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점입가경, 한나라당의 ‘호남 모시기’

예산지원 최우선, 반성 또 반성… 동토에서 싹 틀까?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입력2007-02-05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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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과 호남 사이에는 큰 강이 가로 놓여 있다. 수십년째 흐르고 있는 강이다. ‘광주학살’의 비극에서 불균형 개발, 인사차별, 지역감정이라는 부유물이 떠다닌다. 양안(兩岸)은 왕래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다리가 놓인다고 한다. 과연 제대로 된 다리일까.
    점입가경, 한나라당의 ‘호남 모시기’

    1987년 11월29일 광주시민들이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후보 유세 연단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유세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양쪽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부유물을 걷어내는 작업도 한창이다. 하지만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짓지도 못한 채 부서질 가능성도 많다. 2007년 12월. 그때가 되어야 판정 가능한 일이다.

    호남과 한나라당을 엮는 하나의 사건은 광주민주항쟁이다. 그 그림자는 지금도 한나라당에 짙게 드리워져 있고, 호남 사람들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5·18이라는 프리즘으로 걸러서 바라본다.

    한나라당과 호남의 파국 시점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을까.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나라당에는, 호남 출신이면서도 1980년대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사무처 공채 직원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20여 년간 한나라당과 그 전신 정당을 위해 일해온 이른바 ‘호남 민정 기수’들이 많다. 그 중 한 명인 A씨의 얘기다.

    1980년대 중반까진 사이 좋았다?

    “1984년 공채로 들어왔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때까지 호남에선 민정당에 대한 공분(公憤)이 있지 않았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정도였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정부의 선전술에 묻혔던 측면도 있다.”



    지금의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많은 사람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정권이 많은 광주시민을 죽인 직후부터 반독재, 반민정당 정서가 호남을 뒤덮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호남 출신 민정당 공채 기수 B씨의 얘기다.

    “내 동기가 70여 명 됐는데 순수 호남 출신이 5명이었다. 당시에도 호남 사람들은 민정당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호남 사람들이 반민정당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길로 민정당 공채를 선택했지만 주위에선 ‘왜 하필 거기냐’는 정도였지, 대놓고 반대하거나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1980년대에 치러진 각종 선거 결과는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1981년 3월25일 치러진 11대 총선 결과를 보자. 당시 민주정의당은 전남에서 유효투표 159만1229표 중 49만3757표를 얻어 1위를 기록했고 의원 10명을 배출했다. 물론 중선거구제 선거였던 데다 명목상의 야당만이 있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지금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다. 당시 민정당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아주 싸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민당 돌풍이 몰아친 1985년 12대 총선 결과도 궤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민정당은 전남(유효투표수 178만2729)에서 63만7292표를, 전북(108만6294)에서 39만9758표를 얻어 각각 11명, 7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런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1987년과 88년을 지나면서였다. 6월 항쟁과 6·29선언을 지나 치러진 1987년 대선을 보자. 전남에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유효투표수 149만8755표 가운데 7.95%인 11만9229표를 얻는 데 그쳤다.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는 무려 87.9%인 131만7990표였다. 노 후보는 전북에선 13.7%, 광주에선 4.7%의 득표에 그쳤다. 지역분할 구도의 시작이었고, 호남이 민정당과 본격적으로 벽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가 아닌, 1987년 대선 때였다.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 결과는 민정당에 더 비참했다. 민정당은 호남지역 37개 선거구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소선거구제로 바뀐 상황이었다 해도 이전과는 분위기가 영판 달랐다. 호남인들은 민정당에 대한 시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당시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각종 관련 이야기가 봇물 터지 듯 쏟아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호남 지역에서 민정당 관계자로 있던 C씨는 “호남 사람들은 누가 볼세라 가슴 깊숙이 넣어두고만 있던 민정당과 집권세력에 대한 응어리를 이때부터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민정당 당원 집 담벼락에는 자고 나면 시뻘건 색 글자로 욕설이 씌어져 있곤 했다. 린치 사건도 잇따랐다. 봉변을 당한 민정당원이 많았다. 이전까지 잘 지내던 동네 주민들이 민정당원이라는 이유로 굴비처럼 엮어서 인민재판 하듯 두들겨 팬 일도 있었다. 민정당 관계자는 쉽게 말해 ‘왕따’였다. 하루아침에 천양지차 분위기가 됐다.”

    이회창 호남 전략은 ‘포기’

    가슴 깊이 잠복해 있던 감정이 한번 표출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여기에다 ‘김대중’이라는 정치적 구심체도 등장한 상황이었다. 호남인들은 김대중이란 이름 아래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때의 분위기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공보특보를 맡고 있는 이정현씨는 이렇게 정의한다. 그 역시 호남 출신이다.

    “호남의 분위기는 ‘우리도 우리 지역 출신 대통령을 한번 가져보자’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이 선택의 제1 기준이 됐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념’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DJ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줄곧 호남인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992년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호남 지역에서 3%대라는 최악의 득표율에 그쳐야 했다. 이 같은 득표율은 1997년, 2002년 대선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1997년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맞붙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광주에서 1만3294표, 전북에서 5만3114표, 전남에서 4만1534표를 얻었다. 전체 호남 지역 유효 투표자수 329만여 표 가운데 3.2% 득표였다. 호남과의 골이 이처럼 깊어졌지만 한나라당은 다가서지 못했다. 이회창 총재 시절의 한나라당의 대 호남 전략은 한마디로 ‘포기’였다. 당 관계자였던 C씨의 설명이다.

    “호남은 사실상 포기했다. 호남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반사이익을 챙기자는 생각을 했다. 삼고초려니, 지원이니 이런 것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발버둥도 없었다. 더더욱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입지를 꺾어놓고 말았다.”

    또 다른 관계자 D씨는 “그쪽이 그렇게 냉대하니 이쪽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예산 배정, 전국구 배정, 당직 배려 등은 최근에나 등장한 일이다. 심지어 호남 예산을 깎아서 나눠 갖기도 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이회창 후보는 호남을 좀처럼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도 호남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는지 한인옥 여사가 대신 호남을 찾곤 했다. 하지만 떠들썩하게 호남으로 오지는 않았다. 잠행하다시피 와서는 지역 단체, 유력인사를 만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도 2002년 3월까지였다. 이후 한나라당은 호남을 사실상 선거운동 지역에서 제외했다.

    결국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광주에서 얻은 표는 2만6869표, 전북에서 거둔 표는 6만5334표, 전남은 5만3074표였다. 5년 전보다 약간 나아지긴 했다. 상대가 부산 출신 노무현 후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호남과 한나라당 사이에 파인 골은 복구불능처럼 보였다.

    ‘720표’ 쇼크

    호남의 한나라당 배척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절정에 이른다. 1인2표제가 처음 실시된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광주에서 얻은 정당 득표는 ‘720표’였다. 58만5716명이나 투표했지만 제1야당 한나라당이 이런 득표를 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존폐 위기에 있던 자민련이 광주에서 얻은 표가 2144표였다. 한나라당의 광주 득표율은 호남의 한나라당 배척 ‘결정판’을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호남의 배척이 절정에 달했던 2004년, 한나라당 안에서 비로소 ‘서진(西進)’이란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번의 대선 패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엔 2004년 당 대표로 한나라당의 전면에 선 박근혜 당시 대표의 역할이 컸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 어쩌면 호남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박 대표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먼저 ‘서진’을 얘기하면서 호남으로 가자고 얘기한다.

    “지금같이 지역으로 갈라져서는 미래가 없다. 국민이 화합하지 않고는 경제회생이나 국가발전이 있을 수 없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박 대표가 서진을 외치면서 내세운 명분이었다. 한나라당은 그간 건널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강 위에 다리를 놓으려 한 것이다. 여기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정권 재창출 등의 열망이 충족되어 호남인의 응어리진 마음이 어느 정도는 풀어진 배경도 있었다. ‘10년 야당’ 한나라당의 처지는 호남인의 눈에도 그리 화려해 보이진 않았다.

    그해 6월 한나라당 안에 지역화합발전특위가 구성된다. ‘더 이상 호남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일치가 당내에서도 이뤄진 것이다. 한나라당은 당내 호남 출신 의원 인맥을 총동원했다. 위원장은 부산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영호남 민간교류 회장을 지낸 정의화 의원이 맡았다. 김덕룡, 심재철, 진영, 김애실, 배일도 의원 등 호남 출신이 위원으로 망라됐다. 심지어 호남 인접 지역구 출신이라는 이유로 박희태, 이강두 위원도 고문으로 가세했다. 당시 정의화 위원장은 특위 위원들을 향해 “위원 전원이 호남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라는 각오를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박근혜, 강재섭의 사과

    그해 8월 박근혜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유신 시절 가해자의 딸과 최대 피해자, 영남과 호남의 만남.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 피해를 당하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

    “과거에 대해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하다. 정치를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지내온 것은 사실이지만 박 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준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 대표는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의 적임자”라는 덕담까지 건넸다.

    며칠 뒤 한나라당의 의원 연찬회가 전남 구례에서 열린다. 전남에서 열린 한나라당 행사라는 점은 주목받았다. 연찬회 마지막 날 의원들이 광주 망월동 묘역을 단체참배 계획을 잡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의원들로부터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망월동을 찾아 고개를 숙인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의원들이 한나라당 안에는 꽤 있었다. 그러나 참배는 강행됐다. 다음은 당시 ‘한국일보’ 기사 내용이다.

    “한나라당 의원 90여 명이 30일 광주 5·18묘역을 참배했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 몇몇 의원은 전에 참배한 적이 있지만 당 차원의 단체 참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표는 5·18 묘역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나라당 의원들을 다 모시고 와서 뜻이 깊다’며 ‘우리가 노력해 (호남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주 의원총회에서 참배를 반대했던 일부 영남권 비주류 중진 의원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용갑, 이상배 의원은 각각 건강과 일본 방문을 이유로 아예 연찬회에 불참했다. 이방호 의원은 연찬회에 참석했지만 참배는 거부했다. 수도권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5·18묘역 참배에 반대했던 이재창 의원도 불참했다. 이 의원은 ‘실질적으로 호남 배려를 못하면서 마음에 없이 도와주는 척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이유를 댔다. 반면 참배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안택수 의원은 ‘언론에 잘못 알려졌고 이번이 두 번째 참배’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2004년 7월 전당대회를 광주에서 여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계획안은 중도에 휴지통으로 가야 했다. 실무진이 밝힌 이유는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였지만 속내는 달랐다. “굳이 전당대회를 광주에서 해야 하느냐”는 당내 반감이 작용했다. 한 TK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영남에서 지지율 몇 퍼센트 더 끌어올릴 생각을 하고 노력하는 게 차기 대권을 봐서는 더욱 현실적이고 생산적이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다 놓친다.”

    이른바 ‘집토끼론’이다. 이 같은 당내 밑바닥 정서는 광명시장의 호남 폄훼 발언 등으로 직접적으로 표출된 바 있다.

    또 한 가지 소묘를 보자. 구례 연찬회와 5·18 묘역 참배를 마친 정의화 의원과 박형준 의원은 따로 전남대를 찾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전남대 방문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원들은 전남대 총장 등과의 지방대학 육성방안 간담회를 잘 마쳤지만 나오는 길에 학생 70여 명에 의해 가로막혔다. ‘국가보안법 철폐’ ‘한나라당 해체’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기세가 등등했다. 달걀까지 날아왔다. 정 의원은 “지방대학 육성을 논의하기 위해 방문했다. 변화한 한나라당을 지켜봐달라”며 겨우 학생들을 무마해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진 초반, 호남과 한나라당 사이에 파인 골의 깊이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남에 다가가려는 한나라당의 노력은 ‘쇼’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계속됐다. 박 대표의 바통을 이어받은 강재섭 대표도 누구보다 서진에 앞장섰다. 그는 지난해 8월 광주를 찾아 “호남선 복선화에 36년, 광주 고속화도로 완공에 17년이 걸리는 등 동서 균형발전이 미흡했다. 인재 발굴과 활용 면에서도 차별이 있었다”며 당 차원에서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10월 전남 해남·진도 재선거 지원유세에서도 “5·18과 호남 소외정책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무렵부터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도 거푸 호남을 찾았고, 당내 특위 의원들의 호남행 발길도 잦았다. 특히 예산 배정에 있어 한나라당은 호남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2006년 7월 이후 10% 돌파

    한나라당은 2007년 예산 통과를 앞둔 2006년 11월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이 직접 광주·전남·전북을 방문, 이 지역 광역단체들과 예산 당정회의를 하면서 “지역전략 사업 예산을 반드시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한나라당 지도부는 예결위 계수조정 소위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호남 예산은 무조건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결국 광주의 경우 광주솔라시티센터 건립 예산 등 100억원대, 전남의 경우 압해-암태 새천년대교 건설 예산 등 140억원대의 예산이 한나라당의 노력으로 증액됐다. 한나라당 예결위 관계자는 “당 차원에서 1순위로 호남을 챙겼다”며 “오히려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일까. 2006년 들어 호남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10%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호남 지지도는 20%를 넘어섰다. 2006년 7월27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 따르면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정당 지지도는 11.3%를 기록했다. 9월14일 조사에서도 11.9%를 기록했다. 12월12일 조사에서도 10.3%로 나왔다.

    전조가 있었다. 2006년 10월25일 실시된 전남 해남·진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8.2%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전 선거에서의 득표율과 비교하면 경이적인 숫자였다. “동토(凍土)에서 희망의 싹을 틔웠다”는 자평이 나오기도 했다.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의 2007년 신년 여론조사. 호남의 한나라당 지지율은 14.8%를 기록했다. 명실상부 두 자리 수 지지율 행진을 새해에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호남에서의 지지율 상승이란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 내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시각이 나온다. .

    첫째는 그간 기울여온 한나라당 서진(西進)의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서진은 지지율 상승의 토대는 되었을지언정 곧장 지지율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해석에는 대다수 정치권 인사가 동의하지 않는다.

    둘째는 이른바 반사이득이다. 여당의 실정(失政)으로 갈 곳 없는 호남 표심의 상당수가 한나라당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정현씨의 말이다.

    “호남 사람들이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이라는 경상도 사람을 밀었다. 호남 사람 한화갑을 제치고 대통령을 만들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한 일이 민주당을 깨는 것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들어 유지해온 당이다. 호남 사람들은 허탈과 배신감에 빠졌다. 나아가 노무현 정권은 실패했다. 호남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호남 민심은 지금 무주공산이다. 정치적 공동화 현상에 빠졌다. 허탈하고 허무하고 배신감에 차 있다. 여권에선 이런 것을 추슬러줄 지도자도 없고 명분도 잃어버렸다.”

    “盧, 상처에 소금 뿌려”

    이렇게 정치적 공동화에 빠진 호남 표심이 5·31지방선거 이후 한나라당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는 이를 ‘홧김에 서방질’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원적지를 가진 상당수 수도권 유권자들이 실제로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했고, 이것이 이후 이들의 고향인 호남에 거주하는 유권자에게까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호남에서의 한나라당 지지율 곡선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호남 지역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은 3.0~4.8%(광주일보, KBC, 한국갤럽 공동조사)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410개에 달하는 호남 지역 자치단체장과 광역·기초의원 의석 중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광주시장 선거에 출마한 한영 한나라당 후보는 3.9%, 전남지사 선거에 나선 박재순 후보는 5.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방선거가 직후인 6월13일 조사에서는 한나라당의 호남 지지율은 3.3%에 불과했다.

    수도권 ‘호남 원적자’가 움직였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한나라당 지지율이 눈에 뛰게 뛰어오른 것이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한귀영 연구실장의 해석이다.

    “지방선거에서 호남 원적지를 가진 수도권 유권자의 상당수가 한나라당이 낸 시장, 구청장 후보들을 선택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반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표심이 시간차를 두고 남하해 고향인 호남으로 내려간 것이다. 이전에도 보면 호남 민심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호남 출신 인사들의 표심은 결합력이 상당히 강했다.”

    셋째는 대선주자에 대한 지지가 한나라당 지지율에 반영됐다고 보는 것이다. 한나라당 대선주자에 대한 높은 호감도 때문에 반(反)한나라당 정서가 현저히 약화됐다는 얘기다. 언론사들의 신년 여론조사를 보면 이명박 전 시장의 경우 호남에서 2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 전 시장의 호남 지역 지지도 상승은 다소 의외인 측면도 있다. 이 같은 지지도 상승에 대해 이 전 시장측은 ‘경제를 살려달라’는 실용주의가 먹혀들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다음은 이 전 시장이 최근 한 말이다.

    “호남 민심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올 때는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이룬다는 생각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 목표는 경제발전이다. 호남은 소외감과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농업이 위협을 받고 있고 공장이 없어 젊은층 일자리가 줄었다. 시대적 바람이 달라지고 있다. 나에 대한 호남의 지지는 결코 허수가 아니다. 호남인들의 의식이 ‘실사구시’로 흐르고 있다.”

    이 전 시장은 특이하다. 그는 TK 출신이지만 TK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정치권에도 오래 몸담지 않았다. ‘기업인’ ‘서울시장’ 경력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이 호남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호남의 10~20%대 한나라당 후보 지지세가 2007년 12월 대선 투표일까지 이어질 것인가’이다. 이는 한나라당을 향한 호남 민심이 ‘진짜’ 변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먼저 ‘변화’ 쪽에 방점을 찍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나라당 참정치운동본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영세 의원은 “호남에서 금기가 풀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1월 호남에서의 체험담을 얘기했다.

    “1월 참정치운동 행사차 광주 무등산을 찾았다. 산 정상에 플래카드를 펼치고 있는데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관심을 보이더라. 이전 같으면 ‘놀고 있네’ 정도의 야유가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더라. ‘한나라당 정말 잘해주세요’라고 하더라. 말 속에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호남에서 한나라당을 찍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게 됐다.”

    임태희 여의도연구소장도 최근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호남에 제2지역구 갖기 운동’을 주도하는 등 서진에 공을 들이는 의원이기도 하다. 그는 목포시가 다섯 번째로 임명한 목포 명예시민이기도 하다.

    “2005년 목포시 의회를 처음 찾았을 때 시의원들의 냉소적 시선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나에게 달려온다. 민주당 지역구 의원이 있지만 나와 터놓고 대화할 정도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호남에 다가가지 말고 진정성을 더 보여줘야 한다. 그러면 호남인들은 한나라당을 포용할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엔 호남 표심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한 TK 출신 의원의 얘기다.

    “호남 표심은 절대로 한나라당에 오지 않을 것이다. 호남 표심은 대단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이다. 지금의 지지가 대선에서 표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은 순진하다. 대선은 어차피 양자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되든 여권 후보가 결정되는 순간 호남은 그쪽으로 몰릴 것이다.”

    “결국 다시 쏠릴 것”

    정치전문가들은 이 같은 양쪽의 분석 가운데 어느 한쪽도 부인하지 않는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의 애기다.

    “호남의 한나라당 지지는 현 정권에 화난 일부 호남 민심이 일시적으로 가 있는 것으로 유동적인 것이다. 호남은 지금 전폭적 지지를 보낼 ‘명분’ 있는 후보를 찾고 있다. 명분 있는 후보가 나서면 언제든 여권으로 돌아설 것이다.”

    KSOI 연구실장 한귀영씨도 “호남은 지금은 차선을 선택했지만 최선의 후보가 나오면 그쪽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2007년 대선에서는 호남이 이전처럼 철저하게 한나라당을 배척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와 같은 지역 총결집 현상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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