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 입력2006-12-07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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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금실 법무법인 우일아이비씨 고문변호사

    영혼의 강물로 흘러가버린 친구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 향숙은 신촌로터리 신촌시장 안 골목에서 카페 ‘섬’을 꾸려 나갔다. 언제나 위아래 검은색 옷을 입고 다소곳이 얼굴을 숙인 채, 몸체에 비해 가느다란 다리-그래서 종종 넘어지곤 했는데-를 가지런히 붙여 또박또박 걸으면서, 시장 안을 오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향숙은 시장 안 가게 아주머니들과 친하게 지내며 계를 들어 꾸준히 돈을 모으고 빚을 갚곤 했다. 그리고 장사를 하다가 뭐 안주거리라도 떨어지면 문을 열고 나가 옆집 가게에서 두부도 가져오고, 사과도 가져오곤 했다. 향숙의 ‘섬’은 안쪽에 대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문 없는 구들방이 있고 테이블 대여섯 개가 놓인 오붓한 공간이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손님이 직접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를 꺼내고, 선반 위 소쿠리에 튀겨놓은 팝콘을 기본안주로 담아다가 먹고, 술값도 손님이 스스로 계산해 내고 가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손님들도-손님이라고 해봐야 다 향숙과 언니, 동생, 선배 해가며 친구동아리를 이루었는데-‘섬’의 그런 독특한 운영방식을 좋아하는 듯했다.

    아주 오래되고 맛있고 허름한 음식점 주인은 대개 욕쟁이할머니로 퉁명하게 구는데, 향숙의 스타일도 좀 그러했다. 반가워도 얼굴 환하게 웃는 법 없고, 오는지 가는지 내버려두고, 과묵한 편이기도 하거니와, 정말 좋을 때는 눈만 쳐다보며 입을 살짝 벌린 채 얼굴이 떨리곤 했다. 안주는 정말로 먹음직하고 수북하게 내놓아 학생손님들에겐 그만이었다. 또 명절 때는 고향집에 못 간 학생손님들, 그러니까 동생들을 불러 밥도 해먹이곤 했다.



    향숙의 성격은 우직하고 끈끈한 정은 있되 멋스럽거나 분위기 잡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섬’의 느낌도 여느 카페와는 달리 수더분하고 맥주박스들이 밖으로 다 나와 있어 구멍가게 같았다. 아, 또 한 가지. ‘섬’의 화장실. 깨끗하기는 한데, 좌변기가 아니어서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담아놓은 물을 손님이 직접 파란 바가지로 퍼서 씻어내려야 했다.

    1990년대 내내 향숙은 ‘섬’에 있었다. 나는 일이 바빠지면서 향숙을 자주 못 봤으나, 해마다 12월31일 밤에는 꼭 ‘섬’에 갔다. 언제부터인가 따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송년회를 같이 보낸다는 의식이 형성돼 그날이 되면 나는 아, ‘섬’에 가서 향숙을 봐야지 했고, 향숙도 나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만나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다. 마치 시집간 딸이 엄마 찾아온 듯, 내게 몸에 좋다며 호박즙이며 칡차며 싸줬다.

    향숙과 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심전심 어딘가에서 깊이 만나고 있었다. 고단한 삶의 안타까움을 넘어 무던히 흐르는 영혼의 강물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를 늘 촉촉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섬’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안식을 느꼈으나 ‘섬’ 주인인 향숙은 외로웠다. 그리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노랫말처럼 힘들었다. “빚만 다 갚으면, 곗돈 붓는 것만 끝나면 ‘섬’을 처분하고 조그만 밥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공기 맑은 산 부근에 가서. 그런 꿈을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언제까지 얼마나 돈을 모으면 될까 손을 꼽으며 같이 계획을 세워보곤 했다. 그리고 향숙은 여렸다. ‘로망스’라는 프랑스 샹송이 향숙의 애창곡인데, 그 노래를 부를 때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그 떨림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살금살금 스며 나와 향숙의 마음속 슬픔과 아픔을 처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향숙은 세 해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큰 병이 걸린 것을 발견해 치료를 받은 후 ‘섬’을 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라는 가족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사를 계속하다 결국 못 버티고 쓰러졌다. 그의 고집은 결벽증에서 비롯됐다. 신세지는 것 불편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는 것 극도로 꺼리는 결벽증.

    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동생을 붙잡고 곗돈을 타면 나에게 빌린 돈 꼭 갚으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향숙이 내게 남긴 유언이었다. 친구면 뭐하나. 가장 마음으로 깊고 가까운 친구였다고 말하면 뭐하나. 향숙이 가장 힘들 때, 아플 때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향숙의 꿈을 앞당겨 현실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더라면. 아니면, 향숙, 조금만 더 견디고 버텼어야지, 고집 부리지 말고. 너무 아프면 곁 사람에게 의지했어야지.

    향숙은 죽음으로 비로소 ‘섬’을 떠났고, 나의 ‘섬’ 송년회도 막을 내렸다.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 서양화가

    새벽 산길 낙엽을 밟으며

    지구별에서 걷는 가을의 은행나무 길

    노오란 가을 물감으로 물든

    은행나무 숲길을 걷는다.

    온 세상이 노오란 은행나무 길

    땅 위에 쌓여 있는 은행잎을 맨발로 밟으면서

    가을 길을 걷는다.

    은행나무 길을 혼자서 걸으며,

    나는 은행나무 숲의 가을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온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는

    가을이 노오랗게 물든 은행나무 숲길이 있다.

    나는 그림 속의 은행나무 숲길을 걷는다.

    지구별과 내가 하나가 되어.

    -새벽의 낙엽길을 걸으며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새벽마다 오르는 산길에서 언제나 만나는 낯익은 나무들이 늦가을 단풍잎을 떨구고 있다. 땅 위에 떨어져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이 산길에서 만나는 내 친구 나무들이 이제 곧 겨울을 맞아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겠지. 내 평생 앞으로 몇 번의 가을을 맞게 될까.

    12월이 오면 우리는 정든 사람들과 함께 송년모임에서 만날 것이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는 송년 모임, 동창들과 회포 푸는 송년회, 직장동료들과 함께하는 송년회. 송년회로 바쁜 12월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눈 쌓인 겨울이 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게 되겠지.

    내겐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송년회가 없다. 친구들 송년모임에서 우리는 세상의 이해관계를 잊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우정을 나누며 옛날로 돌아간다. 동심으로 돌아간 친구들은 서로 이름과 별명을 큰소리로 부르며 학창시절처럼 개구쟁이가 된다.

    고향 친구들과 수백번 송년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무심코 착각했던 나는 오늘 낙엽이 덮인 산길을 오르면서 문득 내 인생에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송년 모임이 있을까 생각했다. 여태껏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송년회가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조차 없다. 수많은 송년회가 남아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오다 이제 서른 번도 채 안 되는 송년회가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살아온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다. 몇 번이나 더 가을을 맞게 될까. 가을 색으로 물든 이 산길. 이 나무들을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이 지구별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내가 온 별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자니 이 새벽 산길에서 만나는 나무들과 산새들의 소리가 이토록 새삼스럽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한 해, 한 해가 이처럼 소중할 수 없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새기면서 낙엽 길을 걸었다.

    올해는 친지들과 함께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회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하고 추억에 남는 모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새벽 산길을 걸었다. 언젠가 내가 온 별로 다시 돌아갔을 때 나는 지구별에서 친지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송년모임을 기억할 것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소피아 수녀님과 성탄 미사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연말이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수녀원이다. 분도수녀원이다. 이영숙 소피아 수녀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유교집안 출신이다. 밥을 굶어도 양반을 따져야 하는 그런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당에 혼자 교리를 배우러 다녔다.

    그러다가 상경하여 대학을 다니면서, 무신론에 깊이 빠졌다. 이성과 사회정의, 혁명. 그것만이 오직 나의 길이요, 빛이었다. 그러나 무수한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절망했고, 성경을 몇 번이고 읽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푸라기를 잡았다. 교도소에서 주일마다 하는 미사에도 나가고 통신교리도 들었다.

    1981년인가.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있을 때 나는 삼청교육대상자로 수배됐다. 간신히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한 다음, 한숨을 돌리던 차에, 성남 상대원동에서 노동 사목하는 ‘만남의 집’을 소개받았다. 이영숙 소피아 수녀님이 원장이셨는데, 나에게 노동법 강의를 맡기셨다. 당시에는 노동법 자체가 아주 생소하여, 알기 쉽게 해설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노조위원장을 지내서 현장 경험이 풍부했던 나는 꽤나 인기 있는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철권통치시대라, 노조는 모조리 해체되고, 노조 활동 자체가 불순분자들의 불온행동처럼 치부되었다.

    그 어려운 때에 수도원 앞에는 늘 국군보안대원들이 잠복하여, 만남의 집 출입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수녀원은 우리의 피신처였다. 성역처럼 그곳은 안전했다. 성탄절이 되면 그곳은 젊음의 분주함으로 넘쳤다. 나름의 문화 프로그램도 있었고, 먹을 것과 젊은 만남도 있었다.

    우리는 전태일기념관과 청계피복 노조사무실도 얻었고, 공단 주변에 어린이집도 7개 정도 만들었다. 구로공단을 위한 광명시 철산리 어린이집에서 나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아이 동주도 키웠다. 그 어떤 주교님이나 신부님보다 우리는 소피아 수녀님을 좋아했다.

    그러던 중 1986년 5·3직선제 개헌투쟁으로 나는 그만 경찰에 잡혔다. 모진 고문과 감옥살이를 2년 반이나 하고 나온 1988년 연말에, 나는 성남 만남의 집으로 수녀님을 찾아뵈었다. 왜 그리도 눈물이 쏟아지던지. 수배와 도피 생활하는 중에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까지 솟구쳐 올랐다. 사랑과 지혜, 헌신적 도움, 그리고 영적인 격려, 그것이 소피아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오랜 세월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늘 열심히 기도해주셨다.

    성탄 미사는 연말의 최대행사다. 그중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도원의 미사가 좋다. 1500년이나 이어져 오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고풍스럽고 절제된 노래 가락이 좋다. 수녀님들의 정결한 모습이 좋다. 온전한 헌신의 삶이 좋다. 겸손한 수줍음이 좋다. 내세울 것도 없고, 분주할 필요도 없는 수녀님들의 삶이 나는 좋다. 나지막한 말씀의 봉독이 가슴속 깊이 다가와서 좋다. 조용한 내면의 기도가 나는 좋다. 아무리 추운 한밤이라도 어두움 가운데 모두가 일체되는 그 낮은 소리가 좋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높은 말씀이 선포되는 역설의 기적이 좋다. 그건 분명 인류사의 둘도 없는 기적이다.

    세속의 어지러움을 떠난다고 하지만, 우리는 늘 세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잠시라도 천상의 정결함을 엿볼 수 있는 수녀원의 성탄 미사는 나를 오랫동안 붙들어준다.

    수녀님은 1999년에 분도수도원 로마 총본부로부터 아프리카 우간다 선교책임자로 부름을 받고 적도로 떠나셨다.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시달리면서, 사경을 헤매다가 6년 만에 돌아오셨다. 평생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그분이 계시는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한해를 깊이 새기고 싶다.

    김점선 화가

    멀리서 번득이는 물기를 바라보며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예의라는 걸, 어떤 때는 모른 체하는 것으로도 나는 해석한다. 심하게 꼬치꼬치 묻는 사람을 대하면 힘들고 싫어진다. 천박하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이런 현상은 사람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일을 대할 때도 그렇다. 그래서 그림물감을 살 때나 캔버스를 주문할 때 경건하게 대한다. 절대로 값을 깎거나 하지 않고 신을 대하듯이 경건하게 처리한다.

    우리나라 전설에 승천하는 용을 쳐다보면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이무기로 남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너무나 슬펐다. 용도 슬프고, 그걸 쳐다본 사람도 슬프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도 슬프고. 아마 이 이야기에서 나의 이런 덮어두기, 안 캐묻기, 모른 체하기, 안 쳐다보기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은 어른을 빤히,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이나 황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반면 서양 사람은 상대방의 눈을 주시하면서 말하는 사람을 솔직하고 당당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경건한 것은 비껴서 보는 마음의 습관이 있다. 심지어 산을 바라볼 때도 어떤 부분은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오랫동안 살던 집에서는 창으로 앞산이 보인다. 물이 흐르는 계곡도 조금 보인다. 그 주변이 바위와 숲으로 덮여 있다.

    앞산을 그렇게 많이 올라도 그 주변에는 가지 않는다. 그냥 창에서, 아주 멀리서 번득이는 물기를 바라볼 뿐이다. 그것도 그 주변을, 나무의 변화를 읽으면서 공정하게 훑을 뿐이다. 그 주변이 그 산의 음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델 함부로 가 쳐다보면서 그 산에게 무례한 짓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새해를 맞이할 때는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전업작가로 살기 전에, 아마추어로 그림을 그릴 때도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을 바로 바라보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자정이 되기 얼마 전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 내가 안 보는 시간에, 내가 비껴서서 일하고 있는 시간에 해가 바뀌게 하는 것이다. 내 혼이 캔버스에 빨려들어가 몰아지경(沒我之境)이 된 시간에 새해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해에도 바로 그런 짓, 캔버스에 혼 바르기에 몰두하는 시간이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해가 바뀌는 그런 시간에 한 행동이 다음해를 지배한다는 미신! 내가 만들어 스스로 신앙하는 미신! 그 미신을 평생 실행하고 있다.

    젊어서, 남편 따라 포장마차 술집에서 새해를 맞은 적도 있다. 그럴 때도 나는, 그런 시각이 다가오면, 연필하고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떠들어대는 남편 옆에 그대로 앉은 채, 나는 종이와 연필에 몰두한다. 누가 말을 시키거나 해도 나는 듣지 않고 열심히 스케치한다. 종이가 메모지든 스케치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림의 내용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을 그리든지, 오리를 그리든지 무조건 그림을 그린다. 오직 내가 그 시각에 그림 그리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런 나를 하늘이 바라볼 수만 있으면 된다.

    결혼하고 가족이 생겼어도 그 미신은 이어진다. 세 식구가 잘 먹고 잘 놀다가 해가 바뀌는 시간이 다가오면 뿔뿔이 흩어진다. 남편은 자기 방으로, 아들도 자신의 방으로 간다. 나는 내 작업실에 들어가 이젤 앞에 앉는다. 붓을 들고 그림 그리기 시작한다. 자정이 지나고 얼마 있으면 내 작업실 문이 열리고 가족이 나를 부른다. 히히거리면서 다시 뭉쳐서 논다.

    박재갑 서울대 의대 교수·외과학, 전 국립암센터 원장

    “인생과 고추가 가늘어져요”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가까운 사람들, 일을 같이하던 사람들이 모여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행사가 송년회라 알고 있다. 대부분의 송년회가 연말의 들뜬 분위기 때문에 흥청망청해지기 십상이지만, 요즘 기업 송년회 중에는 제법 ‘송년과 반성’이라는 본래의 뜻을 살린 모임이 적지 않다.

    지난해 연말 프라임그룹 임원들과 함께한 송년회는 국립암센터 원장으로서 마지막 겨울을 맞는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조흥은행장을 지내고 프라임그룹 고문으로 있는 위성복씨의 초청으로 참가한 이날 송년회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지난 한 해 담배를 엄청나게 피워댄 프라임그룹 임직원을 반성하게 하는 일이었다. 프라임그룹 백종현 회장은 나를 초청하면서 “회사에 흡연자가 많은데, 이번 송년회를 계기로 많은 임직원이 담배를 끊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송년회장에는 300여 명의 프라임그룹 임원 및 관계사 부장급 직원 부부가 참석했다. 나는 이날 송년회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다. 어떻게 하면 끽연가들에게서 담배를 떼어놓을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면서.

    평소 나는 강연과 집필 활동을 통해 담배는 각종 암 사망 원인의 30%를 차지할 만큼 폐해가 심각하며, 청산가스 등의 독극물과 비소, 페놀 등 69종의 발암물질이 섞여 있고, 니코틴은 아편 못지않은 중독성이 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런 딱딱한 이야기만으로는 그날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송년회에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프라임그룹 임직원은 송년회장에 들어오기 전에 열심히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눈치였다. 행사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 했다. 그런 그들에게 담배에 대한 의학적 소견을 들려줘봤자 ‘말발’이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이날의 만남은 여느 금연(禁煙) 강연회가 아니라 임직원이 부부동반으로 모여 덕담을 나누고 여흥을 즐기는 송년회 자리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극약처방’을 하기로 했다. 송년회에 참가한 부인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대뜸 “담배를 피우면 남성기능이 저하돼 30∼40대에 발기부전이 찾아올 가능성이 2배 높아질 수 있다”고 겁을 주며 부인들을 쳐다봤다. 성기능 장애로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물도 보여줬다. 한 발 더 나아가 한껏 발기된 ‘고추’와 담배에 찌들어 빈약해진 ‘고추’ 사진도 보여줬다.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송년회장에서 갑작스레 ‘고추’ 사진을 본 부인네들의 표정이 어떠했겠는가. 아마 그들의 머릿속엔 ‘남편과의 잠자리 빈도가 해마다 줄어드는 원인이 바로 담배였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성관계를 가질 때는 에어로빅을 할 때보다 2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흡연으로 혈관이 좁아진 사람은 성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도 들려줬다. 송년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 후에 부인들이 남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온갖 무기를 손에 쥐어준 셈이었다.

    강연을 마치고 자리에 와 앉으니 한 직원이 일부러 부인 들으라는 듯 “박사님, 저는 그래도 굵고 짧게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다른 임직원에게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대꾸해줬다.

    “담배를 피우면 인생이 굵어지는 게 아니라 ‘고추’가 가늘고 짧아져요.”

    장내가 떠나갈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흡연하면 절대로 굵게 살 수 없다. ‘고추’가 가늘어지니 가늘게 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젠 의학이 발달해 마음대로 짧게 살 수도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후일 백종현 회장이 송년회 뒷이야기를 해줬다. 많은 임직원이 그날 집에 들어가 부인에게 혼쭐이 나고 꼼짝없이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회사의 경쟁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날 송년회가 프라임그룹 애연가들에겐 더없이 끔찍했겠지만 덕분에 올해부터 그들의 인생은 굵고 길어졌을 터이다.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

    “여보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할게”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나는 자칭 가정제일주의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다. 평소 ‘가정은 우주의 중심이다’ ‘아내는 내 인생의 공동경영자다’ 같은 얘기를 입에 달고 다닌다. 그렇지만 강의와 방송 등 다양한 활동 때문에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늘 부족하다.

    이 때문에 나는 각종 송년회가 끝나고 나면 12월31일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우리만의 ‘가족송년회’를 즐기는 원칙을 갖고 있다. 장소는 주로 63빌딩 스카이뷰라는 양식당으로, 결혼 전 아내와 데이트를 즐기던 곳이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내다보면서 지난 한 해의 ‘가정경영’을 돌아보고 아내를 칭찬하고 아들딸을 격려하면서 새해의 도전을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1999년 12월31일, 잊지 못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날은 1000년대의 시대가 가고 2000년대로 들어서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나는 그 몇 해 전에 ‘1999년 12월31일에 만납시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IMF 금융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2000년 시대를 축제로 맞이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뉴밀레니엄’ 열풍이 불면서 아내는 나에게 가장 멋진 이벤트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나도 이 날은 평생 잊지 못할 가족모임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는데,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 무렵 나는 ‘생방송 오늘’이라는 2시간짜리 라디오 시사정보 프로그램을 매일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IMF 체제에 들어선 후에는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에 우선순위를 두고 주로 경제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고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1999년 12월 셋째 주에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김영준 PD가 내게 느닷없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12월31일에 무슨 계획 있습니까?”

    “가족과 보내야지요.”

    “어려운 부탁인 줄 압니다만, 혹시 집 나온 실직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사연을 들어보니 김PD가 다니는 교회에 가출한 실직자를 위한 쉼터가 있는데, 목사님이 이들을 위해 뷔페식당을 예약하고 특별한 송년모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쉼터에는 금융위기 때 실직한 사람과 부도 낸 중소자영업자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집까지 차압당하고 가족이 흩어진 사람도 있었다. 남들은 모두 밀레니엄 축제로 들떠 있는데 이들만 교회 옥상에 마련된 임시 쉼터에서 한숨 쉬게 할 수는 없기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자는 뜻에서 특별송년회를 기획했다는 설명이었다. 이들에게 기도와 찬송도 중요하겠지만, 경제현황 진단과 처방, 카운슬링을 해주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게 김 PD의 이야기였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듣고보니 거절할 수 없어 곧바로 참가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아내도 이런 사정을 알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이미 가족끼리 함께할 계획을 다 세워놓았으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생애에 다시는 볼 수 없는 밀레니엄 이벤트를 가족과 함께하기로 약속해놓고 사전에 상의도 없이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여보, 미안해. 당신에게는 늘 내가 있지만 그 실직자들에게는 바로 그날 내가 필요하니 당신이 이해해줘.”

    아내는 온순한 성격이고 평소 내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 그러나 1999년 12월31일의 이벤트만큼은 절대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결국 나는 아내를 설득하지 못한 채 12월31일을 맞이했고, 목동의 한 뷔페식당에서 열린 IMF 실직자 송년회에 특별연사로 참가하게 되었다. 목사님의 기도에 이어 교인들의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목사님은 이들에게 좋은 옷까지 사다 입히는 열성을 보였다.

    “이분들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오늘 처음 보네요.”

    나는 그분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경제지식과 경영정보를 총동원해서 새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설명해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지하게 경청하며 질문이 쏟아지는 등 호응이 컸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1999년 12월31일이 지나고 2000년 1월1일이 온다고 크게 외쳤다. 모두 “새로운 희망으로!”라고 소리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행사가 끝나고, 새벽 두세 시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여보 미안해, 앞으로 더 잘할게.”

    그날 이후 나는 송년회 때가 다가오면 아내의 눈치를 본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실직자들의 눈빛을 떠올리곤 한다. 그분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주실 연극인

    죽기보다 싫은 ‘엄마’라는 대사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대학 선후배가 모여 교도소, 소년원, 복지시설을 찾아 꾸준히 음악봉사를 해온 ‘그린비 합창단’이 올해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 시동을 건다. 이때는 각종 단체가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꺼번에 몰려들게 마련이라 일정을 협의하러 얼마 전 OO소년원에 갔다.

    오랜만에 만난 직원들과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는데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지난 봄과 여름에 집으로 돌아간, 내가 잘 아는 K와 H가 다시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인성(人性)변화를 위한 집단프로그램으로 연극놀이를 진행할 때 일주일에 3회가량,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넘게 만나던 아이였다.

    이곳에서는 비행(非行) 정도가 심해 7호 처분을 받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학업 연계 수업과 심리치료, 사회봉사활동 등 사회적응 훈련을 시킨다. 나는 지금은 개인 사정으로 자주 못 가지만, 햇수로 4년째 드나들며 꽤 많은 청소년을 만나왔다. 그들 중엔 퇴원 후 대학에 진학했거나 중고자동차 매매상, 현수막 제작사 등에 취직해 잘 지내는 성실한 사회인도 있지만, 다시 소년원으로 돌아오는 청소년이 더 많다.

    나는 지난해 사회에 적응한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이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중고 자동차로 공연 소품을 실어나르고, 후배들을 위해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때 K와 H도 함께했다. 특히 K는 무대미술과 음향기기 설치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연극에 출연해 큰 몫을 했다.

    공연 목표가 ‘함께 나눔’이라 무대와 관객의 경계 없이 장내에 있는 모든 이를 어울림 마당으로 이끌었다. 이어 소년원생들이 엮은 10분짜리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그들의 속내를 표현한 연극이었다. 한 줄씩의 짧은 대사였지만, 비행 청소년 가족이 속한 사회계층과 거주지역의 문화상, 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 취향, 말투와 의상이 녹아 있어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절정은 K가 ‘엄마’를 부르는 대목이었다. 어찌나 애처롭게 ‘엄마’를 부르며 목 놓아 울던지 예정에도 없이 그린비 합창단원들이 하나 둘씩 ‘Mother of Mine’을 허밍으로 깔아주어 그 감동이 극에 달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K는 ‘엄마’라는 대사가 죽기보다 싫다고 했었다. K의 생모는 K를 낳고 곧바로 집을 나갔다. 열세 살이 될 때까지 새엄마가 두 사람이나 있었지만, 심한 학대로 도저히 엄마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고 한다. 결국 매질을 못 이겨 가출했는데, 배가 고파 공중전화부스를 털었다. 그렇게 절도죄로 시작해 청소년 쉼터와 소년원을 몇 차례 오가는 동안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호적상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K는 문장완성 놀이에서도 ‘여자’ 혹은 ‘남자’는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머리, 손, 다리까지 3박자로 떨어가며 수선을 피거나 코를 후비고 발가락이나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고는 킁킁 냄새를 맡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연극놀이에 재미를 붙이면서 그 버릇이 없어지더니 송년 공연 무대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K의 눈물은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이슬로 내렸다. 때맞춰 흘러나온 피아노 반주에 맞춰 모두 크리스마스 성가를 목청껏 부르는 가운데 공연의 막이 내렸다. 우리는 한덩어리가 되어 얼싸안았다.

    그랬던 K가 또 이곳에 있다는 것이 반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만남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분노와 고통을 지닌 청소년이 당장 눈앞에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이 받은 고통의 시간보다 몇 배의 치유 시간이 필요하므로.

    전여옥 국회의원

    서른두 살에 맞은 진정한 성년식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1991년 12월31일로 기억된다. 일본에 온 지 1년, 외국은 여행하기도 만만치 않지만 그 사회에서 일하기는 더 고단하고 고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게 일본 특파원 발령이 났다. 방송사 최초 여성특파원(!)이라고 당시만 해도 신문에 날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나의 일본어 실력. ‘읽기’는 별 문제가 없지만 ‘말하기’가 큰 문제였다.

    그러나 젊은 날의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라는 늙은 처칠의 주문을 외우며 미친 듯이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야말로 일본인과 부딪치며 때로는 수모도 당하고 때로는 자괴심도 드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일본어 실력엔 가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다 그 해 마지막 ‘일하는 날’이 되었다. 선배들은 퇴근하고 막내인 내가 새해 특집과 아침용, 저녁용 리포트 서너 개를 정신없이 편집했다. 원고와 자막을 뽑고 나서 NHK 위성실에 가서 새해 보도물을 위성으로 쏘았다. 그러고 나니 저녁 6시. 밖을 내다보니 그 시끌벅적한 시부야 거리가 한산했다.

    일본인들은 마지막 날이면 홍백 노래자랑을 보면서 한 해를 보낸다던데 정말 그런가보다 싶었다.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우리나라로 치면 ‘가요청백전’을 보고 ‘송년 메밀국수’를 들며 한 해를 마감한다는 것이다. 함께할 가족이 없는 나는 이 떠들썩한 연말에 완벽한 혼자였다.

    지하철역을 향해 한참을 걷다보니 ‘려향(麗鄕)’이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 있지만 전혀 일본 냄새가 나지 않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중국음식점이었다. 일본 생활이 숨이 막힐 때 나는 그 집에 갔다. 음식도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한 이유는 시끌벅적한 ‘자유’의 분위기였다. 옆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소곤소곤 귀엣말을 해야 하는 일본의 모든 식당과는 다른 ‘툭 터진’ 해방구 같은 분위기가 그곳엔 있었다.

    대개 나는 카운터에 홀로 앉아 생맥주 한잔에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를 했다. 혼자 앉아서 책을 보면서 천천히 음식을 먹는 게 오랜 습관이었다. 일본에선 ‘나홀로 식사족’이 워낙 많아 나는 사람 시선에서 벗어나 편안히 카운터에 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음식점에는 나 같은 ‘독신귀족(?)’들이 카운터 혹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맥주를 한잔 하고 식사를 할까 하다 옆자리에서 소홍주를 마시는 것을 보니 갑자기 소홍주의 달짝지근한 맛이 당겨왔다.

    웨이터가 소홍주를 따뜻하게 데워 매실, 얼음사탕과 함께 가져다주었다. 오리며 닭고기를 안주 삼아 소홍주에 매실과 설탕을 녹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창을 보니, 동그란 창문 밖에선 함박눈이 소복소복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아, 도쿄는 눈이 귀한데….’ 축복의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이송이 내리는 눈처럼 지난 한 해의 하루하루가 스쳐갔다. ‘전여옥. 너 참 훌륭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이 일본에서 부지런했고 좌절하지 않았고 품위 있게 잘 견뎠다. 장하다’ 하고 하얀 눈이 속삭이는 듯했다. 무엇보다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이제 나의 영역이 한국과 일본으로 넓혀졌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했다.

    결국 그날 나는 끝없이 내리는 하얀 눈을 벗 삼아 500ml나 되는 소홍주 한 병을 다 비우고 꼿꼿하게 걸어서 지하철역으로 갔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이 있는 지유가오카(일본어로 ‘자유의 언덕’이란 뜻)에서 내려 무사히 귀가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발이 퍽퍽 잠기는 눈길을, 그 밤에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갔다는 것이다. 생애 최대의 주량을 실험하며 나의 진화를 축하했던 ‘서른두 살의 송년회’야말로 진정한 나의 성년식이었던 셈이다.

    최재천 국회의원

    산사(山寺)에서 보낸 마지막 날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계곡은 꽁꽁 얼어붙었고, 찬 바람은 늘 산사의 문풍지를 흔들어댔다. 한 해를 마감하던 날, 먼저 방청소를 하기로 했다.

    책상에 놓인 두꺼운 책들을 단정히 눕히고, 한쪽 구석에 쌓아둔 속옷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책상에는 촛농자국이 군데군데 하얗게 얼룩져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으로 책상의 촛농을 살살 긁었다. 입에 숨을 모아 살살불어 촛농 부스러기를 책상 한편으로 모은 다음 신문지로 쓸어담았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는 꺼려지는 일이었지만, 방문을 활짝 열고 찬 공기로 탁한 방구석을 흔들었다.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를 때 데워둔 구들장의 온기를 내버리는 일이 늘 아쉬울 수밖에 없었던 산중(山中)이었다.

    밀린 빨랫감을 모아 계곡으로 나가야 했다. 법당과 법당 사이에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곳에 소(沼)가 있었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방울로 돌계단은 얼음투성이였다. 얼음을 깼다. 빨래비누조차 녹지 않는 그 얼음물에 두꺼운 겨울빨래를 담가 주무르다보면 어디까지가 손이고, 어디까지가 빨래더미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곤 했다.

    전기도 없던 곳, 공양주 보살 외에는 스님조차 거의 절을 비우시던 곳. 그곳에서 겨울 한 철을 보냈다. 부모님께 떠밀리다시피 해서 억지로 떠난, 전라남도 화순 어느 산사에서의 사법시험 공부생활은 그렇게 이어졌다.

    1982년 12월31일도 산사의 하루는 짧았다. 산속의 해는 높다란 서산마루에 빨리도 걸리곤 했다. 저녁 어스름과 함께 한겨울의 추위가 산사를 냉랭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그날도 고춧가루에 버무린 소금투성이 김치 몇 조각, 산나물 두어 가지에 공양미로 들어온, 그래도 쌀밥에 저녁 한 끼를 때웠다.

    한 해가 저문다는 낭만이야 그 깊은 산중의 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다시금 골방에 틀어박혀 방석을 깔고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러기엔 아무래도 특별한 날이었다. 감사해야 했다.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래도 이 깊은 산사에서 중생을 위해 누울 곳과 책상과 공양을 베풀어주신 부처님께 감사하는 일이 첫째였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을 했다. 제대로 살아 부모님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절을 했다. 그곳보다 더 남쪽에, 더 서쪽에 계신 부모님을 향해 남서쪽 방향으로 큰절을 했다. 무릎 꿇고 책상 앞에 앉았다. 반성뿐이었다. 그러고는 젊음의 미래를 생각했다. 스물네 시간, 매 순간 치열하게 임하던 그 날.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기념하고 싶은 가장 온전한 송년회였다.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마지막 술자리

    잊지 못할 송년회 강금실 외
    1990년대 중후반에만 해도 나는 펄펄 날았던 것 같다. 담배도 하루에 세 갑씩 너끈히 피우고, 술은 어느 자리에서건 마다한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 함께한다는 것, 그게 바로 낭만이고 내 인생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한화 이글스 김인식 감독, KBS 유수호 아나운서, 김갑철·김찬익 전 KBO심판위원장 등은 그 무렵 언제든 만나면 한잔씩 걸치던 야구계의 술친구들이었다.

    야구계말고도 나는 사교의 무대가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살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이웃사촌 다섯 분과의 모임인 구공회였다. 1990년에 결성되어서 ‘구공(90)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는 아내들끼리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남편들이 합세해 정기모임으로 발전했다.

    가장 활발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시기는 다들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인 1996~2001년 사이로 기억한다. 특히 2001년 송년회 술자리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술을 많이 마신 마지막 송년회’였기 때문이다. 야구해설자, 은행원, 자영업자, 사업가 등 회원의 직군이 다양하다보니 대화의 소재도 다채로웠다. 또한 연배가 비슷하고 다들 두주불사형이었기 때문에 어느 모임보다 결속력이 강했다.

    2001년, 어느새 10년지기가 된 구공회 회원들은 서로 아끼고 위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술은 술술 들어가고, 아내 또한 곁에 있으니 다들 마음 편하게 작정하고 들이켰다. 새벽까지 술병이 쌓여 갔다. 그렇게 마신 술이 소주만 따져도 각 4병씩, 20병은 너끈히 해치웠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고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2002년 1월 어느 날 내가 먼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야말로 사경을 헤맸다. 얼마 안 있어 한 분은 위암수술을 받았고, 또 다른 한 분은 뇌졸중으로 그만 세상을 먼저 떠나게 됐다. 그 후로도 모임은 유지됐으나 술은 그야말로 테이블 장식품이 돼버렸다.

    올해의 구공회 송년회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리에 맥주 한 잔씩만, 그것도 절반은 폼으로 따라놓을 예정이다. 전엔 꼭 술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엔 술이 없어도 추억을 나누는 데 별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다.

    과거의 나에게 연말은 ‘매일 술 마실 거리’가 생겨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송년회 날 과음할 기회가 잦은 독자분이라면, ‘건강은 과신하면 안 된다’는 평범한 말을 한 번쯤 떠올리면서 속도 조절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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