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창조성, 예측력, 포용력 지닌 ‘내향적 직관형’ 대중의 가슴 뛰게 하는 현실감각 보완해야

  • 김종석 인천광역시 의료원장 mdjskim@naver.com

    입력2006-08-14 0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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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여러 모로 특이하다. 30대 후반까지 학생운동, 철공소를 전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력이 화려하다. 얼굴은 모범생풍이지만 학창시절 밴드와 연극에 몰두한 ‘날라리’였다고 한다. 지식인층은 손 전 지사를 대통령감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지만 대중은 다르다. 5% 미만의 지지율은 대통령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기반이다. 이채로운 경력과 상이한 지지기반. 그는 과연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孫鶴圭·59) 전 경기도지사는 내향적 직관형이다. 가장 보기 드문 유형이다. 내향적 직관형은 개성이 강하고 창조적인 능력이 뛰어나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지 못한다. 손 전 지사도 한 인터뷰에서 “자유로운 삶,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구라고 할까, 그런 게 내 본성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소년시절 손학규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덩치 큰 친구들과 종종 싸웠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는 “나이 많은 아이들이 뒤늦게 학교에 다니며 횡포를 부리곤 했는데, 학규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그들과 자주 싸움을 벌였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끝까지 싸웠다”고 기억했다.

    그는 모범생이지만 샌님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연극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밴드부 선배들에게 흠씬 얻어맞고 나서야 연극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기고 동창인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는 “학규는 모범생이면서 놀기도 잘해 동창들 사이에서 늘 리더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손학규를 ‘잘 노는 모범생’이라고 부른다. 고교 후배인 탤런트 한진희는 ‘손학규가 샌님이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학규 형이 샌님처럼 보이긴 하죠. 그런데 절대 아니거든요. 평소 성격도 호탕하고, 악수를 해보면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아플 지경이에요. 연극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대단하죠.”

    고교 2학년 때 손학규는 한 달에 한 번 북악산에 올랐다. 손학규는 그 시절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손에는 소주 한 병이 들려 있고 주머니에는 ‘라면땅’ 한 봉지가 들어 있다. 고지식한 눈으로 본다면 꼭 탈선한 불량학생이다. 북악산 중턱에 올라가면 숭례문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울이 다 보였다. 서울을 내려다보면서 소주를 천천히 한 잔씩 들이켠다. ‘이게 바로 내 세상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이다.’ 심호흡을 하면서 가슴은 한껏 부풀어 있고 마음은 엄숙하다. 열일곱 살 소년의 눈은 부릅떠 있고 얼굴은 한참 긴장했다.”

    내향적 직관형은 독립심이 강해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손학규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줬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던 그가 1993년 초 경기도 광명 보궐선거 출마 결심을 밝히자 학교측과 동료 교수들은 혹시 낙선할지도 모르니 휴직계를 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손학규는 ‘정치 입문을 결심한 이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마지막 수업시간에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봐달라”는 말로 섭섭해하는 제자들을 위로했다.

    199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 자신의 지역구이던 광명시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광명시의 현역 국회의원은 여당의 총재권한대행이던 조세형이었다. 지역구에 호남 출신 유권자 비율이 40%에 달하고, 충청도 출신까지 합산하면 70%였다.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참모들은 이번 선거에서마저 낙선할 경우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다며 광명시 출마를 말렸다. 대신 전국구 공천을 신청하거나 일산 등 한나라당 후보에게 유리한 지역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잘하거나, 뒤죽박죽 되거나

    그러나 손학규는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며 광명시 출마를 강행했다. 여론조사에서는 뒤졌지만, 승리를 확신하고 지역구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리고 마침내 1800여 표차로 당선됐다.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3선(選)으로 다시 국회에 입성한 손학규는 정치개혁과 정당개혁의 필요성을 앞장서 역설했다. 제왕적 총재제도 폐지, 상향식 공천제 도입, 당권과 대권의 분리를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이회창 총재를 비롯한 당권파를 곤혹스럽게 했고, 그들로부터 온갖 회유를 받았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손학규의 주장은 훗날 2002년 대선과정에서 여야가 모두 채택하기에 이른다.

    내향적 직관형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선다. 손학규는 대학입학 후 30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 외길을 걸었다. 수배, 도피, 구속, 고문으로 점철된 세월을 견뎌낸 끝에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이했다.

    하지만 손학규는 민주화의 과실(果實)을 거부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운동권 인사 대부분은 “마침내 우리 세상이 왔다”며 희망에 부풀었다. 그 상황에서 손학규는 “이제 내가 할일은 다했으니 그동안 비었던 머리를 채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영국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홀연히 유학길에 올랐다.

    내향적 직관형의 단점은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현실감각이 부족해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또 논리를 비약하는 경향이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감각 기능이 억압돼 열등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고 이것을 충실히 기술하는 노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더러는 객관적 사실도 무시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 뒤죽박죽이어서 독자나 학생들의 불평을 사기 쉽다. 손학규의 한 측근 인사는 “손 지사가 조리 있게 강연하는 편은 아니다”며 “그냥 툭툭 치고 나가는 강연을 하는데, 성공적으로 마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엉키기도 한다”고 말했다.

    내향적 직관형은 외곬으로 빠지는 성향도 있다. 한곳에 몰두하다 보면 목적달성에 중요한 현실적 여건을 경시하기 쉽고 그래서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손학규는 고교 3학년 때부터 32세까지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다. 고3 때는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했고, 대학생 때는 더 열심히 데모했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학교 수업은 애초 관심 밖이어서, 막걸리를 통째로 사다가 서울대 문리대 교정 잔디밭으로 가져와 양재기로 퍼마시며 열변을 토했다. 깔끔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행동이 딴판이란 얘기도 적잖게 들었다.

    “얌전하게 생긴 놈이 독하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손학규는 노동운동을 통해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전력 입사시험을 봤다. 한국전력 노조를 장악하자는 생각이었다. “한전 노조위원장이 되어 서울시내의 불을 일시에 다 꺼버리자. 그러면 혁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파업투쟁으로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발상을 한 것이다. 다행히(?) 손학규는 입사시험에 떨어졌다.

    내향적 직관형은 현실감각이 부족한 데다 말과 글이 고상하고 복잡하다. 따라서 일상적인 실생활과 관련된 분야보다는 직관력과 사람 중심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면 정신의학, 심리학, 신학, 예술, 문학 같은 분야다. 손학규의 한 측근은 그의 언행과 관련해 “지나치게 학구적이다. 언사가 자로 잰 듯 정확하다. 지식인이 듣기엔 좋지만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에게선 ‘내향적 감정형’이라는 또 다른 면모도 엿보인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라자로 마을’은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이다. 손학규는 10년 전부터 이곳을 방문해 문드러지고 일그러진 환자들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는다. 의례적으로 잡는 게 아니라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환자의 손을 놓지 않는다. 곁에 있던 기자가 보기에도 가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곳 방문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광명시 ‘사랑의 집’으로 향하면서, 손학규는 출구에 이르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정문 경비에게 다가가 “안녕히 계세요” 하며 악수를 청했다. 조금 전 ‘라자로 마을’ 원장 신부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경비원도 한센병 환자였다. 손학규에겐 이런 포용력이 있다. 그래서 도량이 큰 호인이라는 인상을 준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지난 6월 손학규 지사가 이끄는 경기도 남북교류협력대표단은 북한을 방문, 모내기에 참여했다.

    내향적 감정형은 인내심이 강하다. 손학규는 대학에 입학한 다음 시위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고, 주로 맨 앞줄에서 플래카드를 들거나 돌격대 역할을 했다. 단식농성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철저히 굶었다. 걱정스러워하던 친구가 “슬쩍 나가서 뭐 좀 먹고 와. 우리가 몸 버리기 위해 단식하는 거냐? 단식은 저항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손학규는 끝까지 참았다. 선배들이 “얌전하게 생긴 놈이 생각보다 독하네”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2003년 경남지역에 수해가 났을 때 손학규는 경기도 공무원 70여 명과 함께 마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날 하루 종일 삽을 들고 수해민을 도왔다. 그와 달리 그날 마산을 방문한 정치인들은 주민들에게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 마산 어시장의 최일광 번영회장은 “손 지사는 태풍 매미가 마산을 덮쳤을 때, 도청 공무원과 함께 일찍 내려와 하루 종일 허리 한번 안 펴고 일만 하다 돌아갔다”고 떠올렸다. 서민과 함께하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에 어시장 ‘아지매’들은 훗날 손학규 지사를 다시 보자마자 전어를 썰던 손 그대로 그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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