 못 봐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아니까요….”

    사고가 나던 날에도 김 소령의 부인은 에어쇼 행사장을 찾지 않았다. 그들의 고난도 곡예비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관객만의 특권이다. 관객들은 하늘을 향해 탄성을 지르지만 조종사 부인들은 하늘을 외면하고 눈물을 쏟아낸다. ‘쾅!’ 하는 충돌음이 환청처럼 귀를 울리고 검은 연기가 환영처럼 목을 조여오는 까닭이다. 김 소령의 부인은 집에서 사고 소식을 들은 후 곧바로 실신했다.

    비행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다. 땅 위에서 살 수 있도록 태어난 인간이 단발 엔진에 목숨을 걸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니. 그래서 한 공군장교는 “조종사들은 모두 ‘로맨티스트’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늘을 날겠다는 낭만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블랙이글팀과 함께한 술자리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술자리를 파하면서 팀원 전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조만간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훈련 때문에 촬영에 참석하지 못한 팀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소령은 장교식당 앞에서 필자와 악수를 하며 “그럼, 다음 촬영 때 꼭 뵙겠습니다” 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낭만 청년’이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논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자유롭고 해맑기만 했다.

    김 소령의 마지막 메시지

    이번 추락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종(機種) 노후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공군도 A-37이 노후 기종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숙달된 정비사들이 매일처럼 최선을 다해 비행기를 정비하므로 기종 노후화가 사고로 직결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경제적인 문제도 걸림돌이다. 한 대에 수백억원씩 하는 비행기를 휴대전화 바꿔대듯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민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국방비 예산만 증액하라고 하면 국민적 반발도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실하고 유망한 엘리트 조종사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국력’이란 말을 떠올리면 안타까움이 앞설 뿐이다. 우리의 국력이 좀더 강했더라면 지금껏 이렇게 낡은 비행기를 붙들고 있지 않았을 텐데. 지금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국산 비행기 T-50이 확고한 지원에 힘입어 개발 시점이 조금 더 앞당겨졌거나 개발 직후 곧바로 블랙이글팀에 배정됐더라면 소중한 한 생명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김성일 공군참모총장은 ‘신동아’에 “공군은 T-50 도입을 계속 추진해 왔으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더욱 가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왔다.

    사고 직후 일부 네티즌들은 ‘에어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건 무모하다’는 의견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블랙이글의 비행은 계속돼야 한다. 블랙이글의 존재 목적은 단지 에어쇼를 보여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 선진국 공군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블랙이글과 같은 특수 비행팀을 운영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특수비행팀의 실력이 곧 그 나라 공군의 전투기 운용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블랙이글은 단순한 특수비행팀이 아니라 대한민국 공군의 프라이드다.

    김 소령을 떠나보내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다른 젊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조치와 대책이 필요하다. 티코를 내주면서 오로지 정신력으로 쏘나타 성능을 내라고 다그치는 건 우리의 국력에도 어울리는 모양새가 아니다. 공군이 제대로 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김 소령이 죽음으로 보여준 마지막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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