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서부로, 서부로…8000마일 여정에 담은 ‘미국의 서사시’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10-09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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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선언 당시 13개 식민주로 이루어진 대서양 연안국가에 불과했던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사들인 미국은 군인 출신으로 이루어진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를 서북쪽으로 보내 영토 확장을 위한 역사적 답사를 시작한다. 오늘날 미국이 50개 주를 거느리고 태평양을 넘보는 광활한 대륙국가, 나아가 ‘세계의 일극(一極)’으로 군림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세인트루이스의 ‘게이트웨이 아치’.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장도가 시작된 곳으로, 미국인들에게는 서부 개척의 관문으로 인식된다.

    미국사의 경이 가운데 하나는 대륙국가로 급속하게 팽창했다는 점이다. 1776년 독립선언 당시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 이동(以東)의 대서양 연안에 포진한 13개 식민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83년의 파리조약으로 유럽 세계에 독립이 공인되면서 미국의 영토는 북으로 5대호와 그 변방, 남으로는 뉴올리언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경계로 하면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서북 영지 전 지역을 포괄했다.

    그로부터 불과 60여 년 만인 1850년 캘리포니아의 연방 편입과 함께 미국은 건국 당시의 세 배가 넘는 방대한 땅을 영토로 소유한 대륙국가로 발돋움했다. 실로 유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영토 확장이다. ‘발견되기도 전에 발전한다’는 신화를 낳을 정도로 급속했던 이 같은 영토 팽창은 움직임과 변화, 활기찬 개방성과 노마드적 불안정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독특한 미국적 생활양식을 낳는 데 일조했음이 물론이다.

    미국이 대륙국가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의 루이지애나 매입이다. 미국의 역사가들이 헌법 제정 다음으로 미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꼽는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은 영토를 두 배로 늘리면서 막대한 국가적 부의 원천을 소유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의 정치적 혼란과 내부 분열을 수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후세의 역사가 헨리 애덤스(Henry Adams)의 표현대로 세계사적 사건이다. 프랑스의 탐험가 라 살(La Salle)에 의해 루이 14세를 기려 명명된 루이지애나 영지는 오늘날 루이지애나 주에 해당하는 오를레앙 영지를 제외하고 미시시피 강에서 이른바 대륙분수계(Continental Divide), 곧 로키 산맥 분수령에 이르는, 약 83만평방마일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이다.

    프랑스는 1762년 7년전쟁 패배 후 영국이 캐나다와 함께 이 지역까지 요구할 우려가 커지자 서둘러 스페인에 이를 양도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제1집정관으로 있으면서 스페인에 압력을 가해 이 땅을 다시 프랑스에 반환하도록 했다.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에 양도됐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제퍼슨은 프랑스 공사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에게 뉴올리언스 구매 협상을 벌이도록 훈령을 내렸다. 뉴올리언스는 오하이오 강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와 멕시코 만으로 나가는 서북 영지의 중요한 출구.

    당시 서북 영지의 개척민 중에는 신생 합중국으로부터 분리해 영국이나 스페인에 합병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립하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어서, 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다면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동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이 무렵 스페인은 그동안 서북 영지의 미국인에게 개방했던 뉴올리언스 항의 통행에 관세를 요구해 이를 거부하는 미국측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제퍼슨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와 플로리다를 매입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임스 먼로(James Munroe)를 전권 특사로 파리로 파견해 리빙스턴과 함께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한편 카리브 해의 프랑스령 산토도밍고의 흑인 반란을 진압한 후 북미 대륙에 다시금 프랑스 식민 제국을 재건할 생각이던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은 산토도밍고에 보낸 프랑스군의 대다수가 황열병으로 희생되면서 이루기 힘든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답사 루트. 세인트루이스에서 로키 산맥을 넘어 서북쪽의 오레곤까지 8000마일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1500만달러에 사들인 루이지애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영국과 결전할 생각을 굳히고 있던 나폴레옹은 마음을 바꿔 미국이 요구하는 뉴올리언스와 함께 루이지애나 전체를 미국에 파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루이지애나 영지 전체를 1500만달러에 사라는 나폴레옹의 제안을 제퍼슨이 즉각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상 가장 큰, 그리고 가장 값싼 토지 거래가 이뤄지게 됐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이 미국이 대륙국가로 성장하는 터를 닦았다면,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답사는 훗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말로 미화되는 서부 개척의 본격적인 시작에 해당한다. 일찍부터 미국의 미래상을 서부와 연관지어 생각해온 제퍼슨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어둠 속에 파묻힌 대륙 서쪽에 대한 과학적 탐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를 선도한 것은 서부의 지형과 기후,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과 그들의 생태, 그리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디언 사회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제퍼슨은 단순한 계몽주의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국제적 이해관계에 밝은 뛰어난 현실 정치가였다.

    제퍼슨은 이웃나라에 앞선 학문적 탐사로 경계가 불분명한 이 지역에 대한 영토권 주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1785년부터 시작된 서방의 중국 무역은 날로 경제적 비중이 커지고 있었다. 멀리 케이프 혼을 돌아가는 위험한 항로 대신 대륙을 관통하는 수로, 곧 콜럼버스 이래 유럽인의 지리적 상상력을 자극해온 서북항로(Northwest Passage)가 발견된다면, 아시아와 교역하는 비용이 절감되어 막대한 이득을 안겨줄 것이었다.

    매켄지의 대륙횡단 성공

    이런 복합적 동기에서 서부 탐사를 국가의 우선 과제로 기획하고 있던 제퍼슨의 서부 탐구 욕망을 자극한 것이 알렉산더 매켄지(Alexander Mackenzie)의 대륙 횡단 성공이다. 1792~93년 매켄지는 캐나다 북쪽을 흐르는 블랙워터 강과 프레이저 강을 따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밴쿠버 위쪽의 벨라쿨라 강을 통해 태평양에 도달했다.

    매켄지의 여정은 1536년 멕시코 북쪽 지역을 통해 북미 대륙을 처음으로 횡단한 바카(Cabeza de Vaca) 이후 250년 만에 이루어진 위업이었다. 이런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매켄지가 개척한 항로는 상업적 이용가치는 거의 없었다. 수로의 형편상 물품을 배로 운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매켄지의 답사기 ‘몬트리올로부터의 여행’을 읽은 제퍼슨은 로키 산맥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딘가에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강과 연결된 수로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생각에서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이 구체화하기 이전인 1803년 초에 이미 의회에 서부 탐사를 위한 특별 예산으로 2500달러를 요구함과 동시에 미 육군 대위 신분으로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에게 탐사 임무를 맡기고 준비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제퍼슨의 고향 버지니아 앨버말 출신인 루이스는 1794년의 위스키 반란 때 민병대에 입대한 뒤 주로 변방에서 인디언들과 접촉하는 군 생활을 해와 서부 사정에 밝은 편이었다. 그는 제퍼슨의 지시를 받고 배를 비롯한 탐사 장비를 준비하는 한편, 전문가들로부터 지리·식물학·광물·천문학·의학 등 답사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습득했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루이스(왼쪽)와 클라크.

    루이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원정대의 지휘를 공동으로 하기로 하고 옛 상사였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를 공동 대장으로 영입했다. 클라크 또한 오하이오 영지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집안이 버지니아에서 켄터키로 이주해 변경 생활을 한 경험도 있어서 서부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답사를 준비하면서 군인 중에서 체격이 좋고 책임감이 강한 대원 29명을 선발, 1803∼04년 겨울 동안 출발 예정지인 세인트루이스 근처의 캠프 뒤보아(Camp Dubois)에서 훈련을 시켰다. 이때는 이미 루이지애나 매입이 성사되어 답사 예정 지역의 상당 부분이 미국령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준비 작업도 한층 활기를 띠었다.

    8000마일 대장정

    1804년 5월14일 오후 4시, 루이스와 클라크의 원정대(The Corps of Discovery)는 1년간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드디어 캠프 뒤보아를 출발, “미풍이 불어오는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오르는” 장도에 올랐다. 2년4개월에 걸쳐 8000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일행은 클라크의 지휘 아래 한 척의 평저선(keelboat)과 두 척의 통나무배(pirogue)에 장비와 물품을 싣고 미주리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대원은 짐꾼과 사공까지 모두 44명이었으나 첫 캠프 장소인 맨단에서 태평양까지 답사한 뒤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오는 전 여정에 참여한 인원은 33명이다.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여정이었으나 대원들의 사기는 높았다. 그들은 여정의 목적과 사명, 그리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루이스에게 보낸 세세한 당부 편지에서 탐사의 목적이 “미주리 강과 그 중요한 지류를 답사해 이들이 태평양으로 흐르는 컬럼비아 강, 오레곤 강, 혹은 콜로라도 강과 연결되어 상업적 목적으로 곧장 대륙을 관통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2006년 8월1일,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출발지인 세인트루이스 인근을 둘러보기 위해 나는 해질녘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를 향해 차를 몰고 있었다. 길 양편으로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 아득한 옥수수밭 너머 지평선을 붉은 노을이 물들이고 있었다. 일리노이의 일몰은 장엄하면서도 삶의 근원적인 고독감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하늘은 희미한 금색의 후광으로 빛나면서 대지를 사방으로 감싸안는다. 도시에서 생활해온 내게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처럼 하늘이 어둠 너머로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높게 솟아오르는 이 저녁 풍경은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은 그렇게 실루엣이 되어 어둠의 해원으로 변해갔다.

    1935년 초가을 평안도 성천을 여행한 이상(李箱)은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밭을 보고서 관병식을 떠올렸다. 그러나 일리노이의 옥수수밭은 나에겐 변전을 거듭하면서도 늘 한결같은 바다의 모습이었다. 황혼의 정경이 마음을 사로잡는 심상으로 바뀌어 내 기억의 심층에 자리잡은 것도 그것이 바로 이 같은 삶의 영속성, 곧 덧없는 시간 속에서 영원성을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을 서부로 유혹한 것은 모피와 황금과 무상의 땅만은 아니리라. 거기에는 또한 방랑과 고독, 억압 없는 자유에 대한 동경, 삶의 신비에 대한 매혹이 언제나 함께 어른거린다. 사람들은 이 환영을 좇아 일망무제의 초원에 길을 내고 서부로 달려갔다. 오웬 위스터(Owen Wister)나 루이 아무르(Louis L’Armour)의 소설 속 카우보이의 삶이나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고독한 총잡이의 삶을 사로잡은 것도 이 환영이고, 위험을 무릅쓴 모르몬 교도들의 서부 장정도 필경 서부의 마력이 빚어낸 것이리라.

    매혹의 땅, 서부

    서부 이주로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이르는 66번 도로(Route 66)이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인 1926년에 서부로 가는 이주민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대륙 횡단 도로이다.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어머니 도로(Mother Road)’라고 부른 바로 그 길이다.

    내가 달리고 있는 주간고속도로 55번의 일리노이 구간의 상당 부분이 루트 66과 겹친다. 블루밍턴, 링컨, 스프링필드를 지나 세인트루이스를 향해 차를 몰면서 나는 마차를 타고 꿈을 좇아 서부로 가는 긴 행렬의 일원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환상은 세인트루이스 인근, 루트 66번이 갈라지는 리츠필드에서 길을 내려 허름한 모텔에 들 때까지 계속됐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캠프 뒤보아 사적지.

    이튿날 아침 일찍 세인트루이스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 7시인데도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독립혁명기인 1764년, 뉴올리언스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상해 개척한 곳이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답사의 실질적인 출발지가 되면서 세인트루이스는 몰려드는 모피사냥꾼, 무역상, 모험가, 개척자들로 서부 개척의 중심지가 됐다.

    세인트루이스는 ‘가자 서부로!’라는 구호 아래 서부에서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고자 했던 이주민들을 대륙의 북서쪽 오레곤으로 인도한 장장 2000마일에 이르는 오레곤 트레일과 남서쪽 멕시코 방면으로 길을 열어준 산타페 트레일의 출발지였다. 특히 1817년부터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이 취항하면서 세인트루이스는 미시시피 강 항해의 북쪽 종착지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1840년경부터 독일, 이탈리아, 아일랜드 이민자가 대폭 유입되면서 도시의 인구도 급팽창했다. 1840년에 2만이 채 안 되던 인구가 1860년에는 16만으로 급증했다. 남북전쟁 무렵 세인트루이스는 물동량에서 뉴욕 다음가는 큰 내항으로 서부 제일의 도시가 돼 있었다.

    서부 개척의 관문

    서부 개척의 관문으로서 세인트루이스의 역사적 위상을 표상하는 상징물이 바로 유명한 ‘게이트웨이 아치’이다. 미시시피 강 연안의 언덕, 도시의 첫 정착지 인근에 세워진 이 거대한 아치는 핀란드 이민자의 아들인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이 설계해 1965년에 완성한 것이다.

    아치의 높이는 630피트(192m). 자유의 여신상보다 325피트, 워싱턴 기념탑보다 75피트가 더 높다. 워싱턴의 제퍼슨 기념관을 장식하고 있는 돔으로부터 그 형상을 시사받았다는 이 아치는 하늘의 궁륭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서부 개척의 승리를 표상한다.

    건축의 발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32년이 걸린 아치의 건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다. 세인트루이스 시장 바니 딕맨(Barney Dickmann)의 주도로 기념탑건립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934년이었다. 위원회는 기금 모금을 시작하는 한편 연방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기금 조성은 지지부진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7년에 비로소 그동안 모인 기금을 바탕으로 기념탑 디자인을 공모할 수 있었다.

    172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예일대 출신의 건축가 사리넨의 디자인이 채택됐다. 그러나 건축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금 15년의 세월이 흐른 1962년이다. 4년이 걸린 이 대역사에서 스테인리스 강철만 5000t 이상이 들어갔다. 그 사이 설계자인 사리넨은 아치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61년 사망했다.

    게이트웨이 아치는 제퍼슨 국가 팽창 기념관(Jefferson National Expansion Memorial)의 일부이다. 90에이커에 이르는 이 기념관의 중요한 볼거리는 아치의 양다리 사이의 지하에 조성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1803년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답사에서부터 19세기에 이루어진 중요한 서부 탐험들이 연대별로 정리되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 과정을 담은 아이맥스 영화를 본 다음 트램카를 타고 아치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세인트루이스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면으로 1847년, 유명한 드레드 스콧(Dred Scott) 판결이 있었던 옛 법원 건물의 돔이 선명하고, 왼편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홈구장인 브쉬 스타디움도 보인다.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 사이 곳곳에 역사의 자취가 밴 세인트루이스의 스카이라인은 아름답다.

    그러나 중서부의 거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이 세인트루이스 역시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예전의 번성을 추억하는 처지가 되었다. 1940년에 80만을 넘어선 인구가 지금은 30만에 불과하고 그마저 계속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IT산업이 발달한 캘리포니아와 대서양 해안가의 도시로 사람들이 계속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게이트웨이 아치를 나와 일리노이의 하트포드에 있는 캠프 뒤보아 사적지로 차를 몰았다. 미시시피 강을 건너 일리노이 쪽으로 들어와서 강가를 따라 난 길로 30분쯤 달리니 안내센터 건물이 보인다. 1978년 미국 의회는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 루트를 국립 트레일의 하나로 지정했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미주리 강과 미시시피 강의 합류점.

    루이스와 클라크의 역할분담

    3700마일에 이르는 이 트레일의 출발점이자 첫 번째 사적지가 바로 이곳 캠프 뒤보아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미주리 강 어귀 부근인 이곳에서 1803년 겨울을 나면서 선발된 대원들을 훈련하고, 이듬해 5월14일 이곳에서 원정의 역사적 첫발을 내디뎠다. 안에는 원정대를 태웠던 평저선의 모형, 여러 가지 자료, 소소한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밖의 뒤뜰에는 당시의 훈련 캠프가 재현돼 있다.

    통나무로 지어진 캠프는 소박했다. 캠프는 병사들의 숙소와 루이스와 클라크가 공동으로 사용한 방, 그리고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가지 측량 기구가 놓여 있는 클라크의 책상, 식물 표본과 각종 의약품이 들어 있는 상자가 놓여 있는 루이스의 책상이 특히 눈길을 끈다.

    원정기간에 대원들을 직접 통솔하고 답사지의 지도를 작성하는 일은 주로 클라크의 몫이었고, 원정대를 선도하면서 주변 지형과 동식물을 관찰해 기록하는 일은 루이스의 소임이었다. 두 사람이 별다른 의견 충돌 없이 상호보완적으로 대원들을 이끈 것도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캠프 뒤보아를 둘러본 뒤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이 합쳐지는 지점, 원정대의 실질적인 출발지를 보기 위해 미주리 쪽의 웨스트 앨턴에 있는 합류점 공원(Confluence Point State Park)을 찾아 나섰다. 앨턴에서 미주리 쪽으로 강을 건넌 다음 곧바로 강변도로를 타고 얼마쯤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옥수수밭을 양편에 낀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5분쯤 달리니 공원 팻말이 보인다.

    흔히 널따란 잔디밭이 조성된 여느 공원과 달리 이곳은 두 강이 만나는 삼각점을 향해 나 있는 트레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야생 상태 그대로였다. 공원 입구에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과 연관된 ‘탁한 미주리 강(Muddy Missouri)’과 ‘장대한 미시시피 강(Mighty Mississippi)’의 역사를 소개하는 패널이 걸려 있다. 찾는 이 없는 해질녘의 공원은 이따금 새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숲 속으로 이어지는 트레일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내 멀리 트레일의 소실점이 보이면서 왼편으로 미주리 강이, 오른편으로 미시시피 강이 흘러드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끝자락에 팔각형의 표지판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지표면에 두 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거대한 미주리 강물을 한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미시시피 강은 더할 수 없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찍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 강을 ‘나라의 몸체(the Body of the Nation)’라 불렀다. 광활하고 비옥한 강 유역이 곧 미국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고,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전 미국인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젖줄 미시시피 강

    이처럼 나라의 젖줄이자 대동맥이기 때문에 미시시피 강은 허다한 전설과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마크 트웨인의 걸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 허먼 멜빌의 ‘신용사기꾼’은 강에 얽힌 이런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시시피란 오지브웨 인디언 말로 ‘큰 강’이란 뜻이다.

    그렇긴 하나 길이로는 오히려 미주리 강이 더 길다. 예전에는 물결이 더 거칠고 수량이 풍부했던 미주리 강이 본류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이곳 합류점에서 바라보니 실제로 두 강의 강폭이나 수량이 거의 비슷했다.

    미시시피가 본류가 된 것은 우선 미주리 강은 이 합류점에 이르러 방향이 남쪽으로 꺾이는 데 반해 미시시피 강은 계속 남쪽으로 흐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미시시피 강이 일찍부터 알려져 친근한데 비해 북서쪽 미개척지에서 발원한 미주리 강은 19세기 초까지 초입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미주리 강이 본류로 인정됐다면 그 길이가 4300마일에 이르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을 가졌을 것이다.

    내가 두 강이 뒤섞이는 것을 보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의 합류에 대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인상적인 대목 때문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맑은 오하이오 강물이 탁하고 누런 미시시피 강과 합쳐지지 않은 채 100마일 이상을 흘러간다고 썼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가 타고 간 평저선 모형.

    나는 연전에 이 장관을 보기 위해 일부러 두 강이 만나는 케이로(Cairo)를 찾은 적이 있으나, 그때 공교롭게 홍수가 나서 두 강이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흙탕물인 탓에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런 드라마틱한 정경을 기대하고 두 강의 만남을 지켜봤는데, 기대만큼 뚜렷하지는 않았으나 탁한 미주리 강이 미시시피 강과 만나면서 긴 띠를 이루며 흘러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인적 없는 강가에 홀로 서서 두 강의 합수를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나는 200년 전, 역시 비슷한 일몰 무렵, 이를 거슬러 올라갔을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와 그들이 탄 배를 머리로 그려보고 있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여정은 지형적으로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 바, 황량한 대평원 지역(Great Plains), 험난한 로키 산맥 지역,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쪽 해안지역이 그것이다. 지형이 달라지면서 기후와 생태환경 또한 달라지기 때문에 원정대는 그때마다 새롭게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행로에서 마주치는 원주민 인디언과의 관계 또한 난제였다. 제퍼슨은 루이스에게 인디언들을 우호적으로 대하고, 가능하다면 인디언 추장들을 워싱턴으로 초대하고, 미국 정부는 그들과의 교역은 물론 다른 문제에서도 적극 협조할 뜻이 있음을 알리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줬다.

    인디언과 상생협력한 원정대

    원주민과 접촉한 경험이 있었던 루이스와 클라크는 원주민에게 우호적이면서도 원칙에 입각한 행동을 해서 그들의 신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원정대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원주민 인디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뢰 덕분이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지금의 노스다코타 워쉬번 근처의 포트 맨단(Fort Mandan)에 이르는 답사의 첫 단계 행정(行程)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무거운 장비와 물품을 실은 배를 조종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예상외의 돌발 상황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에 대원들에게는 아주 힘든 여정이었다.

    답사의 전 과정에서 두 명의 이탈자가 생기고 한 명이 사망했는데, 이 모두 여정의 첫 단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첫 행정은 황량하고 메마른 지역과 대초원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접하는 동식물도 많았고 풍경 또한 이국적이었다. 예컨대 출발한 지 2개월이 지난 1804년 7월19일 클라크는 대평원 지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강가의 좁다란 숲 속 오르막길을 지나니 홀연 광활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 끝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초원이 한없이 뻗쳐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강가에서만 조금 보이고, 그 밖의 곳은 그 안에 다른 아무것도 없이 18인치에서 2피트 높이의 풀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이렇게 홀연 전개되는 정경에 넋을 잃고서 나는 찾아 나선 목적도 잊은 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클라크의 찬탄은 훗날 이 지역을 황량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미국의 대사막(Great American Desert)’이라 부른 제불런 파이크(Zebulon Montgomery Pike)와 같은 탐험가들의 시각과 대조된다. 원정대는 이 지역에서 프레리독과 코요테를 비롯한 많은 동물을 새로이 발견했고, 수많은 버펄로 떼와 해리를 보았다.

    전문적인 생물학자는 아니었지만 루이스와 클라크는 예리한 관찰안(眼)으로 답사의 전 여정에서 모두 122종의 동물, 134종의 새, 178종의 식물을 발견해 보고했다. 일행은 10월 말에 당시의 모피사냥꾼들이 가본 가장 먼 변경인 맨단에 당도해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캠프 뒤보아를 떠난 지 170일 만이고, 그동안 답파한 거리는 1600마일가량이었다.

    백인과의 가교 맡은 사카가웨아

    원정대는 날씨가 추워지자 이곳에 캠프를 짓고 겨울을 나기로 했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원주민인 맨단족(族)을 우호적으로 대했고 그들의 습속과 문화 전통을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했다. 원정대는 인디언에게 구슬, 거울, 장신구, 담배, 위스키 등을 선사했고 인디언들은 음식과 담배로 이들을 환대했다.

    클라크는 특히 인디언들을 친절하게 대해 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인디언 부족과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긴 했으나 루이스와 클라크는 당대의 거의 모든 백인이 그렇듯이 인디언을 근본적으로 미개하고 유아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루이스는 인디언 부족을 새로 만날 때마다 그들과 공식적인 회합을 열고 영토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설명했다. 그는 “17개 주의 대추장인 미국의 대통령이 그들의 옛 주인인 프랑스, 스페인 추장과 협의했다. 그리하여 이제 미시시피와 미주리 강 유역의 모든 백인이 그의 명령에 따르게 됐고, 따라서 대추장은 인디언들도 그의 자녀로 인정해 한 식구로 대우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전하고 장중한 의식을 거행해 그곳이 미국의 영토임을 선포했으며, 추장에게는 제퍼슨 평화 메달을 수여했다.

    인디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원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주민 부족들은 원정대에게 먹을 것과 숙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중요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했고 또한 길 안내를 자청해 맡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할 때 원정대는 인디언 혼혈로서 모피사냥꾼인 드루이아르(George Drouillard)를 통역으로 고용해 대동했는데, 포트 맨단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모피수집상인 샤르보노(Toussaint Charbonneau)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쇼손족 출신으로 맨단 부족의 하나인 히닷차(Hidatsa)족에게 포로가 된 후 맨단으로 끌려와 지내다 샤르보노와 결혼한 사카가웨아(Sacagawea)를 만난 것은 원정대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녀는 인근의 인디언 부족과 대화를 나눌 때 통역으로 도움을 줬고, 원정대가 맨단 너머 지역을 답사할 때 내내 동행해 길 안내와 지형 정보를 제공했으며, 식용 채소를 찾아내 그것으로 원정대의 식단을 풍성하게 해주기도 했다.

    1805년 2월11일 그녀와 샤르보노 사이에 아들 장 밥티스트(Jean Baptiste)가 태어났는데, 어린아이를 안은 그녀가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여정에서 마주치는 인디언들의 원정대에 대한 경계심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유일한 여성 참여자였던 사카가웨아는 아마 포카혼타스와 더불어 미국인들 사이에 가장 많이 회자된 인디언 여성일 것이다. 오늘날 그녀를 기리는 사적지와 기념상이 원정대에 참여했던 그 누구보다도 많다는 사실이 그녀가 얼마나 신화화된 존재인지를 가늠케 한다.

    서북항로의 부재 확인

    얼어붙은 미주리 강이 해빙한 이듬해 4월7일, 일행은 포트 맨단을 출발하여 다시 답사 여정에 올랐다. 같은 날 일행 중의 일부는 그간의 답사 보고서, 지도, 채집한 동식물 표본 및 인디언 민속품 등을 휴대하고 평저선으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갔다.

    남은 일행은 사카가웨아와 그녀의 아들 장 밥티스트까지 포함해 모두 33명이었다. 6척의 카누와 2척의 통나무배로 출발한 원정대는 옐로스톤 강, 머라이어스 강을 지나서 6월13일 미주리 강을 가르는 대폭포(Great Falls)에 이르렀다. 장엄한 자연의 모습에 찬탄하는 것도 잠깐, 원정대는 폭포를 우회해 짐을 운반해야 했다. 길이 워낙 험해 우회하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미주리 강은 셋으로 나뉘었다가 그 후로 강줄기가 점점 가늘어져서 로키 산맥의 레미 고개(Lemhi Pass)에 이르러서는 한 마장으로 줄었다. 드디어 발원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원정대가 찾고자 했던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또 다른 강줄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높이 솟은 눈 덮인 산봉우리가 첩첩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원정대는 이 험한 산간지대를 안내해 줄 인디언 부족과의 조우를 고대했으나 맨단을 떠난 지 5개월 동안 단 한 명의 인디언도 만나지 못했다. 지형으로 보아 자신의 출신 부족인 쇼손족이 인근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사카가웨아의 말을 듣고 루이스는 선발대를 조직해 인디언을 찾아 나섰다.

    수일 후 그들은 다행히 쇼손족 일행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그들 부족의 추장 중 한 사람이 바로 사카가웨아의 오빠였다. 8월30일, 일행은 이들로부터 구입한 말을 타고 쇼손족 가이드를 따라 로키 산맥의 지맥 중 하나인 비터루트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산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험준했다.

    10여 일 만에 가파른 롤로 고개를 통과해 오늘날의 아이다호 주의 클리어워터 계곡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로키 산맥을 넘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수로에 이르는 길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약 45일에 걸쳐 400마일에 이르는 험난하고 긴 여정으로 판명된 것이다. 콜럼버스 이래 오랫동안 찾고자 했던, 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해 ‘인도로 가는 행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진 셈이다.

    클리어워터 계곡의 원주민 네 페르세(Nez Perc럖)족의 도움으로 6척의 카누를 마련한 일행은 클리어워터 강을 따라 답사를 계속했다. 원정대는 스네이크 강을 지나서 10월 중순 드디어 컬럼비아 강에 이르렀다. 강폭이 좁고 물살이 급한 컬럼비아 강을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간 일행은 드디어 1805년 12월3일 태평양에 이르렀다.

    12월7일 원정대는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컬럼비아 강 남쪽에 캠프를 세워 포트 클랫솝(Fort Clatsop)이라 명명했다. 캠프 뒤보아를 떠난 지 573일, 4134마일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안개가 잦은 데다 비가 많이 내리고 사냥감이 별로 없는 태평양 연안에서 월동하기란 힘겨운 일이었다.

    이듬해 3월23일, 눈이 녹자 원정대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는 귀로에 올랐다. 한번 거쳐왔던 길이라 돌아가는 여정은 훨씬 빨랐다. 5월 중순에 원정대는 비터루트 산기슭에 도착해 이전에 큰 도움을 준 네 페르세족과 다시 만나서 그들에게 맡겨둔 말을 되찾았다.

    새 루트 답사하며 귀환

    일행은 원주민의 환대 속에 한 달여 동안 로키 산맥의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6월24일 비터루트 산을 넘기 시작, 엿새 만에 롤로 트레일을 통과했다. 7월3일 원정대는 팀을 둘로 나눠 루이스는 머라이어스 강 북단을 탐사해 큰 폭포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아보고, 클라크는 더 남단의 옐로스톤 강을 답사하는 코스를 택해 8월13일 미주리 강에서 다시 합류한 후 8월14일 맨단에 도착했다.

    중간에 루이스 일행은 그들의 말을 훔치려 하는 블랙피트 원주민과 다투다가 2명을 살해한 후 도망쳐왔는데, 루이스 자신도 대원의 오인으로 총상을 입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맨단으로부터의 귀로는 더욱 빨랐다.

    원정대는 가는 길에 사망한 찰스 플로이드의 묘소에 들르는 것 이외에는 중간에 멈추지 않고 주항(舟航)을 계속해서 마침내 1806년 9월23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태평양까지 답사의 첫 여정이 19개월 남짓 걸린 데 비하여 돌아오는 여정은 6개월에 불과했다.

    죽은 것으로 여겼던 원정대의 귀환은 큰 놀라움이었다. 미리 소식을 들은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은 선창에 도열해서 그들을 맞이했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스와 원정대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축하연을 열고, 루이스를 루이지애나 영지의 주지사로, 클라크를 인디언 문제 감독관으로 임명해 노고를 보상해줬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는 콜럼버스의 항해에서부터 시작된 서북항로 찾기의 마지막 탐험이기도 하다. 이 답사로 인해서 오랫동안 서구인의 탐험욕을 자극해온 서북항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답사는 또한 미국이 로키 산맥 너머 오레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어 결과적으로 미국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요컨대 이들의 답사는 미시시피 강 너머 알려지지 않았던 서부 세계에 대한 지형과 지도, 기후와 박물학적 생태, 인디언 부족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미국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서부 개척의 확고한 초석이 됐다.

    영원한 미국의 서사시

    원정에서 돌아온 후 대원들은 서부 탐험의 대업을 이룬 영웅으로 한동안 각광 받았지만, 이들의 위업은 세인의 기억에서 곧 잊혔다. 루이스의 비극적 죽음은 원정대원들의 영광과 뒤이은 내리막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루이지애나 지사로 임명된 루이스는 연방정부와는 물론 내부 직원과도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 어려움을 자주 겪었다. 개인적으로도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길 바랐으나 여의치 않아 우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답사기를 정리해 출판하라는 제퍼슨의 재촉도 그에겐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1809년 루이스는 테네시 주 내슈빌의 한 여관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연방정부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한때 타살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여러 학자가 루이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기는 험난한 답사 여정 그 자체의 이야기로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서부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온 원주민 인디언에 관해 유례없이 꼼꼼한 관찰을 담고 있다.

    대륙국가 초석 닦은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북공정’
    신문수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저서 :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이들의 답사기는 또한 19세기 초 신대륙을 둘러싼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각축과 정치적 이해관계, 서부와 인디언에 대한 미국인의 시각, 모피무역, 아시아와의 교역, 인디언 부족 간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근래에 와서 비로소 그 진가가 인정받고 있다.

    1970년 로버트 다우슨(Robert B. Dowson)이 쓴 ‘미국을 변화시킨 책’의 하나로 꼽힌 바 있는 이 답사기는 최근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 일기’를 편집한 게리 몰턴(Gary Moulton)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의 ‘국보’라고 할 만하다. 이 답사기로 인해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는 초석이 된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답사는 미국인의 의식 속에 ‘미국의 서사시’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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