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한국 무속 연구 30년, 로렐 켄덜 美 컬럼비아대 교수

“탐욕스러운 한국 귀신, 대접받기 좋아하는 기득권층 닮았죠”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6-07-07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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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존여비 심한 한국에서 왜 여자가 굿을 주재할까?
    • 굿 의뢰인 80% 이상이 자영업자…상류층에도 비밀 굿 성행
    • 바나나와 시바스리갈 좋아하는 귀신, 현대인의 물욕 반영
    • 인왕산 국사당 신도 다른 데로 가버렸을 것
    • 무속과 다른 종교의 대화는 한국 학자의 몫
    한국 무속 연구 30년, 로렐 켄덜  美 컬럼비아대 교수

    1970년 평화봉사단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30년 넘게 한국의 무속을 연구하고 있는 로렐 켄덜 교수.

    “사람들이 제게 물어요. 굿을 믿느냐고. 그런데 굿은 믿느냐고 묻는 것보다 효과가 있느냐고 묻는 게 맞죠. 1977년 음력 3월에 감악산에 올라가서 기도했어요. 박사 되고, 좋은 신랑 얻고, 좋은 아이 낳게 해달라고. 논문도 잘 됐고, 신랑도 만났어요. 아기도…. 좀 어려웠지만 삼신할머니 도움으로 한국 아이 얻었어요.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 어떻게 생각하세요?(웃음)”

    과거의 시점을 음력으로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삼신할머니’를 운운하는 로렐 켄덜(Laurel Kendall·58)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970년대부터 한국 여성의 삶과 무속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인류학자다. 5월 말 한국학중앙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한국 무당과 자본주의의 신(神)들’ ‘배고픈 귀신과 현대 한국의 소비문화’ ‘이사 다니는 신과 변화하는 서울의 경관’ ‘무당, 영매, 그리고 소품의 힘: 한국과 베트남 비교’ 등 흥미로운 주제로 네 차례에 걸쳐 특강을 했다.

    특강 주제들에서 짐작되듯 그의 무속 연구는 민속학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한국인에 의한 무속 연구가 주로 사라져가는 전통을 기록하거나 보존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라면 그의 연구는 무속과 현재 한국인 삶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굿과 같은 무속의례와 한국의 젠더 문제, 소비문화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켄덜 교수가 3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기 전날인 6월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 그의 숙소를 찾았다.

    여자가 주도하는 굿판



    -무속을 설명하는 용어는 한국인에게도 낯선데, 공부하기 어렵지 않았나요.

    “매일 읽고 쓰는 것들이니까 그건 괜찮아요. 문제는 한국말을 하는 거죠. 한국말을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면 ‘눈물 흘리면서 배웠다’고 말해요. 제 아들이-한국 아이를 입양했는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하기에 한국인 유학생을 가정교사로 뒀어요. 어느 날, 너무 어렵다고 울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도 울면서 배웠다고 했지요(웃음).”

    켄덜 교수는 캘리포니아 주립대(버클리) 인류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3학년 때 홍콩에서 1년 유학하며 동아시아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대학 졸업 후 아시아 지역 파견을 희망하며 평화봉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한국과 인연이 닿았다. 잘 모르지만 흥미로울 것 같았다. 1970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서는 연세대 외국어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거처하던 하숙집이 있는 신촌의 골목골목에선 종종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당시엔 이름조차 알 수 없던 징과 꽹과리 같은 악기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가보면 대문 밖까지 사람이 모여든 집 안에서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차림을 한 여성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그 주위에서 또 다른 여성들이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참 이상했어요. 한국의 남존여비 사상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았는데, 우연히 굿하는 걸 보니 대감이나 장군 차림을 한 사람이 다 여자인 거예요. 남자들은 그 광경을 몰래 훔쳐보고 있고, 신기했어요.”

    켄덜 교수는 “음악, 색상, 만신과 의뢰인이 주고받는 대화 같은, 굿판에서 벌어지는 행위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것을 여자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여자이기에 잘 연구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평화봉사단원 2년 임기를 마치고도 1년을 더 한국에 머물고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켄덜 교수가 다시 한국을 찾은 건 1976년. ‘한국 여성의 삶과 무속신앙’을 박사논문 주제로 정한 그는 경기도 양주의 한 농촌 마을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마을엔 두 명의 여자 무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며 굿판을 죄다 쫓아다니고, 무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1년6개월 동안 농촌에서 생활한 켄덜 교수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6개월을 더 연구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논문을 완성했다.

    “유교에서 여자와 남자를 내외로 구분하는데, 그건 내조와 외조라는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녀요. 남자는 체면을 중시해서 밖에 나가 좋은 인상을 주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에 관심이 있지만, 여자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 예를 들어 부부 사이가 안 좋거나 집에 도둑이 들거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하는 것들을 책임지죠. 안주인은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무당집을 찾아갔어요. 남녀가 유별하니 자연스럽게 여자가 무당이 된 거예요. 여자끼리의 관계가 더 편하니까요. 안주인이 만신에게 집안 문제를 털어놓으면 만신은 그 집안의 조상들에서 문제를 찾아요. 결국은 신의 역사, 집안의 역사, 지금의 문제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장의 불확실성과 신령

    -이번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 강의는 한국 무속과 한국사회의 현대화를 여러 각도로 조명한 것들입니다. 언제부터 관심이 여성에서 그쪽으로 옮겨졌나요.

    “1980년대에 한국 결혼식의 현대화를 연구했어요. ‘한국에서의 결혼(Getting Married in Korea)’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고요. 그러면서도 친한 무당들과 계속 연락했는데, 1980년대 말부터 무당들이 ‘굿이 자꾸 상업화한다’ ‘손님들이 돈 욕심 너무 많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1990년대부터 현대의 굿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연구 주제가 굿과 여성에서 여성의 결혼과 현대화로 이동하고, 다시 현대화와 굿으로 넘어간 거죠.”

    요즘 같은 시대에 신령의 존재를 믿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 실제 시장이 주도하는 합리성에 편입되면 신령과 무당을 추종하는 이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굿을 의뢰한 사람들의 동기와 배경을 조사하며 현대 굿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켄덜 교수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도가니에서 무속이 어떻게 순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94년 여름에 무작위로 18개의 굿과 작은 치성을 관찰했어요. 의뢰인들은 작은 공장 사장, 버섯 수입업자, 레스토랑 운영자, 작은 술집 사장, 전기공 등 저마다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18명 중 15명이 점포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이들이 후원하는 굿은 대부분 사업과 관련된 걱정 때문이었어요. 호기심 많은 인류학자들이 흔히 얘기하듯 복이나 재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위태로운 신용거래가 붕괴되어 일어나는 끔찍한 재정적자나 사업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로 하여금 굿당을 찾도록 만들었죠. 의뢰인들은 시장의 예측 불가능성과 불안정성을 ‘잘 대접하면 행운을 주지만 뜻을 거스르면 고통을 주는’ 신령들과 동일시한 거예요.”

    주목할 만한 것은 무속인을 찾는 고객 대부분이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 즉 ‘중산층’이었다는 점이다. 켄덜 교수는 “민중문화론이 무속 행위를 한국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본 집단의 관심사라고 ‘낭만적’으로 표현했지만, 내가 조사한 사례에서는 단 세 명의 후원자만이 프롤레타리아라는 프로필에 들어맞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가 굿당에서 전혀 만날 수 없었던 부류가 있는데, 기업에서 일하는 월급쟁이와 공무원 가정 구성원이다.

    “자영업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무당과 이들의 만남은 위험을 내재한 시장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거죠. 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시장이 위험 투성이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굿당을 찾는 거예요. 반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자영업자에 비해 위험에 덜 노출되어 있고 안정적이어서 굿을 후원하는 일이 드물죠.”

    -상류층은 어떻습니까.

    “만신들 얘기로는 상류층 사람들이 굿을 많이 한대요. 하지만 제가 굿당에 갔을 땐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어요. 상류층은 굿을 매우 사적인 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걸 꺼리는 것 같아요. 만신들이 그래서 속상해해요. 상류층 사람들도 굿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만신들의 위상도 높아질 텐데 그렇지 못하다고.”

    -교수님은 사람들이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굿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1997년 금융위기가 무속 세계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을 듯한데요.

    “당시 언론에서 무당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서 돈을 챙기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꼭 무당들을 비난할 건 아니었어요. 그 무렵 무당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거든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고 하는 화이트칼라들도 굿당을 찾았으니까요. 1998년 봄에 만난 무당들은 ‘IMF가 아닌 이유로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만신들에게 어려움이 있었어요. ‘IMF’가 신보다 훨씬 강력했거든요. 한 처녀 무당은 ‘사람들의 요구가 너무 커서 아무리 기도해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가 없다’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카운슬링’에 가깝다고 말했어요. 손님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정도라고. 그래서 한 여자가 찾아와 ‘남편이 직장을 잃었으니 직장 상사에게 해코지를 해달라’고 했을 때 ‘신령님이 가을에는 일이 잘 풀릴 거라고 하시네요. IMF가 다 해결해줄 겁니다’라고 했대요.”

    “대통령이 마셨다면 나도 마셔야지”

    한국 무속 연구 30년, 로렐 켄덜  美 컬럼비아대 교수

    오늘날 한국 무속은 공연문화로서의 굿과 은밀하게 진행되는 사적인 굿이라는 이중적 형태를 띠고 있다.

    그동안 한국 학자들은 무속의례의 ‘노골적인 물질성’을 병폐로 여겨왔다. 순수한 전통을 서구의 물질주의가 변질시켰다고 봤다. 이 같은 견해는 비단 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굿을 할 때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의뢰인에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양주를 마시거나 바나나를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켄덜 교수는 “굿에 사용되는 소품의 변화가 한국의 소비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1992년에 자신이 직접 후원했던 굿을 예로 들었다.

    “만신은 제단에 놓인 세 병의 위스키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세 병을 모두 움켜쥐려 했어요. 그때 누군가 그중 한 병이 국산이라고 하니까 만신이 나를 향해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는 그 한 병을 제자리에 올려놓았어요. 만신은 소주나 막걸리 대신 양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따라줬어요. 내 친구가 ‘이 술(시바스리갈)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던 순간에 마시던 술’이라고 얘기하자 만신은 ‘대통령이 마셨다면 나도 마셔야지’ 하며 좋아했어요.”

    간략한 서술이지만 신의 탐욕스럽고 익살스러운 면모가 드러난다. 이밖에도 무당이 죽은 조상의 모습을 한 채 과거에 겪은 고생과 누리지 못한 것들을 늘어놓으며 그때보다 훨씬 좋은 세상에 사는 후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 굿의 레퍼토리다.

    켄덜 교수는 이러한 광경이 소비재에 대한 의뢰인의 욕망을 극화(劇化)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품, 소비, 급속한 경제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재현해 보임으로써 과도한 욕망을 비난함과 동시에 희구되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 그는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누구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며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굶주린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끊임없이 새롭고 더 나은 상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는 우리를 감질나게 만들지 않는가.

    영험한 능력을 지녀 신으로 하여금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는 사람이 ‘샤먼(Shaman)’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라면 켄덜 교수는 한국 샤먼의 특징을 “대감, 장군, 상제 같은 관리(government official) 이미지를 하고 굿을 하는 스타일”에서 찾는다. 그는 “굿은 고기, 술, 음악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함으로써 호의를 베풀도록 하는 것인데, 그때 선조나 신령들에게 바치는 음식과 의복, ‘노잣돈’ 같은 제물과 여흥거리는 한국사회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모호한 거래’를 모델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속인이 탐욕스러워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건 만신이 요구하는 거죠. 하지만 신이 원하는 것을 만신이 몸으로 느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거예요. 굿에는 나름의 논리(logic)가 있어요. ‘효과가 좋은 신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점이 굿에 쓰는 소품의 변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무속인들이 모두 부패했다고 단정해버리는 건 문제가 있어요. 1970년대, 한국전쟁 이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사람들이 아주 순수하고 진실했는데 지금은 부패했다, 이런 생각으로는 요새 무속을 이해할 수 없어요.”

    -신이 바나나를 좋아하고, 시바스리갈을 마시는 걸 보면 현실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굿을 할 때 신이 밖에서부터 무당의 몸으로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공수(죽은 사람의 넋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전하는 말)를 하는데, 그때 의뢰인의 경험에 맞는 공수가 나와야 하죠. 먼 과거를 얘기하기도 하고,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러려면 사회가 변함에 따라 신도 따라서 변해야 하죠. 그 점은 기독교의 설교 내용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요.”

    국사당과 중요무형문화재 딜레마

    -요즘은 굿하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는데요.

    “사람들이 종종 제게 이런 얘길 해요. 1970년대에 무당을 연구한 게 다행이라고. 그런데 1970년대에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도 주위에서 비슷한 얘길 했어요. 오지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과 작업해야 할 거라고. 물론 그때 농촌에서 연구를 했지만 도시에도 무당이 있었어요. 연세대 앞에도 있었는걸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역동적으로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만 주거 형태가 아파트로 바뀌면서 동네잔치처럼 요란하던 굿판이 은밀해지고 있긴 해요. 1970년대만 해도 굿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행해졌죠. 굿하는 집에 들어가 그 집 사람들과 편하게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 동네 사람들 사는 형편을 다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도시의 삶은 무척 비밀스럽죠. 연구하는 사람이 어렵게 됐어요. 굿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당사자가 싫다고 하니 만나기 어려워졌죠.

    굿으로 인한 소음이 규제를 받으면서 굿당이 주거지에서 산 같은 비밀스러운 장소로 옮겨진 것도 굿을 보기 어려워진 이유 중 하나예요. 그래서 굿당에 가도 굿이 끝나면 의뢰인들이 모두 떠나버리기 때문에 얘기를 나눌 수가 없어요. 이러한 변화 자체가 한국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사람들이 굿하는 걸 감추는 이유는 뭘까요.

    “현대화(modernization)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현대사회로 접어들 때 그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에게서 가장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가 바로 ‘나는 현대인이고, 현대인이기 때문에 미신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미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서기도 전에 미신은 현대화를 거스르는 것, 현대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간주해버려요. 대표적으로 새마을운동에 그런 경향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중국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났고요. 현대화 이데올로기죠.”

    그는 일부 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드러난, 무속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굿은 드러내놓기를 꺼려하면서도 공연으로 하는 굿을 보면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라고 추어올리죠. 하지만 굿을 문화재로 지정해 ‘공연’하도록 한 것은 그 의례 자체를 보존하는 장점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굿의 많은 것들을 제외해버리는 측면이 있어요. 사람들은 1∼2시간 동안 단지 춤추고 작두 타는 것을 볼 뿐이지 굿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지 알 턱이 없죠. 굿의 치유 기능은 매우 사적인 것이 되어버렸어요. 또 마을에서 굿을 할 때는 어르신들이 굿을 잘한다 못한다 가늠할 수 있었는데, 요새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죠.”

    -켄덜 교수께선 구분이 되나요.

    “잘한다 못한다 판단할 수 없지만 좀 쉬워 보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켄덜 교수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뒤 굿을 할 수 없게 된 인왕산의 국사당 또한 굿당의 자격을 잃어 “신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 것”이라고도 했다.

    “국사당 밖에 있는 표지판에는 ‘기도나 무속행위, 그리고 이와 유사한 행위는 인왕산시립공원 내에서 금지된다’고 씌어 있어요. 신과 무속 행위가 없는 신당은 껍데기에 불과해요. 국사당은 한 점의 역사적 기념물이면서 동시에 굿판이 벌어지는 기억의 장소가 되어야 하죠.”

    무속과 다른 종교의 대화

    -미국자연사박물관에는 한국관이 있나요(켄덜 교수는 미국자연사박물관 아시아관 큐레이터이기도 하다).

    “아니요. 아시아관에서 한국이 두 부스(booth)를 차지하고 있어요.”

    -어떤 것들이 전시되어 있나요.

    “양반 문화를 보여주는 안방, 사랑방 모형이 있어요. 전 무속을 소개하면 좋겠는데….”

    켄덜 교수는 말끝을 흐리며 “기독교인들이 반대할 거예요” 하고 속삭였다.

    “예전에 다른 박물관에서 한국 전시관에 지노귀굿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지역 한인기독교단체에서 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포기했어요.”

    -한국 무속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요.

    “아주 어려운 얘기예요. 1970년대에 오늘날 한국이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어요. 한국 무속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와 함께 변화하겠죠.”

    -한국에서 무속이 사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지금도 굿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봄비에 버섯 자라듯 생겨난 굿당이 많아요. 변화했지만 사라지진 않았죠. 한국 무속의 미래가 어떨지 그 구체적인 형태를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지속할 것만은 분명해요.”

    -무속 연구에서 한국 학자들이 꼭 해야 할 몫이 있다면.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무속의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한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하고 있는 연구들은 그런 점에서 가치가 있죠. 그 연구를 바탕으로 다른 종교와 무속의 대화를 시도해야 해요. 지금 제가 하는 연구는 미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할 수 있지만 한국 무속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다른 종교와 대화를 시도하는 건 한국인만이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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