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모스크바 ‘100달러면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에서 ‘억만장자 수 세계 2위국’으로

  • 김기현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6-08-09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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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깊이 남은 誤報 “푸틴 총리를 유력 대권주자로 보긴 어렵다”

    1999년 연쇄폭발테러는 대선 승리 위한 러 정부 자작극?

    푸틴 ‘부시장’의 협조요청 거절하고 뒤늦게 후회한 한국대사관

    한국 정보원 다섯 명, 러시아는 한 명 철수… ‘터프 외교’에 밀리다

    ‘외교관 맞추방 사건’ 희생양 모이세예프의 딸, 한국기업 취직 퇴짜



    ‘사건은 항상 휴가철에’…모스크바 외신기자의 악몽이 된 8월

    김정일 러시아 방문은 정상외교 아닌 ‘은둔자의 신비한 이벤트’

    10년 전의 허름한 암달러商 친구, 이젠 시의원 출마하는 지역유지

    김기현 기자는 지난 13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생활했고 그 가운데 8년을 특파원으로 일했다. 옛 소련이 붕괴하던 1990년대 초반부터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경제부흥을 가속화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건과 사고, 급변사태가 러시아를 스쳐 지나갔다. 현대사를 장식한 주요 사건들을 현장에서 지켜본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그 뒷이야기를 ‘신동아’ 독자를 위해 툭 털어놓았다.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사회주의의 몰락과 소비에트연방 해체, 계획경제 폐기와 시장개혁, 쿠데타 등 두 차례의 정변,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 사태, 민주화를 이끈 거인 옐친의 몰락과 푸틴의 등장…. 199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가 겪은 세기의 대변혁들이다. 필자는 1993년부터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두 차례에 걸친 언론사 특파원과 5년의 유학생활 동안 이 거대한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7월 중순 귀국한 필자에게 누군가 말했다. “노 정권 때 떠나서 노 정권 때 돌아왔구나.” 1993년 1월 노태우 대통령 시절, 2~3년을 기약하고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을 때만 해도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뀐 뒤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에 귀국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13년여 세월동안 한국은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한국이 변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변한 것이 바로 러시아다. 필자가 모스크바를 떠나기 직전 전 동아일보 기자 한 사람이 러시아로 여행을 왔다.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된 그는 1997년에도 모스크바에 출장 온 적이 있다. 그는 9년 만에 다시 찾은 러시아의 변화에 놀란 듯 했다. 한국의 변화 못지않게 역사적인 체제변환을 겪은 러시아의 변화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러시아 하면 1990년대 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떠올리기 일쑤다.

    13년 러시아 생활을 돌아보니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몇몇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주요사건의 뒷면에는 늘 기사화하지 못한 얘기들이 있다. 지면사정 등 여러 가지 제약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지낸 시간을 정리하는 지금 그 이야기들을 독자와 나누고 싶다. 또한 여전히 진행형인 러시아의 대변혁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거대한 러시아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소개하려 한다.

    호텔 1인실 1박에 70만원

    지난 6월말 다국적 컨설팅회사인 머서휴먼리소스컨설팅의 조사 결과 모스크바가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로 꼽혔다. 2위는 서울. 일본 도쿄와 영국 런던 등 전통적으로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도시들은 그 뒤를 이었다. 귀국 준비를 서두르는 필자에게 한 지인이 “물가가 좀더 싼 곳(?)으로 가게 돼서 좋겠다”는 농담을 건넸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스크바의 물가는 정말 살인적이다. 모스크바를 여행해보면 이내 실감하게 된다. 우선 호텔비와 외식비부터 상상 못할 정도로 비싸다.

    6월초 세계신문협회(WAN) 총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세계 각국의 신문 발행인과 편집인, 저명한 언론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시 한국 대표단이 묵은 5성급 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50만원이 넘었다. 평범한 1인실(single standard)이 그 정도다. 그나마 국가적인 차원에서 준비한 국제행사라 러시아 정부가 나서서 할인해준 가격이었다. 이 기간에 개인적으로 호텔을 예약한 여행객이 같은 수준의 방에서 자려면 70만원이 넘는 돈을 내야 했다.

    머서휴먼리소스가 분석한 모스크바의 고물가 원인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었다. 서울과 비슷하다. 모스크바 시내의 일반적인 신축 아파트의 분양가는 ㎡당 2000달러 정도로, 평당 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그만하면 싼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러시아의 아파트는 도배도 돼있지 않고 심지어 전등조차 달려 있지 않은 채로 분양되므로 내부는 입주자가 알아서 꾸며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비용을 계산하면 평당 1000만원이 훨씬 넘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는 평당 2000만~3000만원대에 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서울 강남의 부동산 가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니 한국 기준으로 30평형대에 해당하는 아파트의 한 달 임대료는 2000~3000달러, 외국인들이 살 만한 고급 아파트의 월세는 5000달러가 넘는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의 주재원들조차 고개를 내젓는다. 더 큰 문제는 모스크바의 물가가 여전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치솟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1993년 처음 모스크바에 유학 왔을 때 한국으로 치면 10평대 원룸에 해당하는 아파트를 구했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모스크바 강변에 위치한, 1980년대에 지은 비교적 새 아파트였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기숙사에 살았지만 신혼이던 우리 부부는 방해(?)받기 싫다는 이유로 아파트에서 살았다. 월세는 100달러, 당시 환율로 8만원 정도였다.

    그래도 동료 유학생들은 “왜 그렇게 ‘고급’ 아파트에 사느냐”고 면박을 줬다. 방 한 칸짜리 아파트 월세가 50~70달러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요즘 모스크바 시내에서 비슷한 수준의 아파트를 구하려면 월 600~700달러는 족히 든다.

    1달러-1루블=1달러?

    1992년 가격자유화조치가 단행되기 이전의 러시아 물가는 ‘살인적으로’ 쌌다. 물론 달러 같은 경화(硬貨)를 가진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계획경제라 물가도 환율도 국가가 통제했다. 외국인과 내국인에게 적용하는 물가가 각기 다른 ‘이중가격제’였다.

    하지만 공식환전소가 아닌 암달러상(商)에게 루블로 바꾸면 은행 환율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거액의 돈이 생겼다. 다 쓰기 어려울 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식환율을 억제했지만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 대 루블의 환율이 매일같이 뛰었기 때문에 달러만 있으면 연간 1000%가 넘는 인플레이션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어디서건 100달러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상점에서 거리낌없이 달러로 계산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유행하던 농담 가운데 “1달러와 1루블의 차이는 얼마일까?”라는 것이 있었다. 정답은 1달러다. 1루블은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1달러 빼기 0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루블이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루블을 경화로 만들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이 외국여행을 갈 때 외화로 바꾸지 않고 그냥 루블만 들고 나가면 되게끔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어디를 가나 환전이 가능한 ‘경화’로는 달러와 유로, 엔, 파운드가 꼽힌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장담은 과장이 좀 섞인 것이지만, 요즘 루블이 초강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근 5년 동안 고유가로 엄청난 규모의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이미 2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세계 5위 규모다.

    1990년대 러시아를 여행한 사람들이 다시 러시아에 놀러와 당시의 경험에 의존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을 간혹 본다. 1990년 한-러 수교 직후 ‘러시아 붐’이 한창일 때 러시아를 다녀간 한국인들은 러시아를 ‘가난하고 지저분한 대국’으로만 알고 돌아갔다. 러시아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한번 가봤더니 별거 아니던데…” 하는 우월감이 자리잡았다. “100달러를 흔들었더니 백계 러시아 미인이…” 하는 천박한 무용담이 경험과 인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한국을 어떻게 인식할까. 처음에는 ‘작지만 친해두면 괜찮을 부자나라’로 생각하고 수교를 맺었는데, 겪어보니 ‘속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한러 관계의 발전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서로에 대한 인식이 10여 년 전에서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하고 멈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모스크바대에 유학하던 시절 겪었던 ‘모라토리엄 사태’는 러시아 경제개혁의 분기점이 됐다. 분명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현재 러시아 경제가 눈부신 호황을 이루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흔히 1997년 외환위기를 겪고 난 후 한국인의 경제상식이 풍부해졌다고 한다. 전국민이 IMF가 뭐하는 곳인지는 대충 다 알게 됐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사태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에 어두웠던 러시아 국민에게 ‘경제학습’을 톡톡히 시켰다.

    1990년대 중반까지의 시장개혁 과정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루블화 폭락, 산업붕괴 등 경제난을 겪었던 러시아는, 1996년을 기점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과열 기미까지 보였다. 해마다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다가 1997년에 이르러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비록 0.1%였지만). 러시아 경제에 대한 낙관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시장경제가 정착돼 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당시의 러시아 경제는 위기를 안고 있었다. 누적된 재정적자에다 옛 소련에서 물려받은 것까지 포함해 외채는 무려 2000억달러에 달했다. 지하경제의 비중이 커지고 보혁(保革) 노선 갈등으로 개혁입법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원자재 가격까지 폭락하자 자원 수출에 의존하던 러시아 경제의 부담은 커졌고, 결국 아시아발(發) 금융위기가 러시아까지 덮친 것이었다.

    미리 위기를 감지한 러시아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러시아 단기국채(GKO) 시장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올리던 ‘국제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 정도만이 “러시아에 위기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1998년 중반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모라토리엄 선언이 있기 전부터 러시아 주식시장 주가가 폭락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이 위기의 실체를 몰랐다.

    “주식 시세가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1990년대 초의 극심한 경제난도 겪었는데, 그보다 더한 위기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이런 식이었다. 심지어 기업인 등 실물경제에 밝은 사람들도 태평스러웠다. 워낙 자주 위기를 넘기다 보니 둔감해졌다 싶었다. 1998년의 위기는 1990년대 초의 경제난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1998년 8월17일 러시아 정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루블화가 폭락하고, 은행예금 인출이 동결되고, 모든 시장이 얼어붙어 거래가 끊기고서야 뭔가 큰일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 기업과 은행의 파산이 잇달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운이 좋았다. 루블화 폭락으로 러시아 제품의 국제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수출이 늘어났고 1999년부터는 오랫동안 잠자던 국제유가가 뛰기 시작했다. 세계 2위의 석유수출국인 러시아로서는 경제에 날개를 단 셈이었다. 옐친 시대의 정치혼란은 ‘강력한 지도자’ 푸틴의 등장으로 종식됐다.

    1998년의 짧은 위기는 이후 1999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5~7%씩 계속되고 있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시장개혁 이후 수많은 기업과 은행이 생겨났다. 이 가운데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1998년 모라토리엄 사태 때 시장에서 퇴출됐다.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기업은 그만큼 강해졌다.

    모라토리엄 사태는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장이 얼어붙고 거래하던 러시아 기업이 파산하자 외상 대금을 받지 못하는 등 피해도 보았다. 러시아에서 신규사업을 시작하려고 의욕적으로 진출했다가 모라토리엄 사태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유학생들은 살기가 좋았다. 루블화가 폭락하면서 학비와 생활비 부담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처럼 달러를 가진 외국인들이 힘을 쓰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한창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필자도 그런 혜택을 누렸다. 모스크바 근교에 사는 지도교수 댁으로 자주 찾아가야 했는데, 별 부담 없이 택시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모든 사건에는 명(明)과 암(暗)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 경제가 호황을 구가하면서 환율은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요란한 열차여행

    최근 모스크바의 외신기자들 사이에 또 다른 ‘여름 징크스’가 생겼다. 6월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한 일본 언론 특파원은 “또 시작이군…”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해마다 여름만 되면 반복되는 ‘김정일 방러 신드롬’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2001년 7~8월 24일간 특별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해 숱한 화제를 뿌렸다. 다음해 8월말에도 4박5일 동안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했다. 이후 여름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설이 고개를 들었다.

    2001년 8월3일 밤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 앞 광장에는 수백명의 기자가 진을 쳤다.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로 ‘입성’하는 김 위원장의 특별열차를 기다리는 보도진이었다. 기자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표정이었다. 2001년 초여름부터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설이 몇 차례 제기됐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결국 ‘진짜로’ 북러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바로 모스크바로 오지 않고 각 도시를 방문하며 국가지도자로서는 유례없는 장기간 방문을 기록했다.

    그러는 동안 김 위원장은 곳곳에서 뉴스거리를 만들었다. 기자들은 한 달 넘게 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것이다. 더욱이 김 위원장의 행보는 국가지도자로서는 거의 기행(奇行)에 가까워 예측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김 위원장이 2년 연속 러시아를 방문했으니 러시아에서 일하는 외신기자들이 ‘김정일 공포’를 가지게 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러시아 관영 일간지 ‘로시스카야가제타’는 “최근 북한 접경지역에 있는 탈북자들이 정보원이 되어, 돈을 노리고 김정일의 특별열차가 국경을 넘는 것을 봤다는 허위 정보를 한국이나 서방언론에 흘리는 경우까지 있다”고 전했다.

    2001년 김 위원장의 방러 당시 러시아 현지 언론의 보도는 외국 정상의 진지한 외교활동이 아니라 무슨 신기한 이벤트를 중계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반복되는 김 위원장의 방러설과 이에 대한 반응은 한때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조차 북한과 김정일 위원장을 예측하기 어렵고 비정상적인 지도자와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2001년 김 위원장이 ‘요란한 방러 이벤트’를 마치고 떠난 후 필자는 러시아 대외무역은행에 들렀다가 우연히 모스크바 주재 북한 외교관 두 명을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레 대화는 얼마 전 있었던 김 위원장의 방러 얘기로 넘어갔다.

    필자는 2000년 5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횡단하며 취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저도 ‘장군님(김 위원장)’처럼 시베리아를 횡단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외교관이 필자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거, 남조선에도 우리 장군님을 따르는 장한 기자가 있었구만….”

    혼돈의 시대, 기회의 시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 청년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주의와 소련에 대해 막연한 환상과 호감을 가졌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러시아 땅을 밟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환상 대신 환멸이 찾아왔다. 브레즈네프 이후 이어진 무거운 ‘정체의 시대’가 드리운 그림자에다 급진적인 체제변혁의 혼란이 겹쳐, 당시 러시아 사회는 총체적인 혼란 상황이었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거리와 건물들, 인민은 안중에도 없는 기막힌 관료주의, 이념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대책 없는 물신주의….

    하지만 이 혼란의 시기는 한편으로 새로운 체제의 질서에 빨리 눈뜬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의 시간이었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억만장자가 많은 나라다. 대부분 30~40대인 이들 가운데는, 15년 전에는 전재산이 1만달러도 안 됐지만 지금은 10억달러가 넘는 갑부도 많다.

    물론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부자에 대한 반감도 크다. 하지만 중산층이 점점 늘어나고 절대빈곤층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보면 빈곤을 줄이는 방법은 분배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필자가 1990년대 초부터 알고 지낸 한 러시아 친구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섰다. 개방 직후 모스크바의 러시아호텔 근처를 맴돌며 암달러상(환전상)을 해서 모은 돈으로 터키와 한국 등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돈이 더 모이자 모스크바의 도매시장에서 의류상을 해 제법 큰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고향인 모스크바 근교 도시에 건물을 지어 큰 레스토랑을 차렸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으나 오랜만에 근황을 들었다. 이제 그 도시의 지역 유지가 된 그는 시의원 출마를 준비하는 등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추운 겨울날 초라한 가죽외투 차림으로 호텔 앞을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다가가 “달러 좀 팔라”고 조르던 그의 10년 전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불법인 암달러상을 했다고 그를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한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1990년대의 혼란스러운 러시아 사회 상황을 기억하면서도 러시아의 미래를 낙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젊은이들 때문이다. 명분이나 이념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의 원하는 일에서 성공하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러시아의 신세대를 보면 위기감마저 느끼게 된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혼란스러운 대국’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이 나라를 다시 살펴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년의 모스크바 생활을 마치면서 필자가 되씹는 명징한 교훈이다.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1993년 10월사태 당시의 모스크바. 장갑차와 중화기를 동원한 무력진압에 불타버린 의사당 건물 앞으로 시민들이 구경나와 있다.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러시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꼭 듣게 되는 격언 가운데 ‘러시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라’는 게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직접 ‘느껴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은 나라라는 뜻이다. 필자는 러시아와 만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러시아에서 본 ‘황당한’ 장면 중에서도 좀체 잊히지 않는 것은 1993년 10월사태다. 의회의사당(벨리 돔·White House)이 시커멓게 불타버린 10월사태는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개혁노선을 둘러싸고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본격화된 와중에 일어났다.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의 급진개혁 정책에 보수파가 다수인 의회가 반기를 든 것.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인민대의원회 의장이 보수파를 이끌었다.

    결국 의회는 옐친 대통령을 탄핵하고 루츠코이 부통령을 대통령대행으로 임명했다. 졸지에 대통령이 두 명이 된 상황이었다. 2004년 한국사회를 뒤흔든, 국회의 대통령 탄핵 사태 원조쯤 되는 셈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 모스크바의 탄핵은 유혈충돌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탄핵을 인정하지 않은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달리 러시아 헌법재판소는 반(反)옐친 편을 들었다. 옐친 대통령이 이에 맞서 의회해산을 선언하자 보수파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무장한 채 의사당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경찰이 의사당을 포위하고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바로 2년 전인 1991년 8월 보수파 쿠데타가 벌어질 당시에는 옐친 대통령이 쿠데타군에 대항해 이곳에서 농성을 벌였다는 점이다. 당시 시민들은 옐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벨리 돔 주변에 인간사슬을 만들었다. 옐친 대통령은 자신을 잡으러 온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세계를 향해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개혁을 지키자”는 감동적인 연설을 해 사태를 역전시켰다. 이 사태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해 말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옐친 시대’가 열렸다.

    1991년 옐친 대통령이 벨리 돔에서 농성할 때만 해도 루츠코이 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의장은 함께 자리를 지킨 ‘같은 편’이었다. 함께 목숨을 걸었던 동지가 2년 만에 적(敵)으로 변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2년 전 의사당에 갇혀 농성하던 옐친이 이제는 진압명령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사태를 가를 키워드는 군(軍)의 향방이었다. 의회파를 이끈 루츠코이 부통령은 공군장성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내에서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 옐친 대통령은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에게 거듭 진압명령을 내렸지만 장성들은 눈치만 봤다. 권력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판이었다. 시민을 향해 발포할 수 없다는 명분도 있었다. 훗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모스크바 군관구의 주요 지휘관들은 옐친 대통령과 루츠코이 부통령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전화를 받았다. 진압명령에 따르라는 옐친 대통령과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편에 서라는 루츠코이 부통령의 전화였다.

    망설이는 군이 꼼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의사당을 포위한 경찰도 진압의지가 별로 없었다. 혼란이 지속되는 동안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던 그들은, 정부가 현장에 나가 있는 경찰요원에게 일당을 지급하자 그제서야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산당은 여전히 10월사태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옐친 전 대통령은 건재하다. 물론 믿을 만한 후계자인 푸틴 대통령에게 성공적으로 권력을 물려준 덕분이다.

    쿠데타 주역은 교수로, 주지사로

    옐친 대통령측은 의사당 앞 우크라이나 호텔에 상황실을 차리고 ‘의원 빼내오기’에 들어갔다. 농성 중인 의원들을 회유해서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부 고위직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장관은 수가 한정돼 있으니 차관직을 제의했다. 교통경찰국장 출신 의원에게는 내무부 차관을 제의하는 식이었다(푸틴 대통령 집권 후 대대적인 정부조직개혁과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전까지 러시아 각 부처마다 차관이 10명이 넘었다. 옐친 시절에는 부총리가 10여 명인 적도 있었다. 이런 고위직 인플레이션 현상은 바로 이 10월사태 때문에 시작됐다).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1999년 12월31일 전격 사임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하야 발표 직후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권한대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차관직이 모자라자 다음은 공기업 임원을 미끼로 던졌다. 한편으로는 의사당 건물에 공급되는 수도와 전기를 끊으며 압박했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쓴 것이었다. 상당수 의원이 의사당 건물을 빠져나와 투항했다. 초조해진 보수파 지도부는 무장시위대를 동원해 방송국을 습격하는 등 먼저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섣부른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옐친측에 무력진압의 명분만 쥐어준 꼴이 됐다.

    옐친 대통령은 망설이는 국방장관에게 “내가 대통령이다, 귀하는 내 지시를 따르라”고 다그쳤다. 결국 군이 움직였고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 강제진압에 나선 군은 ‘화이트 하우스’가 시커멓게 탈 정도로 대포를 쏴가며 농성을 진압했다. 당시 희생자가 수백명에 이른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옐친 대통령에게 부담이 됐다. 해마다 10월이면 희생자 가족들이 벨리 돔 주변에서 추모집회를 연다. 공산당은 선거 때마다 옐친 대통령을 ‘학살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물론 옐친측도 할말은 있다. “내전으로 비화할지 모르는 비상사태다 보니 무력동원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당시 옐친에게 반기를 든 보수파 주역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현장에서 체포된 루츠코이 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의장은 반역죄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곧 특사로 풀려났다. 그후 루츠코이 부통령은 정계에 복귀해 쿠르스크 주 지사를 지냈다. 하스불라토프 의장은 현재 러시아 최고 명문대인 플레하노프경제대 교수로 있다. 참극의 후일담치고는 좀 싱겁다.

    스탈린 시대에 대규모 숙청극을 겪은 후 러시아 권력층 사이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생겨났다.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는 실각이 곧 죽음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악명 높은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를 처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권력투쟁의 패배자가 목숨을 잃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흐루시초프 역시 권좌에서 밀려난 후에 ‘연금 생활자’로 살았다.

    불 뿜는 전차포 옆으로 출근하는 시민들

    러시아 공산당은 여전히 10월사태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옐친 전 대통령은 건재하다.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을 불러 세웠던 그 흔한 청문회에조차 나가지 않았다. 물론 믿을 만한 후계자인 푸틴 대통령에게 성공적으로 권력을 물려준 덕분이다. 결국 10월사태의 희생자는 젊은 혈기와 이념에 사로잡혀 무기를 들고 의사당에서 항전했던 청년들과 반대편에서 진압작전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젊은 병사들뿐이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결과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역사의 수레바퀴’가 도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이런 허탈한 정변(政變)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특히 ‘남의 일’에는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모두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 생존방법인 셈이다.

    10월사태가 한창일 때 CNN 등 외신은 긴박한 현장상황을 전세계에 생중계했다. 세계가 모스크바를 주목하던 순간이었다.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은 사태가 확산될 경우 교민과 유학생들을 긴급히 탈출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정작 모스크바 시내는 의회 의사당 주변을 제외하고는 평소처럼 평온했다. 대국 특유의 기질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거듭된 정변에 지친 무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총격전이 한창일 때 어느 외신기자가 현장주변을 지나가는 시민을 잡고 소감을 물었다. 하지만 이 시민은 “빨리 출근해야 한다”며 총총 사라졌다.

    러시아 고전영화 중에 ‘탈주’라는 작품이 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내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하는 적군(赤軍)과 이에 반대하는 백군(白軍)이 전국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백군에는 제정러시아의 귀족세력이 많았다. 오랜 내전 끝에 결국 적군이 승리했고 소련체제가 확고해졌다. 패배한 백군 장교와 귀족들은 다투어 서방으로 탈출했다.

    백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한 백군 지휘관이 휘하 장병들을 사령부 건물 강당에 모았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부대를 해산하니 각자 흩어져 살길을 찾으라는 당부가 떨어졌다. 몇몇 장교는 “끝까지 싸우자”며 반대했으나 장군은 부대 해산을 명령한다. 병사들은 총칼을 버리고 군복을 벗어 던진 채 흩어진다.

    곧 이어 텅 빈 강당에 비를 든 촌로가 들어온다. 청소부인 듯한 이 노인은 무표정하게 비질을 한다. 겨우 몇 초 동안 화면에 비친 장면이지만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터지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러시아 민중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10월사태 당시의 모스크바 풍경이 바로 그랬다.

    한때 한국에서도 ‘안개정국’이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정말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내일 또 무슨 극적인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러시아 정국은 특히 그랬다.

    옐친의 밀레니엄 선물

    1999년 12월31일. 전세계는 밀레니엄을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다. 이 날이 8년 동안의 모스크바 특파원 근무 중 가장 잊지 못할 날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보통 한국 신문은 신년호의 대부분을 사전에 제작한다. 2000년 신년호도 지면의 상당부분이 밀레니엄 특집 기획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서울의 ‘동아일보’ 본사는 이날 이사를 하기로 했다. 신문제작을 마친 후 편집국을 충정로 사옥에서 새로 지은 광화문 사옥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새로운 세기를 신사옥에서 맞으려는 계획이었다. 이사 준비로 분주한 본사는 멀리 모스크바에 나가 있는 특파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도 느긋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밑 풍경을 스케치해서 보내면 일이 다 끝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러시아에서는 1월1일부터 열흘 정도의 신년휴가가 시작된다. 필자도 원래 오전에 일찌감치 기사를 마감하고 다른 한국인 가족과 함께 교외의 별장(다차)으로 놀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오가 조금 지나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옐친 대통령이 사임 성명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급히 TV를 켜자 국영방송에서 옐친이 하야를 발표하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정신없이 본사로 전화를 돌렸다. 한창 이삿짐을 싸느라 분주한 국제부 데스크에게 보고했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곧 외신들이 ‘긴급(urgent)’이라는 제목을 달고 옐친 사임 급보를 타전하자 본사에도 비상이 걸렸다.

    사실 모스크바 외신기자들 사이에는 몇 달 전부터 ‘옐친 전격 사임설’이 퍼져있었다. 당시 옐친 대통령은 1999년 8월 무명의 푸틴을 총리로 임명해 후계자로 삼았다. 1999년 12월 총선과 2000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푸틴을 권좌에 올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푸틴 총리는 2차 체첸 침공을 강행해 일단 지지도를 올렸다. 12월 총선에서도 집권당이 승리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선은 불안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옐친의 조기 사임설이다. 전격 사임하면 푸틴 총리가 대통령대행이 된다. 총리보다는 대통령대행으로 대선을 치르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필자도 몇 차례 옐친 조기 사임설을 써서 본사에 송고했다. 하지만 기사화되지는 못했다. 확실치 않은 소문을 지면에 낼 수는 없다는 데스크의 판단 때문이었다. “좀더 확인해봐.” 데스크의 주문은 간결했다. 그때마다 답답했다. 어떻게 확인을 하겠는가, 크렘린이 대답해줄 것도 아니고…. 그런데 허를 찔린 것이다.

    더욱이 크렘린은 예상보다 치밀했다. 푸틴을 띄우기 위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날의 대통령 사임은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으로 대선은 이미 해보나마나 한 승부가 돼버렸다.

    갖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미 한국은 저녁 6시가 넘었다. 신문 가판 마감이 지났다. 옐친의 사임 소식은 1면 머리기사감이었다. 게다가 사임하게 된 배경과 앞으로의 전망을 짚어주는 해설기사, 옐친과 푸틴은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인물기사까지 써야 했다.

    정신없이 기사를 쓴 후 전화선을 컴퓨터와 연결해 전송하려 했지만 통신망이 ‘먹통’이었다. 당시 외신기자들이 기사 전송에 주로 사용하던 인포넷이라는 회선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수백명의 외신기자가 동시에 접속해 기사를 전송하려 하니 벌어진 일이었다. 할 수 없이 가까스로 국제전화를 연결해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본사의 동료가 장문의 기사를 일일이 받아썼다. 겨우 기사를 마감하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좌악 빠졌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옐친의 밀레니엄 선물은 모스크바 주재 외신기자들에게는 최악의 선물이었다. 이날 아침 “별 일 있겠냐”며 일찌감치 모스크바 밖으로 나갔던 기자들은 초죽음이 됐다고 한다.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2001년 8월 러시아를 방문했을 당시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 정차한 특별열차 안에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누구도 상상 못한 푸틴의 등장

    옐친의 전격사퇴 소동 끝에 푸틴의 시대가 열렸다. 푸틴의 등장은 말 그대로 극적이었다. 1999년 8월, 필자는 기자 생활 중 가장 부끄러운 기사를 썼다. 옐친 이후 권력의 향방을 전망하는 분석기사였다.

    1998년 8월의 모라토리엄 사태 이후 옐친 정권은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예비 후계자를 차례로 총리로 임명해 여론의 추이를 살폈다. 크렘린은 30대의 세르게이 키리옌코 총리에서부터 70대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 40대의 세르게이 스테파신 총리까지 1년 사이 3명의 총리를 갈아 치우며 새로운 카드를 내세웠지만, 여론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내세운 카드가 바로 푸틴이었다. 푸틴이 워낙 무명의 정치신인인 데다가 평생을 음지인 ‘비밀경찰’에서 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그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가 옐친의 후계자가 되리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은행장 출신의 30대 키리옌코 총리를 내세웠다가 한 달 만에 경질한 변덕쟁이 옐친 대통령이 또다시 ‘뭔가’를 노리고 ‘버리는 카드’를 꺼내든 것만 같았다. 여론조사에서도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과 군 장성 출신인 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가 가장 앞섰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크렘린이 푸틴 총리를 내세웠지만 누구도 유력 대권주자로 보지 않는 분위기다….”

    푸틴 총리가 취임한 이후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서는 대규모 폭탄테러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모스크바에서는 아파트가 무너져 수백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푸틴 총리는 이를 체첸 반군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전격적으로 체첸을 침공했다. 러시아군이 순식간에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점령하면서 푸틴의 인기는 갑자기 치솟았다. 겨우 한 달 사이에 여론이 급변했다.

    한때 러시아 최대의 갑부였으며 옐친 시대의 막후 실력자 중 하나였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전 로고바스그룹 회장. 그는 옐친의 둘째딸 타티아나 디야첸코와 함께 푸틴을 옐친의 후계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집권 후 옐친계를 내치면서 그를 버렸다. 그는 런던으로 망명했고 지금은 푸틴 정권과 원수가 됐다.

    베레조프스키 전 회장은 “1999년 당시 푸틴 총리의 인기를 높이는 계기가 된 연쇄테러 사건은 체첸 반군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러시아 첩보기관의 자작극이었다”고 폭로했다. 이 엄청난 폭로가 사실이라면 크렘린은 푸틴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푸틴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전혀 근거가 없는 음해라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또 알겠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베레조프스키가 한 말인데….

    푸틴 대통령의 임기는 2008년에 끝난다. 현행 헌법상 3선(選) 연임은 불가능하다. 집권을 연장하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아니면 옐친이 그랬던 것처럼 믿을 만한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겨줘야 한다. 벌써부터 여러 종류의 시나리오가 떠돈다. 대권 후보들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혹은 “누가 (후계자가) 될 것 같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1999년의 오보(誤報)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다. 러시아 정국을 내다보는 것은 정말 어렵다. 서방의 선진국들에 비해 불확실성과 돌발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악연과 인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도박 같은 모험도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이 2001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대기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푸틴 대통령과 이 기업 사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랜 인연이 있었다. 김대중 정권 아래서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비운을 겪은 이 기업은 1990년대부터 러시아 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그 무렵 푸틴 대통령은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평생 몸담았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퇴직한 푸틴은 한때 택시 운전을 할까 생각할 정도로 좌절을 겪었다. 이후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서 대외담당 부총장을 하다가, 은사인 아나톨리 소브차크 교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이 되면서 대외담당 부시장을 맡았다.

    국가경제가 파탄난 상태에서 지방정부 부시장이 할 일은 외국투자를 끌어오는 것밖에 없었다. 이때 앞서 말한 한국 기업과 푸틴 부시장 사이에 접촉이 있었던 것.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기업이 모스크바도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진출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별다른 사업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때의 인연은 그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각별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반면 푸틴이 부시장을 하던 시절 몇몇 독일 기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투자했다. 여기에는 푸틴 대통령이 KGB 시절 옛 동독에서 근무한 인연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어쨌든 푸틴이 집권한 후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는 전에 없이 밀접해졌고 독일 기업의 러시아 진출도 활발하다.

    외교통상부의 고위 외교관 이모씨는 1990년대 초 모스크바대사관에 근무할 때 푸틴 부시장을 만난 적이 있다. 푸틴 부시장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가 추진하는 행사를 한국 정부가 지원해달라며 대사관에 요청해 온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러시아에서 ‘부자나라’로 알려져 있었기에 대사관에는 러시아 지방정부와 기관 등 여기저기서 이러저러한 부탁이 많이 들어왔다. 다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 외교관은 푸틴 부시장의 요청을 ‘별다른 생각 없이’ 거절했고 그 후로 더는 접촉이 없었다. 만일 그때 대사관이 푸틴 부시장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지금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우리 정부와 크렘린을 잇는 ‘핫라인’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모 사장은 1990년대 초 한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 현지법인 등록을 했다. 지금도 그의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기업등록증에는 담당 책임자이던 블라디미르 푸틴 부시장의 서명이 선명하다.

    그는 사업상 푸틴 부시장을 몇 차례 만났다. 물론 그가 러시아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저 그런 러시아 공무원 중 하나로만 여겼다. 그런 까닭에 푸틴 부시장과의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일을 떠올리면 아쉽기만 하다. 그때 ‘별 볼일 없던’ 푸틴에게 조금 더 잘해주고 관계를 이어갔다면 지금쯤 러시아에서 큰 사업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의 일이다. 한국의 한 중소기업은 1990년대 이 나라에 진출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며 위세를 떨쳤다. 이 기업의 오너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사이의 인연 덕분이다.

    1990년대 초 아직 소비에트연방이 남아 있던 시절, 카자흐스탄은 연방 내의 일개 공화국에 불과했다. 지방정부 지도자 자격으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도 기업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 중소기업만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로 카자흐스탄이 독립국이 되자 이 나라는 일약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다. 광활한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 등 성장잠재력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잡았던 이 중소기업 오너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한때 잘 나가던 이 기업도 카자흐스탄에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몰락해 기회를 끝까지 살리지는 못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쉽게 단언할 일은 아닌 듯하다.

    ‘한국 외교장관의 무덤’

    최근 이범준 전 성신여대 교수(정치학)가 ‘함께 못다 부른 노래’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 교수의 남편이며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고(故) 박정수 박사다. 박 전 장관이 재직하던 중에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최대의 외교분쟁으로 기록된 ‘외교관 맞추방 사건’이 일어났다. 박 장관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 교수는 회고록에서 “남편이 억울하게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1년 반 만에 대장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때 한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러시아 주재 대사관 근무는 ‘출세 코스’였다. 러시아 대사를 지낸 외교부 장관이 세 명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초대 주(駐)소련 대사인 공로명 장관, 2대 대사를 지낸 홍순영 장관, 4대 이정빈 장관이 모두 모스크바를 거쳐 외교부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현재 외교부 내에서 ‘잘나간다’고 손꼽히는 위성락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나 김성환 오스트리아 대사, 백영선 의전장 등도 모두 러시아 대사관 근무경험이 있다.

    반면 러시아는 ‘한국 외교장관의 무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러시아와의 외교문제나 갈등 때문에 물러난 외교장관도 세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박정수 장관이다. 특히 DJ 정권에서는 박 장관을 필두로 홍순영, 이정빈 장관이 줄줄이 ‘러시아 문제’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러시아 대사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러시아를 잘 알고 있던 홍 장관과 이 장관조차 러시아 문제로 장관직에서 중도하차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 장관의 뒤를 이은 홍 장관은 2000년 탈북자 강제송환 사건의 영향으로 물러났다. 탈북자 7명이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탈출하다가 중러 국경에서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됐다. 러시아 보안당국은 이들 탈북자를 다시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고 중국은 다시 이들을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북한으로 강제송환했다.

    당초 우리 외교당국은 러시아가 중국과 달리 인도적인 관점에서 탈북자들의 제3국(한국)행을 허용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실제로 러시아도 그런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러시아 당국은 일방적으로 이들을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결국 “안이한 태도로 러시아측의 의도를 읽지 못해 불쌍한 탈북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홍 장관은 책임을 져야 했다. 정부 등 러시아 각계에 지인이 많은 홍 장관이 사건 당시 러시아에 품었을 배신감을 짐작할 만하다.

    홍 장관의 뒤를 이은 이 장관도 복잡한 안보 이슈가 문제가 돼 낙마했다. 2001년 러시아 국가 지도자로서는 8년 만에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한러 공동선언이 나왔다. 그런데 이 공동선언에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문제는 당시 한러 양국간 현안도 아니었다.

    ‘ABM 협정’이란 1972년 미국과 소련이 탄도탄요격미사일을 제한하기 위해 맺은 협정을 말한다. 하지만 이 무렵 미국은 국가미사일방어망(NMD) 구축을 위해 ABM 협정의 폐기를 주장하며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ABM 협정을 지지한다고 했으니, 미국이 아닌 러시아 편을 들어준 셈이 돼버렸다.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에 배신당했다며 발끈했다. 주무장관인 이 장관은 서둘러 “한국이 MD를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며 미국을 달랬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이 장관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당시 한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측이 ABM 관련 조항을 공동선언문에 포함시키자고 고집해 이 같은 내용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관 맞추방 사건 막전막후

    세 명의 장관이 러시아 때문에 낙마하자 한때 외교부 안에서는 러시아 근무를 꺼리는 분위기가 일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터프(tough)한’ 외교 스타일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박정수 장관을 낙마시킨 외교관 맞추방 사건이다.

    발단은 외교관 체포였다. 1998년 7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는 주러한국대사관의 정보외교관(국가정보원 주재관)인 조성우 참사관이 러시아 외무부 아주1국 발렌틴 모이세예프 부국장과 만나는 현장을 추적해 두 사람을 현행범으로 연행했다. 조 참사관에 의해 매수된 모이세예프 부국장이 국가기밀을 건네줬다는 혐의였다. FSB 요원들은 모이세예프 부국장 집을 수색해 찾아낸 달러를 증거로 제시했다.

    러시아 당국은 면책특권을 가진 조 참사관을 러시아 밖으로 추방했고 모이세예프 부국장을 간첩혐의로 기소했다. 물론 두 사람은 혐의를 부인했다.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외교활동의 일부였으며 금품이 오가지도 않았다는 것. 두 사람이 체포되던 날 모이세예프 부국장이 조 참사관에게 건넨 문건은 국가기밀이 아니라 공개된 학술정보였으며, 모이세예프 부국장 집에서 나온 외화는 조 참사관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해외근무를 하면서 모은 돈이라는 반박이었다. 그래도 러시아 첩보당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통 외교관이 연루된 간첩 사건은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외교관례다. 하지만 러시아측은 조 참사관을 연행해 억류한 상태에서 조사를 벌이는 등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을 위반했고, 언론을 통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공개했다.

    사전기획과 언론 플레이

    러시아 방첩당국은 이후에도 ‘언론 플레이’를 계속했다. 조 참사관이 추방된 지 며칠 후 그의 가족들도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모스크바 공항에 나갔다. 그런데 러시아 세관당국은 조 참사관 가족이 고가의 악기를 밀반출하려 한다며 이들을 잡았다.

    이 장면은 공항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방송 취재진이 촬영해 그날 저녁 메인뉴스에 나왔다. 누가 봐도 러시아 정보기관과 방송사의 긴밀한 공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러시아 주재 한국 외교관은 간첩활동이나 하고 그 가족은 밀수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고의적으로 실추시키려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또한 당시 러시아 일간지인 ‘네자비시마야가제타’는 사건 직후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의 움직임을 마치 손금을 보듯 상세히 보도했다. ‘사건 다음날 아침 러시아 외무부에 다녀온 대사가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고…’ 하는 식이었다. 도청과 감청으로 대사관 내부를 완전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론이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첩보당국이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간첩활동의 진위 여부를 떠나 처음부터 러시아 첩보당국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한 사건이라는 의혹이 피어 올랐다.

    이제 공은 한국의 외교당국으로 넘어왔다. 초기만 해도 정부는 양국관계를 감안해 신중한 대응을 고려했지만, 곧 강경론이 득세했다.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는 것. 이범준 교수에 따르면 남편인 박정수 장관이 이끌던 외교부는 이 과정에서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는 전언이다. 필자가 취재한 바로도 당시의 강경대응은 국가정보원이 주도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주한 러시아대사관의 정보외교관(해외정보국 소속)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규정해 추방했다. 이러한 맞대응은 언뜻 강대국을 상대로 국가 위신을 세운 조치로 보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과연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똑같이 대응했을까. 로버트 김 사건으로 주미대사관 무관 백동일 대령이 미국에서 출국했지만, 한국 정부는 맞대응하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을 드러냈던 것은 아닐까. 한국이 다른 나라 외교관을 ‘기피인물’로 규정해 공식적으로 추방조치를 발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좀 만만해 보이는’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관 추방을 강행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남았다.

    한국은 이 같은 결정으로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러시아가 추가로 외교적 대응을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추가로 한국외교관 추방을 검토하고 있으며, 언론사 특파원이나 한국기업 주재원을 가장한 정보요원이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상대국에 통보하고 정보외교활동을 하는 요원인 ‘화이트’ 외에 신분을 숨긴 ‘블랙’ 요원까지 색출하겠다는 얘기였다.

    모스크바 특파원과 주재원들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러시아 당국이 ‘간첩’이라고 몰아붙이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경색된 상황이었다. 서로 정보외교관을 1명씩 추방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했던 한국 정부는 당황했다. 예상외로 러시아가 확전을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강공 뒤의 역풍

    냉전시대부터 러시아는 서방국가들과 크고 작은 스파이 사건을 놓고 수많은 외교전쟁을 치렀다. 이미 오랜 노하우를 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별다른 경험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기기 어려운 게임을 한 셈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한국의 약점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같은 수의 정보외교관을 상대국에 두자고 치고 나왔다. 당시 한국이 러시아에 파견한 정보외교관은 러시아가 한국에 파견한 정보외교관보다 훨씬 많았다. 러시아가 대북(對北)정보 수집창구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국에 러시아가 가진 중요성이 러시아에 한국이 가진 의미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은 모스크바뿐 아니라 한반도와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정보외교관을 주재시키고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는 결국 상대국 주재 정보외교관의 수를 각각 두 명으로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언뜻 보면 외교적 상호주의에 맞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엄청난 불평등 거래였다. 이 숫자를 맞추기 위해 한국은 조 참사관을 빼고도 다섯 명을 더 철수시켜야 했다. 반면 러시아는 아브람킨 참사관 외에 한 명만을 추가로 철수시켰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러시아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양측은 두 번째 추가철수는 비공개적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바로 언론에 포착됐다. 한국사회의 특수성 때문이다. 보통 정보외교관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않은 채 외교부 직원인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학맥과 인맥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좁은 한인 사회에서는 그 외교관이 외교부에서 나왔는지 국정원 소속인지 금방 알려진다. 처음부터 비밀이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정보외교관들은 일반 외교관처럼 가족을 동반해 모스크바에 나와 있었다. 추가철수가 진행되면서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나 한인교회 등을 통해 정보외교관들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결국 외교관 맞추방 사건은 한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물론 한국이 강대국인 러시아를 상대로 사상 처음 외교관 맞추방을 강행하는 ‘기개’를 보였다고 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익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실패한 대응이었다. 무리한 대응으로 외교적 패배를 자초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정확할 듯하다.

    흔히 1997년 외환위기 후 한국인의 경제상식이 풍부해졌다고 한다. 전 국민이 IMF가 뭐하는 곳인지는 대충 다 알게 됐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사태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에 어두웠던 러시아 국민에게 톡톡히 ‘경제학습’을 시켰다.



    사건 지휘자는 푸틴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러시아가 왜 유독 한국 정보외교관의 활동을 문제 삼았을까. 한국이 러시아 국내 상황의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도 나왔다.

    옛 소련 붕괴 후 극심한 사회혼란이 계속되면서 러시아 정부 내의 기강은 말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외교관이나 언론사 특파원의 정보수집 활동은 비교적 자유롭고 쉬웠다. 러시아 관리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밀이 노출된다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

    반면 이를 통제해야 할 보안기구는 옛 소련 시절만큼의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KGB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옐친 대통령은 집권 후 KGB를 몇 개의 조직으로 쪼개고 권한을 줄여 무력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러시아 보안당국이 다시 권한을 강화하는 계기를 찾기 위해 이 사건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당시 사건을 지휘한 연방보안부 부장이 바로 푸틴이다. 물론 그때만 해도 푸틴은 ‘음지의 인물’이었고 그가 1년 후 옐친의 후계자로 떠오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과 한국 사이의 ‘악연’ 한 자락인 셈이다.

    사건의 여파는 컸다. 무엇보다도 러시아 관리들을 만나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다. 러시아 공무원들은 외신기자나 외국 외교관과의 접촉을 무조건 피했다. ‘외국 간첩’과 접촉했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 옐친 정권 시절 러시아에서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언론의 자유와 정보 공개의 확대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공안정국’이 조성된 것이다. FSB 부장으로 이러한 상황을 주도한 푸틴이 이후 대통령이 되자 분위기는 더욱 굳어졌다. 특파원들이 모스크바에서 취재활동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모이세예프 부국장이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4년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됐지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한때 러시아 정부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각광받았지만 사건 후에는 변변한 직장조차 구하지 못해 아직도 실직 상태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당국의 감시도 여전하다. 한국의 수많은 지인과도 연락이 끊겼다.

    그의 딸 나데쥐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그는 최근 어느 한국 대기업의 모스크바 현지법인에 이력서를 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의 오해를 사는 것을 두려워한 이 기업은 채용을 거부했다. 쓸쓸한 후일담이다.

    1990년대 초 서방언론은 해마다 겨울이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러시아 위기설’을 보도했다. 식량부족으로 이번 겨울을 넘기기 어려워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허름해 보이는 교외의 별장 지하실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가꾼 감자와 양파를 가득 쟁여놓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전쟁, 스탈린의 대숙청 등 온갖 격변을 겪으며 살아온 러시아인들은 나름대로 늘 비상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몇 차례의 겨울 위기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평온한 겨울, 위기의 여름

    반대로 정작 굵직한 사건들은 꼭 여름에 일어났다. 소련 해체를 불러온 보수파 쿠데타도 1991년 8월에 일어난 일이고, 러시아가 국가부도가 난 ‘모라토리엄 사태’도 1998년 8월에 일어났다.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 침몰도 2000년 8월의 일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여름휴가를 떠나려다가 사건이 터져 아예 휴가를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휴가철이면 꼭 사건이 생기는 징크스 때문에 여름은 모스크바의 외신기자들에게는 ‘공포의 계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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