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IMF 체제’ 의미 논쟁

기업 모험 가로막는 ‘주주자본주의 시장개혁’

  • 정승일 국민대 겸임교수·경제학 sijeong11@hanafos.com

    입력2007-01-15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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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체제’ 의미 논쟁

    소액주주 운동을 일으킨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부의 시장개혁 방향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때 세계는 아시아의 4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주목했다. 이들 국가의 경제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30년에 걸쳐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구가했으며 국민소득은 수십배로 늘어났다.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농업이 주력이던 보잘것없는 한국 경제가 1990년대 중반에는 세계시장에서 선진국과 기술과 브랜드로 경쟁하는 대기업을 보유한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은 ‘동아시아의 시대’였다. 서구의 언론과 학자들은 일본의 도요타 모델과 대만의 중소기업, 한국의 재벌체제 등 동아시아 특유의 비즈니스 모델의 성공비결을 알아내려고 분주했다. 일본과 한국, 대만에서 뚜렷했던 정부의 산업정책과 인허가 정책, 은행통제, 외환통제, 외국인 지분 제한 같은 다양한 개입주의 정책과 제도가 성공비결로 알려졌다. 시장주의 경제학의 관점을 강력히 옹호하는 세계은행마저 1993년 ‘동아시아의 기적’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동아시아의 높은 투자율과 저축률, 낮은 인플레율, 균형재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양호한 빈부격차 등의 성과를 극찬했다.

    ‘시장개혁’의 일방적 승리

    그러나 일본의 1990년대 장기 불황에 이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이러한 긍정적 논의 지형을 극적으로 뒤집었다. 정부의 다양한 개입조치,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성공요인으로 간주되던 대기업집단의 선단식 경영,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 평생직장 같은 한국 특유의 제도는 모두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모럴 해저드, 고비용 저효율의 원천으로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IMF 위기를 계기로 국내외 여론과 정책형성 과정을 좌우하게 된 시장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시장개혁’ 방향타를 장악했다.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을 포함한 ‘시장개혁’은 개혁진보 시민단체의 열렬한 후원과 압력을 받으며 진행됐다. 재정경제부의 변양호, 참여연대의 장하성 등 한국 경제의 시장주의적 재편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IMF 위기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 ‘위장된 축복’이었던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개혁가들은 과거의 잘못된 경제체제를 고치려고 노력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 특히 관치금융과 재벌의 독점적 지배라는 반(反)시장적 요소를 개선하기 위해 자본시장 완전개방, 공기업 민영화, 외국투자자에 대한 규제 폐지, 금융규제 완화, 기업지배구조 개혁 조치가 이뤄졌다. 이러한 개혁 정책이 시장원리와 규율을 확산해 경제와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재벌의 독식을 막아 경제의 공정성을 높이고 분배를 개선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들은 지식기반 경제 또는 혁신주도형 경제를 이룩하기 위해 과거와 같은 ‘요소 투입형’ 경제성장보다는 기술혁신에 기초를 둔 ‘총요소 생산성 기여형’ 성장이 더욱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 기술혁신 지향적이라고 가정된 영미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외환위기 이후 투자 위축, 왜?

    이들의 목표는 대부분 실현됐다. 재벌개혁 과정에서 30대 그룹 중 대우 등 10여 그룹이 해체됐다. 살아남은 그룹들도 부채비율을 급격히 낮춰 재무구조를 개선했고 계열기업 수를 줄여 핵심역량을 강화했다. 또한 소액주주권 신장과 적대적 인수합병(M·A) 활성화 조치와 결합된 출자총액제한 강화, 그리고 사외이사제도 도입 등과 결합된 주주가치 경영 패러다임이 정착되면서 오늘날 상장기업은 주식투자자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일견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빨리 외환위기에서 탈출했다.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과 은행은 사상 최대의 경상이익과 순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됐고 수출 또한 사상 최대 규모를 달성했다.

    하지만 시장개혁 성과가 가시화하는 2001년부터 한국 경제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단적인 예로 제조업 설비투자는 1990년대 초반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국민경제 규모가 2배 이상 성장한 것을 감안하면 3분의 1로 떨어진 셈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극소수의 글로벌 우량기업을 빼면 대다수 대기업은 지난 8년간 설비투자규모를 줄여왔다.

    연구개발(R·D) 투자도 마찬가지다. 삼성, LG, 현대차, SK, 포스코 등 20∼30개 대기업이 투자를 늘리고 있을 뿐, 나머지는 지난 8년 동안 거의 제자리걸음을 했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욱 심각한데, 1999년 이후의 벤처투자 붐 때 잠깐 늘었던 중소·벤처기업의 기술개발 투자는 2003년 이후 감소하고 있으며 설비투자도 줄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대기업의 현금보유고가 급격히 늘고 있는데도 투자는 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2002년 47조원으로 1991∼97년 평균인 20조원보다 2.3배나 늘어났다. 2006년 중반에는 다시 78조원으로 늘어났다. 적어도 대기업의 경우 돈이 없어 투자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다른 이유란 무엇일까.

    보수논객들은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고 반(反)기업적 정서를 고무해서 기업이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 투자는 기피하고 해외 투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시각이다. 투자 부진 현상은 최근에 불거진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지속됐기 때문이다.

    보수논객들은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 시각(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에서 규제완화 만능론을 내세우는데, 무분별한 규제완화는 경제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불필요한 규제는 물론 폐지돼야 한다. 하지만 IMF 위기는 1990년대 초·중반 김영삼 정부가 금융규제 및 산업규제를 무분별하게 완화한 결과였다. 해외 차입이 폭증하고 종금사가 난립하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신용카드업 규제완화를 단행한 것도 결국 카드대란으로 불거졌다.

    기업은 불안하다!

    이에 반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시민단체에 포진한 이른바 ‘개혁 성향’ 인사들은 박정희 시스템의 유물인 관치금융과 재벌체제 개혁이 아직도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경제 문제는 시장원리가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자본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더욱 높이고 소액주주권 강화 및 상시적인 적대적 M·A 위협을 통해 기업의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 견해에 동조하면서 출자총액제한 강화와 순환출자 금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금융과 산업의 분리) 등의 개혁조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열린우리당의 경제정책 라인도 대동소이하다. 이들은 재계가 요구하는 차등의결권(지배주주에게 보통주의 수십배 의결권을 주자는 것)과 ‘독약처방(기존 주주에게 싼 값에 신주를 제공하는 것)’ 등 선진국들이 허용하는 다양한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에 대해 ‘국제자본시장 투자자의 요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완강히 반대한다.

    지금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1997년 환란 이후 추구한 개혁정책이 불충분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정책의 방향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란 이후 추구한 시장개혁의 궁극적인 목표가 주주자본주의라는 점이 문제다. 1998년 이후 도입된 금융구조와 기업지배구조를 핵심으로 형성된 새로운 제도적 환경, 주주자본주의는 기업의 장기 투자를 구조적으로 양극화하고 있다.

    첫째, 소액주주권 강화와 적대적 M·A 활성화, 그리고 이를 위한 출자총액제한 강화 및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과 각종 경영권 방어제도의 폐지, 회계투명성 강화, 사외이사 권한 강화 등을 축으로 진행된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결과, 국내외 주식투자자들이 기업의 투자의사결정(기업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

    둘째, 기업들의 대대적인 부채비율 감축과 함께 추진된 금융개혁은 은행 등 금융기관의 해외 매각과 외국인 지분보유 급증, 그리고 ‘바젤1과 바젤2(기업의 신용에 따라 대출금리 차등화)’ 등 은행의 자기자본 건전성 규제와 결합돼 은행의 행태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투자 리스크 홀로 감당

    선진국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발 공업국은 높은 투자위험, 즉 손실 가능성을 사회적으로 분산, 공유하는 투자 리스크 공유체제를 가동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업은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는다. 과거 한국의 재벌은 투자위험을 1차적으로 계열사들과 공유했다. 다양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 내부 자본시장을 형성해 위험을 분산했다. 어떤 계열사가 새 사업을 벌이면 영업이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현금흐름이 양호한 다른 계열사가 지원했다.

    ‘IMF 체제’ 의미 논쟁

    한국의 부동산 투기 열풍은 중국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중국 부동산 투자 설명회장.

    이 덕분에 재벌은 신규 업종으로 진출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에서 짧으면 수년, 길면 10년 동안 영업이익을 창출하지 못해도 개의치 않고 투자를 계속했다. 이런 체제였기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투자율을 30년간 유지하면서 설비투자와 R·D 투자를 늘렸다. 그것을 동력으로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하지만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여론과 경제관료, 정치인을 지배한 주주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이 같은 계열사간 투자 리스크 공유체제를 모럴 해저드의 원천으로 봤다. 1997년 동아시아와 한국의 경제위기는 재벌의 이렇듯 잘못된 기업지배구조와 그로 인한 모럴 해저드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주주자본주의 이념에 따라 지난 8년간 진행된 기업지배구조와 금융개혁의 목표는 재벌 계열사의 투자위험 상호공유 체제를 폐기하고, 나아가 은행과 정부도 부분적으로 분담해온 투자 리스크 공유체제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업의 재무관리에서 나타났다.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장기 투자를 유발하던 과거의 느슨한 현금흐름 관리체제는 사라졌다. 대신 매우 엄격하고 단기적인 현금흐름 관리체제가 등장했다. 1년 혹은 6개월 안에 영업수익과 현금흐름이 창출되지 않으면 그 사업부나 회사는 존속 여부를 의심받게 됐다. 영업수익과 현금흐름이 좋은 회사가 그렇지 못한 계열회사를 지원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특히 투자자의 이해관계를 조직 내에서 대변하는 IR담당 임원이 회사의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단기적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경영은 상장 대기업에서 확고하게 정착했다.

    모험하지 말라!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신규투자 확대 혹은 신사업 진출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계열사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데다 바젤 규제와 주주가치 경영의 제약에 직면한 은행도 과거와 달리 곤경에 빠진 고객 기업을 지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렇듯 장기 투자에 수반하는 모든 투자 리스크, 즉 손실(혹은 파산)의 위험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끔찍한 상황을 맞았다. 같은 규모의 신규 투자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불확실성 또는 위험이 과거보다 몇 배나 커졌다. 장기적으로 투자하려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은 자체적 현금창출 능력, 즉 수익창출 능력을 보유해야 한다. 이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선뜻 투자확대에 나설 수 없다. 전반적 투자 부진은 ‘시장개혁’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간 기술력 축적과 선진국 시장 개척에 소홀했던 상당수 대기업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들이 영위하는 업종은 대부분 중저가 기술영역이고 중국이 맹렬하게 따라오고 있는 것들이다. 추격을 피하려면 고부가가치 제품과 첨단기술에 도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수행할 경영진과 기술인력, 조직문화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과감한 투자와 모험적인 시장개척을 허용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주주자본주의와 단기 현금흐름 중시 체제가 이를 막고 있다. 강행할 경우 주가하락과 경영권 위협이라는 ‘처벌 메커니즘’이 작동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나마 일어나는 투자는 업종을 고도화하는 모험적 기술혁신보다는 중저가 기술이 여전히 통용되는 중국과 동남아 시장으로 기존 설비를 이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당장 매출을 늘리고 수익을 내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10년 앞을 내다본다면 중국산 중저가 제품에 먹혀버릴 것이 자명하다. 아울러 국내 제조업은 공동화(空洞化)하고, 수많은 일자리가 중국으로 옮겨갈 것이다.

    신자유주의형 금융구조 정착에 따른 가계대출 및 주택담보대출 폭증과 55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의 유동화, 그리고 이 자금의 부동산시장 유입이 초래한 전국적 투기 열풍을 보라. 원-달러 환율변동에 따른 막대한 외국인 투자자금의 국내증시 유입과 이탈도 불안정성을 낳는 요인이다. 이것도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킨다.

    그로 인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화되고 서민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진다. 주주자본주의에 노출되고 현금흐름, 재무중시 등 미국식 경영관행 조직절차를 대거 도입한 대기업은 단기 수익성 확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건비 절약과 하도급 단가 절약에 나선다. 그 결과 비정규직과 생계형 자영업자가 끊임없이 늘어난다. 중산층 붕괴와 저소득층의 소비지출 감소는 내수시장 위축을 야기한다. 매출이 좋은 수출업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도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요구로 수익성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개방화, 시장화가 초래하는 이런 심각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2005년 11월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주최하면서 한국이 ‘무역과 투자의 세계화’ 물결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6년 들어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통해 급진적인 시장주의 개혁을 예고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와 불안정을 낳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에 동참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반세계화 물결에 동참하는 것이 옳은가. 둘 다 답이 될 수 없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시장주의적 개방화론에 내포된 무장해제식 세계화론은 위험하다. 무대안적 반세계화론도 우리 처지에는 맞지 않다. ‘방비된(무장된) 혹은 관리된 세계화’를 내포하는 ‘관리된, 조절된 시장경제’가 우리가 택해야 할 대안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운용해온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의 강소국(强小國)에서 배워야 한다.

    북유럽의 강소국들은 어떤 대내적 조절장치로 세계화와 시장화에 따른 위험과 불안정성에 대비하고 있을까. 먼저 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보육, 노후, 의료, 교육) 제도를 갖추고 있다. 수준 높은 사회복지는 수혜계층의 소비를 늘려 내수시장 위축을 막아 내수기업의 투자와 성장을 활성화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수준 높은 사회복지와 소득 재분배가 단지 ‘분배’만으로 끝나지 않고 높은 ‘성장’으로 선순환하도록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펴고 있다. 질 높은 직업교육훈련 제도를 운용하며 양질의 노동력을 기업에 공급한다. 분배라는 말만 들어도 분개하는 성장우선주의 보수논객들이 정말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이들 국가의 정부는 적극적인 과학기술 정책과 산업정책을 통해 지식기반산업을 창출하고 육성하는 데 앞장선다. 단순한 완전고용이 아닌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주력한다. 한국에서도 산자부, 과기부, 정통부 등 여러 부처가 이와 유사한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복지정책 및 노동시장 정책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다.

    북유럽 강소국에는 우리처럼 재벌형 기업집단이 많은데, 이들은 한국 재벌과는 달리 높은 투명성과 확고한 경영권 방어제도로 안정된 법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누린다. 그리고 기업집단 오너들도 높은 누진소득세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고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으로 명예와 존경을 얻고 있다.

    우리의 재벌개혁에 있어서도 기업집단의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과 함께 차등의결권 같은 다양한 적대적 M·A 방어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제적 투자자들도 합리성을 인정하는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다양한 법제도적 혁신이 요구된다. 이를 통해 재벌그룹의 기업지배구조를 안정화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영권 공백이 더 큰 문제

    물론 기업지배구조 안정화의 목적은 단순히 총수가족의 지배권 보호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잘못된 재벌개혁 과정에서 파괴된 그룹 계열사간 투자위험 공유체제를 되살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78조원에 달하는 현금을 움켜쥐고도 우왕좌왕하면서 투자를 주저하는 대기업이 다시 과감한 장기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리하여 대기업이 자본시장 투자자와 총수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성장과 기술혁신,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국민경제에 기여하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IMF 체제’ 의미 논쟁
    정승일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석사(사회과학),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정치경제학)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現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연구위원 겸 국민대 경제학부 겸임교수

    공저: ‘쾌도난마 한국경제’, ‘한국경제가 사라진다’


    이와 함께 재벌총수 가족과 후계자들이 보유재산으로 다양한 사회적, 과학적, 문화적 공헌활동을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와 언론, 지식인의 존경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재벌의 편법상속 문제도 재벌가족에 대한 조세정의 실현이라는 좁은 차원이 아닌, 한국 최대 기업집단의 경영권 공백 가능성과 직결된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새롭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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