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원전 종합설계회사 ‘한국전력기술’

96% 기술 자립…4% 핵심기술 독립 위해 총력

  • 천근영 에너지경제신문 기자 eewn@chol.com

    입력2006-12-15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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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자력발전소 종합설계 회사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한국전력기술. 동일 모델인 한국표준형 원전 8기를 반복 설계하면서 기술력을 쌓은 이 회사는 일부 핵심 기술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술을 독자적으로 보유했다. 그러나 아직 핵심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 턴키 방식 원전 수출에는 한계가 있는데….
    원전 종합설계회사 ‘한국전력기술’

    2005년 10월31일 한국전력기술은 WEC와 기술 제공 계약을 체결했다.

    2005년 10월31일, 원전을 비롯한 발전(發電)플랜트 종합설계사인 한국전력기술(이하 한기) 원자력사업단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미국의 원전 기자재 전문회사인 WEC(Westinghouse Electric Co)사가 발주한 신형 원전 AP1000 건설 프로젝트인 뉴스타트(NuStart) 사업에서, 한기가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등 구조물과 배관 설계사업을 1600만달러에 수주 계약한 것을 자축하는 파티였다.

    용역비는 고작 1600만달러에 불과하지만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것은 발주사가 20여 년 전 한국에 가압경수로를 턴키(Turn-key)로 판매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압경수로를 판매한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는 일본의 도시바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WEC가 되었다. 한기는 2007년까지 2년 동안 원전 설계기술자 80여 명을 미국에 보내 원자로 계통설계는 물론이고 종합설계를 지원한다. 한기는 31년 설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전 종주국인 미국에서 신설되는 원전 설계 프로젝트를 따낸 것이다.

    이듬해인 2006년 8월3일, 한기는 미국의 발전플랜트 종합설계회사인 벡텔(Bechtel)사가 요청한 26명의 원전 설계기술자 파견을 위한 계약에도 서명했다. 26명의 설계기술자는 올해 7월28일 이미 벡텔 본사에 파견돼 있던 인력과 합류해 신규 원전 설계와 가동 원전의 설비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기술력을 제공하고 있다. 벡텔사는 올해 안에 추가로 20~30명의 기술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상태라 모두 80여 명의 설계기술자가 미국으로 건너가 4년 동안 총 700만달러를 벌어들이게 됐다.

    원전 불모지에서 세계 톱 클래스 설계 전문회사로

    103기(基)의 원전을 보유해, 세계 최대 원전국이자 원전 종주국인 미국이 예전에 원전기술을 전수해준 한국 설계회사의 기술자를 급히 불러들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상업용 원전 설계 기술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979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리마일 섬 원전에서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한 후 미국은 신규 원전 건설을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새 원전을 짓지 않았으니 상업용 원전 설계 기술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반면 한기는 한국의 첫 원전인 고리 1호기부터 지난달에 계약을 체결한 신고리 3, 4호기 그리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지원한 대북 경수로까지 20기가 넘는 상업용 원전 설계에 참여해 현장 경험과 실전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의 박기철 신월성사업소장은 “원전 반복 건설에 따른 한국의 경험과 노하우는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어, 경수로 원전 설계 능력은 원전 종주국인 미국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원전 종합설계를 할 수 있는 회사는 한기를 포함해 10개사 미만이다. 원전 기술 선도국인 미국에서는 벡텔과 S·L, S·W 3개 사가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아레바(Areva), 영국의 AMEC, 러시아의 AEP, 캐나다의 AECL , 일본의 미쓰비시와 히타치·도시바가 원전 종합설계를 할 수 있는 회사들이다.

    원전 아키텍처 엔지니어링 전문

    일본, 캐나다, 프랑스의 회사들은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같은 기자재 제작과 종합설계를 함께 한다. 따라서 순수 설계 전문회사는 한기를 포함해 6~7개사뿐이다.

    한기는 원전기술 자립정책 덕분에 단기간에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1975년 10월 ‘Korea Atomic Burns · Roe’ 사로 출범했다. 그런데 이듬해 Burns · Roe 사가 경영난에 빠져 떨어져 나가면서 사명이 지금의 한기로 바뀌었다. 한기는 미국 벡텔사와 고리 원전 3·4호기, 영광 원전 1·2호기 설계를 함께 하면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원전 종합설계회사 ‘한국전력기술’

    한국전력기술 본사.

    당시 원자력연구소의 안전해석실장이던 한기인 한기 원자력사업단장은 “설계 자립 없이는 원전사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수백명의 설계인력을 정책적으로 키웠다”고 했다. 한기는 1983년 한국전력의 자회사가 되고 이어 영광 3·4호기의 주계약자가 되면서 지금과 같은 종합전력기술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한기는 고리 3·4호기, 울진 1호기 설계에 연 800명의 인력을 투입해 설계 경험을 축적했다. 그리고 고급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교육훈련과 기술개발에 총 매출액의 20% 이상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1995년 영광 3호기가 상업운전에 성공함으로써 한기는 경수로형 원전 설계기술의 자립도를 95%까지 끌어올렸다.

    한기는 1996년 12월 정부의 원전산업 구조개편에 따라 원전 설계의 핵심인 원자로계통설계 사업을 원자력연구소로부터 이관받아 원전 종합설계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원전 아키텍처 엔지니어링 회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 조치를 계기로 한기는 원전의 핵심이자 1차계통인 핵증기 공급계통, 즉 원자로 계통설계(NSSS·Nuclear Steam Supply System)와 2차계통인 터빈·발전기 계통설계 그리고 보조설비계통(BOP·Balance of Plant)을 아우르는 종합설계사로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됐다.

    한기가 원전 종합설계 사업자로서 수행한 프로젝트는 월성 2호기, 영광 3·4·5· 6호기, 울진 3·4·5·6호기 등 총 11기. 현재 신고리 1호기와 신월성 1호기를 설계 중이다. 이어 신고리 3·4호기 설계에 도전하는데 신고리 3·4호기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짓는 140만㎾급 차세대 원전이라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전 1기를 설계하기 위해 제작되는 도면과 자료는 A4 용지로 9만장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설계도와 자료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원전이 만들어진다.

    한기가 설계한 영광 3호기는 1995년 미국의 ‘파워 엔지니어링’지(誌)가 선정한 세계 최우수 프로젝트상을 받았고, 월성 2~4호기는 2000년 캐나다의 CNS가 수여하는 존 S 휴위트 팀 어치브먼트상(John S Hewitt Team Achievement Award)을 수상했다.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한기는 한국 원전의 간판 격이라 할 한국표준형원전인 울진 3호기를 탄생시켰다. 울진 3·4호기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종료된 KEDO의 대북 지원 원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장인순 고문은 “한국표준형원전은 국내 원전 건설 사상 처음으로 국내 설계진과 기관이 성능 보증과 책임을 포함한 전체관리를 주도한 원전이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프랑스·일본·독일 ·러시아 등 선진국만이 보유하고 있는 원자로 계통설계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 원전 역사의 새 장을 연 중대 사건이다”라고 평가했다.

    목표는 턴키 수출

    한기는 원전 설계기술자 1100여 명, 연구인력 100여 명 등 1200여 명의 설계전문가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연 매출액의 10%가 넘는 370여억원을 연구개발비에 투입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목표는 해외 원전 종합설계시장 진출이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한기는 한국표준형원자로를 토대로 한 100만㎾ 원자로인 OPR-1000(Optimized Power Reactor-1000)을 설계한 경험과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를 턴키 방식으로 수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기는 원전 플랜트 설계의 핵심인 노심 및 원자로 계통분야 설계 계산을 위한 전산 프로그램을 완전 국산화했다. 그러나 원천 기술은 미국에서 도입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기술을 전수한 미국 회사가 특허를 풀어주지 않으면 한기는 턴키 방식으로는 해외에 진출할 수 없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중국이 지난해 광둥(廣東) 원전 공사를 발주하면서 한국을 원천 기술 미보유국으로 분류해 입찰 참가자격을 주지 않은 것이다. 독자 개발한 노형과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면 제3국에 기술을 이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인지라 한기는 반론을 내놓지 못했다.

    인터뷰·임성춘 한국전력기술 사장

    “10년 경험 기술자 1000여 명 거느린 최고의 설계회사”


    원전 종합설계회사 ‘한국전력기술’
    ▼ 한기의 현 위치를 어떻게 자평하는가.

    “원전 원천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미국과 프랑스 영국 정도이고, 원전 종합설계를 할 수 있는 회사는 10개 이내다. 한기도 이러한 회사 가운데 하나인데, 경험이 많다보니 설계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톱 클래스에 이르렀다.

    한기는 미국 정부가 제3자 이전을 제한하고 있는 ‘노심 및 원자로 계통분야 설계 계산 전산 프로그램’ 10여 개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국산화했다. 한기의 설계 자립도는 96% 정도이다. 한기는 지난 20년간 국내에서 건설된 10여 기 원전의 설계를 전담했으므로 현장 설계 능력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 원전 수출사업자로서 한기의 목표는 무엇인가.

    “한국의 원전산업 목표는 원전 턴키(Turn-key) 수출이다. 즉 100만㎾급인 OPR-1000 원전을 통째로 수주해 시운전까지 한 상태에서 발주자에게 키를 넘겨주자는 것이 목표이다. 이를 위해선 원전의 종합설계 능력을 갖춰야 한다. 수출 경쟁력을 가진 노형(爐型)을 개발하고 완벽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그리고 2만여 개에 달하는 보조기기 제작에 기준이 되는 재질과 규격을 설계하고 주설비 건설공사와 시공 설계 그리고 이를 사이트에 조화롭게 디자인하는 것이 한기에 주어진 임무이다. 이른바 아키텍처 엔지니어링을 실현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구매 기기의 검사 업무도 포함된다. 원전 시공 3년 전부터 시운전까지의 8년여 동안 설계작업을 계속해 원전 구조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종합설계능력을 확보할 수 없다. 한기는 이러한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턴키 수출을 하고자 한다.”

    ▼ 한기의 강점은 무엇인가.

    “지난 30년 동안 계속해서 원전을 설계해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특히 동일 노형을 8기나 반복 설계해 숙련도가 높다. 원전 설계에 투입되는 인력은 5년 이상의 실전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한기는 원자로 노심과 계통, 원전연료, 기자재 등 전 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설계 전문인력을 1000여 명 거느리고 있다.”

    ▼ 한기는 원천기술이 없어 지난해 중국이 발주한 신설 원전 입찰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한기의 설계 자립도는 어느 정도이고, 완전 자립 시기는 언제로 예상하는가.

    “원전기술의 고도화 정책에 따라 한기가 거의 모든 부분의 기술을 국산화한 것은 1995년 영광 3·4호기를 완공했을 때이다.

    중국의 광둥 원전 입찰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기가 갖고 있는 노심 계산 전산 프로그램 중 일부가 미국의 WEC나 ABB-CE(과거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에서 개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과거 한국에 기술을 제공한 회사인데, 미국 정부는 자국의 기술을 제공받은 회사가 이 기술을 제3국으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특허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한기는 10여 개 프로그램을 제외한 기술은 거의 국산화했다. 2012년이면 극히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독립기술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려면 설계기술을 완전 국산화해야 한다. 한기는 원전 설계기술 선진화 방침에 따라 150여 개 프로그램을 국산화하기로 했는데 이 중 3분의 2인 100여 개의 기술을 국산화했다. 그리고 40여 개의 기술을 2012년까지 국산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울러 원전의 열수력 계통과 안전규제, 중대사고와 기자재의 재질, 인간공학, 대형로(爐)인 차세대 원전과 소형 중심의 미래 원전 개발을 위한 7개 국제 프로그램에 참여해, 원전 종합설계사로서의 발언권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원전 수출은 기술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원전을 지으려고 하는 나라에 자금을 끌어다줄 자금조달능력과 외교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정부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중국의 원전 기술인력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적극적으로 교육 훈련하는 것은 원전 수출을 위한 외교력 확보 전략의 일환이다.

    기술수출 시장 개척

    턴키 방식 수출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부문별 수출은 이미 이뤄지고 있다. 이 회사의 유정무 사업개발부장은 “1999년 대만 룽먼 원전의 기술인력 지원 용역을 시작으로 미국의 벡텔과 팔로버디 스톤 앤 웹스터, 중국의 링둥 원전의 기술자문에 응했고, 중국의 링아오 원전 2차 주제어실 환경 설계 등 10여 건의 기술지원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미국이 원전 신설을 검토하면서 가동 중인 원전의 성능개선 수요가 많아졌다. 가동 중인 원전의 성능을 개량하는 기술 수출 전망도 밝은 편이다”라고 덧붙였다.

    2000년 이전까지 단 2건에 600여만달러이던 한기의 해외 수주 실적은 2000년 이후 8건에 2700여만달러로 급증했다. 물론 기술수출 대상국이 미국과 중국, 대만 등 일부 국가에 제한돼 있긴 하지만 수출액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면 북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간접자본이 전력이다. 전력원 확보를 위해 원전 건설이 시작된다면, 한기는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전무후무(前無後無)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북한시장에서 쌓은 경험과 독자 기술은 한국의 원전 턴키 수출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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