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청렴하고 인내심 강한 내향적 감정형, ‘냉철한 교활함’ 번뜩이는 현실감각 필요

  • 김종석 인천광역시 의료원장 mdjskim@naver.com

    입력2006-10-13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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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투사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집권당 의장으로 활약하면서 대권주자의 행보를 걷고 있다. 진보적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그가 최근에는 ‘경제가 최우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변신을 꾀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좌향좌에서 우향우로 돌아선 그의 변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3%에 불과한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김근태(金槿泰·59) 열린우리당 의장은 내향적 감정형이다. 내향적 감정형은 대개 조용하고 사귀기가 힘들며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대중의 인기를 끌지 못한다.

    내향적 감정형은 인내심이 강하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추위 배후 조종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는 22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 고문을 이겨냈다.

    “그들은 고문하기 하루 전에는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고문을 알리는 예고였고, 그 두려움을 견디는 것이 고문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발가벗겨 묶어놓고 전기고문을 위해 물을 뿌리면서 본인의 성기를 가지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모멸이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 부스러기

    내향적 감정형은 정서적으로 안정돼 좋고 싫은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때론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인상을 준다. 그는 항상 6시5분 전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처럼 갸우뚱하게 고개를 들고 묘한 웃음을 짓는다. 전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는 흥분했을 때나, 기쁠 때나, 중요한 말을 할 때나, 유머를 말할 때나 말투가 똑같아 오래 들으면 졸음이 온다.



    이런 유형은 위기에 잘 대처한다. 김근태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통해 날짜를 가늠하고, 고문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인상을 외우려고 애를 썼다. 고문의 진행과정이 어땠는지 소상하게 기억했고, 감옥에 가서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식을 거의 잃어가는 상태에서도 그는 전기고문을 받으며 몸부림치다 발뒤꿈치에 생긴 상처 부스러기를 모았다. 김근태는 상처조각을 아내에게 전했고, 이것이 고문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가 됐다.

    내향적 감정형은 인간에게 진실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집단의 윤리적 지주가 될 수 있다. 김근태는 모범적이고 우수한 의원에게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제정 첫 해인 1999년에 수상했다. 그 뒤로도 세 차례 더 상을 받았다. 이 상의 선정 기준은 정직성과 언행일치, 친화력, 유연성, 타인 배려라고 한다.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이며, 깨끗한 정치를 하려고 애쓴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내향적 감정형은 포용력이 있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대표로 구(舊)여권 출신인 김중권을 임명했을 때, 김근태는 속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과정에서 국민이 불안해하니 개혁 부작용을 보완하고 안정감을 주기 위해 김 대표를 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유형은 외향적 사고가 미숙해 소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한다. 그는 실제 재야 운동권에서 투쟁할 때 온순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될 수 있으면 큰 소리로, 좀더 과격하게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상례일 때 그는 성명서 문구에 ‘(전두환 정권) 타도’라는 두 글자를 넣는 데도 무척 신중했다.

    김근태에게는 내향적 감정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기보다는 민주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또한 말과 글이 고상하고 복잡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에 대해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을 만큼 언변이 부족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감각은 떨어지고 직관은 발달한 것 같다.

    “더디고 답답하지만…”

    내향적 직관형은 독립심이 강해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199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김근태는 파격적인 ‘내부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민경선제’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집 과정을 갖춰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재야시절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96년 4월 김대중 총재에게 “통일과 민생경제 등 정책을 연구하는 모임을 허용해달라”고 건의했다. ‘국민회의=김대중’이라는 인식 때문에 대선에서 국민적 지지를 끌어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총재가 “자칫 계파활동으로 비칠 수 있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결국 5개월 뒤 ‘열린정치포럼’이 결성됐다.

    내향적 직관형의 단점은 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던 2002년 3월12일 김근태는 느닷없이 최고위원 선거 때 불법 선거자금을 받았다고 고백해 충격을 줬다. 이 일로 당이 발칵 뒤집혀 그는 당에서 ‘왕따’를 당했다. 결국 김근태는 제주와 울산에서 꼴찌를 하고, 경선후보에서 사퇴했다.

    내향적 직관형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희망이다. 자신의 홈페이지 맨 위에도 ‘희망을 현실로’라는 구호를 적어놓았다. 정치권에 입문하면서 쓴 저서의 제목도 ‘희망의 근거’였다. 그는 “꿈꾸는 사람은 허황한 이상주의자나 몽상가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꿈이 있어야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격적 특성으로 보아 김근태는 융의 심리학적 유형 가운데 내향적 감정형이며, 제2기능인 직관이 발달한 내향적 감정직관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김근태는 포용력이 있고 대인관계가 원만해 갈등을 조정하고 화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기간 중 상충하는 가치와 이해관계를 조정해 타협하게 만드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재야운동을 할 때도 김근태는 보수-진보의 분류에 반대하고, ‘민주대연합론’을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하는 모든 세력이 연합해야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근태는 인사에 공정하다. 가까운 사람의 민원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민청련 시절부터 20년 동안 함께 했던 동지들도 국민의 정부 시절, 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주위에서는 ‘야박하다’거나 ‘자신의 평판만 챙긴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근태는 “내 단점인데 가능한 한 공정하게 임하고자 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그는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정책을 펼칠 수 있다. 김근태는 보건복지부 장관 때 ‘서열파괴 인사’로 강수를 두면서 부서 내부의 낡은 관행을 없앴다. 내부 불만과 동요에도 그는 강도 높은 개혁을 밀고 나갔다. 보건복지부에서 요직으로 꼽히는 국민연금보험국장, 국민연금심의관 등 주요 보직에 행정고시 26기 출신을 전면 배치했다. 행시 22기 몫으로 뒀던 자리였다. 김근태와 가까운 인사는 “능력보다는 기수 중심의 인사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면서 “누군가 이를 깨줘야 한다고 판단하고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겐 ‘미래지향적 개혁성’이 있다. 김근태는 개혁 이미지에 평화통일 이미지를 더해 ‘동북아시아의 평화통일 전도사’라는 입지를 구축한다는 거시적인 계획을 세웠다. “국민과 함께 개혁을 완성하고, 지역감정으로 분열된 동서를 화합시키고, 남북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21세기 정치 리더십은 새로운 사고(思考)를 가진 열린 리더십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더십 측면에서 그의 단점을 살펴보자. 그는 우선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2001년 정치학계의 전문가들과 중앙일간지, 방송사 정치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차기 대선 주자들의 정치적 전망 등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조사에서 김근태는 각종 항목에서 상위권에 올라 전체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도덕성’과 ‘민주개혁 의지’ ‘통일비전’ 등 3개 항목에서 1위에 올랐다. ‘지역갈등 해소’와 ‘경제적 비전’에서도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력’ 항목에서는 9위로 하위권이었다. 눈에 띄는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근태는 “다소 더디거나 답답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리더십은 박정희처럼 영웅적·카리스마적·패권적 리더십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그는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 11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유권자에게 이렇다 할 메시지를 던진 적이 없다. 유권자 중에 ‘김근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 여론조사기관 대표는 “김근태는 대중적인 관심사를 끄집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중적 말투로 표현하는 데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김근태 의장은 시간만 나면 서민층의 터전을 찾았다. 국민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다.

    셋째, 여러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다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김근태는 자기 목소리를 못 낸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를 결정하지 못해 망설일 때가 많았다. 토론을 너무 좋아하고, 결론을 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디지털 시대의 대중 정치인으로는 처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와, 이근안이다!”

    김근태가 대중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어떤 정치적 자산을 활용해야 할까. 김근태는 ‘고문’이란 단어를 연상케 한다. 고문을 이겨낸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는 고문을 견뎌낸 사람을 성격이 아주 강하고 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한 사람은 오히려 고문에 쉽게 무너진다. 고문을 이겨내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심이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했기 때문에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을 견뎌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근태라는 이름 석 자는 신비로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김근태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작가 조정래씨와 신화연구가 이윤기씨는 “우리가 고민만 하고 글만 쓰던 시절, 그는 온몸으로 지독한 고문을 당하며 시대의 아픔을 혼자 감내했다”며 “부채감 때문에 이제라도 그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김근태는 고문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완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억울한 것은 고문당한 경력 때문에 주변에서 강직하다 못해 ‘고집불통’으로 오해받는 겁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상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를 보면 고문이란 단어만 떠오르는가 봐요. 언젠가는 차에서 내리는데 저더러 ‘와, 이근안(유명한 고문 기술자)이다!’라고 하더군요.”

    좋건 싫건 고문은 김근태의 정치적 자산이다. 그는 고문 때문에 국민에게 ‘초인적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문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누구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 고문이다. 이 때문에 고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호기심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김근태는 고문과 관련된 인권 문제에 관해 인터뷰를 하자거나 강의해달라고 하면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고문 자체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 그리고 자신이 당한 고문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보려는 시각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문을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수치감이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내면의 갈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는 아직 이근안을 마음속으로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심리적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김근태가 당한 고통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강한 위력이 있다. 그에게는 이미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얘기다. 정치인에게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자산이다. 일반인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김근태는 해냈다는 사실. 이 때문에 국민은 그를 지도자로서 존경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정치지도자는 대중을 이끌고 가야 한다. 대중에게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그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흡인력을 지녀야 한다.

    한 기자가 김근태에게 “수시로 양심선언하고 위선의 정치를 폭로하며 도덕성을 강조하니까 때묻은 이들이 불편할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뇨, 저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욕심도 많고 남들에게 책임도 전가하고, 후회도 하죠. 스스로 채찍질하며 휘청거리면서도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정치인에게 도덕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믿음이 있는 정치,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려면 이게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자화상은 도덕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갖추고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치 행보에 박력과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재야 출신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에도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영혼을 지키면서 현실 정치에 몸담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고 있다. 나의 정치이념을 설파하고 세력을 넓히는 일이 솔직히 힘겹다. 돈과 추종세력이 있어야 하는 정치구조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인 2005년 5월, 김근태는 심리 분석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심리학 교수는 그에게 속물근성을 내보이며 대중성을 보완하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나도 욕심 사나운 생각을 적잖이 해요. 그 욕심 때문에 혼자서 얼굴이 벌개집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그 욕심을 들켜서 곤란하고 난감해합니다. 그런데 욕심을 더 내라고 말씀하시니, 이걸 어째야 할지….”

    이처럼 김근태의 도덕적 기준은 보통 사람의 수준을 넘어선다. 거의 성직자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가 연구한 결과를 보면 김근태를 좋아하는 집단에서 그에 대해 느끼는 이미지는 랠프 네이더나 최일도 목사와 같은 ‘사회참여 성직자’였다.

    정치인으로서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김근태는 항상 양심과 원칙을 강조한다. 정치적 술수나 테크닉, 또는 언론 플레이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정치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의원들과 스킨십이 부족한 점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식사라도 자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어느 기자의 말을 듣고 김근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적, 인정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사람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돈 때문에 못해요. 골프 치자고 하면 제가 돈을 내야 하는데 합법적 정치자금으로는 감당이 안 됩니다. 호텔에 모여 저녁 먹고 술 먹는 것도 어쩌다 할 수는 있지만 자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돈 문제는 투명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대로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때문에 마음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묘안을 생각해야 할 것 같군요.”

    김근태는 정치적 감각이 부족해 ‘뒷북치는 햄릿’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심사숙고가 지나쳐 정치적 타이밍을 놓치고 ‘한 박자 늦게 북을 치기’ 때문이다. 김근태도 자신에게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정치 현안이 있을 때마다 고민도 많이 하고 내심 해결책도 정리해놓는데, 겉으로 드러낼 때면 한 박자씩 늦어요. 독재 정권 때는 치고 나가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는데,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어째 선공을 취하기가 어렵더군요. 하지만 앞으로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서는 제 주장과 태도를 명확히 할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타이밍 감각과 핵심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을 가다듬어야겠지요.”

    “민주개혁세력은 무능했다”

    1994년 김근태는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를 창립해 제도권 진입을 준비했다. 그리고 1995년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의 말처럼 정치권에 입문한 뒤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김근태는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다 뒤늦게 신당에 합류했다. 당시 노무현 의원은 민주당 사수파로 남았다.

    2000년 민주당 정풍(整風) 운동 때도 김근태는 주저했다. 애초 당·정 쇄신이라는 군불을 끊임없이 지펴왔지만, 막상 정풍운동이 화두로 올랐을 때, 김근태는 미적거렸다. 반면 정동영 최고위원은 과감했다. 결국 정풍운동의 과실은 정동영에게 돌아갔다.

    2001년 9월 당내 ‘새벽21’ 소속 초선 의원들이 탈당 불사를 외칠 때 김근태는 ‘탈당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바른정치모임 소속 재선 의원들이 대책회의를 열 때도 ‘국정 쇄신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인사 쇄신이 포함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문제만 제기했다. 그러다 초·재선 의원들의 기세가 꺾인 뒤 김근태는 팔을 걷어붙였다. 이 때문에 또 한 박자 느렸다느니, 햄릿이 돈키호테로 변했다느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김근태는 차기 대권주자의 핵심 덕목으로 꼽히는 경제에 대한 식견이 높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시장경제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 줄곧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만 맡았다. 또 정보화 사회를 이끌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첫 당직으로 ‘전자정부구현 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김근태는 자신이 경제학 교수나 경제 관료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유학 가서 경제학을 공부해 국민을 계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그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정보화 사회’라는 3대 키워드에 맞춰 대권을 향해 차곡차곡 준비해왔다.

    지난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신임 당의장에 취임한 김근태는 전략적으로 우향우 노선을 취했다. 지난 6월11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김근태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복지 혜택을 늘리려면 경제성장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근태는 8월24일 경실련, YMCA전국연맹 등과 가진 정책간담회에서 “국민은 민주개혁세력이 지난 10년간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냈을지는 모르나, 먹고 사는 문제에는 무능했다고 평가한다. 잃어버린 10년, 활력을 못 찾은 10년이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끝내 못 읽은 ‘군주론’

    그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계·노동계와 대타협을 추진하겠다”며 ‘김근태판(版) 뉴딜’을 선언했다. 기업에는 출자총액제 폐지, 기업 총수 사면, 대기업 경영권 보호 조치 등을 약속했다. 재야운동권 출신 김근태가 이런 친(親)재계적 발상을 꺼내자 재계에서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김근태는 8월8일 “기업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고, 제도적 장치를 개선할 테니 경제인은 그 멍석 위에서 마음껏 춤을 춰달라”고까지 말했다.

    김근태는 내향적 감정형으로 포용력이 큰 것이 장점이다. 이념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좌우를 아우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김근태는 가장 진보적인 국회의원으로 꼽힌다. 김근태가 진보적 이념을 띠게 된 것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독재 정권과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독재 정권의 탄압을 심하게 받을 때는 인격의 연속성이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철저히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응어리가 생겼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보수=독재=수구냉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응어리진 마음의 상처는 독서에서도 나타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으려고 했는데 아직 완독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대여섯 번 시도는 했는데 아직 완독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군사독재 세력의 마인드를 알기 위해 ‘군주론’ 정도는 읽고 이해해야겠다 싶었다. 정치에 입문한 후에는 ‘군주론’을 감당하지 못하면 현실정치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잘 안됐다. 시간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혐오감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자신에게 ‘민주주의자’ 외에 ‘진보적’이라는 이념적 수식어가 붙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진보라는 라벨은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한국의 사회구조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김근태의 이미지를 특정 이념에 묶어둘 우려가 있다. 그는 학자들로부터 진보적 국회의원으로 꼽히지만 정작 김근태는 “나는 관념적이고 공허한 진보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한 ‘개혁적 구조조정’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근태는 최근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는 여기자들과 오찬을 하면서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우리를 어린아이로 알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좋아할 줄 아는데 우리도 이제 미국과 눈높이가 같다”며 “우리 정부가 미국에 대해 ‘꼬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변할 줄 모르는 내향형

    8월29일 김근태는 현재의 우리 사회를 ‘파시즘에 물든 사회’로 비유했다. ‘뉴딜 행보’의 일환으로 참여연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5·31 지방선거 참패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930년대 대공황을 전후해 유럽에서 파시즘이 대두한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그런 위험이 있다. 그것이 5·31선거에서 표현된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냉전수구세력의 대연합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고, 이는 한국 민주사회에 중대한 위협이다.”

    통합의 리더십은 내향적 감정형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김근태는 노선 투쟁이 격렬했던 재야 활동 기간에도 민청련 의장직을 맡아 이를 잘 조율했다. 정계에 입문한 뒤에는 시종일관 범민주세력 대연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합을 주장하면서도 그는 이념적으로 진보에 편향된 한계를 보였다. 보수세력을 수구냉전 세력으로 간주하고 통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어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냉전적이고 특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빼고는 다 손잡을 수 있다. 나는 민주개혁 세력의 연합을 주장한다. 민주당은 같은 개혁세력이다. 나는 개혁적이지만 민주화운동 때부터 시종일관 냉전수구 세력을 제외한 모든 세력이 손잡고 내부에서 경쟁하자는 넓은 대연합을 외쳤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당내 보수세력과도 융합하지 못한다고 한다.

    2001년 그가 민주당 최고위원일 때 민주세력결집론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는 “군사독재에 맞서 함께 싸웠던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협력관계가 회복된다면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들이 다시 힘을 합치는 ‘신민주연합’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김근태와 친분을 맺어온 우크라이나 문화원장 심실씨는 “김 장관은 감옥에 있을 때나 장관직에 있을 때나 한결같다. 험한 정치판에서도 변질되지 않은 사람”이라며 “성직자도 아내에게 존경받기 힘든데 그는 인격자로 존경받는 훌륭한 남편”이라고 말했다.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김근태는 1995년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재야 운동권 시절의 원칙과 양심을 지키며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김근태에겐 여전히 재야 운동권 투사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김근태에게는 변할 줄 모르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정치인은 대부분 외향적 성격이지만, 내향적 성격이라도 정치를 하면서 외향적으로 바뀐다. 그러나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향형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

    “평소에 잘 웃고, 울고, 화도 내는데 이상하게 카메라만 보면 주눅이 들고 긴장해서 표정이나 몸이 딱딱해집니다. 연기력이 부족해서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정치생활 10년이면 좀 공격적이고 동물적인 성향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저는 식물적인 특성을 못 버렸어요. 약간 느물거리게는 되었지만 말이에요. 여기저기 많이 찾아다니고 부딪치다보면 변하지 않을까요? 말투도 그렇습니다. 감정을 실어서 말하면 격해질까봐 숨을 고르고 신중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더러 너무 느리다고 하네요.”

    김근태도 나름대로 변해보려고 노력은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면 좀 튀어야 하는데, 그걸 제가 싫어합니다. 제대로 못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대중연설입니다. 오랫동안 지식인을 자임해왔기 때문에 일방만 강조하는 선동은 싫어해요.”

    김근태는 차세대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두루 갖췄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교수, 정치부 기자 등 전문가 집단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지지율 1, 2위를 다툰다. 그러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2∼3%밖에 나오지 않는다.

    특기 할 점은 정치부 기자 집단과 교수 집단 사이의 편차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정치부 기자들의 지지율이 교수 그룹의 지지율보다 훨씬 높다. 이것은 정치부 기자들이 김근태를 직접 대하면서 그의 장점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리라.

    ‘김근태 알리기’

    현재는 낮은 대중적 인지도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이 큰 숙제다. 이 때문에 김근태와 측근들은 ‘김근태 알리기’에 주력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있을 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소외된 이웃과 서민층이 살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다. MBC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밤에’에 출연해 어색한 포즈로 노래를 부르고, 맨손체조를 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은 모두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행동이었다.

    변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대 앞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다. 한 측근은 “이곳에서 20, 30대 젊은이를 만날 수 있고, 또 젊은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김근태는 공중파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대학가 미용실에 가고, 연예인 매니저 출신에게 자문하면서 ‘부드러운 남자’로 변신하려고 애쓰고 있다.

    김근태가 지금까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성격 탓이다.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탓이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포착하여 대중이 공감하는 메시지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김근태는 이 대목에 약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늘 한 박자 늦게 대처하고 만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정치인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외부 현실, 즉 정치적 상황에 쏟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성격이 외향화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볼 여유가 없다.

    엉뚱하게 푼 마음의 빚

    그런데 김근태는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외부의 정치적 현실에 쏟아붓지 못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내향적 성향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정치를 하고 있다. 김근태의 표현대로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내면의 세계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외부 현실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도덕적인 태도도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장애요인이다.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늘 검증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다보면 긴박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김종석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서울대 의대 외래교수, 인천의료원 신경정신과장

    現 인천광역시 의료원장

    논문 : ‘대통령의 성격유형과 리더십 스타일에 관한 연구’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법 경선자금을 고백해 결국 중도에 경선을 포기한 것이 그런 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일단 경선을 통과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런데 김근태는 엉뚱하게도 최고위원 경선 때 받은 불법 경선자금이 마음에 걸렸다. 이 때문에 경선에 총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이러니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현실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러한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대중 정치인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대중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정치 현실에 쏟아부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정치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치인은 도덕가나 성직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인은 결코 순수하다고 할 수 없는 대중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김근태 자신이 표현한 대로 ‘냉철한 교활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이 기사를 작성하는 데는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김아연 정보검색사가 다양한 자료를 검색,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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