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정계개편 바람몰이 나선 이수성 전 총리

“새마을 운동은 죄가 없다, 그 정신으로 분열의 정치 치유하겠다”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6-06-09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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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 일부는 독재권력에 붙어먹던 사람들”
    • “열린우리당은 경박, 분열, 무능의 정치집단”
    • “5·31 지방선거 후 신당 창당하고 싶다”
    • “YS, 이건희 삼성 회장 구속시키려 했다”
    • “새마을 협동정신 되살려 정치 바로잡고파”
    • 중국에 부는 새마을 열풍…공무원 3만명 한국 연수
    정계개편  바람몰이  나선 이수성 전 총리
    ‘대한민국 마당발’ 이수성(李壽成·69) 전 총리는 ‘유신 잔재’로 치부되던 새마을운동을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부활시켰다. 이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직을 맡은 뒤 ‘새마을운동 전도사’를 자처하며 세계를 누볐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더 이상 이 가락은 들리지 않지만, 국내에서도 새마을운동은 이웃봉사, 지역사랑운동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스며들어간다. 이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의 협동정신을 부활시켜 지역으로, 계층으로, 이념으로 분열되어가는 우리 사회를 치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분열의 정치를 걷어내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겪은 김 대통령과의 일화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한때 유력한 대권후보’였던 ‘정치인 이수성’의 자격으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해체를 주문했다. 두 정당 모두 나라를 이끌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므로 국민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리 때 새마을 예산 원상회복

    이수성 전 총리는 TK(대구 경북) 출신이지만 개혁적이고, 개혁적이지만 안정감을 준다. 그는 산업보국론(論)을 펴지만 묘하게도 ‘진보의 상징’인 민화협 의장 자리도 어울렸다. 그런 그가 ‘박정희의 유산’ 새마을운동을 끌어안았고, 화려하게 부활시키더니, 새마을정신을 ‘사상(思想)의 시장’에 다시 내놓으려 한다.



    그가 힘주어 얘기하는 것을 듣다 보니 ‘촌스럽게’만 느껴지던 ‘근면’ ‘자조’ ‘협동’과 같은 단어가 왠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가 던진 새마을 정신은 ‘국민통합의 새 정치’를 지향한다. 이 메시지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왜 지금 ‘새마을’인가.

    5월4일 오후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새마을운동 중앙회에서 이 전 총리를 만났다. 그는 2003년 2월 새마을운동 중앙회 16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지난 3월 3년 임기의 17대 회장에 재취임했다.

    그는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경북 칠곡이 본적인 이수성 전 총리는 1937년생이다. 고건 전 총리보다 한 살 위다. 서울대 법대 교수, 서울대 총장(1995년), 국무총리, 신한국당 상임고문(1997년 대선 경선주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1998~2000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2003~2005년) 등을 역임했다.

    공직경력이 화려하지만, 그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다. 주변의 애경사엔 꼭 참석한다. 오세훈, 강금실, 이해찬, 천정배, 유시민, 손학규, 심대평‥ 요즘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여야 정치인들과도 두루 교분을 맺고 있다. 대화를 할 땐 상대를 편하게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총리까지 역임한 그가 새마을운동 사령탑을 맡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1995년 총리로 와서 보니 전임 총리 때부터 새마을운동 관련 국고 지원이 없어졌습니다. 그걸 원상회복시켰어요. 그게 새마을운동과 맺은 첫 인연이었습니다. 그런데 2003년 초 새마을운동 관계자분들이 내게 ‘좀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마 고위급 공직을 지낸 사람이 필요했나 봐요.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새마을운동은 남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해야겠다, 이렇게 판단했어요. ‘총리까지 한 사람이 그런 자리에 왜 가느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새마을운동이 정치와 무관해서 좋았습니다. 또 대통령이든 누구든 퇴임 후엔 어떤 자리에든 가서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총리 시절 새마을운동 예산을 원상회복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박정희 대통령은 애정을 갖고 이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도 잘 됐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점차 정부 지원이 줄어들었습니다. 급기야 김영삼 대통령 재임 이후엔 내 전임 총리가 ‘새마을운동 중앙회는 관변단체’라며 훈령으로 예산지원을 중단시켰어요.

    그런데 내가 총리가 되어 새마을운동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새마을운동은 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요구대로 전액 지원해주라고 지시했습니다. 물론 그 때는 훗날 내가 새마을운동을 맡게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새마을운동 중앙회장을 처음 맡을 무렵 새마을운동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내 후임 총리들은 다시 새마을운동 예산 지원을 중단했어요. 새마을운동은 정부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정말 관변단체였다면 지금까지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새마을운동 지도자와 회원들이 스스로 새마을운동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내가 회장을 맡았을 때 회원들은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한-중 교류 사상 초유의 일”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22일 제창됐다. 이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부산의 기관장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고 해도 좋고…”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도농(都農)간 소득·생활수준 격차 해소가 주 목표였다.

    효과는 엄청났다. 통일벼 보급사업으로 단위 면적당 벼농사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쌀 수입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당시로선 농민 소득증대뿐 아니라 국가 재정에도 숨통을 틔우는 일이었다. 민족의 업보로만 여겨지던 ‘보릿고개’가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했다. 전국 농촌의 초가집이 근대적 주택으로 바뀌고 도로, 전기,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이 투입됐다. 정부 지원도 있었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성과가 배가됐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근대화의 상징이 됐다.

    새마을운동 중앙회는 새마을운동을 민간 주도로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80년 12월 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이 때는 농촌개량사업이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중앙회는 ‘사회봉사정신을 실천해 지역사회, 국가발전에 기여함’을 운동 목표로 삼았다. 이 단체는 현재 전국 17개 시도, 234개 시군구, 3576개 읍면동에 각각 단위조직을 두고 있으며, 200만명의 회원과 함께 사업을 벌여나가고 있다.

    이 전 총리가 회장에 취임한 이후 새마을운동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전파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은 2006년 4월 중국 공무원들에게 새마을운동 위탁교육을 해주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연간 1만명씩 3만명의 중국 공무원이 중국 정부 예산으로 한국을 방문, 새마을 교육을 이수할 예정이다.

    5월부터 연말까지는 1만명의 중국 고위 공직자가 10일 일정으로 방한해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된다. 수만명의 중국 관리가 한국에서 집단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은 한-중 교류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게 새마을운동 중앙회측의 설명이다.

    또한 새마을운동 중앙회는 중국 현지에서도 공무원, 기업인, 주민 등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 보급사업을 펴고 있다. 중앙회측은 “베트남, 필리핀,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몽골, 러시아 연해주, 콩고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가에서 새마을운동 전수사업을 벌여 현지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중국 정부측은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박 대표의 부친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깊이 공부했다”며 박 대표를 환대했다.

    -이 전 총리께서 회장에 취임한 뒤부터 새마을운동이 해외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나는 총리를 역임했기 때문에 중국에 가면 장쩌민, 리펑 등 중국 최고위 인사들과 만납니다.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만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새마을운동의 위대성을 알렸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그렇게 하니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새마을운동이라는 게 좋은 거라는데, 그거 한번 알아보라’고 시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보니 실제로 좋거든요. 이렇게 되어 중국 최고위층의 새마을운동 도입 지시가 중국 전역으로 내려가게 되어 13억 중국 전체에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정계개편  바람몰이  나선 이수성 전 총리

    중국 고위 공직자들이 2005년 5월 새마을운동 중앙 연수원에서 ‘새마을운동’ 연수를 받고 있다.

    새마을운동 보급의 핵심은 새마을 정신을 가르칠 연수원 시설입니다. 정부에다 ‘다른 도움은 필요 없으니 멋진 연수원 하나 짓는 건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수원을 완공해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중국은 왜 이 시점에서 새마을운동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한국에서 도농간 소득격차는 커다란 사회 문제입니다.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 비하면 심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 농촌가정은 평균적으로 도시가정 수입의 80~90%는 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농촌가정 수입은 도시가정 수입의 3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격차는 자꾸 더 벌어지고 있고요. 이렇게 가다가 같은 나라 국민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도농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불안이 발생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중국은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했기 때문에 도농간 격차를 줄이면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요즘 중국은 새마을운동을 도입해 ‘사회주의 신농촌건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상당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도 새마을운동에서 ‘농촌근대화를 이끈 시스템과 정신’을 찾으려 하고 있지요.”

    새마을 회원들은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

    -중국 등 해외로 새마을운동이 확산되는 것이 ‘종주국’ 한국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요.

    “우선 중국인들이 한국을 많이 찾게 되니 좋은 일이지요(웃음). 중국은 아직 공무원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중국 공무원들이 한국의 정신을 배운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중국은 한국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신뢰하게 됩니다.

    중국엔 3만여 개의 한국 업체가 진출해 있고 앞으로도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과 교류하게 될 텐데, 이들은 불가피하게 중국 공무원들과 접하게 됩니다. 새마을운동의 중국 진출은 음으로 양으로 한국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입니다.”

    -요즘 국내의 새마을운동 사정은 어떻습니까.

    “새마을지도자연합회, 새마을부녀회, 새마을문고, 새마을금고, 새마을직공장연합회 등 5개 조직에서 200만 새마을 가족들이 정말 열심히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얘기하면 대형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 맨처음 달려와서 마지막까지 남아 봉사하는 사람들은 새마을 가족들이죠. 이들은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궂은 일 도맡으며 가족처럼 아픔을 함께 합니다.

    읍면동 단위까지 조직을 갖춰 자원봉사하는 단체는 새마을운동이 유일합니다. 유휴지에 채소를 심어 어려운 이웃에게 김장을 해주고, 하천 주변을 청소하고, 방범순찰을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수집하고, 책을 빌려주고, 집을 수리해주고…. 봉사활동에는 끝이 없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해도 좋을 한국의 훌륭한 정신입니다.”

    -이 전 총리께서 회장을 맡은 이후 새마을운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새마을운동 지도자, 새마을 부녀회, 그 밖에 많은 회원이 해외에서 새마을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잃었던 자긍심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관변운동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도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2003년에 ‘전국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연합회’가 내게 총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조건을 붙였습니다. 전국 아파트 단지에 새마을운동을 보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그쪽에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50~60%가 아파트에 거주합니다. 새마을운동이 아파트 단지를 활동의 장으로 갖게 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농촌의 아파트든 도시 변두리의 아파트든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든 새마을운동은 계층을 따지지 않아요. 삭막해지기 십상인 아파트 생활에 이웃의 정과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이제는 일종의 자원봉사운동, 정신운동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군요.

    “그렇습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잘살기 운동이었다면, 이젠 이웃에 대한 봉사, 정직, 청정운동이 되고 있어요.”

    이 전 총리는 1995년 12월 서울대 총장 재임 중 김영삼 대통령(YS)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1997년 3월까지 재임했다. 이 전 총리는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내가 처음으로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공개제안해 성사시킨 일, 역대 총리 중 유일하게 총리직 사임 때 국회에서 여야 의원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은 일”을 꼽았다.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성사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 지 9개월밖에 안 된 시점에 총리로 옮기게 된 사정이 있었습니까.

    “서울대 총장 때 YS에게 결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서울대 병원장에 YS의 경남고 후배를 앉히라’고 했는데 내가 끝까지 ‘노’라고 했거든요. 그 얼마 후인 1995년 10월 YS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이건희 삼성 회장을 포함해 수십명을 구속해야겠는데 이 총장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으니 반대한다’고 답했습니다.

    2개월 뒤인 12월4일 YS가 ‘점심을 같이하자’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친구 아들 결혼식 주례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더니 ‘좀 일찍 와서 먹고 가라’고 해서 청와대에 갔습니다. 대뜸 ‘총리를 맡아달라’고 하길래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5일, 6일, 7일, 10일, 12일, 17일, 18일 연속으로 전화를 걸어와 부탁을 하는 거예요. 결국 대통령을 이길 수 없어 18일에 총리를 맡겠다고 한 겁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명동성당 경찰투입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1996년 말 김대중(DJ), 김종필(JP)씨를 찾아가 ‘이런 노동법으로는 5년 뒤에 망한다’며 법안통과에 협조해달라고 했습니다. DJ와 JP는 1997년 2월 중에 통과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야당과 다 합의를 끝내놓고 기분 좋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습니다. 청와대는 DJ와 JP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거예요. 그때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체포영장이 발부된 민노총 관계자들이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습니다. 나는 검거 원칙론을 고수했습니다. 언론에서 나를 사흘 내리 비난했지만 감수했어요.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화해 ‘오늘 경찰을 들여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추기경은 ‘며칠 더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경찰청장에게 명동성당 진입을 지시했습니다.”

    교수 처단하겠다는 학생들에 호통

    -실제로는 경찰이 투입되지 않았죠?

    “경찰에 지시한 날 저녁, YS가 나를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이 총리가 정치를 안해봐서 잘 모르는가 본데, 절대로 경찰을 성당에 들여보내선 안된다’고 하더군요. 나는 ‘들어가야 한다’며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과 15분간 다투다시피 했습니다. YS는 ‘이 총리, 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입니다. 대통령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세요. 대통령 지시에 따르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듣고만 있었습니다.

    YS는 수화기를 들더니 경찰청장에게 ‘총리에게 지시받은 것,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했어요. 속으로는 ‘잘 됐다’고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내가 욕 먹을 일은 없어졌다’고 본 거죠. 대통령에게 ‘예산 문제 끝내놓고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대통령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그렇게 해서 그만두게 됐습니다.”

    -민주화 세력, 진보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총리에서 물러난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건 뜻밖인데요.

    “내가 서울대 학생처장으로 있을 때 당시 학생운동 하다 제적될 위기에 처한 학생 대부분을 구제했습니다. 반면, 흥분한 학생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서슬퍼런 기세로 ‘독재정권에 협력한 교수들을 처단하겠다’고 했을 때는 호통을 치며 막았습니다. 나는 인정을 베풀 때, 법과 원칙을 지킬 때를 구분해왔습니다.”

    이 전 총리는 국무위원 등과 함께 하는 총리공관 조찬모임 때 아침 메뉴를 1인당 3만7000원짜리 호텔식에서 2000원짜리 청진동 해장국으로 바꿨다. 3000만~4000만원 들던 국무위원 송년회 장소도 300만원이면 해결되는 무교동 불고기집으로 돌렸다. 대신 일본군위안부, 장애인 등에 대한 지원을 늘렸고, 외채 상환에도 주안점을 뒀다.

    이 전 총리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고건 전 총리와 곧잘 비교한다. “총리, 서울대 총장을 위시한 다양한 사회활동 경력, 일관된 정치적 행보, 진보와 보수를 통합할 만한 자질과 경륜, TK 출신이면서도 비(非)지역적인 성향 등을 놓고 볼 때 이 전 총리가 못할 게 없다”는게 그들의 논리다.

    -총리 사임 후 신한국당 고문으로서 경선을 준비한 것으로 압니다. 몇몇 정치인은 신한국당 ‘7룡’ 중 이 전 총리가 후보가 됐다면…하고 가정하기도 하는데요.

    “최형우씨가 내게 ‘꼭 대통령 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민주계는 차기 대권주자로 나를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YS가 나를 지지하던 국회의원 모임의 해체를 지시하는 순간 사실상 경선은 끝난 거였죠.

    그 일만 없었으면 내가 신한국당 후보가 되어 김대중 후보를 눌렀을 겁니다. 당시 청와대 내부 조사로는 ‘이수성을 내보내면 DJ를 크게 이기고, 이회창을 내보내면 박빙’이라고 나왔거든요.”

    하지만 이 전 총리는 YS가 그의 지지모임 해체를 지시한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 폭로정치의 희생자”

    -신한국당 후보선출 과정에서 부친이 월북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죠.

    “신한국당 모 후보측에서 내 아버지가 월북한 빨갱이라고 허위사실을 퍼뜨려 보도가 됐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6·25전쟁 때 변호사이던 아버지는 1950년 8월10일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어린 내가 두 눈으로 보는 앞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요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도쿄대를 나와 일제 강점기 때 법관을 하다 창씨개명을 안 한다는 이유로 쫓겨난 분입니다. 조선 총독까지 나서서 창씨개명을 강요했지만 끝내 거절했죠. 그런 분을 빨갱이로 몰아 월북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어머니께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며 마음아파 하셨는지…. 그러나 그 후보는 내게 끝내 사과하지 않더군요.”

    한 측근에 따르면 이 전 총리의 어머니는 이 폭로사건 때 받은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얼마 뒤 숨졌다고 한다.

    이 전 총리는 1997년 YS가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함께 탈당했다. “YS의 권유로 입당했기에 YS가 나올 때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 “지금까지 어느 후보에게도 줄을 서본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2000년 민국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는 “내가 망조가 들려고 그랬나 보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민국당 경력이 그의 이미지에 작지 않은 흠집이 됐다.

    -5·31 지방선거가 끝나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개편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전 총리께서 한때 몸담았던 한나라당이 현재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당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은 조순씨가 지어준 건데, 한나라당은 그를 내쫓았습니다. 한나라당의 지지층인 산업화 세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구성원 중 일부는 독재권력에 붙어먹은 사람들입니다. 한나라당이 아직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하는 것은 실망스럽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지하고 겸손하게 자기반성을 하지도 않았어요.

    학교에 있을 때도 민주화운동 하던 학생들 처벌에 앞장선 교수들이 총장선거 나가는 것 보면서 ‘세상 참 더럽다’고 느꼈습니다. 독재정권에 편승한 자들을 끌고가는 한나라당은 국가경영을 맡을 자격이 없습니다. 냄새나는 나라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래도 1997년의 신한국당보다는 지금의 한나라당이 더 나아진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당은 정권을 맡아도 될, 도덕적으로 떳떳한 사람들로 물갈이돼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회창씨는 한나라당을 거꾸로 끌고 갔습니다. 이념논쟁을 벌이면서 수구·구태 세력을 그대로 남겨뒀어요. 현재 한나라당엔 이재오 원내대표와 같은 민주화 세력도 일부 있지만, 극과 극이 혼재되어 합일점도 없고 정체성도 없습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국정은 편향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은 열린우리당의 경박한 정치, 분열정치, 무능정치에 피로증을 느끼고 있어요. 국민은 안정을 원합니다. 적대적 정치로는 나라를 망칩니다.”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진정한 통합

    -그렇다면 5·31 지방선거 후 직접 신당을 만들 의사가 있습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산업화 세력, 편향되지 않는 민주화 세력이 모인 신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두 세력의 진정한 통합을 꿈꿉니다. 여야엔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 중 협동정신을 계승해 지역적, 계층적, 이념적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를 치유하는 운동을 벌이고 싶습니다. 분열의 정치를 치유하고 싶습니다. 동과 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르지 않고 국가의 국제경쟁력을 높여나갈 그런 정치가 필요합니다.

    여론조사는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인품,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치단체장 중에도 그런 자질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가령 손학규 경기지사와 심대평 충남지사는 참 좋은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내 제자이기도 한 손학규 지사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접목시킬 수 있는 인물입니다. 손 지사는 학생운동하면서 그렇게 말썽을 피웠지만 교수나 선배에 대한 예절이 깍듯했습니다. 투쟁을 하더라도 표정은 늘 온화했습니다. 참, 그런데 심 지사는 먼저 당을 만들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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