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참여정부’ 최초 검거 남파간첩 정경학

외국 애인 대동하고 한국 침투, e메일로 北에 정보 보고

  • 이정훈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10-13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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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부터 친구와 애인 데리고 한국 드나들어
    • 방글라-태국-중국-필리핀으로 국적 세탁하며 ‘현지화’
    •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한국 여교사와 펜팔
    • 필리핀과 공조수사도 성공, 그러나 침묵하는 국정원
    ‘참여정부’ 최초 검거 남파간첩 정경학

    국정원으로부터 정경학 검거를 통보받은 필리핀 수사 당국이 정경학의 숙소를 수색하고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기로 무장했다.

    7월31일 한국을 떠나기 위해 서울 보문동 소재 한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다 검거된 북한 35호실 공작원 정경학(48)은, 방글라데시-태국-중국-필리핀인으로 국적을 세탁했을 뿐 아니라, 태국 애인을 대동하고 두 차례나 한국에 침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신동아’가 입수한 국정원의 국회 정보위 보고 자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공작원이 애인을 둔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정경학은 평양에 부인과 1남 1녀를 둔 유부남. 유부남 공작원이 3국에 침투해 애인을 만들고 그 애인과 함께 한국에 침투한 것은 새로운 공작 유형으로 보인다.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정경학은 6년간 태국에 거주하며 현지인이 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대 중퇴

    자료에 따르면 정경학은 모두 네 번 한국에 침투했는데, 1996년 3월20일 첫 번째 침투했을 때는 태국인 남자친구인 분미 빈 핫산과 동행했고, 1997년 6월2일 두 번째로 한국에 왔을 때와 1998년 1월29일 세 번째로 한국에 입국했을 때는 태국인 애인인 밍위왓 유핀과 동행했다. 그리고 네 번째 침투 때는 혼자 들어왔다가 검거됐다.

    그러나 자료는 정경학의 태국인 친구와 애인이 북한 공작원이거나 북한 공작 조직에 포섭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한국에 온 것이 8~10년 전의 일이고 한국에 살지 않는 외국인이라 조사를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후 정경학은 5년간 필리핀에 머물며 필리핀 사람이 되는 공작을 펴왔고 필리핀 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검거됐다.



    필리핀에서 그는 한국여성과 인터넷 펜팔을 하고, 북한의 35호실 본부에는 e메일로 보고했다.

    자료에 따르면 함경남도 함주 태생인 정경학은 18세 때인 1976년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영어) 2학년을 중퇴하고 인민군 내의 노동당 조직을 관리하는 총정치국 산하 적공국(敵工局) 전사(사병)로 입대하면서 공작 세계와 인연을 맺었다. 적공국은 말 그대로 적(한국)을 상대로 공작을 하는 부대로, 통상 ‘563군 부대’로 불린다. 인민군은 김일성의 지시로 1965년 5월부터 인민군 안에 있던 적공국을 총정치국 산하로 옮겼다고 한다.

    적공국의 평시 주임무는 한국군 동조자 포섭과 휴전선 부근에서 전단 살포, 그리고 심리전 차원에서 대남방송을 하는 것 등이다. 전시에는 국군으로 위장해 한국군 지역으로 침투해 군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적공국은 판문점에 나와 경비를 서는 부대로도 유명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 판문점에서 한국군 병사를 포섭하는 북한군 병사(송강호 분)가 나오는데, 바로 이들이 적공국 소속. 몇 년 전 판문점 우리 측 초소에서 김훈 중위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심리전 기술을 익힌 북한의 적공국 요원들이 판문점의 한국인 병사를 상대로 포섭을 위한 심리전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정경학은 2년간 적공국 전사를 하다 20세이던 1978년 군관 양성 학교인 ‘김일성정치대학’ 보위학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 그는 노동당 당원이 됐고 22세이던 1980년 11월 이 학교를 졸업하며 중위로 임관했다. 외국어에 소질이 있던 그는 적공국 해외공작부의 공작원이 됐다.

    그러나 군 조직인 적공국이 해외공작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으므로 1981년 적공국은 해외공작부를 해체했다. 그후 정경학은 적공국에서 공작원을 양성하는 지도원으로 활동하다 28세 때인 1986년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김일성정치대학 연구원 과정에 입교해 3년간 공부했다. 이러한 그는 33세이던 1991년 2월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해외공작기관인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에 선발됐다.

    북한의 공작조직은 크게 노동당 소속과 인민군 소속으로 나뉜다. 노동당 소속의 대남공작기관에는 대남전략을 짜고 남북대화를 벌이는 ‘통일전선부’, 한반도 해안을 통해 한국으로 침투한 공작원을 관리하는 ‘대외연락부’, 공작선 등을 이용해 대외연락부 공작원의 한국 침투를 지원하는 ‘작전부’, 그리고 제3국을 무대로 우회 침투하는 ‘대외정보조사부’가 있다.

    ‘블랙’ 요원으로 양성

    인민군 소속 공작기관으로는 총참모부 산하 ‘작전국’이 유명하다. 작전국은 잠수함 등을 이용해 특수부대원을 침투시킨다. 1996년 9월 일어난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도 작전국이 일으킨 것이다. 인민군 보위사령부는 주로 내부 쿠데타를 막는 대전복(對顚覆) 기관으로 활동하나 때에 따라서는 정보를 수집하는 공작을 펼치기도 한다.

    종종 국가정보원에 비교되는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 정부 기관으로 내부 방첩과 보안 그리고 공작을 병행한다.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유명한 인물은 1987년 KAL 858편을 폭파시킨 김현희와 필리핀 사람으로 위장해 12년간 한국에 머물며 학자로 활동하다 1996년 검거된 깐수(정수일 박사), 그리고 북한으로 납치한 일본인 하라타 다아키의 신분자료를 이용해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그의 여권으로 한국에 침투했다가 1985년 2월 검거된 신광수 등이 있다(김대중 정부는 신광수를 2000년 9월 북한으로 돌려보내,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커다란 반발을 산 바 있다).

    대외정보조사부는 정보세계에서 ‘블랙’으로 불리는 요원을 주로 양성한다. 정보원은 크게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뉜다. 화이트는 외교관 등 정부 조직원으로 위장해 다른 나라에 들어가는 정보기관원을 가리킨다.

    정보기관끼리는 공식·비공식적으로 협조할 것이 많다. 따라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정보기관은 요원들에게 영사나 공사 같은 외교관 직함을 줘 외국에 파견해, 그 나라 정보기관과 정보를 교류한다. 이러한 요원은 상대에게 신분을 밝히고 들어가는 것이라 ‘화이트’로 불린다.

    ‘블랙’은 상대국에 전혀 통보하지 않고 집어넣는 공작원이다. 이들은 유학생, 상사 주재원, 노동자, 심지어 언론사 특파원으로 위장해 들어간다. 블랙은 신분을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수년간, 때로는 십수년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지내며 현지인화를 시도한다.

    화이트는 외교관 신분인지라 면책특권이 있지만 블랙은 정체가 드러나거나 첩보 수집을 하다 걸리면 간첩으로 몰리고 두 나라 사이에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블랙은 앞으로 있을 특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침투시킨 인물인지라 이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대외정보조사부는 블랙 요원을 침투시키고 관리하는 일을 한다.

    1993년 1월 대외정보조사부는 35세인 정경학에게 주민등록 체계가 도입되지 않은 방글라데시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경학은 7개월간 무전 송수신법과 난수(亂數) 사용법 등을 익히고 7000여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 그해 7월27일 베이징으로 나와 8월5일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에 들어갔다.

    정경학은 그곳에서 만난 관광 안내원 모하메드 알리에게 150달러를 주고 알리 명의의 여권신청서에 자기 사진을 붙여 여권을 신청해 발급받는 데 성공했다. 방글라데시인 신분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모가 방글라데시인과 너무 다르고 방글라데시어를 익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15일 만에 철수했다.

    김정일 특별지시로 만든 문화연락실

    태국에는 화교가 많이 살고 있다. 1993년 8월말 베이징으로 나온 정경학은 대외정보조사부의 변복현 과장과 상의해 언어를 배우기 쉽고 화교가 많아 섞이기 쉬운 태국을 다음 침투지로 선정했다. 그해 9월초 정경학은 알리 이름의 방글라데시 여권으로 태국에 들어가 고정적인 월급을 받지 않는 국제직업학교의 관리인과 자동차 수리공 등으로 일하며 지냈다.

    ‘참여정부’ 최초 검거 남파간첩 정경학

    야후 e메일을 통한 정보보고(왼쪽). 검거된 직후 정경학이 작성한 남조선 침투 임무서(오른쪽).

    1993년말 정경학은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국 문화연락실 공작원으로 신분이 변경됐다. 문화연락실은 김정일의 지시로 한국의 군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장봉림을 실장, 대외정보조사부 과장으로 있던 변복현을 부실장으로 해서 갑작스럽게 만들어졌다. 지도원은 8명, 공작원은 정경학 등 40여 명이었다.

    문화연락실은 외형상으로는 인민무력부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김정일 서기실(비서실)에 직보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태국에 정착한 지 1년5개월이 돼가던 1995년 2월, 정경학은 농기구 등을 제작하는 태국 기업 ‘탄 붓(TARN BUCH)’사의 무역부장으로 취직해, 차량 및 주택과 월급을 제공받게 됐다. 그리고 6월엔 태국에서 사귄 분미 빈 핫산의 도움을 받아 가공인물인 ‘마놋 세림’ 명의로 호적을 얻는 데 성공했다. 12월에는 마놋 세림 명의로 주민증과 병력증명서, 여권을 발부받아 합법적인 태국인 신분을 확보했다.

    이러한 노력을 할 때인 10월, 그는 사업차 태국에 온 한국의 A실업 대표 손모씨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는 태국인 신분을 획득한 사실과 한국인 사업가를 만난 것 등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인민무력부의 문화연락실로 보고했다.

    한국 회사 직원 안내로 청와대 관광

    해가 바뀐 1996년 1월20일 북한에 들어간 정경학은 장봉림 실장으로부터 남조선에 들어가 유사시 인민군이 타격할 수 있도록 청와대와 원전, 통신기지국, 고속도로의 터널과 교량 등을 사진으로 찍어오라는 지시와 함께 5000달러를 받고 2월20일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3월20일 여권을 만들어준 태국인 친구 분미 빈 핫산과 함께 태국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을 통과해 한국에 들어왔다.

    다음날 그는 A실업의 손 대표를 찾아가 은가락지 등 선물을 주며 지방 관광을 부탁했다. 그리고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등을 다니며 전국도로지도, 관광안내책자, 필름 등을 구입했다. 3월22일 A실업의 손 대표는 직원 김모씨로 하여금 렌터카를 몰고 24일까지 정경학 일행에게 지방 관광을 하게 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때 정경학은 달리는 차안에서 천안 성거산에 있는 공군 레이더, 울진의 원자력발전소, 경부고속도로상의 터널과 다리 등을 촬영했다. 서울에 돌아온 다음날인 25일에는 A실업 여직원 김모씨의 안내로 청와대 관광에 나섰다. 그러나 겁이 나서 청와대 촬영을 하지 못하고 27일 서울을 떠나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태국에 와 있던 장봉림에게 필름을 넘겼다.

    1997년 3월 정경학은 다시 평양에 들어가 ‘용산 미군기지와 국방부 등을 촬영해오라’는 지시를 받고 5월말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2일 그동안 사귀어 놓은 태국 애인인 밍위왓 유핀을 데리고 마놋 세림의 여권으로 김포공항에 들어왔다.

    6월5일 정경학은 남산의 서울타워에 올라가 용산기지를 파노라마로 촬영하고, 7일에는 A실업의 안모 직원의 안내로 국방부 근처로 가 국방부를 촬영했다. 9일에는 광주의 5·18묘지를 방문하고 10일에는 고속도로변에 있는 한국군 탄약사령부 담장을 미군 부대로 잘못 알고 촬영하고 12일 태국으로 돌아갔다.

    정경학이 두 번째로 한국에 침투하기 6개월 전인 1997년 2월12일, 베이징에서는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북한은 공작기관을 상대로 한 전면적인 검열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장봉림이 숙청되면서 문화연락실도 폐쇄됐다. 그해 10월 2차 한국 침투를 끝내고 돌아온 정경학도 북한으로 소환됐는데 이때가 정경학으로서는 큰 위기였다.

    태국 주재 북 외교관 망명으로 드러나

    정경학을 만난 35호실(구 대외정보조사부)의 김 부부장(60세가량)은 “장봉림이 간첩짓을 했다. 당신의 신분도 노출됐을 수 있으니 더 이상 태국인 신분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정경학은 “나의 신원 사항이 남조선에 갔다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 내가 직접 남조선에 들어가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지 입증해 보이겠다”고 극구 주장해, 간신히 “남조선에 들어가더라도 절대 남조선 사람을 접촉하지 말라”는 지령을 받고 1만달러를 수령해 11월30일 태국으로 돌아왔다.

    ‘참여정부’ 최초 검거 남파간첩 정경학

    정경학의 필리핀 여권.

    큰소리를 쳤으니 정경학은 자신의 말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 두 달이 지난 1998년 1월27일 정경학은 애인인 밍위왓 유핀과 함께 마놋 세림 여권으로 김포공항을 통과했다. 30일 도보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 그는 다음날 바로 태국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그의 신분이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그 다음해 본격적으로 닥쳐왔다. 1999년 2월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던 A씨가 가족과 함께 탈출해 그해 8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북한은 A씨 일가족의 망명을 막기 위해 이들을 자동차에 태워 끌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부상자가 생겨 태국 경찰이 개입함으로써 북한이 A씨 일가를 납치하려고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태국과 한국에서 크게 보도됐다.

    국정원은 한국에 들어온 A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태국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해 8월엔 35호실 공작원으로 활동해온 리모(42)씨도 귀순해왔는데, 그는 “태국 여권을 가진 정 선생이 한국을 출입했다”는 첩보를 제공했다. 이로써 국정원은 태국 여권을 쓰는 정경학의 존재를 알고 그의 소재지를 쫓는 추적에 들어갔다.

    A씨가 망명했을 때 북한은 추가 망명자를 막고 A씨 망명을 막지 못한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정경학 등 태국 주재 북한 요원들을 북한으로 소환했다.

    정경학은 11월까지 평양에 머물다 베이징에 나가 남조선 정세를 수집하라는 지령과 함께 3000달러를 받고 베이징으로 나왔다. 베이징에서 그는 인터넷으로 한국 정세를 수집 분석해 보고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00년 5월 그는 중국인 브로커에게 1000달러를 주고 네이멍구자치구 사람인 이용(李勇)의 공민증을 입수했다. 그러나 북한은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해 정씨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베이징 생활 1년10개월째인 2001년 6월, 그는 35호실 김모 과장으로부터 필리핀으로 침투하라는 지시와 함께 1만달러를 받고 필리핀에 들어갔다. 2003년 4월 열대 과일인 ‘노니’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일하게 된 그는 길버트라는 필리핀인을 사귀었다. 2004년 4월 그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통해 ‘겔톤 카르시아 오르테가(1954년 11월27일생)’의 출생증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 출생증을 근거로 그는 여권, 사회안전증, 건강보험증 등을 줄줄이 발급받아 합법적인 필리핀인이 됐다.

    필리핀 침투 성공…그러나

    노니 농장에서 일할 무렵 그는 인터넷 펜팔을 통해 알게 된 한국에 있는 이모 여교사와 e메일을 주고받았다. 당시 한국은 이라크에 자이툰 부대 파병을 거론하고 있었다. 정경학은 이모 여교사에게 ‘왜 한국은 이라크에 파병하려고 하는가. 한국은 미국의 노예다’라는 내용의 e메일을 발송했다.

    방글라데시와 태국에 있을 때 정경학은 난수와 음어를 이용해 지령을 수수하고 보고했다. 35호실은 단파 방송을 통해 매월 2일과 17일을 기본일로 삼아 자정부터 30분간 정경학에게 지령을 내렸다. 이날 정경학이 수신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4일과 19일을 예비일로 지정해 같은 시각에 같은 부호를 송출했다.

    지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 정경학은 난수표와 암호표를 이용해 암호로 된 보고서를 만들어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에 전달했다. 태국 대사관에서는 다시 무전수가 이를 35호실로 송신했으므로 태국대사관 근무자들은 정경학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에 들어온 후부터는 영문 e메일을 이용해 지령을 수수하고 결과를 보고했다. e메일 송수신에서는 음어를 사용했다. 본부와 남조선 태국 라오스 등 몇몇 단어는 Hellen과 Nam Kyong, Other Place, Noodle Factory 등으로 정해놓고, 야후 e메일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은 것이다. 다음은 국정원 보고서에 소개된 2006년 7월19일 정경학의 음어 e메일 내용이다.

    “Dear Hellen. I will arrive in Nam Kyong on 27 July, Other place on 31 July, Noodle factory on 6 August. When I arrive in Other place, I will write you again. I want to meet you in Noodle Factory(본부에 보고함. 나는 7월27일 남조선, 7월31일 태국, 8월6일 라오스에 도착할 예정이다. 내가 태국에 도착하면 다시 메일을 발송하겠다. 라오스에서 다시 접선하기 바란다).”

    2006년 3월 정경학은 베이징으로 가 이모 지도원에게 필리핀인 신분 취득 경위를 보고했다. 이 지도원은 남조선에 들어가 장기간 머물며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며 각별히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1만달러를 제공했다. 필리핀으로 돌아온 정경학은 7월27일 켈톤의 여권을 갖고 인천공항에 입국했다.

    이 시기 국정원은 정경학이 필리핀인 켈톤의 신분을 얻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놓고 있었다. 7월27일 그가 한국에 들어오자 국정원은 바로 법원에 체포영장을 신청해 발부받고 7월31일 출국하려던 그를 검거했다.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람만 용의자로 체포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제약은 대공사건 수사를 어렵게 하는 요소일 수 있는데, 국정원은 오랜 추적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씨를 체포했다.

    자료 공개하지 않으려는 국정원

    정씨를 체포한 국정원은 이 사실을 필리핀에 통보했다. 통보를 받은 필리핀 수사기관은 정씨가 머물렀던 곳을 수색해 정씨가 사용해온 컴퓨터 등을 압수했다. 해외 공조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로써 정씨의 혐의는 더욱 분명해졌다.

    과거 같았으면 국정원은 언론을 불러 공작원 체포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료를 입수한 ‘신동아’가 보충 취재를 위해 수차례 접촉을 요청해도 피의사실 유포 혐의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으려 했다.

    북한 공작원은 애인을 대동하고 e메일을 이용해 정보 보고를 하는 등 변모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남북화해정책을 추구하는 노무현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안보 사항도 제대로 알리지 않으려 한다. 기묘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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