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연애편지, 한 달의 동거, 딸, 그리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사랑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6-10-13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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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븐에 과자를 구워주고, 내가 바닥에 앉을 때면 늘 손수건을 깔아주던 사람. 그가 떠난 지도 50년이 흘렀다. 대신 그 시절 뱃속에 있던 딸과 지금껏 인생의 벗으로 동행한다. 그리고 이틀에 한 번, 그가 묻힌 산에 올라 그와 함께 보낸다.”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여기 오래 묵은 연애편지 두 통이 있다. 우선 이 편지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확실히 나에겐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 사랑하는 상대에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유해한 것이어서 결국은 둘 사이 불행밖에 더 초래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보세요. 이렇게도 안타까이 못 견디게 당신을 그리는 것이니 그 어디 하룬들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는 때를 가져볼 수 있어야지요.

    확실히 공부하는 놈에게 사랑의 감미란 유해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19일 중이 되는 계(戒)를 받게 되는 것이랍니다. 몇 해나 중노릇을 해 먹게 될 것인지 씨원스레 속계의 미련 활활 털어버리고 독실 중으로만 지낼 수 있을지. 결심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지금만 해도 당신과 마음놓고 만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제날이기에 떡방아 찧고 제 올리고 성찬에 떡도 먹었습니다. 오후 세 시 넘어 혹여 서울 문인들 오지 않나 싶어 용하 행자 아이와 함께 아랫마을까지 나려갔습니다. 마음 한구석엔 당신이 와주었으면 싶은 마음 떠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내일 배달날이니 학수고대합니다. 정 아모 소식 없다 하드래도 내 자존심이니 뭐니 다 뿌리치고 당신의 곳 찾아가야겠습니다. 홧김으로 해선 뺨을 갈겨놓고만 싶습니다…. (중략) 보름달이 휘황합니다. 왠일인지 까닭없이 눈물겨워집니다. 이럴 것이면 당신을 괜히 알아두었다 싶습니다.”

    1956년 8월15일과 20일에 씌어진 편지다. 이 편지를 쓴 이는 당시 오대산 월정사의 탄허스님 밑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문학평론가 김종후였다. 그는 이 편지를 쓴 지 일년 반 만에 사고로 죽었다. 사고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저렇게 김종후를, 뺨을 때리고만 싶은 그리움으로 내몰던 여자는 당시 낙산사에서 보육원 보모 노릇을 하고 있던 최옥분이었다. 김종후가 사고를 당할 때 이 편지를 받았던 여자의 뱃속에는 그들 자신도 모르는 새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유복녀로 태어난 그 아이가 지금 마흔아홉이 됐다.

    지난 50년간 두 모녀는 세상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았다. 재혼 같은 건 단 한 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50년 만에 김종후가 남긴 8편의 평론과 2편의 에세이를 수습하여 얼마 전 ‘김종후의 삶과 문학’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젊어 요절했지만 한평생 지극한 그리움으로 떠받들려진 김종후의 삶은 행복한가, 불행한가. 너무 일찍 사랑(결혼식을 치른 정식 남편이 되기도 전에 김종후는 세상을 떠났다)을 잃었지만 평생 한결같이 추억하고 그리워할 대상을 간직했던 최옥분은 불행한가. 행복한가.



    한평생 그리워한 남편

    저 의문을 풀자면 최옥분 모녀를 만나야 했다. 들끓는 볕을 머리에 이고 안광이 서늘하고 해맑은 청년 김종후의 사진이 든 책을 들고 나는 속초로 차를 몰았다. 인간의 행불행을 한 가지 잣대로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재단할 수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궁금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에 지상에 없는 한 남자만을, 그것도 결혼으로 묶인 사회적 관계도 아닌 한 남자의 죽음을 평생 자신의 것으로 껴안고 살아온 사람, 그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죽은 김종후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아무리 네 개의 외국어에 능통하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공부했던, 드물게 보는 한국 문단의 기린아였다고 해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재능과 열정을 아까와하고 너무 이르게 그를 잃은 한국문단의 불운을 안타까와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다르다. 스물여섯에 일을 당한 후 평생을 고스란히 밀봉한 채 살아온 최옥분, 그의 삶의 좌표는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뱃속의 아이라니. 요즘같은 개방된 시대에도 미혼모가 된다는 건 전 인생을 건 도전일 텐데 1950년대 한국사회에서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막막해지는 일이다.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김씨가 교통사고로 숨진 뒤 49재에 부인 최옥분씨(소복 차림)와 지인들이 모였다.

    속초 가는 길은 지난 장마로 곳곳이 통제되고 미시령 하나만 열려 있었다. 김종후도 서울과 속초를 여러 번 오갔다. 당시 미시령엔 길이 없었고 동서를 잇는 차도는 진부령 하나뿐이었다. 가는 길 내내 김종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평론은 선진적이었다. 지금 읽어도 손색없는 문제의식이고 논리 전개였다. 단어들은 야물고 문장은 우렁차다. 행간에는 얼마간 시니컬한 기운도 흘렀다. 동서양을 통틀은 방대한 독서량에 이십대 청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색의 깊이가 읽혔다.

    1958년 1월 초 현대문학사에 들렀다가 속초로 내려가던 김종후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우리는 어쩌자고 이렇게 전도유망한 젊은 문인들을 자꾸만 사고로 잃어버리는가. 오겠다던 날짜에 도착하지 않아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최옥분은 라디오 뉴스에서 사고소식을 듣는다. 홍천에서 버스가 뒤집혀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 우리가 요즘도 자주 듣는 그런 뉴스였다. 예감이 이상했던 그녀는 서둘러 홍천으로 달려간다. 김종후는 품안에 들어있던 원고 표지에 씌어있던 ‘김운학’이란 이름표를 달고 거기 눕혀져 있었다. 얼굴이 으깨져 신원을 알아볼 수 없었다. 원고더미만이 그를 증명했다.

    그 순간을 최옥분은 내게 이렇게 증언했다. “아무 생각도 안났어요. 머리가 아니라 다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불구가 됐다면 평생 곁에서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을. 그 생각만 자꾸 들더라고요.”

    오대산 월정사에서도 총무 희윤스님이 달려왔다. 똑같이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였다. 그들은 함께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한다. 그리고 유골을 낙산사로 가져온다. 낙산사는 그가 최옥분을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최옥분은 비로소 김종후의 아내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었다.

    소복을 입고 무표정하게 유골함을 들고 서있는 20대 중반의 처녀! 아니 뱃속에 두 달 된 아이가 자라고 있는 젊은 새댁, 그녀는 평생을 세상에서 사라진 사랑했던 남자와 더불어 살았다. 무덤을 네 번이나 옮겨가며 그의 곁에 철저하고 완벽하게 밀착했다. 이날 월정사 총무스님은 두 해 전 김종후가 평론으로 등단했던 현대문학사에 기별을 보낸다. ‘문학평론가 김종후 사망. 신문광고 요망함’.

    현대문학의 주간이었던 조연현은 나중 그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바로 2, 3일 전 현대문학에 들러 속초로 간다고 명랑한 얼굴로 떠났던 김종후의 별안간의 사망통지는 충격과 함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이 심상한 것이 아니라는 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2, 3일 전까지 건강했고, 둘째 전보의 발신인과 사망 원인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셋째 그의 사망 장소가 전보 발신처로 미뤄보아 목적지가 아닌 홍천인 점 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정주씨와 안수길형은 우선 홍천으로 달려가야겠다고 말했지만 무작정 가봐야 허사가 될 것 같아 우리는 어서 다른 소식이 당도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수도생활 택한 엘리트

    월정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김종후 ,그는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승려는 아니었다. 1955년 현대문학에 ‘김동인론’을 발표하면서 평론가로 등단한 그는 ‘동아일보’에서 특이한 모집광고 하나를 본다. 오대산 수도원이 경비를 일절 받지 않고 5년간 불교연구를 할 대졸이상의 인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양철학을 철저하게 공부하고 싶어서” 그는 거기 응시한다. 아니 어쩌면 5년간 숙식제공이란 단서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28세의 김종후는 서울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고 열 시간이나 걸려서 월정사 입구인 진부에 도착한다. 거기서부터 월정사까지는 도보로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최옥분 할머니가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56년 4월 7일. 3시에 월정사 도착. 눈이 나리다. 중도에 웬 집 마루에서 김밥을 먹다. 모두 반가히 맞아주다.”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김종후씨(왼쪽)와 그의 스승 탄허스님. 김씨는 ‘레이디 퍼스트’가 몸에 배인, 시대의 엘리트였다.(왼쪽) 최옥분씨가 간직하고 있는 김씨의 신분증과 학생증.(오른쪽)

    당시 월정사엔 젊은 승려,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일반인이 20여 명 모여 불교 경전과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다. 삭발에 채식하고 승복을 입은 채 새벽부터 밤까지 승려와 똑같은 생활을 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을 했다. 이름은 오대산 수련원. 월정사 조실인 탄허스님이 한국 현대불교를 이끌고나갈 지식들을 키우려고 설립한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수도원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다. 수도원의 열악한 재정이 첫째 이유였고 월정사 안에서 일어났던 비구승과 대처승들의 대립, 원생들과 승려간의 갈등 등도 이유가 됐으리라 짐작된다. 그 무렵 월정사는 6·25전쟁의 참화로 절 전체가 타버리는 상처를 입는다. 남아 있는 김종후의 사진에서 그가 기대선 집은 유리창이 끼워진 현대식 건물이다.

    수도원의 중심과목은 화엄학이었으나 동시에 사서삼경과 노장학과 주역도 배웠다. 강의는 주로 조실인 탄허스님이 맡았고 원생들이 돌아가며 하는 순강(巡講)이란 것도 있었다. 의대생, 법대생뿐 아니라 외국유학을 다녀온 이들도 있어 수도원의 강좌는 문학 의학 법학을 비롯 영어 노어 일어 등의 외국어도 포함됐고 각자 살아온 경험을 나누는 시간엔 ‘수풍댐 건설공사의 내력’ 같은 것도 있었다. 지금 살펴봐도 불교인재 양성만이 아니라 나라 안 최고 지성을 길러내기 위한 최상의 커리큘럼인 게 확실해 보인다(김종후가 맡은 특강 제목은 ‘서구와 한국의 현대문학 개관’이었다).

    월정사에서 공부하면서 김종후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성불론(成佛論)을 자각한 것 같다. “이제 나는 희미하게나마 나의 힘, 인생의 구경목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깨닫는 데 여호아든 크리스트든 관여시킬 일이 아니다. 자력으로 해야 한다. 내가 성불했을 때 나는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멸한 여호와가 될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었고, 자신이 입산한 이유를 “사회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고 자부한다. 수도(修道)는 도리어 사회생활의 의의를 찾기 위함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신념과 힘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 바로 입산이다”라고 정리한다.

    정신적으로 수도원 생활에 이토록 만족했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배고픔이었다. 이건 차라리 희극이다. 탄허스님은 동양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자신의 절로 모여든 젊은이 열두엇을 배불리 먹일 밥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불교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은 좋았지만 때는 전쟁 직후, 공부하겠다고 산사(山寺)에 모여든 엘리트 젊은이들에게 감자 이상을 제공할 힘이 없었다.

    철학과 과학의 결합 시도

    “식량이 떨어져서 아침은 죽 점심 저녁은 밥알이 보일둥 말둥 하게 감자만을 먹습니다. 감자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 주식으로 먹자니 싫증이 나는군요. 아침 죽은 굶고 점심 저녁 깡보리밥에 창자가 어떻게 뒤끓는지 영양부족에 현기증은 나날이 다해만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태를 5년은 고사하고 단 5개월을 버티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김종후의 이 편지는 지금 읽으면 기막히다. 게다가 그는 부잣집 도령이었다. 감자밥에는 설사를 하는 예민하고 고급한 위장을 가졌으며 매일 목욕물을 데워 목욕을 해야 하는 부르주아였다. 집에서 과자를 구워먹고 신선한 해산물을 상시로 즐기던, 당시로는 최상류의 의식주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월정사의 고단한 생활방식에 적응하기가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1928년 함경남도 청진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독립운동 때문인지 만주로 떠나셨고 어머니만 혼자 남아 큰 어장을 관리하는 집안이었다. ‘겐자쿠’라는 대형 어선을 8척 가졌는데 겐자쿠 하나에 작은 배 7∼8척이 딸리는 게 보통이었으니 청진에서 제일가는 거부였다. 넷째아들이었지만 정깊고 섬세해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청년이었다. 나남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청진 교원대학 박물과에 진학한다. 박물과는 요즘말로 하면 생물과인 모양이다.

    “그 사람이 청진대학에 다닐 때는 러시아로 종마 교배 실험을 하러 가기도 했었대요. 전쟁 후에, 저와 같이 사는 동안에는 유한양행인가 하는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남미에 가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왔었어요. 독사의 독(毒)을 이용해서 백신을 개발하는 일이라는데 날더러 어떡할까고 물어요. 위험한 일 같아서 가지 말라고 말렸지요. 그때 가라고 했으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 사람이 말하던 실험실 얘기가 떠올랐어요”라고 최옥분 할머니는 기억한다.

    졸업 후엔 함남 단천에서 잠깐 중학교 생물 교사 노릇을 하다 거기서 6·25를 만난다. 전쟁은 그의 삶을 완전히 부셔놓았다. 엉겁결에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다. 물론 처음엔 짧은 피난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남으로 내려오는 김종후에게 어머니는 급한대로 끼고 있던 팔찌와 반지를 벗어준다. 한동안은 그걸 팔아 고생없이 지냈다. 청진 제일가는 갑부의 아들이니 피난길도 처음엔 다른 사람에게 목도리니 외투니를 벗어주고 여관 잠을 자며 목욕도 하는 식의 여유로운 것이었다.

    영어 원서도 한 가방 짊어지고 다녔을 정도였다. 패물이 떨어질 때쯤 돌아갈 길이 열려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선이 밀고 밀리면서 북으로 돌아갈 길은 완전히 끊겨버린다. 책상물림의 청년이 전쟁통의 객지에 돈 한푼없이 버려졌으니…. 험한 일이라곤 당해본 적 없던 온실 안 청년이 전쟁과 실향과 극빈에 동시에 맞닥뜨렸다.

    그에게 세상이 얼마나 가혹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온갖 일을 했던 것 같다. 머슴살이와 비렁뱅이에서 통역관과 교사까지. 그때 이미 김종후는 러시아어와 일어와 영어의 3개 국어에 능통했고 중국어도 웬만큼은 할 줄 알았다. 더구나 드물게도 자연과학을 공부한 학구적 기질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어처구니없는 소용돌이 앞에 개인의 능력이나 희망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그는 전쟁통에도 진학하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러나 통역이니 머슴의 대가로 근근이 모은 돈을 믿었던 사람에게 몽땅 떼이고 만다. 그러면서 김종후는 세상과 사람을 새롭게 배운 것같다. 모멸과 치욕과 절망 속에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기면서 그는 자연과학도에서 서서히 문학과 철학 쪽으로 공부의 방향을 바꾸게 된 것같다.

    세상과 사람을 새로 배우다

    “그 사람은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했어요. 나와 만나 낙산사 아래를 같이 걷다가도 저기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걸어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아이처럼 울먹여요. 집에서 과자를 굽는다는 말도 그 사람에게 처음 들었어요. 나중에 아이에게 친가를 찾아주려고 저는 백방으로 노력했어요. 청진에서 내려온 친척들을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했고…, 곧 통일이 될 줄 알았지요. 청진 본가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날이 금방 올 줄 알았다고요.

    여기 속초에는 가족을 함경도에 두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통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 사람의 맏형, 그러니까 저 아이의 백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었답니다. 해방되던 해 독일로 떠나는데 부두에 청진시내 사람들이 구름같이 환송을 나왔더라지요. 6·25 전에 형이 서울에 들렀을 땐 반도호텔에 몇 달 동안 묵었는데 어머니가 원산 루씨여고 교사를 데려와서 선을 보였다고도 했어요.

    김종후는 유복하게 길들여진 자신의 버릇을 민망해하고 거추장스러워했다. 진작 고생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전쟁도 수도원도 그토록 힘겹지는 않았을 텐데 한탄하곤 했다.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했던지는 몰라도 전쟁이 끝나자 이 귀족 청년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입학한다. 당시 그 학교에는 김동리 서정주 백철 곽종원 등 1950년대 한국 문학의 주역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의 지도교수는 평론가 백철이었고 인간적으로 친밀하기로는 안수길과 서정주 선생 쪽이었다 한다.

    “특히 안수길 선생에게는 부모 같은 정을 느낀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제가 서울로 안 선생을 뵈러 간 적이 있어요. 돈암동 어름에서 방 두 칸짜리 가난한 살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이미 병색이 짙으셨는데 지아비없이 배가 불러진 저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시더군요.”

    합리적인 백철 선생은 처녀 최옥분에게 아이를 떼어내고 새 인생을 시작하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최옥분은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새 인생이니 재혼이니는 꿈속에서도 떠올려보지 않은 금기였다. 대신 강철같이 자신을 무장했다. 여자다운 표정조차 버렸다. 기꺼이 중성적으로 살기를 택했다. 자그만 유치원을 경영하면서 스스로 쓸쓸히 고립되기에 속초라는 도시는 여러모로 알맞춤한 동네였다.

    “그 사람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무섭게 했던 사람인가는 제가 잘 알아요. 전에 자연과학을 전공한 것이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데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고 기뻐하던 것도 눈에 선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자연과학의 기초인 공리(公理)나 원리(原理)를 발견했다면서 흥분했어요. 저는 그저 놀랍게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지요. 정신과 물질을 둘로 가를 게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도 했어요.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닌 것을 자신이 증명해 보이겠다고도 했죠. 서른 해 짧은 생애 동안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했던 사람인데 문단에도 학계에도 실뿌리조차 내리지 못하고 가버렸으니…,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을 잊고 딴생각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월정사에서도 쉬지 않고 왕성하게 글을 쓴다. ‘위기의 해명과 극복’ ‘민족문학 소론’ ‘동양의 휴머니즘’ ‘유불선 삼교 계합의 종지(宗旨)’ ‘노자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잇달아 현대문학에 발표한다. 하나같이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글들이었다. 죽은 후에 발견된 원고는 ‘(문학적 견지에서의) 장자론’이었다. 그가 남긴 장자론을 나는 밑줄 그어가며 꼼꼼히 읽었다. 이전 어느 장자론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1950년대 중반에 씌어진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글에 인용되는 작가들의 면면에서 당시 이렇게 많은 서양 책이 유통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고 놀란다.

    50년 전의 통찰

    무엇보다 그는 철학이 과학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근세과학을 자연과학으로 특색지우고 전형화, 유형화시킨 것은 이 시대의 형이상학에 의하여 발견되고 확립된 자연의 개념의 지나지 않는다. 그 근본 범주는 확실히 근세의 형이상학이 처음으로 확보한 존재론에 유래했다. 19세기 초까지 과학은 아직 형이상학과 구별치 못할 자연과학이었으며 자연과학과 구별치 못할 형이상학이었다…. 철학과 과학은 원래 해로동혈(偕老同穴)을 계약한 부부였다.

    과학이 본래 의미로 Phisika(자연학)로 형성되는 때 철학은 Meta-Phisika(초자연학)가 되고 말았다. 철학이 몸을 던져 기진하고 있을 때 인간은 거기서 무의지 절망 허무를 보고 또 과학은 과학대로 인간의 행복을 위한 의도로 발전된 것이 되레 인간정신을 궁핍케 하고 인간의 생명을 노리게끔 되었다. 쌍방이 서로 협량하기 때문에 철학은 철학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비명을 올리고 있다. 현대의 위기는 실로 여기에서 왔다….”

    김종후의 ‘위기의 해명과 그 극복’의 한 부분이다. 그는 이 글에서 게오르규와 사르트르와 카뮈와 손창섭의 소설들을 다채롭게 인용한다.

    “과학은 별종의 힘(철학 종교 도덕 포함)에 의하여 도와지지 않으면 안 되고 철학은 과학에 의해 촉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은 철학의 육체가 되고 철학은 과학의 두뇌가 돼야 한다. 위대한 기능이란 본질적으로 종합적이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빌려온 요소를 합성하여 더 많은 기능을 가진 건축을 완성한다.

    자연에는 원리적으로 미래란 없다. 자연에는 무시간적인 현재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장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희망이나 결의를 말함에 지나지 않는다. 때는 왔다. 우리(철학인 예술인 종교인 역사가)가 방금 닥쳐오는 과학의 위세를 깨닫자. 닥쳐오는 폭풍에 창구멍을 떼고 앉아있는 예전 규방색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김선달에게 대동강을 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일관된 주장이자 충고다.

    최근에 출판된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은 너무도 멀어져버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하고 둘의 뿌리는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데 합의한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고민과 통찰을 50년 전 김종후는 이미 혼자서 하고 있었다. 젊은이다운 흥분과 열정에 차고 약소국 지식인으로서의 오기와 결기로 번뜩이는 그의 글, 그러나 당시엔 아무도 김종후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아깝게도 김종후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옥분에게는 달랐다. 김종후는 최옥분의 우주이고 영웅이었다. 이제 할머니가 돼버린 평론가 김종후의 애틋한 사랑, 그녀는 속초 인근 고성군 토성면의 단정한 집에 잔디와 꽃을 가꾸면서 살고 있었다. 평생 속초를 떠나지 않았다. 방송국 직원을 거쳐 30년 넘게 유치원을 경영했다. 지금은 딸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하루 두어 시간만 아이들과 어울린다. 그녀의 딸 김해련도 혼인하지 않고 어머니 곁에 살고 있다.

    이틀에 한 번 남편을 본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서울로 유학했지만 결국 속초로 돌아왔다. 둘 다 몸가짐이 반듯하고 단정하다. 말수가 적다. 실내는 정갈하고 텃밭과 꽃밭도 티없이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뒤뜰 소나무 위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호젓하게 들릴 뿐이다. 홍익대학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했다는 따님 김해련은 베란다에서 책을 읽고 최 할머니와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단단한 입매와 가라앉은 눈빛을 가진 그녀, 긴 여행 끝에 마주앉았지만 최옥분 할머니에게 막상 질문을 건네기는 쉽지가 않았다. 내 말이 얄팍한 호기심으로 비쳐질까 겁이 났고 행여 자존심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웠다. 아픈 기억을 헤집게 될까봐도 두려웠다.

    “그동안 나는 너무 오래 갑옷을 입고 살았어요. 사람들에게도 통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스스로 허물어질까봐 경계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그 사람이 그해 겨울 서울로 갔던 건 현대문학의 조연현 선생에게 오대산 수도원 동료였던 김운학 스님의 평론 원고를 갖다주려던 것이었어요….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운학스님은 낙산사 홍련암에서 묵언기도 중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품안에서 자기 원고가 나왔는데도…, 기도중이라고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더군요. 그게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다 용서해도 좋았을 텐데…, 내가 그 분을 오랫동안 미워하면서 살았어요. 생각하면 후회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최 할머니는 재작년에 머리가 쏟아질 듯 아픈 병을 얻어 기억력이 급작히 나빠져버렸다. 뭘 생각하려면 한참을 머릿 속 서랍들을 뒤져내야 했다. 그러나 풀려나온 이야기는 많았다. 애틋했다. 아프고 안타까웠다.

    최옥분 할머니는 남편 김종후의 무덤을 십여 년 전 집 가까이로 옮겨왔다. 바로 코앞이다. 걸어서 십분 거리, 이틀에 한번쯤은 반드시 거기 올라가본다. 사고 이후 그녀는 남편의 유골을 여러 차례 옮겼다. 처음엔 낙산사에 백일 동안 모셔뒀다가 친정어머니가 계신 홍천 어느 절로 옮겼다가 딸이 서울 유학 중일 때는 성묘 다니기 쉽도록 다시 김포에다 모셨었다.

    십수년 전 바다가 보이는 이곳 고성군에 양지바른 야산을 조금 샀다. 생전에 남편이 그토록 바다를 좋아했고 오징어잡이 배라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어했기에 고향 쪽을 바라보며 안식하게 하고 싶었다. “저승에서나마 바다를 실컷 보게 해주고 싶었어요….”

    정갈하게 빗돌도 세우고 석수도 앉혔다. 무덤이 즉 남편의 존재증명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는 임시조치법이 발효될 때가 있었다. 최 할머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얼른 김종후의 호적을 새로 만들고 자기 이름을 그 곁에 올려 혼인신고를 마친다. 딸의 출생신고도 잇따라 한다. 그래서 딸은 아버지의 성 ‘김(金)’을 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사망신고를 했다. 그랬으니 그들은 엄연히 법률적인 부부다. 다만 사별했을 뿐. 그리고 그 시기가 조금씩 어긋났을 뿐. 사실 최 할머니는 통일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다. 불원간 딸을 데리고 청진의 시댁으로 인사 갈 날이 올 줄로 믿었다.

    “임신 사실을 그 분이 아셨나요?”

    “아니요. 성품이 정다워서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아이 얘기는 없었어요….”

    “무슨 얘기를 주로 하셨나요”

    “현대문학의 기본 토대를 서구적인 것에서 찾으면 안 되고 동양적인 것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같은 문학얘기를 주로 했어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종후는 최옥분을 만나 다시 예전 청진시절의 따스함과 안락을 회복한다. 결혼식을 하게 되면 하객들 답례품으로 어떤 케이크를 줄까를 의논하고 주례는 백철 선생님을 모시자는 합의도 끝내놓은 상태였다.

    “내가 빨래를 하러 가면 저만치서 그 사람이 따라와요. 옷이 승복이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그저 멀리서 내 쪽을 향해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사랑의 밀도는 높아지는가. 그 사랑법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가. 나는 눈부시게 최옥분 할머니를 바라본다.

    보육원에 삶을 정착하다

    “우리 보육원이 소풍을 가는 날도 멀리서 따라왔어요. 한번은 내가 물에 빠졌는데 얼른 와서 손을 내밀더라고요. 내미는 그 손을 안 잡고 나 혼자 일어섰어요…. 다 후회가 돼요. 그때 그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을 걸…. 밤에 만나면 내가 앉는 자리에 꼭 손수건을 깔아줬어요. 당시에는 그런 짓 하는 남자들이 잘 없었거든요. 한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못봤어요. 뭐든 그렇게 맛있게 먹고, 행동 하나하나가 딴 사람과 달랐어요. 일일이 여자에게 속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어요….”

    강릉 출신의 최옥분과 청진 출신의 김종후를 낙산사에서 만나게 만든 운명, 어쩌면 그 배경을 위해 6·25전쟁이란 무대장치와 숱한 우여곡절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전쟁나던 해 최옥분은 강릉사범에 막 입학한 명랑하고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가게를 꾸리고 계셔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사범학교에 입학하려면 보증인이 세 명 필요했는데 제가 강릉 시장님에게 직접 찾아가서 보증을 받았어요. 어머니가 옷을 한 죽하고도 일곱 벌을 팔아서 입학금을 내 주셨던게 기억나요.”

    강릉은 38선이 가까워 전쟁나고 3일 만에 금방 인민군이 쳐들어 왔다. 남학생들은 군대에 간다면서 대관령을 넘어가고 여학생들은 장난스럽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전쟁이 뭔 줄도 몰랐다.

    “우리는 피난도 안 가고 광목을 마름질해서 자꾸 태극기를 그렸어요.”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최옥분 할머니는 6·25전쟁 후 50년이 넘도록 속초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식구들이 모두 피난을 가고 없었다. 그녀도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갔다. 피난길에 열여덟 처녀는 평생 잊지 못할 두 가지 장면을 목격한다. 그건 이후 최옥분의 전 인생을 암암리에 지배했다.

    “비행기에서 마구 기총소사를 해댔어요. 일각대문 문설주에 어떤 한 사람이 달려가 매달리니까 사람 수십명이 거기 따라가서 우르르 붙어요. 흡사 여왕벌을 따라 나뭇가지에 붙는 일벌들 같이. 군중심리라는 게 그렇게 어리석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흩어지지 않고 왜 다들 그렇게 모여 있었던지.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총을 맞았어요. 그중에 아이 업은 엄마가 하나 있었는데 엄마는 뒷머리에 총을 맞아 피투성이가 됐는데 업힌 아기는 엄마를 부르며 자꾸 집에 가자고 울어대요. 그 자리를 떠났는데 우는 아이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드라고요.”

    “또 한번은 제천인가 어디서인데 한 부인이 전봇대에 아기를 포대기로 꽁꽁 동여매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염없이 우는 거예요. 곁에는 노인 한 분이 누워있는데 둘 중 하나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누구를 데리고 갈까 망설이다 결국 아기를 전봇대에다 묶어놓기로 한 건가 봐요. 그러면서 ‘너는 누가 데려가서 키워줄 거다, 그러나 할머니를 버려두면 금방 돌아가실 거다, 그러니 용서해라 아가야’ 하면서 그리도 섧게섧게 울어요. 참 고상한 부인이었어요. 내 발이 그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상당한 지식층의 부인이었을 거예요. 그 두 장면이 전쟁이 끝나도 두고두고 잊히지를 않는 거예요.”

    휴전이 되자 사방에 전쟁고아들이 넘쳤다. 동국대 총장하던 정두석 스님은 낙산사에 내려와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을 설립했다. 보모를 구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전쟁 중엔 태백중학교 교사를 하다 강릉에서 금천유치원에 나가고 있던 최옥분은 한달음에 낙산사로 달려간다. 동해안 일대에서 모여든 고아 108명, 거기서 그녀는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가르쳤다.

    목욕, 입맞춤, 새벽

    보육원 개원 소식에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간 건 아마도 그 전쟁 중의 그 장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갖은 정성을 들였다.

    “학교에 가면 우리 고아원 애들이 공부를 제일 잘했어요. 시간날 때마다 모아놓고 제가 공부를 시켰거든요.”

    나중 낙산사 보육원 출신 아이들은 정부부처 공무원, 농협직원 등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일이 많았다. 불운한 아이들이라 사고로 죽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 최옥분은 늘 궂은 일 수발에 앞장섰다. 어머니가 돌아가셔 어린 동생 셋을 책임져야 했고 집에는 늘 고아원 아이들이 한둘씩 와서 얹혀 살았다.

    김종후의 일기에 최옥분이 처음 등장하는 건 1956년 5월이다. 수도원 교과에 ‘사찰 순례’라는 과목이 있었다. 탄허스님과 오대산 수도생 전원이 대관령을 넘어 낙산사를 찾아왔다. 둘은 거기서 우연인 듯 마주친다. 둘 다 전쟁을 막 겪었다. 육친과의 이별을 치렀고 젊었고 외로웠다. 눈앞에 산더미 같은 할 일을 두고 있는 것도 같았다. “9시 버스로 낙산사 출발. 동해안 풍경에 고향을 그리다. 주문진 피란 당시를 회상. 낙산사 탁아원 보모 최옥분, 밤에 의상대에 나와앉다.”

    그날 최옥분은 그가 고시공부하러 절에 온 법대생이거니 했다. 절에 온 학생들과 의상대에 가서 얘기를 나누는 건 전에도 가끔 있던 일이었다. 나는 이글을 쓰다말고 속초로 전화를 걸어 그날 김종후 선생은 어떤 인상이었냐고 할머니에게 다시 한 번 물어봤다. 그녀는 전화선 너머에서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그냥, 보통 사람하고 별반 안 달랐어요. 하도 오래 돼서…, 아이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지난 번 속초에서와 비슷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김종후에게 그녀는 특별했다. 다녀간 뒤로 매일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아니 우체부가 사흘에 한 번씩 왔으니 사흘에 한 번씩 세 통의 편지가 손에 들어왔다. 6월 말 일기에 “마음속이 자꾸 서러워진다”는 구절이 나오고 7월 초에 “밤 참선 후 옥분이와 두 시간을 보내다. 입맞춤”이 등장한다. 7월 말에는 “낙산사행. 목욕물을 끓이래서 밤에 목욕하고 입맞춤. 새벽까지 이야기. 학원에서 옥분이 이불덮고 자다”가 이어진다.

    사고무친한 그에게 찾아온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기로에 선다. 절에 남아 승려가 되어야 할지 속세로 돌아가 결혼을 해야 할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탄허 스님은 그에게 승려가 되기를 권했다. 그도 반승낙은 해놓은 상태였다. 그 무렵에 찾아온 사랑이었으니 맨처음 일기에 드러난 고뇌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최옥분보다 네 살이 많았다. 그러나 애인 앞에서는 아기처럼 변했다. 북의 어머니가 보고싶다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대고 울곤 했다. 최옥분은 공부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게 싫어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짐짓 냉정을 가장했다. 이쪽에서 한번도 애정을 고백하지 못했던 게 지금 그녀에겐 가장 큰 한이다. 당시엔 그를 갈등에 빠지게 만든 것이 자기인 것이 싫었다. 그래서 도망치려고만 했다. 실제 그를 피해 낙산사를 단호하게 떠났다. 속초로 내려와 소식도 끊어버렸다.

    그대 곁에 묻히리라

    낮에는 유치원 교사를, 밤에는 직물기를 들여놓고 편물을 했다. 나이는 이미 스물넷. 당시로선 늙은 처녀였다. 어린 동생 셋을 키우는 게 그녀의 과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김종후가 속초집으로 쳐들어온다. 백철 선생 내외와 함께였다. 얼떨결에 그를 받아들인다. 얼떨결이라고? 운명은 늘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아니 실은 앉을 때 바닥에 손수건을 깔아주던 그가 늘 그리웠다. 그가 찾아왔다는 것은 그간의 번민과 갈등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승려의 길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세속 인간으로 귀환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의 동거생활이 시작됐다. 꿈 같았다. 그리고 한 달, 어처구니없는 버스 전복사고 발생,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 두 사람 인생의 각본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최옥분 할머니와 마주앉아 새벽이 오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50년 전에 죽은 사람을 얘기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그녀의 얘기는 워낙 조용했다. 말수가 하도 적어 말 사이의 휴지(休止)가 더욱 길었다. 할머니도 나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푸른 새벽빛 속에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문학적인 재능이 조금도 없어요. 그 사람이 왜 나를 선택했던지가 궁금해요. 나를 선택한 게 잘못돼서 그런 운명이 되지나 않았나 싶고. 생각하면 늘 미안해요. 그때 남미로 가라고 했으면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그걸 말렸거든요.”

    가당찮은 말씀이라고 나는 펄쩍 뛰었다. 차라리 남겨놓고 떠난 그분을 원망을 해야지 미안하다니 무슨 말이냐고!

    “원망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애한테도 미안해요. 내 고집 때문에 힘들게 만들어버린 것 같애서.”

    따님의 이름 ‘바다 해, 연꽃 연’은 아버지의 수도원 친구셨고 사고 당시 묵언 기도 중이셨던 그 운학스님이 지어줬다. 동국대학에 계실 때 운학스님은 가끔 해련을 불러 용돈도 주고 아버지를 추억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분을 원망했지만 저는 그 어른이 싫지가 않던데요.”

    따님 김해련이 밝게 말한다. 딸이 어렸을 때 어머니 최옥분은 ‘너희 아버지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느 날 아이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듣는다.

    “우리 엄마는 아빠가 미국에 가셨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죽었어. 난 네 살 때부터 알고 있는데 엄마만 그걸 몰라.”

    이제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어간다. 허망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러나 너무 많은 할 말은 되레 입을 다물게 만든다. 입을 다물고 밝아오는 세상을 조용히 응시한다. 기쁨이 가득 차오르는 것도 같다.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나중에…, 합장하실 건가요?”

    “예. 그러려고….”

    수줍게 대답한다.

    그들은 살아서 단 한 달을 함께 살았다. 한 달…, 평생에 한 달, 그 짧은 인연이 영원을 만들고 있다.

    세상에는 수십년을 함께 살다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인연도 있고 한 달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인연도 있다. 영원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미지(未知)다. 그곳에서 김종후 최옥분 부부는 머잖아 다시 만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건 이토록 깊고 그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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