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신, 붙잡힌 조선 청년들은 과연 범인인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6-12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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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운 겨울밤, 전도유망한 일본인 순사부장이 얼굴이 뭉개지도록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곳곳에서 발견된 증거와 유류품은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줬다. ‘경찰관 집단살해’라는 초유의 사건에 발칵 뒤집힌 일본 경찰은, 엿새 만에 다섯 명의 인근 동네 청년을 긴급 체포하고 자백까지 받아낸다. 그러나 법정에 선 이들은 고문에 따른 허위자백이었다고 주장하고, 변호사는 경찰의 수사결과를 조목조목 무너뜨리기 시작하는데….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안동 순사 살해사건 기사가 실린 ‘신여성’ 1934년 4월호(큰 사진)와 1930년대 조선인이 재판을 받는 광경.

    1932년 1월19일 밤 10시경, 경상북도 안동경찰서 가와카미 신사쿠(川上新作) 순사부장(경사)은 범죄수사를 위해 집을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그랬는지, 신분 노출을 꺼려서 그랬는지 정복 대신 조선옷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 가와카미 부인은 늦은 밤 출근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늘 있는 일이라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며 남편을 배웅했다. 남편은 너무 늦지는 않을 것이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날 가와카미 순사는 귀가하지 않았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가와카미 부인은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땅 설고 물 선 조선에서 경찰의 아내로 10여 년을 살면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지만, 그날만큼은 유난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경찰서에 달려가 소식을 알아보니 남편은 경찰서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경찰 생활 10여 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결근이었다. 그러나 외박과 결근 사실만으로 실종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밤새 놀다 결근했을 수도, 보안을 요하는 사건 수사를 위해 잠복근무 중일 수도 있었다.

    “실종처리 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별일 없을 것이니 걱정 마시고 집에 돌아가 기다리세요. 곧 돌아올 겁니다.”

    불안에 떠는 부인을 간신히 달래 돌려보낸 경찰은 가와카미 순사의 소재 추적에 나섰다. 오전까지만 해도 경찰은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와카미 같은 베테랑 순사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조만간 미소를 지으며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전후사정을 설명해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경찰의 안이한 기대는 오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참혹한 사체

    “안동읍에서 예천 방향으로 1.5㎞ 정도 떨어진 도로의 콘크리트 다리 밑에 사람 시체가 있어요. 어서 와주세요.”

    인근 야산으로 나무하러 가던 초동의 제보였다. 주막집 개가 다리 밑에서 짖고 있길래 다가가 살펴보니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자의 시체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나절부터 가와카미 순사의 소재를 추적하고 있던 경찰은 뜻밖의 제보를 받고 아연실색했다.

    “설마 가와카미 순사가….”

    얼마 후 사건 현장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아오야마(靑山) 검사대리와 우에다(植田) 안동경찰서장을 위시한 경관 수십명이 달려왔다. 사체 감정을 위해 도립 안동의원 야마다(山田) 원장까지 나타났다. 안면부가 참혹하게 뭉개진 사체를 살펴본 경관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설마’가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마는 심하게 깨어졌고 이는 부러졌고 귀밑과 손등의 할퀸 자국을 비롯해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코허리를 맞은 것이 치명상 같았다. 웃옷은 벗겨지고 바지는 정강이까지 흘러내려 속옷이 드러나 있었다. (‘미궁에 든 안동 순사 살해사건’, ‘신여성’ 1934년 4월호)

    대충만 훑어보아도 타살이 분명했다. 경찰은 현장조사를 마친 후, 정밀한 사인(死因) 조사를 위해 사체를 안동병원으로 옮겼다.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기도 폐쇄로 인한 질식사’였다. 누군가 공무수행 중이던 현직 일본 순사를 마구 구타한 후 목 졸라 살해한 것이었다.

    안동경찰서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구에서 검사와 예심판사가 황급히 달려와 수사를 지휘했다. 사건 수사에 소속 경찰이 총동원됐다. 조용한 시골읍내는 일순간 계엄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계 상태에 놓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옆 자리에 앉아 함께 근무하던 동료를 잃은 순사들의 눈빛에는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라는 상급관청의 주문도 주문이거니와 하루빨리 범인을 잡아 ‘억울하게’ 죽은 동료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사건의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풀렸다. 수사 개시 하루 만에 사체 발견 현장에서 서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밭에서 가와카미 순사의 장갑, 수갑 등 잃어버린 유류품 일부를 찾았다. 유류품과 함께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쌈지와 부서진 성냥갑, 그리고 범행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돌멩이가 발견됐다. 모래밭에는 대여섯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단서는 다른 장소에서도 속속 발견됐다. 모래밭과 다리 사이에 있는 논에서는 가와카미 순사의 열쇠꾸러미와 수첩, 6원50전이 든 지갑, 금니 한 개, 명함 10장, 연필 한 자루, 그리고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 묻은 구두 한 짝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유류품이 발견된 논과 시체가 발견된 다리 사이에 있는 안기천 철교 아래에는 가와카미의 검정색 외투, 두루마기, 목도리, 모자, 포승, 곤봉과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방한모 한 개가 떨어져 있었다. 가와카미의 외투와 두루마기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수집된 증거물을 통해 사건 정황의 추론이 가능했다. 첫째, 범인은 한 명이 아니라 대여섯 명이다. 둘째, 범인들은 모래밭에서 가와카미 순사를 집단구타하고 목 졸라 살해한 후 사체를 논과 안기천 철교를 거쳐 다리 밑까지 지고 가서 유기했다. 셋째, 사건 뒤처리가 엉성한 것으로 보아 비전문가의 우발적 범행이다.

    원한관계 수사도 착착 진행됐다. 가와카미는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었다. 가와카미는 유능한 경관이었고,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마음씨 착한 이웃이었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부인할 수 없는 ‘일본 순사’였다. 경찰은 범인을 ‘일본 순사를 미워하는 자’(?)로 단정하고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상 안동에 사는 모든 조선인이 용의자였다.

    경찰은 사건현장 인근의 민가를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주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안동경찰서에는 매일같이 수십명의 농민이 끌려와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일본 순사 한 명이 살해당한 바람에 애꿎은 안동 읍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무구한 양민의 수난은 길지 않았다. 가와카미 순사가 살해된 지 엿새 만인 1월25일, 사토 하야오(佐藤速男) 사법주임이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이 해결되기까지 고초를 겪은 것은 비단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엿새 동안 우에다 서장 이하 안동경찰서 전 경찰은 불철주야로 수사에 매달렸다. 의자에 기대 새우잠을 자면서 밤낮으로 수사에 내몰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범인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한 다음 차례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안동경찰서 경찰들 사이에는, 가와카미 순사처럼 이국땅에서 비명횡사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죽는 것보다야 일주일쯤 잠 못 자는 게 나았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토 사법주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사토 주임이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살해 당시의 상황이다.

    과수원 살인사건

    1932년 1월19일 밤 9시경, 조동래(24), 황석칠(22), 조용화(27), 강점목(20), 안경호(22) 등 시골청년 다섯 명은 안동 읍내 옥동에 있는 과수원에 모였다. 다섯 청년은 과수원지기 오두막에서 한 판에 1전씩 걸고 화투를 쳤다. 한두 시간 지나 판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두루마기를 입은 괴한이 들이닥쳤다. 놀란 청년들은 화급히 호롱불부터 껐다. 조선옷을 입은 괴한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본말로 다그쳤다.

    “무엇을 하느냐? 다 일어서라.”

    일본말에 서툰 무식한 시골청년들이었지만 분위기만으로 사태를 직감할 수 있었다. 청년들은 괴한의 말에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청년들이 일어서자 옷 사이에 숨긴 화툿장이 우수수 떨어졌다. 괴한은 손전등으로 청년들의 얼굴을 차례로 비추며 자신이 순사임을 밝혔다.

    “녀석들, 노름을 한 것이로구나. 순순히 이름과 주소를 대라.”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1930년대 안동읍 풍경.

    가와카미 순사는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 청년들의 이름을 적으려 했다. 청년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만 주고받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가와카미 순사는 다시 한 번 손전등으로 청년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반항해도 소용없다. 달아나려거든 달아나라. 얼굴은 다 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와카미 순사의 얼굴에 딱딱한 물체가 날아들었다. 조동래가 옆에 있던 목침을 집어던진 것이었다. 목침은 가와카미의 콧등을 정확히 강타했다. 가와카미 순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자 다섯 청년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황석칠과 강점목이 팔다리를 누르고, 조동래가 목을 졸랐다. 조동래가 사력을 다해 목을 조르는 동안, 조용화와 안경호는 바동거리는 몸뚱이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얼마 후 발버둥치던 가와카미 순사가 저항을 멈췄다. 피는 속옷, 셔츠, 외투를 적시고 두루마기 밖으로 흘러내렸다. 화투 치느라 깔아놓은 돗자리까지 유혈이 낭자했다. 조동래는 가와카미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재차 확인하고 널브러진 시체를 등에 지고 집 밖으로 나왔다.

    다섯 청년은 시체를 번갈아 짊어지고 어둠을 가르며 내달았다. 과수원에서 300m쯤 떨어진 모래밭에서 시체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조동래는 죽은 가와카미의 몸을 뒤져 현금 50원이 든 지갑과 회중시계 하나, 그리고 만년필 한 자루를 훔쳤다. 몸을 뒤지는 동안 장갑과 수갑이 땅에 떨어졌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담배 한 대씩을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황이 없어 담배쌈지와 성냥갑을 앉은자리에 두고 떠났다.

    다섯 청년은 시체를 짊어지고 내달리다 지치면 땅에 내려놓고 끌었다. 시체를 땅에 끌고가다 보니 피부가 벗겨지고, 지니고 있던 물건이 흘러내리고, 두루마기와 외투가 벗겨졌다. 조급한 마음에서 그랬는지 아둔해서 그랬는지, 사체를 유기하면서 다섯 청년은 흔적을 무수히 남겼다. 가와카미 순사의 시체를 과수원에서 600m쯤 떨어진 예천 가는 길 콘크리트 다리 아래에 내다버리고, 과수원으로 돌아와 피 묻은 흔적을 지웠다. 화툿장은 부엌 아궁이에 넣고 태웠다.

    다음날 조동래는 영주로 달아났고 나머지 네 청년은 전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태연하게 지냈던지 가족조차 조그만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우수성’을 자랑하는 일본 경찰 사전에 완전범죄란 없었다. 제아무리 열심히 증거를 인멸한들 일본 경찰의 예리한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안동경찰서 경찰은 사력을 다해 수사했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다가 지난 24일 옥동 과수원집 방안에서 깔아놓은 돗자리와 목침과 벽 위에 작은 피 흔적을 발견했다. 과수원지기 아들인 조동래가 사건 다음날부터 종적을 감춘 것이 이상하여 조사한 결과 영주 방면으로 행적을 감춘 것을 알았다. 안동경찰서 박상규 순사가 출장하여서 지난 25일에 체포해 돌아온 후 공범 4명도 부근 안기동에서 모두 체포했다. (동아일보 1932년 1월29일자)

    피 묻은 돗자리, 벽지, 목침, 타다 남은 화툿장 등 명백한 물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청년은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했다. 사전에 치밀히 입을 맞춘 듯 다섯 청년은 화투를 치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다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다. 심지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며 관계마저 부인했다.

    “이렇게 확실한 물증이 있는데도 부인할 테냐?”

    “글쎄, 안 한 것을 어찌 했다 하나요?”

    다섯 청년은 악랄한 범죄 수법만큼이나 지독한 ‘독종’이었다.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아도 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순순히 자백하지 않았다. 자백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에도 경찰의 증거 수집은 계속됐다. 이리에(入江) 순사는 조동래의 아우 조용이에게서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했다. 조용이는 경찰이 찾아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19일 밤 저녁을 먹고 황석칠과 같이 과수원 오두막에 갔어요. 조금 있으니 형까지 모두 다섯이 모여서 화투를 가지고 노름을 했어요. 한참 재미나게 노는데 눈만 보이는 모자를 쓰고 검은 외투를 입은 일본사람 하나가 나타나,

    ‘왜 노름하느냐?’

    하니까 형이

    ‘하면 어때서. 네가 무슨 상관이냐?’

    했어요. 한 사람이 팔을 잡자 일본사람이 뿌리치며 뺨을 갈겼어요. 두 사람이 밖에 나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말없이 코허리를 때리고 목을 졸라 죽였어요. 뒷문으로 끌고 나가는 것까지 보고 졸려서 잤어요.”

    (‘미궁에 든 안동 순사 살해사건’, ‘신여성’ 1934년 4월호)

    형은 일본 순사의 목을 졸라 죽이고 동생은 그 무시무시한 살인현장을 목격하고도 졸려서 잤다니 대범함이 말 그대로 난형난제였다. 이리에 순사는 ‘열두 살밖에 안 된 꼬마’의 진술을 증거로 삼는 게 꺼림칙했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나이가 문제겠냐며 애써 자위했다. 검은 외투를 웃옷으로 입었다거나 몽둥이로 코허리를 가격했다는 등 몇 가지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어린 마음에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잘못 기억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잠 안 재우고, 때리고, 며칠이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고, 명백한 물증과 동생의 증언까지 들이밀자, 완강하게 부인하던 조동래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훔쳐간 50원을 어떻게 하였느냐? 바로 대라! 바로 대!”

    사정없이 내리는 호령과 철썩 하는 뭇매에 솔개 앞에 병아리 같이 파랗게 질린 젊은이의 입에서는 뭐라고 묻는지도 모른다는 듯이,

    “네, 그저 그렇습니다.”

    “거기 갖다 두었지.”

    “그랬다고 해두십시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의문의 안동 순사 살해사건’, ‘동아일보’ 1933년 6월23일자)

    한번 자백의 물꼬가 터지자 경찰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주범격인 조동래가 허물어지니 나머지 네 명도 차례로 백기를 들었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뀔까 봐, 사토 사법주임은 신속히 신문조서를 꾸미고 서둘러 범인들의 지장(指章)을 꾹꾹 눌러 찍었다.

    이것으로 사건은 경찰의 손을 완전히 떠나는 듯했다. 가와카미 순사의 죽음으로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안동경찰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건해결에 큰 공을 세운 사토 사법주임은 표창과 함께 포상금 100원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은 끝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다섯 청년은 도박, 공무집행방해, 살인, 사체유기, 점유물이탈횡령의 다섯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경찰의 손아귀를 벗어난 다섯 청년은 예심정에서 또다시 범죄사실을 부인했다. 예심에서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부인하면 자백할 때까지 몇 년이고 방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예심판사는 범죄 사실을 시인한 경찰조서를 근거로 유죄를 인정해 서둘러 공판에 회부했다.

    곡성이 낭자한 법정

    1932년 9월19일 대구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렸다. 범죄사실을 인정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다섯 청년은 이구동성으로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다섯 청년의 유죄를 입증할 확실한 물적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대구지방법원과 복심법원. 1·2심 재판을 담당했다.

    검사가 제시한 피 묻은 돗자리, 벽지, 목침 등은 참고자료에 불과했다.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흐릿한 얼룩이 과연 핏자국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핏자국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얼룩을 가와카미의 피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타다 남은 화투라며 제시한 증거도 한 줌 재에 불과했다. 화투를 태운 재가 맞다 하더라도, 재에 지문이 찍힌 것도 아니고 그것이 사건 당일 다섯 청년이 치던 화투의 재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경찰이 조동래의 자백을 바탕으로 찾은 50원이 든 돈 봉투는 출처가 의심스러웠다. 체포 당시 조동래가 몸에 지니고 있던 돈은 15전에 불과했다. 영주에서 친구 조또쇠에게 사정해 1원을 빌려 쓰고 남은 돈이었다. 현금이 추적되는 것도 아닌데 훔친 돈 50원을 숨겨놓고 아쉬운 소리 해가며 친구에게 돈을 꾼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조동래는 현금이 추적될 것을 걱정할 만큼 치밀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동래의 동생 조용이의 경찰 진술도 의문투성이였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이리에 순사가 진술을 얻기 위해 조용이를 ‘매수’한 정황이 드러났던 것이다. 처음 경찰서에 불려왔을 때 조용이는 사건을 목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리에 순사가 조용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과자를 사주어 달래니 그제서야 사건을 목격했다고 시인했다. 진술이 오락가락하는데다가 몽둥이로 때렸다는 둥, 형들이 시체를 업고 나가는 것을 보고 졸려서 잤다는 둥, 내용마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제1회 공판은 원고와 피고 어느 쪽도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입증하지 못한 채 끝났다.

    10월24일, 제2회 공판에서도 다섯 청년은 범죄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검사는 먼저 안경호를 증언대에 세워 신문했다.

    “피고인은 김경삼을 아는가?”

    “안동형무소에 있을 때 한방에서 지냈습니다.”

    “김경삼에게 순사를 죽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지?”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대구형무소로 이송되면서 김경삼이 호송순사에게 사실을 죄다 털어놓았다. 김경삼이 피고인이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떨고 있는 이유를 물었을 때, 피고인은 조동래와 화투를 치다가 들켜 순사를 죽인 것이 양심에 걸려 그런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들은 사람이 있는데도 부인할 테냐?”

    “아,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끝내 안경호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검사는 대구형무소 간수 류시발을 증인 신청했다. 재판장이 검사를 향해 물었다.

    “원고는 신청 이유를 말하라.”

    “얼마 전 류시발이 본 검사에게 찾아와 강점목이 변호사를 면회할 때 사실을 자백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제보했습니다.”

    재판장은 강점목을 일으켜 세워 물었다.

    “사실인가?”

    “아닙니다. 고문에 못 이겨 자백했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도 사실을 자백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재판장은 류시발을 증인으로 채택한다고 말하고 폐정을 선언했다.

    10월28일, 제3회 공판 개정과 동시에 류시발 간수가 증언대에 섰다.

    “증인은 박필주 변호사가 형무소에 면회 갔을 때, 강점목이 범행을 자백한다는 말을 들어 전말을 담임검사에게 보고한 적이 있느냐?”

    “보고는 했는데, 그게…직접 들은 것이…아니라….”

    류시발은 재판장의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때 검사가 일어서서 “나에게 말한 그대로 말하면 그뿐이 아니냐”며 세 번이나 증인을 꾸짖었다. (‘동아일보’ 1932년 11월1일자)

    류시발은 강점목의 범죄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채 증언대를 내려왔다. 그것으로 사실심리는 종결됐다. 경찰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한 것이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검사 또한 범죄사실을 시인한 경찰조서 외에 뚜렷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무죄일지 유죄일지 확률은 반반이었다.

    검사는 비록 물적증거는 부족하지만 피고인들이 경찰에서 범죄사실을 자백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언과 정황 증거가 있어 범죄사실이 명백하다는 요지의 논고를 펼친 후, 곧바로 구형을 내렸다.

    “조동래 사형, 황석칠·조용화·안경호 무기징역, 강점목 징역 15년!”

    일본어로 내린 구형의 통역이 끝나기도 전 사형이라는 말에 놀란 조동래는 그 자리에 쓰러져 통곡했다.

    “억울합니다. 재판장님, 억울합니다.”

    조동래가 울면서 하소연하자 나머지 네 청년도 목놓아 울부짖어 법정 안은 한참 곡소리가 낭자했다. 11월4일,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다섯 청년의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조동래에게 무기징역, 황석칠·조용화·안경호에게 징역 15년, 강점목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다섯 청년은 단 하루라도 징역을 살 이유가 없다며 복심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복심법원에서도 똑같은 공방이 이어졌고, 1심과 똑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일반적인 경우 사실심리는 2심에서 끝나고 3심에서는 법 적용의 타당성만을 검토했다. 1심인 지방법원에 이어 2심인 복심법원에서도 도박, 공무집행방해, 살인, 사체유기, 점유물이탈횡령의 다섯 가지 죄목이 모두 인정됐으므로, 새로운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 한 다섯 청년이 3심인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지극히 희박했다. 다섯 청년은 10년, 15년, 평생 감옥을 집으로 삼고 지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눈물의 상고장

    다섯 청년 모두 한문으로 자기 이름 석 자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그중 안경호만이 초보적인 일본어를 쓸 줄 알았다. 복심법원의 선고가 있은 후 안경호는 스스로 상고장을 작성했다. 간수의 감시 하에 줄친 인찰지(印札紙·공문서 작성용 종이) 위에 서툰 붓글씨로 비뚤비뚤 써내려갔다. 지난 시절을 생각하니 눈물 없이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가슴에 품은 사연을 한 줄 한 줄 쏟아내니 인찰지는 어느덧 40장을 넘겼다.

    한 살에 어미 죽고 두 살에 계모를 맞았더니 14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보니 넓은 세상에 의지할 곳 전혀 없어 손발이 닳도록 애를 써서 겨우 살아갈 만하니 이 무슨 업원일까! … 내 죄 없음은 하늘땅이 아옵니다. 이 쓰린 원한을 호소할 길 전혀 없어 가슴만 메어집니다. 철저히 조사하면 사실이 드러날 터인데 왜 증거 신청을 낱낱이 물리치는가요?…이렇게 도무지 여가를 차릴 수 없으매 무슨 동무라고 있습니까? 담배와 술은 조금씩 하지마는 노름이야 생후 한 번도 손에 대본 일도 없습니다. (‘의문의 안동 순사 살해사건’, ‘동아일보’ 1933년 6월27일자)

    안경호는 안동읍 안기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조부모와 계모를 모시고 아내와 어린애를 데리고 사는 가장이었다. 낮에는 들에서 저물도록 농사를 짓다가 밤에는 잠들기 전까지 짚신을 삼고, 아내와 계모는 삼베를 짜가며 가난하지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갔다. 조동래와는 4~5년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황석칠과는 대면조차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안경호의 이야기였다. 가와카미 순사 또한 이름은커녕 얼굴도 몰랐고, 살해당한 사실도 경찰서에 붙들려 와서야 알았다는 것이었다.

    이전부터 안동경찰서에서는 동네 청년들을 몇 조로 나누어 야경을 돌게 했다. 가와카미 순사가 죽던 날 밤, 안경호는 강점목, 조용화와 더불어 야경을 돌았다고 한다. 추운 밤 셋이 만나 야경을 돌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잤으며, 계원으로 참여하는 계회에 잠깐 다녀온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경성고등법원. 일제 강점기 최고법원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형사와 순사가 찾아와 저녁을 먹고 있던 안경호를 체포했다. 안경호는 그날 밤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고했지만 신문하는 순사는 믿어주지 않았다. 이틀 동안 구금을 당하고 풀려났는데, 풀려난 지 채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또다시 붙들려갔다.

    “죽였지?”

    “안 죽였어요.”

    “화투를 친 것은 사실 아닌가?”

    “글쎄 안 쳤다니까요.”

    “그렇다면 죽이기만 했나?”

    “화투를 치지도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어요.”

    별실과 유치장을 오가며 여러 가지 문초를 받았다.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되묻고, 잠도 못 자게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아득해서 자기가 말하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그 바람에 귓병을 얻었고 다행히 치료를 받아 나았지만, 어지럼증은 그후로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조동래, 황석칠과는 만난 일도 없습니다. 과수원지기 오두막집에 놀러 가자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야경을 도는데 일부러 갈 수도 없었습니다. 순사를 만난 일도 없거니와 살해의 공모가 무슨 말입니까?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무슨 원한이 있겠으며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과 무슨 노름을 했겠습니까. 15년의 징역이 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은 일로 옥살이를 하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양심이 있는데 한 일을 안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밝은 눈으로 살펴 이 억울한 죄를 벗게 해주시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의문의 안동 순사 살해사건’, ‘동아일보’ 1933년 6월27일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슬픈 사연에 상고장을 받아든 법관조차 감동했다. 결국 경성고등법원은 안경호의 상고를 받아들였다. 안동에서 체포돼 경찰조사를 받고 대구로 후송돼 검찰조사와 예심, 1심, 2심을 받은 다섯 청년은 3심 재판을 받기 위해 또다시 서울로 호송됐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청춘을 보낼 것인지, 사랑하는 가족 품에 돌아갈 것인지 이제 단 한 번의 재판만 남았다.

    가와카미 순사는 손이 셋?

    대구에서 활동하는 손치은 변호사는 사건이 알려진 이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다. 다섯 청년에게 1심에 이어 2심에서까지 중형이 선고되자 자진해서 무료로 변론을 맡았다. 경찰조서, 검찰조서, 1·2심 판결문을 꼼꼼히 연구해보니 사실관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다.

    1933년 5월8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개정된 제1회 상고공판에서 손 변호사는 사실관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가와카미 순사가 방에 들어왔을 때 호롱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복심법원의 판결은 가와카미 순사가 손전등으로 피의자들의 얼굴을 비추면서 수첩에다 성명을 기입하려고 했다는 검사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와카미 순사가 한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수첩을 들었다면, 도대체 어느 손으로 만년필을 들었단 말인가? 가와카미 순사가 손이 세 개라도 된단 말인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여 버리자고 피고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공모했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불은 꺼졌고 손전등은 번쩍번쩍 하는데 어떻게 살해하자는 눈빛을 주고받겠는가?

    또 복심법원의 판결은 ‘피고인들은 협력하여 순사의 손발을 누르고 배에 걸터앉아 목을 감고 머리를 쳐서 질식시켰다’는 검사의 주장을 인정했다. 압수 물건 제30호 가와카미 순사의 두루마기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증거 제43호 조동래가 과거에 입던 옷 외에 다른 피고인들의 옷에는 피 묻은 흔적이 없었다. 피고인들은 원래 가난하고 또 겨울이라 한 벌 옷을 한두 달씩 입는 사람이므로 사건발생 후 얼마 안 돼 검거된 그들의 옷에는 마땅히 피 묻은 자국이 남아 있어야 했다.

    깜깜한 밤중에 달려들어 격투를 벌이다 살해하고 또 시체를 다리 밑까지 짊어지고 가서 버렸으니 그들이 귀신이 아닌 이상 옷에는 다량의 피가 묻었을 것임은 상식에 속한다. 살해한 후 검거되기까지 갈아입은 흔적이 없는 피고인들의 옷에 한 점의 혈흔이 없는 것은 피고인들이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족할 것이다.”

    (‘의문의 안동 순사 살해사건’, ‘동아일보’ 1933년 6월21일자)

    원심 판결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손치은 변호사는 재판장에게 원심을 파기하고 사실심리를 요청했다. 워낙 날카로운 논리였기에 재판장도 변호인의 요구를 기각하기 어려웠다. 5월8일, 제2회 상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근거 없는 사실에 기대어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실심리를 결정했다.

    6월12일, 다섯 청년은 고등법원 형사법정 증언대에 차례로 불려 나갔다. 재판장이 물었다.

    “가와카미 순사를 죽인 일이 있는가?”

    “아니오, 우리는 도박한 일도 없거니와 순사를 살해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입니다.”

    다섯 청년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경찰의 신문조서에는 네 사람은 자백했다고 적혀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

    “때리고 차니 견딜 수가 있습니까? 거짓말이라도 해야 살겠기에 그리한 것입니다.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도 심증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피고인들의 진술에 귀를 기울였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학생과 일반인은 마치 흥미진진한 활동사진이나 연극을 구경하는 듯 긴장된 태도로 증언대를 주시했다. 방청석에 앉아 재판 과정을 지켜본 판·검사시보조차 피고의 승리를 낙관했다.

    “저 시골뜨기들이 그런 무서운 범행을 했을까?”

    “그건 재판이 확정되기까지는 모르지만 경찰 조서에는 허무한 것이 적지 않은 모양이야.”

    “만일에 5명이 아니라고 보면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결론이 나지 않을까?”

    “그러기에 말이야 조선 경찰은 무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이 사건으로서도 알게 될 걸세. 참말 중대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좌우간 흥미 있는 문제야.”

    (‘의문의 안동 순사 살해사건’, ‘동아일보’ 1933년 6월21일자)

    다섯 청년에 대한 신문이 끝나고 사토 사법주임이 증언대에 섰다. 재판장은 증거가 이토록 부실한 이유를 물었다.

    “피고인들이 전부 자백하여 사실을 인정했는데 또 다른 증거가 소용 있겠습니까?”

    검사의 사무를 대리하는 사법경찰 입에서 어이없는 답변이 나오자 방청석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판장은 경성제대 법의학부 사토(佐藤) 교수를 참고인으로 소환해 피살자의 옷에 묻은 피와 돗자리의 피가 동일한지, 가와카미와 동일한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목침에 묻은 피와 조동래의 옷에 묻은 피가 가와카미의 혈액형과 동일한지 감정을 요청하고 폐정했다.

    7월20일, 공판이 속개됐다. 사토 박사가 지난 재판에서 요구받은 혈흔감정의 결과를 보고했다.

    “목침과 문지방에 묻은 것은 피가 아니다. 돗자리에 묻은 것만 피인데 가와카미 순사의 혈액과 같은 O형이다.”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누명을 벗고 출옥한 조동래, 황석칠, 조용화, 강점목, 안경호. ‘동아일보’ 1933년 8월1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범행의 도구로 사용됐다는 목침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음이 밝혀지자 다섯 청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안동형무소에서 안경호가 순사를 죽였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죄수 김경삼이 증인으로 나왔다. 재판장이 물었다.

    “증인은 안경호가 순사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런 말은 들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야경을 돌다가 추워서 과수원지기 오두막에 들어가 노름을 한 일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재판장이 안경호를 일으켜 물었다.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있는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어찌 하겠습니까?”

    사실심리가 끝난 후 검사의 논고와 구형이 이어졌다. 그만하면 공소를 취하할 만도 했건만, 검사는 끝까지 다섯 청년의 유죄를 주장했다.

    “가장 중요한 목침에 피가 묻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피고인들이 경찰과 검사국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하였습니다. 고문한 증거가 없는 이상 마땅히 피고인들의 자백은 증거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조용이의 공술이나 조선의 남부지방 사람 중 O형을 가진 이가 적다는 과학적 사실에 미루어 피고인의 유죄는 충분히 입증됩니다. 원심과 같은 무거운 형벌을 내려주십시오.”

    손치은 변호사는 최후변론에서 피고인들이 자백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자백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낱낱이 증명했다.

    “안면이 부서져 얼굴을 잘 헤아리지 못할 만큼 부상을 시킨 목침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밤에 덤벼들어 목을 조르고 때리고 어깨에 걸쳐 지고 다녔는데 옷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조동래가 50원이 든 지갑을 훔쳐갔다고 주장하나, 가와카미 순사의 호주머니에서 6원50전이 든 지갑이 나왔습니다. 일본 순사는 지갑을 두 개씩이나 들고 다닙니까? 30여 원의 돈이 그후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겠습니까? 조동래는 가와카미 순사를 살해하지도 돈을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고등법원에서 사건을 신중히 취급하여 사실심리를 거듭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가와카미 순사가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구한 다섯 청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범죄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 사건에 무죄 언도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동아일보’ 1933년 7월21일자)

    재판장은 피고인들에게 더 할말이 없는가 물었다.

    “억울합니다. 이 가슴을 보십시오. 죄를 지었다면 하늘이 무서워 어찌 삽니까?”

    일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선처를 부탁했다.

    “고향에 돌아가 부지런히 일하라”

    7월31일, 선고가 내렸다. 재판장은 다섯 명의 피고인을 불러 세운 후 위엄 있는 어조로 판결 주문을 읽었다.

    “원심판결 중 유죄의 부분을 파기한다. 피고인 조동래 무죄. 황석칠 무죄. 조용화 무죄. 강점목 무죄. 안경호 무죄.”

    다섯 청년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단상 위에 앉은 재판장을 향해 수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은 아무런 신빙성이 없는 이상 믿을 수 없다. 피고인 5명이 공소사실과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확인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러므로 범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재판장은 판결이유를 설명한 후 다섯 청년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제 무죄 석방이 되었으니 고향에 돌아가 부지런히 일하라.”

    순박한 다섯 명의 시골청년은 1년7개월 만에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체의 자유를 되찾았다고 행복까지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다섯 청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면서부터 현실의 장벽을 실감했다. 석방은 됐으나 고향에 돌아갈 차비가 없었던 것이다.

    1년 7개월의 억울한 구금생활을 마치고 31일에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조동래 외 4인은 청천백일의 몸은 되었지만 돌아갈 여비가 없다. 그들을 맞으러 벽돌담 높은 감옥으로 찾아와준 친척 한 명 없었다. 다섯 청년은 가려야 갈 수 없는 출옥인들을 위하여 숙소와 고향 갈 여비를 마련해주는 아현리 경성구호회를 찾아갔다. 감옥으로 마중 나온 구호회의 간부를 따라 31일 밤 9시10분에 서대문형무소를 나와 걸어서 아현리로 향했다.

    체포될 때 입었던 두터운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보퉁이를 들고 따라가는 정경은 실로 눈물겨웠다. 구호회에서도 근래에 경비가 넉넉지 못하여 곤란한 중이므로 속히 돌려보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니 그리운 친척은 얼마나 그리워할까? (‘동아일보’ 1933년 8월1일자)

    석 달 후, 다섯 청년은 1년7개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청구했다. 놀랍게도 형사보상법상 그들이 청구할 수 있는 액수는 단돈 9원이었다. 한 사람당 552일, 합계 2760일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국가가 최대로 보상해줄 수 있는 금액이 9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고등법원은 다섯 청년이 경찰에서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보상청구를 기각했다. 범인을 신속히 검거한 공로로 표창과 포상금 100원을 받았던 사토 사법주임은 산골 주재소로 좌천됐다.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全峯寬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순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일본 순사라 해서 모두 조선인을 학대하고 착취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쩌면 착한 일본 순사가 나쁜 일본 순사보다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본성이 착한 일본 순사라 하더라도 ‘공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식민 지배의 첨병, 권력의 주구였다.

    식민지 시대, 일본 순사의 손에 참으로 많은 조선인 양민이 죽어갔다. 숫자상으로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적었다 해도, 가와카미 순사처럼 조선에서 비명횡사한 일본 순사도 적지 않았다. 가와카미 순사를 죽인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자기 나라에 그냥 살았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목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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