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입력2006-10-09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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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국회 내 반(反)이승만 세력은 내각제 개헌 추진으로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장면을 옹립하려 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의원들을 압박했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휴전의 걸림돌로 여겨 한때 장면 추대를 지지했지만, 전쟁 승리와 확고한 ‘반공’ 정책 유지를 위해 이승만 지지로 돌아섰다. 결국 40여 일간의 헌정 중단 사태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도입이라는 발췌개헌으로 끝을 맺었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952년 발췌개헌안 국회 표결 광경.

    전쟁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레닌은 이 관계를 “전쟁은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라고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했다. 두 혁명가는 전쟁과 정치가 수단을 달리하는 권력추구방식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 사이 한반도에서는 전쟁과 정치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상황이 연출됐다. 한편에서는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정치(즉 전쟁)가 벌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총도 쏘지 않고 피도 흘리지 않는 전쟁(즉 정치)이 전개되었다.

    전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동안에도 후방에서는 전시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빼앗기 위한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정치는 전쟁의 일부분이었으며, 전쟁 또한 정치의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전시(戰時) 정치의 정점이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었다. 이승만은 이 두 사건을 통해 1960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장면 옹립공작과 미국의 지원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이후부터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승만 정부는 늘 의회로부터 쫓기는 처지였다. 한 번도 국회에서 안정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세는 전쟁이 터진 후에도 계속됐다. 전쟁 발발 초기 이승만 정부는 잦은 정책 실패 내지는 실수를 범했다. 예컨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점, 피난민이 가득한 한강교를 폭파해 많은 양민을 사상케 한 일, 국민방위군의 이름으로 동원된 수많은 청장년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건, 거창지역에서 민간인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은 모두 이승만 정부로서는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운 실책이었다. 야당 세력은 국회에서 연일 정부의 비정(秕政)을 질책했고, 이승만의 지지도는 날로 떨어졌다.

    1951년 5월7일 이승만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각료 몇 사람을 교체하면서 내무장관 조병옥도 경질했다. 이승만의 측근 비서가 작성한 5월4일자 경무대 일지(log)를 보면, 이승만은 조병옥의 경질을 한국정치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차단하고, 더 나아가 미국이 6·25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것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초 대사가 대통령을 방문해 조병옥의 사표를 수락한 데 대해 항의했다. 조병옥은 무초의 사람이었으며, 그를 통해 미국인들은 다음 선거를 통제하려고 했다.…이제 조병옥이 사라졌기 때문에…무초는 다른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온화한 장면이었다. 무초는 자신의 사람을 잃었지만, 아직도 다음 선거에서 이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다가올 몇 해 동안 한국을 그들의 손아귀 안에 두고 싶어 했다. 선거는 한국전쟁을 제한전(조기 휴전을 의미-필자)으로 끌어가려는 미국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자신들의 계획에 동조하는 한국의 대통령을 갖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한반도의 절반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이승만의 재선은 이러한 미국의 계획과 맞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한국의 완전독립을 계속 주장하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5월2일 부통령이 대통령에게 와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총리와 국방장관을 묶어 그 자리에 장면을 앉히는 것이 최선이라고들 한다고 말했다(R.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p.381-382).


    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획

    1951년 중반부터 야당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신 당시 총리이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1952년 4월17일 민국당, 민우회 등의 의원들이 중심이 돼 재적의원 3분의 2인 123명의 서명을 받은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이때 이들이 내심 대통령으로 염두에 둔 것은 장면이었으며, 이 방안은 미국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주한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1952년 2월15일자 전문(電文)에서 무초 대사는 차기 대통령으로는 장면이 최선이라고 썼다.

    …다른 두 (대통령-필자) 후보인 이범석과 신익희는 우리가 볼 때 격이 좀 떨어진다. 최선의 두 후보는 장면과 허정인데, 그들은 추종자가 적고 좀 허약하다. 내각제를 도입하면서 이승만을 재선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다른 강력한 후보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승만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원치 않을 것이고,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프라이팬에서 나와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내각제를 운영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장면이 당선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희망이다.…미국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원내에서 그가 지닌 가장 큰 강점일 것이다(FRUS 1952-1954, pp.50-51).


    그러나 이 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미국은 내각제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은 현행 제도하에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최선의 방안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각제 개헌과 장면 추대를 동시에 꿈꾸고 있던 야당 세력과는 생각이 달랐다.

    한편 이승만 대신 장면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군부 일각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는 한국군 장성들을 상대로 미국측이 반(反)이승만 편임을 암시하고 다녔다. 특히 밴 플리트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한국군이 이승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군 수뇌부 일각에서 이러한 미국의 암시를 이승만 제거 쿠데타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52년 5월14일 육군본부 작전국장이던 이용문 준장이 장면 전(前) 총리의 비서실장이던 선우종원을 찾아와 ‘이종찬 참모총장도 알고 있고, 밴 플리트 장군의 묵계도 얻어두었으니’ 반이승만적인 의원들과 힘을 합쳐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 대표적 예였다.

    직선제 개헌공작과 북진통일론

    이러한 야당의 장면 옹립 및 내각제 개헌 시도에 대항해 이승만은 자신의 정당을 만들려는(자유당 창당)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1952년 5월14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이승만은 내각제 개헌안과 직선제 개헌안 사이의 대립을 단순히 국내 정쟁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작게는 미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간 한국 의회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한국 정부 사이의 힘겨루기로 간주했으며, 크게는 6·25전쟁의 수행방향을 둘러싼 미국 일본과 한국 사이의 갈등으로 보았다. 이 점은 그가 올리버(R. T. Oliver)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인과 미국인은 모두 자기 나름의 이유 때문에 대통령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국회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매수되고 압력을 받고 있다.…(일본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배상금을 받을 때까지-필자) 한일강화조약을 반대하기 때문이고, 또 한국에는 소비재 원조만 하면서 일본의 산업건설을 위해 거액의 원조자금을 제공하는 미국의 정책에 내가 반대하기 때문이다.…미국의 고위관리들은 전쟁의 목표뿐 아니라 휴전회담에 관해서도 나와의 의견차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면은 미국이 다시 한국에 1945년과 같은 분단선을 설치하려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사람이다. 만일 미국이 한반도 전체가 무력으로 재통일될 때까지 전쟁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 대신 장면 같은 인물로 대통령을 교체한다면, 그들에게는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다(R. T. Oliver, 앞의 책, pp.388-389).


    전쟁정책을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1950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1월 말 20여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미국은 전쟁에 관한 기본방침을 재검토했다. 38선 돌파로 시작된 롤백(roll-back) 정책을 밀고 나갈 것인지(확전), 냉전의 기본노선인 봉쇄(containment) 정책으로 복귀할 것인지(봉합), 아니면 한국을 포기할 것인지(철수) 를 놓고 미국은 고민했다. 미국의 최종 선택은 제한전, 즉 휴전을 통한 봉합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선회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이었다. 북진은 롤백과는 잘 어울렸지만, 봉쇄와는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후 미국이 확전을 주장하던 맥아더를 해임(1951년 4월11일)하고 휴전회담을 개시(7월10일)하자, 이승만은 미국이 북진을 주장하는 자신을 제거하고 미국의 전쟁정책에 보다 순응적인 인물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닌지 몹시 우려했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952년 이승만이 제출한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가 부결하고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민중자결단, 백골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나타나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

    그의 눈에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신과 정부를 공격하는 의회 내 야당 세력의 행동은 통일을 저버린 매국행위이자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위로 보였다. 한반도가 재차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진통일을 달성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직선제 개헌을 관철해 자신이 대통령에 재선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요컨대 그는 직선제 개헌의 관철을 권력(정권) 유지뿐 아니라 전쟁정책(북진통일론)과도 연결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선제 개헌안 제출을 전후해 이승만은 직선제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을 소환하자는 관제데모를 동원하고, 그동안 유보했던 지방자치제선거를 실시했으며, 총리와 내무장관에 심복인 장택상과 이범석을 임명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원 체포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당시 그는 경찰과 특무대를 통해 ‘육군본부 내의 흥사단(평안도) 인맥이 장면과 결탁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용문은 평양 출신으로서 육군본부 평안도 인맥의 핵심이었다. 또 원내의 반이승만 의원들은 5월29일 국회에서 대통령선거를 전격적으로 실시해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승만은 다급했다. 이에 그는 1952년 5월25일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압박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승만은 공비 출몰을 이유로 5월25일 부산, 경남, 전남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심복인 원용덕을 직제에도 없는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헌병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앉혀 이 지역의 계엄업무를 총괄토록 했다. 당시 부산지역에는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을 빼고는 군 병력이 전혀 없었다. 전투부대 병력은 모두 일선 전투나 지리산 일원의 공비토벌에 투입돼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에 군 병력의 출동을 명령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중장은 군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명령을 거부했다. 이승만이 원용덕의 헌병대에 의존해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튿날 계엄군은 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구속하는 등 야당 의원들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대부분의 야당 의원은 잠적하고 국회는 그 기능이 정지되는 헌정(憲政)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최초의 정치적 상황은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5월28일 국회는 계엄령 즉각 해제를 결의했고, 다음 날 부통령 김성수가 계엄선포를 ‘반란적 쿠데타’라고 비난하면서 사표를 냈다. 미국은 유엔한국위원단(UNKURK)을 내세워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했다. 라이트너 주한미대리(代理)대사도 5월30일 이승만을 만나 미국 정부가 유엔한국위원단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6월4일 미국 정부가 이승만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주한 미대사관에 보낸 전문은 미국의 정책변화 이유와 향후 해법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는 어느 정도의 리더십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이승만이 약간 통제되고 부드러워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러한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최종 결과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남아 있는 것일 때, 미국과 유엔의 이해관계는 보다 확고하게 보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국회가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보다 국민이 투표를 통해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때, 그는 한국 내외에서 더욱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승만이 국회의 통제 아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지난 6월3일 부산에서 우리에게 보낸 전문에 나와 있는 (장택상) 총리의 제안 중 2항과 3항(이 내용은 뒤에서 설명함-필자)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와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하는 것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FRUS 1952-1954, p.303).


    美대사관과 유엔군의 견해 차이

    이러한 결정이 나온 것은 한국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해법을 가지고 있던 주한미대사관과 유엔군(주로 미군) 사이에서 후자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당시 유엔군보다는 대사관이 이승만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대사관은 유엔군이 직접 개입해 이승만을 감금하고 조속히 사태를 해결하자고 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다. 후방으로 돌릴 병력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유엔군 지도부에 중요한 것은 전쟁이었지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승만과 같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유사한 의견대립이 워싱턴에서도 있었다. 국무부 동북아시아과(課)의 한국담당 실무자들은 주한미대사관의 견해에 가까웠다. 그러나 고위 정책결정자들은 군부의 의견을 선호해 이승만 배제에는 소극적이었다. 결국 조정회의를 거쳐 군부의 의견이 수용되었고, 그 결과가 위에서 인용한 6월4일자 전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방침은 무초에 의해 즉각 실천됐다. 그는 이승만을 만나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미국 정부의 공식견해를 다시 전달했고, 신익희 국회의장을 찾아가 “이제는 양측이 조금씩 양보할 때”라고 말했다.

    미국의 정책변화에 발맞추어 한국 내부에서도 수습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장택상 총리가 주도하는 신라회는 이승만과 야당 세력의 개헌안을 절충한 타협안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6월3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각료들에게 국회를 해산하지 않는 대신 다른 대안을 마련하라고 다그치자, 장택상이 내놓은 다음 3가지 타협안에 기초한 것이었다: 1) 대통령 직선제 2)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에 대한 국회의 동의절차; 국회의원 3분의 2가 불신임하면 총리는 사직해야 함 3)대통령이 총리가 제청한 사람을 각료로 지명할 때, 비로소 국회는 그 각료에 대한 동의절차에 들어감. 6월5일부터 각파 대표 2명씩 모여 사태수습책을 협의하기 시작했고, 12일에는 장택상의 안을 토대로 한 발췌개헌안의 기초가 거의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부 반이승만 의원들은 여전히 타협하려 들지 않았고, 양측의 충돌은 더욱 격화됐다. 6월12일과 13일에는 지방의원들이 부산에 와서 직선제 개헌안 통과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국회와 미대사관에 난입하려고 했으나 저지당했다. 반이승만 세력은 6월20일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김성수, 이시영, 조병옥, 김준연, 서상일, 김창숙 등 야당과 재야의 반이승만 인사가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폭력배의 난입으로 모임은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6월21일 드디어 발췌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그러나 국회는 정족수가 미달돼 개헌안을 표결할 수 없었다. 반이승만 의원들 중 일부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 숨어버렸고, 나머지는 국회활동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군정실시안 유포

    그러나 이 무렵부터 원내의 내각제 개헌세력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당수는 돈에 매수돼 넘어갔고, 감투를 약속받고 변절하는 의원도 일부 있었다. 그래도 반발하면서 국회에 출석하기를 거부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타협을 거부할 경우 유엔군이 군정을 실시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논리로 설득했다. 이 논리는 발췌개헌안에 끝까지 반대하던 의원들을 돌아서게 만드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유엔군의 군정보다 발췌개헌안이 낫지 않겠느냐는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심정으로 그것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비상계획안으로 유엔군에 의한 군정실시안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6월25일 합동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유엔군사령관 클라크가 작성한 비상계획안에는 이승만과 장택상이 모두 미국의 타협안을 거부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유엔군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안이었다.

    그런데 이런 계획안이 어떤 경로로 반이승만측 의원들에게 유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봉암 부의장이 유엔군 군정설을 들어 완강한 반대의원들을 설득했으며, 조봉암은 가까운 의원들에게 “혼란이 계속되면 유엔군이 계엄을 선포해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비밀각서를 보내왔다”는 말까지 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유엔군 군정설 유포가 갖는 설득효과가 대단했다는 점이다.

    7월4일 국회는 드디어 의결 정족수를 채우는 데 성공했다.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의원들을 동원하는데도 정족수가 모자라자 국제공산당 관련자로 구속했던 10명의 의원까지 석방시켜 출석시킨 결과였다. 이날 국회에서는 재적의원 185명 중 166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표결한 결과 찬성 163, 기권 3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됐다. 골자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의 도입이었다.

    이로써 짧게는 5월25일부터 시작된 헌정 중단의 사태,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 40여 일 만에 끝을 맺었으며, 길게는 1951년 중반부터 시작된 두 갈래의 개헌공작 간의 투쟁이 1년여 만에 막을 내렸다. 결과는 최종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획득한 이승만의 승리였다. 새 헌법에 따라 8월5일 시행된 선거에서 이승만이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290여만표를 얻은 함태영이 당선됐다.

    부산 정치파동은 단순히 권력을 둘러싼 투쟁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당시 시점에서 한국에 적합한 권력구조가 무엇인지를 놓고 맞선 대립이 담겨 있었으며, 전쟁정책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이라는 국제적 측면도 내포돼 있었다.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를 함유한 사건을 어느 한 차원으로만 환원해 살펴보아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이 사건이 지닌 복합적 의미를 놓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부산 정치파동의 대립축은 야당 대 이승만이라는 두 정치세력 또는 국회 대 행정부라는 두 헌법기관이었으며, 대립의 내용은 대통령 선출권과 권력구조 문제였다. 제헌헌법은 내각제와 대통령제를 절충하는 과정에서 국회에 의한 대통령 간선이라는 특이한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은 내각제보다 대통령제 선호

    국회는 대통령 선출권한을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겼고, 행정부는 이러한 국회의 간섭과 견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이승만에게서 권력을 탈환할 방법은 내각제 개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행정부를 장악한 이승만은 재선, 즉 권력 연장을 위해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고자 했다.

    부산 정치파동을 단순히 권력 장악을 둘러싼 이승만과 야당 사이의 정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이 사건은 단순히 민주냐 독재냐는 식의 단선적 차원에서만 평가되며, 이승만의 행위는 집권 연장을 위해 헌정질서를 파괴한 친위쿠데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이승만의 탈법적 행위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분명 군대를 동원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행위로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만 이 사건을 정쟁의 수준에서만 보면 그것에 내포된 또 다른 두 차원을 놓쳐 그것이 지닌 복합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선 부산 정치파동은 우리에게 내각제와 대통령제 중 어느 것이 당시 한국 여건에 더 적합하냐는 문제를 던져준다. 당시 한국은 전쟁을 하면서 국가를 형성해가고 있었으며, 정당정치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각제가 과연 한국에 적합했을까.

    전시 신생국가에서 전쟁을 원활하게 치르면서 국가 건설도 제대로 하려면 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가 나아 보인다. 이런 나라일수록 정치적 권위와 안정을 확립하는 게 긴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대통령제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 점을 알았기에 이승만을 대체하는 대신 ‘순화’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당시 의회 내의 여러 정치세력은 놀라울 정도로 가변성을 보이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1951년 3월4일 의석 분포는 ‘신정동지회’ 70, ‘민국당’ 40, ‘공화구락부’ 40, ‘민우회’ 20, 무소속 5석이었으며, 공화구락부는 민국당과 보조를 같이 해 이승만 정부를 성토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얼마 뒤인 5월29일 공화구락부의 주류는 친이승만 세력인 신정동지회의 주류와 통합해 ‘공화민정회’를 구성하는 무원칙성을 보여주었다. 그 후 공화민정회에서 민우회나 무소속으로의 이탈이 가속화돼 12월19일경에는 공화민정회 85, 민국당 39, 민우회 34, 무소속 17석이 된다.

    정당이 뿌리내리지도 못했고, 의원들이 이렇게 무원칙하게 움직이는 나라에서 내각제가 과연 제대로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앞서 언급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미국대사관의 판단도 부정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야당 세력을 지지해 이승만을 교체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내각제 개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제도 자체만 놓고 본다면 형성 과정에 있는 나라에서 국가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내각제보다는 대통령제다. 이 점이 우리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에서 이승만의 개인적 권력욕과는 별개로 읽어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 여기에도 양면성이 있다.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을 통해 국가 건설의 핵심인 ‘정치적 권위’가 확립됐고, 정치적 안정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권위주의’로 가는 길의 시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야당의 모순과 이승만의 정치적 안목

    부산 정치파동에서 나타난 의회와 행정부의 갈등의 이면에는 전쟁정책을 둘러싼 미국과 이승만(정부)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내포돼 있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의 참전 이후 미국은 6·25전쟁을 휴전으로 봉합해 또 한번 분단선을 설정하려 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미국은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국회를 이용해 이승만을 밀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정부)은 이러한 미국과 그것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국회에 맞서 휴전을 저지하고 북진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해 자신이 계속 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진통일론을, 일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재(再)분단을 겨냥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약소국 지도자 이승만의 견제수단이자 협상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직선제 개헌론은 단순히 집권연장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김일영

    1960년 강원 동해 출생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現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사회과학연구소장, 일본 규슈대 법학부 객원교수

    저서 : ‘건국과 부국’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주한미군’ ‘한미동맹 50년’ 등


    이러한 미국과 이승만 사이에서 야당 세력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에게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의사에 반해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지지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 것.

    그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쟁취를 위한 내각제 개헌이었으며, 이러한 국내정치를 전쟁정책과 어떻게 연결해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국내정치와 전쟁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만한 안목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승만은 정치를 전쟁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한 유일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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