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 김광화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6-08-14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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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달 전북 무주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즐겁게 읽는 기쁨을 잠시 접어둬야 할 것 같다. 1년5개월 동안 ‘몸 공부, 마음 이야기’를 연재해온 김광화 선생이 잠시 쉬고 싶다는 뜻을 비쳐왔다. 김 선생은 “중독이다 싶은 ‘신동아’ 글쓰기를 중단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좀더 귀 기울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년 초쯤 ‘자기 빛깔이어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소재로 새 연재에 도전해보겠다는 의욕도 드러냈다. 그가 보내온 올해 마지막 편지엔 손님을 맞는 농부의 부지런하고 섬세한 마음이 들어 있다.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집에서 손님을 맞다가 다른 집에 손님으로 가면 그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해성이가 시연하는 태극권 자세를 지켜보았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 산골 마을에는 손님이 부쩍 많아진다. 동네 집집이 보지 못한 차가 서 있거나 낯선 얼굴이 보인다. 아랫마을 할머니네는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왔는지 시끌벅적하다. 귀농한 사람들 집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손님들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찾아오기도 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원하기도 한다. 농사일을 체험한다거나 땅이나 집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 해서 들르기도 한다. 어떤 분은 삶의 전환이나 자녀와의 소통 문제 같은 ‘철학적인’ 문제를 갖고 오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아이들 손님도 전국에서 찾아온다. 부담 없이 오고 가는 이웃들도 있다.

    우린 지금 ‘열려 있는 구조’에서 산다. 도시에서 집은 사생활 영역이다.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집 밖에서 만나고 대접한다. 반면 산골은 손님이 집이나 논밭으로 곧장 온다. 작은 시골집에 손님이 오면 어른이든 아이든 식구가 다 함께 손님을 맞게 된다.

    손님에게 까다로운 까닭

    산골에서 고요히 살다가 손님이 오면 반갑다. 생활에 긴장을 주기도 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해주기도 한다. 바쁜 농사철에 일손을 거들어줄 때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일상이 흐트러지거나 손님이 가고 난 뒤 후유증을 앓기도 한다.



    손님이 온다고 하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많이 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 씀씀이다. 아내는 마당이 지저분하지 않은지, 뒷간 냄새는 어떤지, 아이들 방은 정리가 되었는지 마음을 쓴다. 자고 갈 형편이면 이부자리는 물론 음식 대접도 마음 쓰인다. 아이 손님까지 있다 보면 더 그렇다.

    그러나 손님은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어 한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길 원한다. 이따금 고성방가로 그동안 쌓인 억압을 풀어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잠을 못 이루고 우리 식구 생활의 리듬은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전에는 누가 온다면 선뜻 그러라고 했다. 이제는 손님보다 식구가 먼저다. 손님 처지에서는 조금 서운할 수도 있지만 “식구들과 의논해보겠다”고 말한다. 처음 만나는 이라면 손님이 누구인지, 왜 오고 싶어 하는지도 묻는다. 그리고 우리 식구가 손님을 함께 맞듯 손님 또한 되도록 가족과 함께 상의해서 오기를 권한다. 부모는 원하지만 아이들이 마지못해 따라오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들다. 먹는 것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관계에서도 자주 부딪치곤 한다. 그러나 손님 식구들이 모두 원해서 방문하는 경우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낯설지 않고 친근함이 느껴진다. 우리가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물론 우리 자신에게도 있지만 손님에게도 좋은 계기가 되리라, 서로 ‘상생’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번은 경북 상주로 귀농한 두 가정이 함께 오겠다고 했다. 어른 넷에 아이가 다섯. 돌 지난 아이부터 중학생까지 있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셨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분은 꽤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들은 부모가 가면 당연히 따라온다는 생각이었을 게다. 우리가 바라는 ‘절차’를 거치다 보니 방문 예정날짜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막상 만난 자리는 풍성했다. 우리 식구와 처음 만났지만 그 시간만큼은 대가족이 된 것처럼 편안했다.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나비가 꽃을 찾듯이, 자연에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몸짓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몸과 마음에 대한 두려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면 미리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책이나 홈페이지 ‘자연달력’ (www.nat-cal.net/)을 통해 우리 삶을 드러내고 있다. 회원들도 댓글이라든지 게시판에 이런저런 글을 올림으로써 서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우리 또한 그분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친해질수록 궁금증도 많아지는 것 같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만나보고 싶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32세 처녀가 보낸 편지였다. 손으로 또박또박 쓴 종이편지였다. 내용 가운데 일부만 옮겨보자.

    “귀농을 하고 싶어요. 저 혼자요. 많이 막막해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농부가 되고 싶었어요. 아저씨, 아줌마 농사짓는 방식대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오래 전 방식대로 제철농사를 짓고 싶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농사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또렷해져요. 어서 자리잡고 싶은 데 어디서 농사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지고 있는 이 돈(500만원)으로도 가능한지. 이웃 어른들 하시는 것 보고 물어가며 농사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 그밖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농사지을 땅을 소개받을 수 있는지, 주의할 것이 무엇인지, 아저씨 아줌마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편지였다. 간절하지만 마음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처지가 느껴졌다. 아내와 상의해, 그 처녀와 비슷한 처지에서 농사를 시작한 한 이웃 여성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그에게 의논했더니, 편하게 오라고 한다.

    그 손님이 오신다니 내 가슴도 부푼다. 모아둔 돈이라고는 500만원이 전부인 사람. 그러면서도 사람답게 사는 삶을 부단히 가슴으로 품고 있는 사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주고 싶었다.

    막상 만나니 손님은 별로 말이 없다. 아내와 함께 이것저것 물어보면 짧게 대답하거나 미소를 머금기만 한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서 하루쯤 머물다가 이웃한테 갈래요? 아니면 지금 갈래요?”

    그러자 지금 가겠단다. 아내가 손님을 이웃한테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손님은 이웃집에서 한 열흘쯤 머물다 돌아갔다. 나중에 이웃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을 매우 열심히 도와주었다며 흐뭇해했다.

    요즘 산골에는 호랑이 같은 맹수가 없다. 그렇다면 산골살이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을 벗어나서 살아온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이 부분은 한두 마디 말로 쉽게 해결되는 부분은 아니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마음으로 이겨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픈데…”

    내가 누구보다도 반갑게 맞는 손님이 있다. 바로 아이 손님이다. 얼마 전에 우리 작은아이 또래인 동영이가 집에 찾아왔다. 동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동영이 어머니는 우리 집에 얼마간 머물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당사자인 동영이에게 생각을 물었고, 동영이는 내게 e메일을 보내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는 동영이라고 해요. 아저씨가 제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편지를 썼어요. 저는 홈스쿨링이 뭔지 모르지만, 아저씨 아줌마가 쓴 책을 읽고 조금은 알았어요. 저는 우리나라가 좀 제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특히 교육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홈스쿨링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학교 교육이 별로 저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예요. 학교에서는 1교시 하고 10분 쉬고, 2교시 하고, 10분 쉬고(사실 요즘은 쉬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화장실만 갔다 오는 걸로 끝나요). 하고 싶은 공부를 오랫동안 하고 싶은데, 학교 선생님도 마음에 안 들어요. 가끔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만, 2학년 때, 3학년 때 선생님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마을 아이들과 손님 아이가 어울려 오디를 따고 있다.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아이들이 이곳 아이들, 아래에서 오디를 받는 아이가 서울서 온 동영이다. 쉽게 어울리고, 서로 할 일을 나누어 하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땐 제가 너무 순진했는데, 고통스러운 시기를 꾹 참고 견뎌냈어요. 그때 선생님과 반 아이들 전체가 저를 왕따시켰죠. 그래서 학교가 싫었어요. 이번에도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홈스쿨링을 하고 싶은 거예요.

    홈스쿨링을 시작하면 하고 싶었던 공부나 책을 읽고, 목공일도 할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 집에 가보고, 홈스쿨링이 뭔지 겪어보고 싶어요. 상상이(우리 아들의 인디언식 이름)도 만나보고 싶어요. 저는 아저씨 아줌마 책을 읽으면서, 홈스쿨링을 하면 경쟁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홈스쿨링을 하려는 아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애정이 있다. 그 이유는 이 사회에 잘못 알려진 홈스쿨링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집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공부는 그렇다 치고, 사회성이나 친구 문제에 대해 상당히 우려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사회성이 더 좋아질 수도 있다고 믿는다. 학교에 갇히지 않으니 친구를 전국에서 사귈 수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사귀면서 자라다 보면 동영이처럼 나중에는 자칫 사람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을 선택해서 사귄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상처를 덜 받으며 사람을 사귀는 힘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울 것이며, 나 아닌 사람으로부터 건강한 에너지를 받는 지혜를 익힐 것이다. 우리 작은아이에게도 또 다른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경험도 되리라. 게다가 동영이는 우리 부부가 낸 책을 읽은 독자 가운데 ‘최연소’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뭐든 ‘최’자가 들어가면 강하게 끌리는 그 무엇이 있지 않나.

    자존감을 회복한 동영이

    하지만 동영이에게 선뜻 오라고 하지 않았다.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미리 서로 알 필요가 있을 듯했다. 동영이와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고, 아내가 서울 갔을 때 그 집 식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동영이네 식구가 왔다. 동영이 부모님은 하룻밤 자고 돌아가고 동영이는 우리 집에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내가 동영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우리 아이처럼 대하는 것이다. 학교생활에 지친 아이가 편하게 쉴 수 있고, 뭔가에 호기심이 생기면 다가가 이를 채우는 게 좋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아이가 자신을 잘 돌보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조금이나마 확인하고 키워갈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다.

    동영이는 우리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도시 아이가 산골 아이들 리듬을 따라가자면 자칫 넘어지기도 하고 벌에 쏘일 수도 있다. 몸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방법도 새롭게 익혀야 한다. 자연은 울퉁불퉁 제각각이다. 풀이 무성해 길인 줄 알고 디뎠는데 도랑이라 발이 빠지기도 한다. 돌멩이도 바위도 나무도 그 무엇 하나 가지런하지 않다. 자기 길을 가되 그 하나하나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동영이가 오고 나서 한 이틀은 마음이 쓰였지만 그 뒤엔 편해졌다. 아이가 차분한 성격이라 잘 적응했다. 동영이는 식구처럼 요리도 하고 우리 아이랑 놀기도 하고 혼자 책을 읽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웃집 동생과 사귈 만큼 행동반경이 넓어졌고, 우리 집 고양이와 친구도 되었다. 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잘 지내다 돌아갔다.

    그리고 동영이는 우리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렸다. ‘홈스쿨링 한 달을 돌아보며.’ 이 글만 봐도 아이는 짧은 기간이지만 무척 많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다. 친구관계도. 동영이는 자신이 친구를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친구를 사귈 기회를 갖지 못한 걸 자각하게 된 것 같다. 다음은 동영이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의 일부다.

    “홈스쿨링하면서 달라진 동영이 모습을 보는 게 기쁩니다. 동영이에게 자존감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 기쁩니다. 언제나 힘이 없고 지쳐 보였던 아이가 생기 흐르는 점이 기쁩니다. 항상 먼 산만 쳐다보던 동영이의 눈이 빛나게 된 것이 기쁩니다. 모기소리마냥 기어들어가던 목소리가 씩씩해져서 기쁩니다. 싫다 좋다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끌려다니던 동영이가 자기 의견, 자기 주장을 하게 된 것이 기쁩니다.”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자연에는 그 본래자리마다 주인이 있다. 자칫 이를 소홀히 하면 다치기 쉽다. 여기 아이들은 이를 몸으로 느끼는지, 스스로 몸을 낮추며 움직인다.

    이렇게 동영이네 식구와 삶을 나눌 수 있는 우리 또한 기쁘다. 서로 잘하는 건 격려해주고, 고민이 되는 것은 나누고. 동영이 부모도 우리 식구를 초대했다.

    남 보란 듯한 삶 아닌 나다운 삶

    홈스쿨링은 이렇게 한 가정에 매몰되는 교육이 아니라 궁극에는 대가족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동영이가 우리 집에서 식구처럼 지내고, 우리 아이는 서울 동영이네 가서 내 집처럼 지낸다면 얼마나 좋겠나. 언젠가는 ‘각자의 내 아이’가 ‘우리 모두의 아이’가 되는 그런 날을 꿈꾸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들도 ‘남 보란 듯한 삶보다, 나다운 삶’을 함께 모색해야 하리라. 동영이 덕에 서울 사는 이웃 한 가정을 사귈 수 있었다.

    동영이가 우리 집에 머물던 어느 날 큰애가, “해성 언니 전화인데, 서울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우리 집에 와도 되냐고 묻네요?” 한다.

    해성이는 우리 큰애보다 두 살 위인 언니. 그 집은 우리보다 귀농 선배이고, 그 집 큰딸인 해성이는 우리 식구의 태극권 선생님이기도 하다. 우리 식구는 대환영이었다. 동영이가 서울로 돌아간 바로 그날 오후에 해성이가 도착했다.

    해성이는 얼마 전에 책 번역작업을 끝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큰애는 오랜만에 자기 손님이 와서 활기차게 지내고, 나도 해성이를 식구처럼 여기니 일상에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잘 지냈다. 먹는 것도 우리 먹는 대로. 하루 일정도 우리 식구 하던 대로. 달라진 게 있다면 식구 모두 틈틈이 태극권을 배웠다는 것뿐이다.

    두 밤을 자고 나니 해성이가 집으로 돌아간단다. 일기예보에는 하루 종일 비가 올 예정이란다. 우리 집에서 해성이네 집이 있는 경남 산청까지는 대중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두어 번 시외버스를 갈아탈 뿐 아니라, 꼬불꼬불 육십령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아내가 데려다줄 겸 놀러가자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바쁜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다섯이 차를 타고 산청으로 갔다. 산청에 갔더니 마침 장날이라 읍에 나가고 아무도 없다. 해성이네 또 다른 이웃에게 가보기로 했다. 그곳까지 가는 길에 산딸기가 어찌나 좋은지, 모두 산딸기를 따먹었다. 오후에는 세 집 식구들이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태극권도 배웠다.

    해성이네는 손님이 아니라 이웃이다. 손님은 서로 낯을 가리는 사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사이일 것이다. 반면에 이웃은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마주칠 수 있는 사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사이다. 한동네에 살아야 이웃이 아니라, 멀리 있더라도 삶을 공감하고 또 나눌 수 있다면 이웃이 되는 게 아닐까.

    옥수수알 까다가 서로의 속을 보네

    손님을 자주 치르다 보니 이제는 손님이 온다면 특별히 마음 쓰기보다는 손님과 우리 일상을 함께하려 한다. 일할 때 함께 일하고, 밥해 먹을 때 함께 밥해 먹고, 틈틈이 대화하고…. 손님과 일을 함께 하면 좋은 점이 많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이야기가 끊겨 어떤 정적이 감돌 때가 있지만, 일을 함께 하면 그렇지 않다.

    시골에는 일이 많다. 손님이 일을 거들어준다면 우리에게는 당장 힘이 된다. 논밭에만 일이 있는 게 아니다. 시골은 집 안팎에도 온통 일이 널려 있다. 마당에 풀 뽑기, 옥수수알 까기, 콩 고르기. 함께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야기가 심각하지 않아 좋다. 사실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보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부분은 자기 삶만큼이다. ‘심각하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해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니 일하며 나눈 이야기는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흘러 서로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먹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주인 처지에서는 손님 접대가 알게 모르게 마음 쓰인다. 우리 집의 밥때는 일하다 배고파지는 때다. 이를 손님과 맞추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시장을 봐서 반찬을 장만하는 게 아니고 그때그때 밭에서 거두어 먹는다. 손님맞이에 매달리다 보면 아내는 밭에 다녀올 틈을 찾기 어려워, 집안에 남아 있는 재료로 상을 차려야 한다.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시골에는 일이 많다. 일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 서로 부담이 없다. 손님들과 둘러앉아 콩을 고르는 광경. 콩도 손도 예뻐서 찰칵!

    이렇게 하느니 함께 밭에 가, 일하고 나서, 돌아올 때 먹을거리를 해오면 여러 모로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함께 다듬게 되고, 요리할 때도 이것저것 일손을 거들게 된다. 자신이 먹을 밥상을 손수 차리니 어느 손님이든 맛있어 한다. 이는 도시 아이들에게 시골 밥을 잘 먹게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손님은 집주인처럼, 주인은 손님을 식구처럼’ 여기게 되어 서로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해진다. 밥 먹고 나서 손님 쪽 남자분이 설거지를 해준다면 우리 식구들은 매우 높은 점수를 준다. 남의 집 부엌에서 팔 걷어붙이고 설거지하는 남자, 얼마나 부드럽고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손님을 자주 치르다 보니 사람 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진다.

    누구네 집을 방문할 때 사람들은 곧잘 선물을 고민한다. 무엇이 좋을까. 우리도 처음 산골에 왔을 때 우리보다 먼저 내려온 이웃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갈 때마다 그냥 가기는 어렵다. 한번은 이웃을 방문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뭘 좀 가져가면 좋을까요?”

    “괜찮으니 그냥 오세요.”

    “그래도 빈손으로 가기는 뭐한데….”

    “그럼, 명상을 해보세요. 하하하.”

    이럴 때 명상은 부담이 없다. 주인 처지를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그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고등어자반을 사 갔다.

    원하는 것에 솔직하기

    인사용 선물은 사람에 따라서는 한없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번은 우리 집에 온 어떤 분이 우리 아이들 준다고 과자를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인사를 나누고 분위기를 보니 선물이 영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가져온 선물은 꺼내지도 않고 그냥 가져간다고 했다.

    가끔은 선물로 가져온 물건이 쓸모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손님 앞에서 쓸모없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쌓아두는 것도 부담이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이것도 돈이요 시간 낭비다. 교감하지 않은 선물은 자원 낭비, 에너지 낭비로 이어진다. 선물 자체도 자원이지만 선물을 고민하는 것도 에너지가 아닌가.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선물에 대한 문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선물이란 정을 주고받는 것이다. 솔직하게 물어보면 서로 좋지 않을까. 그래서 손님에게 먼저 선물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이분은 도자기 빚는 분이라 오실 때 직접 만든 물잔 두 개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분은 물잔말고도 손수 빚은 접시 세 개도 주었다. 이 컵과 접시를 쓸 때마다 그 손님 얼굴이 새삼 고맙게 떠오른다.

    손님 처지에서는 멀리 산골까지 오는 특별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바쁜 시간, 귀한 돈 들여가며 얻고 싶은 게 어디 한두 가지일까. 먼 거리까지 몸을 움직이게 만든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드러내지 않고 막연하게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줄 알았는데, 한여름 무더위에 사방에는 풀 천지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만남을 나는 바란다. 그러자면 서로 원하는 것에 솔직한 게 좋다.

    손님이 한번 오고가면 한동안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 아무래도 에너지가 한곳으로 쏠리는가 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사는 가까운 이웃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쉽다. 심지어 멀리서 오는 손님들 때문에 가까운 이웃들이 번거로울 수 있다.

    이러한 소홀함은 사실 사람 관계만이 아니다. 우리 삶의 뿌리는 자연과의 관계 맺음에 있다. 흙과 물, 벌레와 짐승, 곡식과 풀…. 사람과 관계 맺음 못지않게 자연과 관계 맺음이 소중하다. 때로는 절대에 가깝다. 자연이 우리 목숨을 살려주고, 심지어 사람관계에서 받은 상처까지 치유해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는 길이 뭘까.

    손님을 식구처럼, 손님은 집주인처럼
    김광화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서울을 떠나 1998년부터 전북 무주에서 자급자족 농사

    정농회 회원

    저서 : ‘아이들은 자연이다’


    교감, 조화, 생명

    자연에는 그 본래 자리마다 그 나름의 주인이 있다. 일하다가 내 둘레를 찬찬히 살피지 못하고 내 앞가림만을 생각하다 벌에 쏘여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또 풀과 교감을 충분히 나누지 못하면 풀독이 올라 이를 치료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각자 주인으로 살아가되 서로 존중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도시를 떠나 꿈꾸던 시골로 온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사는 삶의 깊이는 끝이 없으리라.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앞으로도 고민해야겠다.

    ※ 그간 부족한 글을 애정으로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연재에 등장한 분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주인공으로 등장한 곡식과 짐승들, 그리고 하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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