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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⑮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그가 도전한 최후의 실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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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황금광시대’로 불린 1930년대 조선의 사금 채취선.

예정된 시각이 되자 50대 초반의 중년신사가 나타나 회견장 중앙에 앉았다.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거만하고 우악스러운 금광 졸부 느낌은 나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자면 한평생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지식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회견장이 정돈되자 1937년 조선 광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종만 사장이 입을 열었다.

“누추한 곳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저는 경성에 집이 없어 경성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묵고 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시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어제 영평금광을 155만원을 받고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습니다. 제가 바쁘신 여러분을 이곳까지 오시게 한 것은 매각대금 중 50만원(현재가치 500억원)을 출연해 신설할 ‘재단법인 대동(大同)농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중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 중 누구도 그런 엄청난 계획이 발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때까지 조선 재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종만이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얼굴이나 보고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기자회견장에 온 참이었다. 기껏해야 돈 자랑이나 하다 끝나려니 예상했는데, 금광을 매도해 번 돈의 3분의 1을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작농을 위해 내놓겠다는 ‘폭탄선언’이 나온 것이다.

“첫째,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는 50만원의 자금으로 전 조선에서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지역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하여 집단농지를 매입할 것입니다. 둘째, 재단이 소유한 집단농지는 경작자를 선발해 골고루 분배한 후 영구히 경작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셋째, 재단은 경작자로부터 매년 수확량의 3할을 ‘의무금(義務金)’으로 징수하여 집단농지를 추가로 매입하는 데 쓸 것입니다. 의무금은 30년 한도 내에서 징수하고 그 후로는 경작자가 자신의 수확물을 모두 가지게 할 것입니다. 단, 경작지의 소유명의는 영구히 재단이 보유하여 경작자가 토지를 팔거나 담보로 잡혀 어렵게 확보한 토지를 잃지 않도록 방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작농의 생활안정을 영구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집단농지 안에 부락민의 자치조직을 결성하여 교육, 위생, 문화 등 제반 문제를 경작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다섯째, 집단농지 안에 농업교육시설을 설치해 대동농촌의 중추가 될 청년을 양성할 것입니다.” (‘산금계의 대왕 이종만씨’, ‘광업시대’ 1937년 7월호)


당시 소작료는 법적으로 50% 이상을 징수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60~70%씩 징수하는 악덕 지주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작료를 30%만 받겠으며 30년이 지나면 아예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이종만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도 지주의 당연한 권리로 ‘소작료’를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농지를 전 조선으로 확대하기 위한 기부금조로 한시적으로 ‘의무금’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이종만의 자영농 육성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하루이틀 생각해 즉흥적으로 발표한 선심성 발언이 아님이 분명했다. 농촌운동가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는 더더욱 아닌 ‘금광왕’ 이종만이 그처럼 거금을 조건 없이 사회에 내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평생 바다로, 산으로, 들로 돈을 좇아 떠돌았던 이종만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처럼 웅대한 계획을 발표한 것일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전 조선 인구의 8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농촌의 생활수준은 곧 조선인의 생활수준을 의미합니다. 농민의 빈궁은 우리가 가장 역점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이제 어느 정도 금전을 만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의 갱생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자고 이런 계획을 한 것입니다. 처음 광산을 시작할 때도 돈을 잡으면 꼭 농촌사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50만원 재단으로 농촌구제사업’, ‘조선일보’ 1937년 5월13자)


험한 일을 하다가 뒤늦게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 중 일부는 더러 자신에게 부족한 명예를 보충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자선을 베풀기도 한다. 공익재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놓고 실제로는 절세(節稅)나 상속의 도구로 삼는 부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종만은 달랐다. 재단에 출연한 금액도 금액이려니와, 자영농 육성사업에 임하는 태도에서도 진실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종만은 자영농 육성계획을 발표한 지 넉 달 후, 자기 개인명의의 토지에서도 대동농촌사에 준해서 소작료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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