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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좌편향 사학자는 민중주의에, 뉴라이트는 통계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명성황후 시해 주범 밝혀낸 원로 사가(史家) 최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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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민씨 정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에는 고종이 통치하던 시대인데요.

“다른 연구논문에서도 ‘민씨 정권’이라는 용어를 많이 써요. 고종에겐 자기 세력이 없었어요.”

▼ 민씨 정권이라는 용어가 역사학계에서 자리잡을 정도라면 고종은 무능했다고 봐야 하나요.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졌죠.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훌륭했다고 얘기하는데, 훌륭했으면 나라를 그 꼴로 만들었을까요. 하여간 저는 훌륭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군주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수도 없을 것이다. 고종과 민왕후가 망국지주(亡國之主)라는 인식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관점도 있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을 1999년에 펴냈다. 이 교수는 그 책에서 고종이 대원군과 민왕후의 권력다툼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유약한 군주였다는 기존의 인식을 부인하고,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시각으로 개화를 추구한 개명(開明) 군주라고 평가했다.



▼ 민왕후 하면 보통 사람의 뇌리에는 대원군과의 마찰이 먼저 떠오를 겁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도 전부 그걸 중심으로 그리잖아요.

“물론 갈등이 없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사람들이 민왕후가 대원군과의 갈등 때문에 시해됐다고 조작하려 했어요. 대원군은 실각 후 민씨 세력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어요. 민왕후의 시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에서 비롯된 거예요. 민왕후가 러시아에 접근하니까 일본이 죽인 것이죠.

민왕후를 정치인으로 평가해야지, 하우스와이프(가정주부)로 봐서는 안 됩니다. 하우스와이프로서 민왕후를 보면 시아버지한테 대든 패악(悖惡)한 며느리가 되지요. 민왕후는 대단히 똑똑한 여성이었어요.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항상 남편의 체면을 세워줬죠. 아이디어와 기지(機智)가 있는 명민한 정치인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세계 외교무대에 내놓고 볼 때는 구중궁궐에 박힌 여인에 불과했어요.

민왕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을 했습니다. 그런 정책을 쓰려면 러시아가 조선을 완전히 도와준다는 전제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한국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 없었어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될 때까지 일본과는 절대 대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한국 문제를 놓고 일본과 거래했어요. 이건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민왕후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친절을 러시아 정부의 호의로 이해했습니다. 하우스와이프가 아니라 정치인이었지만 객관화해놓고 보면 뛰어난 정치인은 못 되죠. 국제정세를 몰랐으니까.”

박영효 숙청에 분개한 일본

▼ 민왕후 시해의 주범은 누구입니까.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죠. 일본의 국익이 걸린 싸움이었습니다. 일본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를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가적 결정에 의해서 움직인 거죠. 일본 정부는 처음부터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죠.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와 고향도 같고 영국 유학을 같이했습니다. 나이는 이토보다 다섯 살 위입니다. 이토 초대 내각에서 외무대신, 2차 내각에서는 내무대신을 지냈어요. 그리고 일본의 ‘겐로(元老)’로 천황에게 수상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이런 실세가 국장급에 불과한 주한공사를 자청합니다. 한국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결권, 백지위임장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완전히 총독처럼 군림했죠. 이 사람이 한국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직접 결정했죠.”

최 교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明) 육군대장이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에게 “이노우에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시켜야 한다. 내각회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민왕후 시해의 결단을 촉구한 편지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내 개정판에 보완했다.

“일본의 정책이 민왕후를 회유하는 것에서 시해하는 강경책으로 바뀐 시점이 1895년 7월11일경입니다.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그즈음의 자료를 다 찾아봤죠. 문제의 편지는 7월8일에 씌어진 것입니다. 민왕후가 7월6일 박영효를 내각에서 내쫓은 다음이죠. 박영효는 이노우에가 심어놓은 친일파 내무대신입니다. 박영효의 축출은 한국 내 일본세력에 심대한 타격이었죠. 편지에서 ‘이제는 한국사태에 대해서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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