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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⑧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230년 후,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현주소는?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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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보스턴 차 습격단 사건이 일어났던 곳. 이 사건은 훗날 미국의 독립을 가져오는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올해 축제의 구호는, 팸플릿의 이곳저곳에 적혀 있듯이, ‘자유가 울리게 하라(Let freedom ring)!’이다. 독립전쟁은 정녕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됐고, 자유의 쟁취로 끝이 났다. 그렇게 얻어진 자유의 반석 위에 미국은 세워졌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의 찬가도, 자유의 수호도, 모두 상충하는 복잡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하부에 거느리고 있다. 230년 전의 독립전쟁도 결국 규모와 첨예함의 정도만 다를 뿐,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상충된 경제적 이해관계가 촉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7월4일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는 직접적 동인(動因)이 북아메리카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오랜 쟁패에서 거둔 승리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763년, 역사가들이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 부르는 7년에 걸쳐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지루한 싸움에서 영국은 마침내 승리한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원주민 인디언 부족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프랑스에 고전했으나 식민지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 국면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영국은 1759년 퀘벡을 함락하고, 1760년에는 몬트리올에서 프랑스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패배한 프랑스는 1763년 오늘날의 캐나다 지역 대부분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프랑스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하고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서쪽 식민지는 스페인에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한 파리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이로써 북아메리카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유럽을 선도하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지만, 1억3000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戰費)를 부채로 떠안게 됐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해 이를 변제하고자 했다.

‘세금폭탄’은 저항을 낳는다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수입하는 당밀에 수입관세를 부과한 1764년의 설탕법, 공문서는 물론 모든 상업적인 출판물에 인지를 첨부하라는 1765년의 인지법, 수상 찰스 타운젠드(Charles Townshend)가 주동이 되어 식민지의 일상 수입품인 차, 종이, 도료 등에 관세를 부과한 1766년의 타운젠드법은 모두 이런 재정적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는 고육책의 소산이다. 이 가운데 특히 인지법은 영국 정부가 식민지에 직접세적인 성격으로 부과한 첫 세금이어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버지니아 주 식민지의회는 저 유명한 패트릭 헨리가 주동이 되어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 주장 아래 인지법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보스턴에서는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5000명이 보스턴 코몬에 모여 인지세 징세관인 앤드루 올리버의 초상을 느릅나무에 매달아 화형시키고(그후 이 느릅나무를 ‘자유의 나무(Liberty Tree)’라 칭했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기물을 파괴했으며, 며칠 뒤에는 부지사로 갑부이던 토머스 허친슨의 집에 몰려가 부수고 약탈했다. 버지니아와 보스턴에 이어 뉴욕,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도 인지법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인지법은 결국 본국 의회의 식민지 관할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 셈인데, 이 논쟁은 본국 정부와 식민지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고, 그로부터 촉발된 시민적 권리와 자유의 한계에 대한 제자백가(諸子百家)적 논쟁이 결국 1776년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본국 정부의 규제와 간섭에 대한 이와 같은 격렬한 반응은 1692년 국왕이 임명한 총독에 의한 직할 식민지 체제로 바뀌었다고 하나 청교도 시대의 자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타운젠드법이 통과되자 보스턴에서는 인지법에 항의하기 위해 새뮤얼 애덤스가 주동해 조직한 이른바 ‘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을 중심으로 영국 물품 보이콧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이렇게 소요 사태가 계속되자 치안 유지에 불안을 느낀 당시의 버나드 총독은 본국으로부터 2개 연대의 정규군을 지원받아 보스턴에 주둔시켰다. 상비군이 식민지에 주둔하자 본국 정부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따라서 긴장의 파고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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