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중수로에 집착한 박정희, 분노한 아이젠버그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12-14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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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는 고리 1호기를 건설한 후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 건설에 도전한다. 제작기술을 이전받는 조건으로 중수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인도가 핵실험을 했다. 인도는 캐나다에서 지원받은 중수로를 이용해 핵실험을 한 것으로 밝혀져 한국의 중수로 도입은 난관에 봉착하는데….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원자력과 핵 개발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박정희 대통령.

    무분별한 핵 확산을 막고 자본주의 진영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미국의 선택과 시슬러씨의 자극, 이승만 대통령의 자주 의지 그리고 원자력을 배우려는 청년들의 의욕이 결합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기술을 제공받을 기회를 잡았다.

    그리하여 양국은 1956년 2월3일 미국 워싱턴에서 ‘원자력의 민간 이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라는 매우 긴 이름의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대표로는 양유찬(梁裕燦) 주미 한국대사가, 미국 대표로는 국무부 차관보인 월터 로버트슨과 루이스 스트라우스 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이 서명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원하던 날개를 달게 된 셈인데 이 협정에는 중요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협정 제7조에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기관과 사람은 이 협정에 따라 대여하거나 매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공된 설비나 장치 자재를 원자병기나 원자병기와 관련된 연구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군사목적으로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6년 3월 이승만 정부는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 과의 윤세원 과장이 초안을 만든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해 1958년 3월11일 공포됨으로써 이듬해인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원자력원 개원



    이승만 정부의 선택은 시기적으로 일본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구 일본 해군 대위 출신으로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젊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의원이 원자력 발전의 터를 닦았다. 나카소네 의원이 일본 정부 예산에 원자력 항목을 삽입한 것이 1954년이었고, 원자력 기본법을 제정한 것은 1955년이었다. 법 제정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3년 늦게 원자력에 도전했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지금까지 한 차례 수정되었다. 1971년 한국이 고리 1호기라고 하는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 건설에 착수하자 1973년 미국은 이 원자로에 사용되는 농축 우라늄을 미국 민간 기업들이 제공할 수 있도록 이 협정을 개정했다.

    그러나 애초 협정에 있던 단서 조항의 내용은 바뀐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한국 원자력의 원천(源泉) 기술은 미국산이기 때문에 한국은 군사용 핵, 다시 말해 핵무기(원자병기)를 개발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 협정이 체결되었기에 한국은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세우고 트리가 마크-Ⅱ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 원자로를 도입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트리가 마크-Ⅱ는 미국 정부가 35만달러를 무상지원하고 한국 정부가 42만달러를 내놓음으로써 구입이 성사되었다. 당시 한국 처지에서 42만달러는 막대한 거금이었는데, 이 대통령은 이 돈의 집행을 승인했다. 그만큼 원자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박정희 매료시킨 이민하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날개를 편 원자력연구소는 1961년 5·16군사정변을 맞으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새롭게 등장한 군부세력의 핵심 지도자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원자력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가 원자력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이 서린 월성 1호기. 이 원전은 박 대통령 사후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되었다.

    박정희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정국을 운영했다. 그야말로 군인이 통치하는 군정(軍政) 시기였으므로, 각 기관에는 군인들이 나와 기강을 잡으려 했다. 이 시기 원자력원의 기획조사과장이 이민하(李敏厦)씨였다. 이민하 과장은 ‘원자력발전 장기계획서’를 만들어 원자력원에 파견된 군인을 통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한국도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 하는데 어디에 짓는 것이 좋고 예산은 얼마가 들어갈 것이다’라는 한국 원자력 정책의 대강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서를 받은 박 의장은 이 과장을 불러 직접 설명을 듣고 서명을 했다. 이로써 박 의장도 원자력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이 확인돼 정변(政變)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분야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1962년 3월30일부터 원자력연구소에서 트리가 마크-Ⅱ 원자로가 가동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원자력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3월30일에는 원자력청을 신설해 원자력원이 하는 일을 인수하고, 그해 4월21일에는 원자력 정책을 포함한 국가 과학정책을 총괄하는 과학기술처를 만들었다.

    1967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장기 전원(電源)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에는 1976년까지 50만㎾급 원전 2기를 건설한다는 ‘야망’이 들어 있었다. 한국에 건설한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의 설비 용량은 58만7000㎾이다. 1967년 계획보다는 설비 용량이 커졌는데, 최초 원자력발전소의 설비 용량이 커진 데는 ‘사연’이 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이 원자력발전소를 세워야겠다고 판단했을 때 처음 예상한 설비용량은 15만㎾였다. 지금 시점에서는 ‘15만㎾급 설비로 원전을 지어서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의문이 떠오르겠지만, 당시 형편에서는 15만㎾급 원전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고리 1호기 건설은 무모했다?

    당시 한국의 전체 전기 설비 용량은 약 200만㎾였다. ‘생산한 것을 전부 판매’하는 매진을 기록해야 떼돈을 번다는 것은 경제의 기본 원리이다. 그러나 전기는 생산한 것을 모두 소비하는 매진을 기록했다가는 ‘블랙아웃’이라고 하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 모든 전기가 나가버리는 사태이니 발전소까지 멈춰선다.

    따라서 전기는 항상 여유를 두고 소비해야 한다. 그러나 수천만 국민이 사용하는 전기의 소비량이 언제 어떻게 급증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전기 소비는 에어컨 가동이 급증하는 한여름철 급증하는데 이때를 가리켜 피크타임(peak time)라고 한다. 한 나라에서 생산하는 전기는 피크 타임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피크 타임을 채울 수 없을 때는 몇몇 지역에 대해서 단전(斷電)함으로써, 국가 전력체계 전체가 블랙아웃되는 사태를 막는다.

    전기는 다른 제품과 달리 저장할 수가 없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전기선을 통해 각 가정과 공장 회사에 공급되는데 이때 소비되지 못한 전기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사라져버린다. 이 때문에 블랙아웃을 피하기 위해서는 여유 있게 전기를 생산해야 하는데, 여유 있게 생산된 전기는 저장하지 못하므로 예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전기 생산은 비효율적이 된다.

    예비율을 계산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각 발전소의 설비용량이다. 발전소는 연료나 부품 등을 교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지시켜야 할 때가 있다. 또 고장으로 인해 갑자기 정지할 수도 있다. 교체나 고장으로 발전소가 정지하면 이 발전소가 생산하던 것만큼의 전기 생산이 줄어드는데, 이러한 생산 감소는 곧 바로 예비율에 영향을 준다.

    예비율은 보통 10% 정도로 잡는데 갑자기 멈춰선 발전소의 설비용량이 국가 전체 설비용량의 10%라면, 이 발전소가 정지함으로써 이 나라의 예비율은 순식간에 0%로 떨어진다. 예비율 0%는 바로 블랙아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전소를 지을 때는 무작정 설비용량을 크게 할 게 아니라 국가 전체 설비량의 10%가 넘지 않도록 지어야 한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원전 건설을 입안한 오원철 당시 대통령경제 2수석.(왼쪽) 고리원전 1호기 입지 결정에 참여한 이창건 박사.(오른쪽)

    1960년대 중반 한국의 전기 생산 설비량은 200만 ㎾였다. 따라서 새로 짓는 발전소의 설비용량은 20만㎾를 넘으면 안 되었다. 발전소를 운영하다보면 20만 ㎾급 원전과 다른 화력발전소 1기가 동시에 멈춰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새로 짓는 원전의 설비 용량은 15만 ㎾가 적정하다는 계산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전력 기술자들과 원자력 공학자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배운 것에 충실했다. 실제 업무 경험이 적은 이들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든 일을 학교에서 배우고 교과서에서 나와 있는 대로 하려고 했다. 이러한 때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경제분석 전문가인 루리 크린(Ruri Krynn)씨가 중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한국이 짓고자 하는 원자력발전소의 설비용량을 지금 기준으로 결정하지 말라. 한국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인데 이는 곧 전기 소비가 급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실제로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 한국은 지금 시점의 국가 전력 설비량을 기준으로 원자력발전소의 시설용량을 결정하지 말고 10년 후 한국이 사용할 전기량을 기준으로 새로 지을 원자력발전소의 시설용량을 결정하라.”

    위기 속에 내린 결단

    당시 박정희 정부는 5년 단위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었으니 한국이 소비하는 전력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에 따라 정부와 한국전력은 곳곳에 화력발전소를 짓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고려해 원자력연구소는 한국이 짓고자 하는 최초 원전의 설비용량을 15만㎾에서 20만㎾, 30만㎾, 50만㎾로 늘리다 최종적으로 58만7000㎾로 확정했다. 10년 후 한국 경제가 소비할 전기량을 추정해 확정한 58만7000㎾급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결정은 당시로선 모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정전(停戰)체제의 나라였다. 정전체제는 쉽게 깨질 수 있다. 더구나 1960년대 중후반의 안보 환경은 매우 험악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한 미국은 파월(派越)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있던 2개 주한미군 사단을 차출하려고 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한국군 2개 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의하고 이를 실천해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을 막았다. 1968년 북한은 도발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해 1월21일 북한은 124군 부대라고 하는 특공대를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청와대가 북한군의 기습을 받은 비상사태에 한국은 경제개발 정책은커녕 안보정책부터 다시 검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흘 후인 1월23일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미 7함대에 배속돼 활동하던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미국을 경악케 했다. 북한은 사흘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과 미국에 강펀치를 먹인 것이다. 그해 가을 북한은 중대 규모의 특공대를 삼척과 울진 지구에 투입해 베트남식 게릴라전을 펼쳤다. 울진·삼척 사태라고 하는 이 게릴라전을 진압하는 데 한국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69년 4월에는 미 5공군에 배속돼 활동하던 EC-121 정찰기가 북한 함경남도 해안 상공을 비행하다 북한 공군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을 두고 ‘공산 종주국인 소련이 베트남에 이어 한반도로 전선을 확대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왔다. 전쟁이 일어날 기운이 높은 한국에 대형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것은 무모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흔들리지 않고 루리 크린의 의견을 수렴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강행했다. 결과적으로 루리 크린의 조언은 한국 원자력발전의 미래를 결정짓는 방향타가 되었다. 대량 생산을 하면 그만큼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기가 상존하는 한국은 58만7000㎾라는, 당시로서는 초대형인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확정함으로써 급증하는 전기 소비에 대처하고 아울러 전기요금을 낮추는 계기를 잡게 되었다.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인도가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데 이용한 CIRUS 원자로. 이 원자로는 캐나다가 제공했다.

    아이젠버그를 따돌려라

    이어 한국은 어떤 원자로를 선정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건설되는 원자로에는 ‘경수로’로 통칭되는 가압경수로와 ‘비등수로’로 불리는 가압비등수로, 그리고 ‘가스냉각로’가 있었다.

    경수로는 미국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CE)사 등에서 제작했고, 비등수로는 트리가 마크-Ⅱ를 제작한 GA의 모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GE) 사가 제작했다. 그리고 가스냉각로는 영국의 원자력수출공사(British Nuclear Export Executive)에서 생산했다.

    비등수로는 조기에 검토 대상에서 탈락했다. 경수로와 가스냉각로가 남게 됐는데 이것을 놓고 원자력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둘로 갈리게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연구원들은 가스냉각로를 선호했고, 미국에서 공부한 연구원들은 경수로를 지지한 것이다. 가스냉각로냐 경수로냐. 이 대립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외견상 우세를 보인 쪽은 영국제인 가스냉각로였다.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용 원자로(가스냉각로)를 개발한 영국은 이 원자로에 사용되는 부품 생산을 유럽 각국에 맡김으로써 가스냉각로를 유럽형 원자로로 만드는 작업을 펼쳤다. 벨기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이 가스냉각로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했으므로 이 나라들도 한국이 가스냉각로를 선택하길 원했다. 그로 인해 전체 유럽이 한국에 대해 가스냉각로를 선택하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에 주재하는 유럽 각국의 대사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이 원자로의 장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영국은 유럽 각국을 가스냉각로 부품 생산 기지로 만듦으로써 유럽 국가들도 가스냉각로를 설치하도록 유도했다. 덕분에 가스냉각로는 세계에서 수출이 가장 잘되는 원자로가 되었다. 영국은 유럽을 넘어 일본에도 이 원자로를 수출했다. 영국이 가스냉각로를 세계 각국에 수출할 수 있었던 데는 무기 중개상으로 이름을 날린 독일계 유대인인 숄 아이젠버그(Shoul Eisenburg)의 영향도 있었다.

    아이젠버그는 돈을 소개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국은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 기간산업을 건설했는데, 아이젠버그는 이러한 차관도 마련해주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많은 일을 아이젠버그에게 맡겼다. 호남비료 동해화학 인천제철 등 당시에 건설된 중요한 기간산업체들이 아이젠버그의 중개로 성사됐다.

    대한(對韓)영향력이 대단한 아이젠버그가 가스냉각로를 제작하는 영국을 위해 뛰어다녔다. 가스냉각로는 세계적으로 수출을 많이 했는데 아이젠버그까지 뛰어다니니 유력한 정치인들이 가스냉각로 쪽으로 기울어졌다.

    김종주의 결단

    그러나 경수로 지지파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의 국가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영국의 원자력발전 시장은 작지만 미국은 매우 크다. 미국의 전력회사들은 미국 내에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데 매진하느라 수출을 등한히했다. 반면 영국은 영국 시장이 작아 수출에 매진했다. 미국이 경수로 수출에 진력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수로의 가치를 절하해선 안 된다. 경수로는 가장 안전한 원자로이다”라고 외쳤다.

    미국파와 영국파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태완선(太完善) 장관이 이끄는 부흥부가 중립적인 인물에게 판단을 맡겨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중립적인 인물로 한국전력의 기술이사를 맡고 있던 김종주(金鍾珠)씨가 선정되었다.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경우 건설 자금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빌려오려면 담보가 있어야 하는데 원자력연구소는 그러한 담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한국전력은 전국 각지에 있는 발전소를 담보로 제공하고 돈을 빌려올 수가 있다. 이런 이유로 태완선 장관은 노형(爐型) 선정을 한전에 맡기기로 했다.

    김종주 이사는 광복 전 일본 도쿄제국대학을 다니다 폐가 나빠져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았다. 광복 후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국 하웰(Harwell)에 있는 영국원자력연구소에서 가스냉각로에 대해 공부하고, 미국 MIT에서 경수로에 대해 공부했다. 태완선 장관은 한전에 있는 김 이사를 적임자로 보고 그에게 노형 선택을 맡겼다.

    김종주 이사는 미국산 경수로가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태 장관이 이를 받아들여 미국제 경수로를 선택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아이젠버그가 강하게 반발했다. 비난의 화살은 노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김종주 이사에게 쏟아졌다.

    아이젠버그가 방향을 틀면 건설 과정에 있는 한국의 기간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견디다 못한 김 이사는 다음에는 영국에서 만드는 개량형 가스냉각로를 구매하겠다는 말로 분노한 아이젠버그를 달랬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가스냉각로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돼 영국 정부가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문제가 된 부품을 회수해 교체하는 리콜(Recall) 조치를 취하고, 영국 정부는 사이즈웰(Sizewel) B 원전부터는 경수로로 짓는 것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로 인해 잘나가던 가스냉각로는 된서리를 맞아 세계시장에서 사라지고 경수로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고리가 최초 원전 건설지 된 사연

    경수로를 선택한 후 한국은 다시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양사를 놓고 고민했으나 경수로 건설 경험이 많은 웨스팅하우스를 최종 계약사로 선정했다. 한국전력은 1970년 12월 웨스팅하우스사와 발전소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이 가스냉각로를 선택했다면 발아기의 한국 원자력산업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영국 정부가 가스냉각로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으니 한국은 이를 버리고 다시 미국산 경수로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기회비용 상실은 신생 국가인 한국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량과 노형이 결정될 때쯤 어디에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것인지가 화두가 되었다. 이때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던 이창건씨가 석탄공사, 석유공사, 기상대 사람들과 논의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체적인 원전 부지 조사를 했다.

    부지 선정을 위해 정해진 큰 원칙이 ▲원자력발전소는 냉각수인 바닷물을 구하기 쉬운 곳으로 한다.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설 곳에서 대도시가 있는 쪽으로 바람이 불면 안 된다. ▲원자로와 함께 세워지는 증기발생기는 300t이 넘으니 이는 배에 실어 운반해 와야 한다. 따라서 항구가 있거나 배를 댈 수 있는 곳에 지어야 한다 등등이었다.

    그리하여 선정된 곳이 행주산성 부근인 ‘행주외성(外城·행주산성은 본성과 외성 2중 구조로 돼 있다)’, 경남 양산군 기장읍 ‘공수리’와 ‘고리’ 세 군데였다(공수리와 고리는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소속으로 바뀌었다).

    원자력연구소측은 자신들의 판단을 검증받기 위해 IAEA 요원을 불러 조사케 했는데 이들은 제1 후보지로 고리, 제2 후보지로 공수리, 제3 후보지로 행주외성을 꼽았다. 원자력연구소측도 고리를 제1 후보지로 생각했으므로 고리는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설 곳으로 지정되었다.

    고리 주민들은 누대에 걸쳐 살아온 땅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다는 데 대해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21만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1971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고리에서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기공식이 열렸다. 사업비는 1560억원으로 산정됐는데 이 금액은 당시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비였다.

    박정희의 야심, 중수로 건설

    이렇게 시작된 고리원전 1호기 건설 공사는 1973년 1차 석유위기가 닥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부품 값은 오르고 건설 재원은 부족한데 가스냉각로를 공급하려다 실패한 영국이 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리 1호기 건설은 파행을 거듭해, 애초 생각한 것보다 2년 늦은 1978년 7월에 준공되었다.

    고리 1호기의 준공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21번째로 원자력발전소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이승만 시절에 품은 꿈을 박정희 때에 이룬 것이다.

    고리원전 1호기 착공식이 열린 직후인 1971년 5월7일 정부는 신(新)장기에너지 종합대책을 마련했는데 이 대책에는 1981년까지 60만㎾ 원자력발전소 3기를 건설해 가동에 들어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고리 1호기의 착공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원전 건설에 본격적인 야망을 품은 것이다. 두 번째 원전은 고리 1호기 옆에 짓기로 했으므로 고리 2호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리 2호기는 고리 1호기를 납품한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에서 공급받기로 결정되었다(1974년 10월28일).

    이때는 전세계적으로 1차 석유위기(1973년)가 닥친 다음이었다. 1배럴당 1달러 미만이던 석유값은 중동국가의 선공(先攻)으로 시작된 4차 중동전을 계기로 10달러선까지 올랐다. 4차 중동전은 1967년 이스라엘군의 선공으로 발발해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3차 중동전). 중동국가들이 보복에 나섰다. 중동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함과 더불어 석유값을 올림으로써 전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다. 이로써 중장기 사업에 대한 투자가 세계적으로 위축되었다.

    이 와중에 웨스팅하우스사는 고리 1호기 계약 발효시기인 1975년 11월30일까지 고리 2호기를 짓기 위한 차관 주선에 실패해 계약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영준(金榮俊)씨가 한전 사장에 취임해(1976년 1월) 웨스팅하우스와 새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해결되었다(1976년 11월 재계약 체결).

    그리하여 1호기보다 용량이 큰 65만㎾의 고리 2호기 공사가 1977년 3월1일 시작돼 박 대통령 사후인 1983년 7월25일 준공되었다. 고리 2호기보다 한 발짝 먼저 완공된 것이 ‘그 유명한’ 월성 1호기이다. 고리 1·2호기는 경수로이지만 월성 1호기는 중수로이다.

    경수로는 원자로를 열고 한꺼번에 핵연료를 교체한다. 경수로의 핵연료 교체는 1년에 한 번 정도 있는 ‘행사’이므로 이때가 되면 IAEA의 감시가 집중돼 경수로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빼돌릴 수 없다. 하지만 중수로는 원자로를 가동하는 와중에 핵연료를 교체한다. 하루에도 열 개 이상의 핵연료를 원자로에서 뽑아낼 수 있어 IAEA의 감시 카메라를 벗어날 여지가 있다. 이렇게 뽑아낸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면 원자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캐나다는 왜 중수로를 개발했나

    중수로는 캐나다원자력공사(AECL·Atomic Energy of Canada Limited)가 개발한 것이다. 캐나다가 중수로를 개발하게 된 데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캐나다는 지금도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는 영연방 가운데 하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캐나다는 영국과 함께 움직였다. 영국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며 캐나다군이 유럽전선에 참전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캐나다를 자국 영토처럼 생각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영국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기간 중 영국도 독일을 이기기 위해 핵폭탄을 연구했는데, 이 시기 독일 공군이 집중적으로 영국을 폭격했다. 그로 인해 핵폭탄 연구에 어려움을 느낀 영국은 과학자들을 캐나다로 보내 연구에 전념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 경제는 엉망이었다. 그로 인해 캐나다에 파견된 과학자들이 귀국을 포기하고 캐나다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캐나다는 미국과 달리 중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경수로나 가스냉각로는 수백t이 넘는 쇳덩어리이므로 중공업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제작할 수가 없다.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도 상당한 시설이 필요한데 캐나다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캐나다에는 우라늄이 무진장이라고 할 정도로 널려 있었다. 또 수력발전이 풍부해 전기를 이용해 중수(重水)를 만들 수 있었다.

    우라늄광석을 선광(選鑛)해 정련하는 과정을 거치면 천연 우라늄을 얻을 수 있다. 천연 우라늄은 농축 단계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235가 0.72% 정도 함유돼 있다. 천연 우라늄은 자연 상태에서는 핵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나 중수를 만나면 핵분열을 일으킨다. 중수를 많이 넣어주면 핵분열이 빨라지고 줄이면 늦어질 정도로, 천연 우라늄은 중수의 양에 따라 핵분열 속도가 변화한다.

    농축 시설을 가질 수 없었던 캐나다는 천연 우라늄을 중수에 반응시켜 핵분열을 하는 원자로를 만들기로 했다. 핵연료는 ‘펠렛(pellet)’이라고 하는데, 펠렛은 담배 필터와 그 모양이 비슷하다. 직경이 50원짜리 동전보다 작고 크기와 모양은 담배 필터와 비슷한 펠렛 한 개에서는 4인 가족이 8개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기가 나온다.

    이러한 펠렛은 연료봉(棒)이라고 하는 속이 빈 통 속에 집어넣는데 경수로 연료봉 속에는 240개이 펠렛이, 중수로 연료봉에는 29개의 펠렛이 들어간다. 이러한 연료봉을 묶어 핵연료 다발을 만든다.

    경수로용 핵연료 다발에는 236개의 연료봉이 묶이고, 중수로용 핵연료 다발에는 37개의 연료봉이 묶인다. 경수로용 핵연료 다발은 사각형으로 만드나, 중수로용 핵연료 다발은 원통형으로 만든다. 경수로에는 모두 177개의 핵연료 다발이, 중수로에는 4560개의 핵연료 다발이 장전된다.

    중수로용 핵연료 다발은 길이가 49.5㎝, 지름은 10.2㎝, 무게 23.7㎏인데, 이 다발 12개가 중수로에 들어가 중수를 만나 핵분열을 일으킨다. 캐나다는 큰 원자로를 만들 만큼 중공업이 발전하지 못해 작은 원자로를 만들고 이 원자로를 여러 개 묶어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월성원전은 이러한 원자로 380개로 구성돼 있는데, 작은 원자로 덩어리를 ‘칼란드리아(Calandria)’라고 한다.

    중수로 이용해 핵 개발한 인도

    각각의 원자로 속에는 12개의 핵연료 다발이 들어가므로 칼란드리아 안에는 모두 4560개의 핵연료가 들어간다(380×12=4560). 이 4560개의 핵연료 가운데 매일 16개의 핵연료(핵연료 다발)가 교체된다. 다 탄 핵연료(사용후핵연료) 16개를 꺼내고 새로운 핵연료 16개를 채우는 것이다. 이때 핵연료를 교체하는 중수로만 가동을 멈춘다. 나머지 원자로는 계속 가동하는 것이다. 하루에 16개의 사용후핵연료를 꺼낼 수 있으므로 핵폭탄을 만들 의지가 있는 나라는 캐나다에서 만든 중수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캐나다는 이러한 원자로를 1947년에 개발했다. NRX(National Research X-metal or X-perimental)라는 이름의 실험용 원자로를 그해 7월22일 초크리버 연구소 안에 준공한 것이다. 이 원자로는 플루토늄을 얻는 데 매우 좋았으므로 미국은 NRX 원자로를 수입했다. 캐나다는 원자로를 수출하는 국가 반열에 올랐는데 이때 콜롬보계획이 시작되었다.

    콜롬보계획은 1950년 1월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에서 열린 영연방 외무장관회의에서 캐나다의 제안으로 채택된 아시아 제국 원조 계획이다.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여유 있는 영연방 국가가 인도나 스리랑카 등 어려운 영연방국가를 6년 동안(1951~56년) 돕는다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 내용이었다(이후 이 기간은 연장되었다). 콜롬보계획이 입안되자 미국과 일본도 동남아 제국을 지원하겠다며 참가했다.

    콜롬보계획의 일환으로 캐나다는 1956년 CIRUS (Canada-India-Reactor-United States)라는 이름의 중수로를 인도에 제공했다. CIRUS(사이루스) 원자로 도입 비용은 1700만달러였는데 이중 950만달러를 캐나다가 지원했다. 이 원자로에 미국을 뜻하는 US가 붙은 것은 미국이 이 원자로에서 사용할 중수를 공급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인도에 수출된 예가 있어 몇몇 나라가 캐나다산 중수로 도입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과 대만이었다.

    한국과 캐나다의 접촉은 1973년 4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그레이 총재가 한국에 와 청와대와 상공부 과기처 한전을 방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중수로 도입을 주도한 사람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현경호(玄京鎬) 박사였다. 현 박사는 특정 국가(미국)의 원자로만 도입하면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그 나라에 예속된다는 이유로 원자로 도입 다변화를 주장했다.

    그해 6월 현 박사는 조사단을 이끌고 캐나다로 가 현지조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 직후 1차 석유위기가 발생하자 정부는 원전 도입을 서둘렀다. 1974년 1월27일 캐나다와 중수로 도입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한국이 캐나다산 중수로 도입을 빨리 진행하게 된 데는 아이젠버그도 한몫했다. 영국 가스냉각로의 에이전트를 했던 아이젠버그는 캐나다산 중수로의 에이전트로 활동했다. 계약이 체결된 후 그는 캐나다 원자력공사로부터 1800만달러의 중개료를 받아, 그중 일부를 이후락씨 등 당시 공화당 실세에게 리베이트로 건네주었다고 한다.

    김영준 사장, 중수로 건설 강행

    한국이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중수로를 도입했는지는 오원철(吳源哲·78) 당시 대통령경제2수석 등 중수로 도입에 관여했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1972년 캐나다에 있던 교포 학자 김경하씨를 영입한 북한이 1975년 g 단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첩보가 있었던 만큼 박정희 정부도 핵 개발 의지를 불태웠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런 까닭으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중수로를 도입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의심은 인도가 일으킨 사건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박정희의 테크닉

    카슈미르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파키스탄과 오랫동안 분쟁해온 인도가 1974년 5월 비밀리에 핵실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핵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한 것처럼 핵실험 후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하지 않고 그냥 ‘눙치고’ 지나간 것이다. 문제는 인도가 캐나다에서 공급받은 CIRUS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미국과 IAEA는 중수로를 도입하려는 나라에 대해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은 캐나다에서 NRX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대만에 압력을 넣어 NRX 원자로를 폐기하도록 했다. 1971년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과 닉슨 대통령이 차례로 중국을 방문해 중국과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데탕트 시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반(反) 중국 세력인 대만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NRX 원자로를 갖고 있는 것이 확인되자 중국은 미국에 대해 대만에 있는 이 원자로를 폐기하게 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캐나다와 미국의 선의(善意)를 감쪽같이 속인 인도로 인해 한국의 중수로 도입도 무기한 연기되었다. 진퇴양난의 이 문제를 1976년 취임한 김영준 한전 사장이 풀었다. 애초 한국은 캐나다로부터 중수로는 물론이고 중수로 설계 기술까지 몽땅 도입할 계획이었다. 김 사장은 이러한 계획을 버리고 ‘한국은 순수 발전 목적으로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이니 의심을 살 만한 기술은 제외하고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미국의 의심을 풀고 중수로와 그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

    김사장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인 1975년 4월23일 박정희 정부는 1970년 발효된 NPT(핵확산 방지조약)에 비준함으로써 국제적인 의심을 제거해 주었다. 이로써 월성에 중수로 건설 공사가 시작됐는데, 월성 1호기는 고리 2호기에 앞서 1983년 4월 준공되었다. 이후 한국은 월성에 같은 형의 원자로 3기를 더 지음으로써 도합 4기의 중수로를 가진 나라로 발전했다.

    인도의 핵실험으로 인해 가장 손해를 본 나라는 대만이다. 한국은 김영준 한전사장의 결단 덕분에 중수로를 도입할 수 있었으나 재처리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핵 개발 의지를 피력함으로써 미국을 긴장시켰다. 미국은 박정희 정부를 달래기 위해 ‘핵우산을 제공하겠다, 주한미군을 줄이지 않겠다’는 등의 약속을 거듭해서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원자로도 받고 핵우산도 받고 안보도 지원받는 테크닉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국의 발전원별 발전소 설비용량(2005년)
    구분 원자력 기력 복합화력 내연력 수력 집단·대체 합계
    설비용량(만kW) 1,771.6 2,381.1 1,501.4 29.7 388.3 153.7 6,225.8
    점유율(%) 28.5 38.2 24.1 0.5 6.2 2.5 100.0
    자료 - 제199호 전력통계(한국전력공사)


    한국의 연도별 발전설비 용량 및 원자력의 점유율 (단위 : 만kW, %)
          구분

    연도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총 발전

    설비용량
    2,875.0 3,218.4 3,571.5 4,104.2 4,340.6 4,697.8 4,845.1 5,085.9 5,380.1 5,605.3 5,996.1 6,225.8
    원자력

    설비용량
    761.6 861.6 961.6 1,031.6 1,201.6 1,371.6 1,371.6 1,371.6 1,571.6 1,571.6 1,671.6 1,771.6
    원자력

    점유율
    26.5 26.8 26.9 25.1 27.7 29.2 28.3 27.0 29.2 28.1 27.9 28.5
    자료 - 제199호 전력통계(한국전력공사)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3부

    한국내 총발전량 속의 원전 발전량과 그 점유율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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