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의 햇병아리 변호사 체험기

“공평한 법 앞에 불공평한 사람들… 그들에게 팔이 굽네요”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06-07-19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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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의 햇병아리 변호사 체험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장승수(張承守·35)씨.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996년 서울대 인문계열 전체수석을 차지하며 법학과에 입학해 화제를 모은 그는 2003년 사법시험(45회)에 최종 합격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장씨는 지난 2월 사법시험 동기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던 날, 그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두꺼운 법서를 보고 있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서는데, 타이를 매지 않은 살짝 구겨진 하얀 와이셔츠가 눈에 띄었다. 변호사가 된 지 3개월째, 그 사이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20여 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는 “경력과 사무실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사건을 맡아 정신이 없다”며 멋쩍어 했다.

    그의 ‘첫경험’이 궁금했다. 처음 법정에 선 ‘변호사 장승수’의 모습은 어땠을까.

    “(사법연수원 시절) 실무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법정에 서니 몹시 떨렸어요. 더욱이 상대편에서 내세운 증인을 상대로 반대 신문을 해야 했던 터라 더욱 긴장했죠. 재판이 끝나고 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주위 사람들 얘기로는 잘했대요(웃음).”

    ‘유죄는 아니다’ 직감



    그가 맡은 사건들의 면면이 궁금했는데, “대부분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라며 말하기를 꺼렸다. 유일하게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른바 ‘초짜 변호사의 강간치상 피의자 무죄 변론기’다.

    지난 3월1일, 그는 혼자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오후 3시 무렵. 선배는 뭔가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머뭇거리던 끝에 조카가 강간치상 혐의로 입건돼 있다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날 오후에 당장 피의자와 피의자의 노부모를 만났다. 불구속 입건된 피의자에겐 검찰의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였다. 피의자의 부모를 다른 방에 모셔놓고, 피의자로부터 2시간 가량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피의자 A에겐 1년 이상 교제해온 여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 A는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며칠간 옥신각신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A는 여자친구를 설득해보려고 만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관계를 가졌는데, 헤어진 뒤 여자친구가 A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피의자 A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그는 직감적으로 ‘유죄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사귀었고, 그 사이 성관계도 여러 번 가졌다. 게다가 피의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경찰서에 드나든 적 없는 순박한 청년이다.’ 그는 “여전히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피의자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고 말한다.

    이튿날인 3월2일 오전 10시, 그는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해 피의자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날 오후 피의자는 전격 구속됐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돌아본 사건 현장은 그에게 ‘피의자는 여자친구를 강간한 것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현장에 들어가고 나올 때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목격자가 있었다. 더욱이 피해자는 옷을 가지런하게 입고 나왔고, 외상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피의자와 피의자의 노부모가 그의 확신을 흔들어놓았다. “강간이 아님을 인정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일단 (혐의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석방을 시켜놓은 뒤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는 쪽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심정을 이해 못했던 건 아니에요. 피의자가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구치소에 구속된 지 근 열흘이 지나 있었어요. 피의자는 좌절하고 있었죠. 더욱이 노부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구속됐으니 어떻게든 석방부터 시켜놓고 싶었겠죠.”

    “저는 변호사잖아요”

    3월 중순, 마지막으로 피의자를 접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변호인으로서 변론의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그 또한 의뢰인의 요구대로 혐의를 인정하고, 선처를 바랄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피의자가 너무 젊었다. 피의자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강간치상의 전과를 안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나이였다. 구치소에서 사무실로 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제가 스물여섯 살에 대학에 들어갔어요. 스물일곱 살 땐 한창 꿈을 꾸고 있었죠. 그렇게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해야 할 나이의 청년이 평생 전과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어요. 저는 변호사잖아요.”

    결국 그는 끝까지 무죄 주장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피의자와 피해자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성관계에 관해 장시간에 걸쳐 피의자를 신문하며 얻은 확신이 뒷받침됐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검사에게 제출할 변호인 의견서를 작성했다.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1차 구속 만기일을 하루 앞둔 3월17일 금요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그는 초조해졌다. 상담하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그런데 공무원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다 되어도 피의자는 석방되지 않았다. 깊은 좌절감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오후 7시경,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피의자의 부모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는 선뜻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아이고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하는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석방된 피의자에게서 마중 나오라는 전화가 왔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물일곱 살 청년의 인생을 구했다는 생각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죠.”

    그는 “깊은 강물 속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고 털어놓는다.

    “비록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피의자는 무려 1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의 부모는 졸지에 ‘강간범의 가족’으로 몰려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요. 경찰은 피해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피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했고, 법원 또한 경찰의 주장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간과했어요.”

    그는 또 “경찰과 법원으로서는 피해자의 진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시민에게 경찰과 법은 무시무시한 존재”라며 “그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학시절 찾아온 시련

    장 변호사는 잘 알려진 대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장 막노동, 택시 운전, 가스통 배달, 식당 물수건 배달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면서 가족(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살면 가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고, 고교 졸업 6년 만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의 햇병아리 변호사 체험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장승수 변호사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시절 그에게 시련이 찾아 왔다. 2학년인 1997년 가을, 폐결핵과 늑막염 진단을 받은 것.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며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그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빨간불을 보고도 길을 건넜다. 잠시 쉬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뿌리친 채 계속 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러다 11월 기말고사 기간 중에 며칠 밤을 새운 그는 마지막 시험을 보고 집에 와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실려가 입원을 했고, 보다못한 동생이 그를 대신해 휴학 신청을 했다.

    입원 후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됐다. 의사로부터 “잘못하면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폐가 너무 나빠져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행히 상태가 호전됐고, 이듬해 5월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한 뒤에도 계속 통원 치료를 받았고 겨울이 돼서야 비로소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독한 결핵약을 오랫동안 복용한 탓에 체력이 많이 약해져 그로부터 2년 더 힘들게 생활했다.

    인생을 가르쳐준 권투

    그 와중에도 다시 책을 잡았다. “숨은 쉴 수 있게 됐으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했으니 대학생활의 낭만이나 즐겼겠나 싶은데, 그가 환하게 웃는다.

    “저를 잘 챙겨준 동기들 덕분에 MT도 가보고, 술도 마시고, 실연당한 친구들 위로도 해주고…. 대학생활에서 경험해볼 만한 것은 다 겪어봤어요. 동기들이 미팅 자리에도 꼭 데리고 나갔어요. 근데, 미팅 나온 여학생들이 처음엔 유명인이라고 관심을 갖다가 나중엔 자기 또래의 잘생긴 친구들에게 눈길을 주더라고요.(웃음)”

    인터뷰 도중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물씬 묻어났다. ‘체육관 사부’의 전화였다. 공부하는 틈틈이 대학생활을 즐기던 중에 그가 빠져든 게 또 하나 있었다. 권투였다.

    “권투는 어릴 적부터 좋아한 운동이에요. 많이 맞으면 그 충격으로 하루 종일 앓아요. 정신적으로도 위축되고요. 그렇지만 제게 권투는 맞고 때리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매력적인 운동이에요. 권투를 통해 인생을 배우기도 했고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요.”

    고교 시절 그는 권투선수를 꿈꿨다. 하지만 먹고 살기가 바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저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당장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 되자 봉천동 집 근처 체육관을 찾았다.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대충대충하는 게 없다는 그는 “권투도 한번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법시험 준비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어떻게 권투까지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중간에 체육관에 다녀오곤 했어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샤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서 체육관까지 2km 되는 거리를 뛰어갔어요. 그러면 따로 러닝 트레이닝을 할 필요가 없죠. 운동이 끝나면 다시 체육관에서 학교까지 뛰고, 공부를 끝내고 집에 갈 때도 뛰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에 사법고시보다 권투 실력을 먼저 인정받았다. 2000년 프로복싱 슈퍼플라이급 테스트에 통과해 프로복서가 된 것. 2003년 말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그는 이듬해 1월에 열리는 슈퍼플라이급 신인왕전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등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인대까지 다치는 바람에 신인왕전 출전을 포기했다. 지금은 한 달에 2~3번 체육관에 나가 몸을 푸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원리 위주’ 공부가 주효

    2003년 12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기까지 그는 2001년과 2002년 두 번 고배를 맛보았다.

    “2002년에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몸도 마음도 정말 지쳐 있었습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어머니께도 죄송했고, 2000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동생에게도 면목이 없었죠. 많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제 자신이 풀어지는 게 싫어 불합격 소식을 들은 날도 곧장 도서관으로 갔어요.”

    아무리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그이지만, 두 번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사법시험의 방대한 공부량은 그를 힘들게 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쉬운 길을 골라가지도 않았다. 고시생 대부분이 신림동의 학원 수업에 의존해 요령껏 공부하는 것과 달리, 그는 착실하게 ‘원리 위주’로 공부했다. 1, 2년 먼저 합격하는 것보다 법률을 온전히 이해하고 제대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스승(서울대 법대 양창수 교수)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학교 전공 수업 위주로 공부했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법대생들이 학원에 의존하면서 법 원문은 읽지 않고 요약본 판례를 읽는데,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판례를 꼼꼼히 읽었어요. 법원 공보를 찾아 읽고, 교재 각주에 달린 판례도 거의 다 찾아 읽었죠. 법원 도서관 판례 모음집 CD도 구입해 읽었고요.”

    하나씩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공부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를 목표로 삼으면서 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기회가 되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고 한다.

    고백 한 번 못한 짝사랑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 결혼해야겠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감히’ 못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결혼하면 가장이 되고, 가장이 되면 바깥에서 부는 어떤 바람도 막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루한 생각인가요? 그런데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죠. 누추한 인생에 누구를 끌어들이겠어요? 그건 제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시절 마음에 둔 과 후배가 있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가 적지 않은 터라 좋아한다는 고백은 곧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지 못했다. 서른다섯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그가 요즘, 친구 아기 돌잔치에 초대받거나 나들이 나온 가족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고 한다.

    “괜찮은 직업도 갖게 되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니까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심’이 조금씩은 생기네요.”

    ‘햇병아리 변호사’ 장승수가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무게’다.

    “제 자신이 ‘유죄’라고 판단하는데, 무죄라고 변론한다고 해서 진실이 숨겨질 수 있겠어요? 설령, 숨겨진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죄’라고 생각하면 방향을 바꾼다. 죄는 인정하되, 형벌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그러기 위해선 올바르게 판단해야 하는데, 그는 의뢰인과의 사이에 신뢰가 쌓여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면 결과도 좋은 쪽으로 나오죠.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소송 중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변호를 맡을 당시 의뢰인 스스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 소송이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차츰 저와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럴 때 변호사가 된 보람을 느끼죠.”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는 왜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택했을까.

    “법이라는 것, 규범이라는 것은 학습으로 익히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공평’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똑같이 법을 적용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자유롭기 위해서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그와 마찬가지인 신참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연 것도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실한 변호사, 용기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경찰이나 검사, 판사 앞에서 피의자는 너무나 무력해져요. 경찰과 검찰,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무시무시한 존재죠. 그들로부터 범인으로 몰리면 평범한 시민이면 누구라도 깊은 좌절감에 빠지고, 자신의 억울함을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고 말아요. 그렇다면 누군가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의자 편이 돼줘야 하지 않을까요?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쉽게 단정하는 쪽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대쪽에서 그 단정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변호사가 할 일이죠. 그런데 변호사도 한 개인에 불과한지라, 여럿이 ‘합동작전’으로 나오는 수사기관에 맞서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들의 무게에 밀려 소극적으로 변호하거나 쉽게 타협점을 찾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장 변호사는 또 그 자신이 사회의 음지(陰地)에 있어 보았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사회의 약자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날의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이 지금 제게 소중한 자원이 돼요. 요즘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면면을 보면 성장 과정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경우가 많아요. 적어도 저는 가난한 삶을 체험해본 만큼 약자의 삶을 이해하는, 균형감각을 지닌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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