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조선 문인들이 머물고 지나친 그곳 ‘조선의 문화공간’

  •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입력2006-09-14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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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문인들이 머물고 지나친 그곳 ‘조선의 문화공간’

    ‘조선의 문화공간’ (전4권) 이종묵 지음, 휴머니스트, 각권 500쪽 내외, 각권 2만2000원

    한명회 양성지 조광조 조식 김육 김창협 박지원…. 우리 역사에서 굵직한 행적을 남긴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과 업적은 알아도, 조선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한 인물의 행적에서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그 인물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나고 자란 환경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한문학을 전공한 이종묵 교수가 10여 년간의 답사와 그동안 쌓은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내놓은 4권짜리 ‘조선의 문화공간’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다. 조선 초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물 87명이 살아간 흔적을 그들이 지켜낸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되찾았다. 출생지에서 거주지, 은둔지, 유배지 등 인물이 지나간 주요 공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를 망라하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문화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냈다.

    이제까지 인물의 삶과 사상 연구가 생활공간, 거주지라는 측면을 간과한 데서 오는 한계를 정면 돌파한 것이다. 남아 있는 시와 편지들이 그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인문 분야 전문 사진작가 권태균씨가 찍은, 적재적소에 시원하게 배치된 사진들은 책의 값어치를 더한다.

    옛사람의 자취 서린 땅

    이 책은 조선시대 문인의 땅과 삶에 대한 문화사다. “글은 사람을,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 근대라는 괴물의 힘에 밀려 우리의 산하가 많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러한 땅에도 옛 사람의 자취가 서려 있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저자는 손상된 우리의 산하에서 옛사람들이 살아온 자취를 찾아가는 작업을 시도했다. 조선의 문화공간을 인물별로 최대한 살려놓은 저자의 작업은 어쩌면 옛 자취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은 개발의 시대라 더 빛나는지도 모른다.



    인왕산 무계정사와 안평대군, 청송당과 성수침, 낙산과 신광한, 통진 대포동과 양성지, 하동 악양정과 정여창 은 조선 초기의 문화공간과 인물이다.면앙정과 송순, 개성의 화담과 서경덕, 독락당과 이언적, 지리산과 조식, 청량산과 이황, 우반동과 허균, 평해와 이산해, 침류대와 유희경, 필운대와 이항복, 청풍계와 김상용, 석실서원과 김상헌, 김포와 신흠, 화양동과 송시열, 곡운구곡과 김수증, 수락산과 박세당은 16~17세기의 문화공간과 그 주인이다. 이외에 자하동과 신위, 청계산 옥경산장과 남공철, 양수리와 정약용, 백탑과 이덕무, 인왕산 옥류동과 위항시인(委巷詩人), 임자도와 조희룡은 18~19세기를 장식한 문화공간과 인물이다.

    조선시대 문화공간을 따라가노라면 지금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서울 곳곳에 문화의 현장이 살아 숨쉬었음을 알 수 있다.

    천민 유희경이 주인이던 창덕궁 옆의 침류대, 이항복이 살던 필운대, 안동 김씨가 대대로 세거하던 청풍계, 위항시인들이 시를 짓고 즐기던 인왕산 옥류동 일대는 조선시대 문화를 선도한 공간들이다. 이들 ‘문화사랑방’을 중심으로 당대의 명사들이 모이면서, 학문과 문화의 수준은 높아졌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인왕산 자락, 백악산 일대, 그리고 도심 한가운데가 되어버린 백탑 거리까지, 곳곳이 계곡과 산으로 어우러진 서울은 조선의 문화를 살찌우는 곳이었다.

    서울은 물론이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명산대천, 이름 없는 섬에 이르기까지 옛 선조들의 발길이 닿았다. 때로는 관직에서 물러나 풍류를 즐기는 안식처가 되었고, 때로는 유배를 당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다짐하는 은둔지가 되었다. 조선의 산하 곳곳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기거하면서 그곳은 하나 둘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인왕산의 옥류동이나 청풍계, 송석원은 조선 후기 시와 문장을 하는 선비들로 넘쳐나던 공간이지만 그 흔적들이 없어지면서 대부분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기억의 끈 이어주는 옛글

    이 책은 사라진 흔적을 되살려내고, 흩어진 기억을 끌어모아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낸다. 진경산수화를 그린 정선은 물론이거니와 송석원의 주인이던 장혼과 같은 중인들도 무대의 중심에 등장한다. 이들이 당시에 직접 창작한 시에는 그 시대의 모습이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속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갖추어야 했던 필수교양, ‘문사철(文史哲)’이 들어 있다. 시에서, 편지에서, 그리고 기문(記文)에서 옛 선비들의 교양, 스승과 제자의 애틋함, 벗들의 우정이 아스라이 드러난다.

    퇴계 이황과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룬 남명 조식의 삶의 공간을 따라가보자. 삼가(합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김해-합천-지리산으로 옮기며 살아간 과정이 그가 지은 문학작품들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온몸에 찌든 사십년의 찌꺼기를 천말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흙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는 과격한 시의 배경이 되는 계곡, 남명이 그처럼 닮고자 했던 지리산의 풍광이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로 시작하는 시와 지리산 유람록으로 와 닿게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저자의 전공이 한문학이어서 그런지 인물이 활동한 주요 문화공간을 표현하는 글은 대부분 시와 편지, 기문이다. 이들 인물에게 역사적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상소문과 같은 글을 인용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상소문은 한 인물의 현실인식과 그 대응 방법을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조식의 경우 그의 삶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한 것이 1555년에 올린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이다. 책에서 일부 서술하고 있지만, ‘단성현감사직 상소문’을 직접 인용하여 명종을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비유하고 나라가 이미 망해가고 있다며 격렬하게 현실을 비판하던 조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좋았을 듯하다.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인물과 삶의 공간을 설명하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역사적 상황이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문장을 담았더라면 인물의 삶이 더욱 역동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인물의 삶과 문화공간을 정리하다보니, 지역별로 그곳에 살았던 인물들의 흐름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저자도 이러한 점을 우려했는지 “이 책은 문화유적지에 대한 현장답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옛글을 통하여 옛사람이 사랑한 땅과 삶에 대한 기억의 끈을 이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답사에 편리하게 지역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러나 열성적인 독자들은 누워서 책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현장에 가서 그들 삶의 자취를 흠뻑 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이 책이 앞으로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답사 길잡이로 활용될 것을 감안하면, 지역별로 조선시대 인물들의 문화공간을 일람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푸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엄청난 노작이 탄생한 즈음에 하기엔 부적절한 언급 같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이 책이 지역별로도 묶여 조선시대 문화의 생생한 현장을 탐사할 답사 안내서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여유로운 시간에 한가로이 읽어도 좋지만, 선조들의 삶의 자취와 역동성이 배어있는 현장에서 이 책을 펼쳐보는 것도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보판이 나온다면 인물의 연보와 주요 활동 공간을 간단한 도표로 정리해 싣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과 기록의 위대함

    몇 가지 보태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들이 결코 이 책이 지닌 의미를 퇴색시킬 수는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조선시대를 장식했던 인물들의 삶의 공간을 대부분 추적하여, 이들이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다. 서경덕이나 이황의 대유학자로서의 모습보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사랑했던 소박한 면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나아가 그 시대를 스케치해준다는 점에서 새삼 글과 기록의 위대함을 느낀다. 영상 매체가 없던 시대를 산 인물들의 삶의 터전, 그들이 남긴 글들은 조선의 중심이 다름 아닌 문화와 학문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조선시대 문화공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여유와 풍취를 안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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