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자본이 푼돈 빼앗고 권력이 얕잡아 보면 언제든 다시 거리로 뛰어들 것”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7-02-06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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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고사 1세대…1987년 고려대 논술문제 ‘평등에 대해 논하라’

    ‘삶의 방향타’ 강만길 교수 “역사는 강의실이 아니라 거리에 있다”

    광주항쟁 화보집 ‘죽음을 넘어 사선을 넘어’가 운동권 입문서

    당시 주사파 문과대 학생회장은 비리로 구속된 청와대 행정관

    시위 권하는 교수들, 입학 1년 만에 전공과목 첫 시험 본 신입생들



    고향 부모님 호통 “데모 안 하고 왜 내려왔냐, 우리도 하는데!”

    DJ ‘비판적 지지’ 놓고 사분오열된 동기들

    사학과 최고의 주사파 이론가, 뉴라이트운동의 핵심 되다

    “우린 너무 진지했다. 그게 탈이었다.”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기자는 1987년 3월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석 달 만에 6·10 항쟁이라는 도도한 물결을 체험했고 6·29 선언을 목도했다. 6월항쟁은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권이 다져놓은 민주화의 텃밭에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양심적 시민들이 씨를 뿌려 거둔 ‘무혈혁명’의 과실이었다. 그래서 87학번들은 학생운동권에서 ‘승리의 학번’으로 불린다. 386세대의 막내 격인 그들은 입학하자마자 군부독재를 상대로 한 첫 싸움에서 승리를 맛봤다. 물론 그 과정에는 박종철, 이한열의 가슴아픈 희생이 있었다.

    민주화 1세대인 87학번은 그들이 이뤄낸 5년 단임제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그해 말에 치렀다. 그후 5년마다 직선제 대통령을 뽑았고 사회생활 3~4년차이던 입학 10년 후(1997년)에는 IMF 관리체제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해 12월에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입학 15년 후인 2002년에는 6월항쟁 이후 가장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는 월드컵에 열광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그해 12월이었다. 87학번들은 학생운동권 안에서 가장 많은 연애 스캔들을 터뜨린 것으로 유명한데, ‘87학번’이라는 연애소설이 탄생하기도 했다.

    대학 입학 20년이 되는 해이자 민주화 20년째인 올해에는 정초부터 대통령이 개헌 논란을 촉발해 시끌시끌하다.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역사의 아이러니 같다. 6월항쟁 때 목이 터지도록 소리친 구호가 ‘호헌철폐, 직선쟁취’였다. 20년 전 오늘도 귀가 따갑도록 ‘개헌’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87학번만큼 ‘민주화 20년’의 삶을 제대로 압축해 보여줄 수 있는 세대가 또 있겠는가. 87학번 중에서도 특히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상징성은 더하다. 6월항쟁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던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당시 의장은 이인영 현 열린우리당 의원)의 지도부가 고려대에 있었고, 그중에서도 사학과엔 학생운동의 각 정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또 역사라는 학문 자체가 주는 무게감은 사학과 신입생을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 고려대 사학과를 대표하는 인물은 강만길(姜萬吉·74) 교수(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로 1980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해직됐다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의 호는 ‘여사(黎史)’. ‘검을 여(黎)’자는 관(冠)을 쓰지 않아 검은 맨머리를 드러낸 사람들 즉 민중을 가리킨다. 그의 호에는 민중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추운 겨울에도 교수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학생들의 인생 상담을 마다않던 강 교수는 사학과 학생의 정치적 방향타이자 학문적 지표였다.

    운동권 밥줄 된 논술시험

    1월9일, 오랜만에 고대 사학과 동기회 모임에 나갔다. 이날 모임은 고대 87학번 전체 동기회에서 입학 20주년, 민주화 20주년 모교 방문행사를 하는데 사학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 마련됐다. 87학번들은 그만큼 1987년 6월을 특별한 감정으로 추억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유대감을 나누고 있다.

    기자가 “이제 우리도 불혹(不惑)이다. 6·10 항쟁이 있은 지 벌써 20년이고 우리가 입학한 지도 20년이 지났다”고 하자 이곳저곳에서 탄성과 신음이 교차했다.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군의 노제(오른쪽)와 그해 6월9일 직격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군.

    이날 모임에는 1993년 졸업한 이래 16년간 동기회장 자리를 장기 집권하고 있는 박석훈(대우건설 영업부 차장), 고대 주사파 운동권의 이론가 노릇을 하다 지금은 뉴라이트 운동에 뛰어든 김배균(정치웹진 뉴라이트 폴리젠 조직위원장), 13년째 국사 교사를 하고 있는 고재원(용인외고 교사), 대학 때부터 지금껏 주야장천으로 통일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강진구(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집행위원장), 중국 유학을 다녀와 최근 동양사 박사학위를 받은 김진우(고대 사학과 시간강사), 20년이 지나도 친구들을 웃기는 이승훈(YTN 국제부 차장), 무슨 일에든 늘 열심인 박희성(크라운베이커리 CN팀장), 12년간의 시민운동가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생활인’으로 변신한 김태수(ING 생명 FC), 쇼핑몰 바이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편의점 사장이 된 정웅(구리 GS마트 대표), 그리고 15년째 신문사 밥을 먹고 있는 기자 등 10명의 동기가 참석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우리는 20년 전의 공간으로 훌쩍 날아갔다. 20년의 시공을 초월했기에 대학 시절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혹은 누군가로부터 아픔을 당하게 한 정치적 앙금이나 사상적 강요는 더 이상 묻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추억일 뿐이었다.

    87학번은 요즘 사교육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논술고사의 원조 세대다. 전두환 정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85년도 대학입시에 논술고사를 도입했다가 1987년에 폐지했다. 그래서 86, 87학번만 논술고사를 본 것이다. 이후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이던 97학번 이후 논술이 다시 살아났다. 꼭 10년 만에 논술이 부활한 것. 동기들은 아직도 87년도 고대 논술고사 문제를 기억한다. 당시 시국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평등에 대해 논하라. 부제 : 절대적 불평등을 중심으로’

    고교시절 웬만큼 책을 많이 읽었거나 시국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손도 대기 어려운 정치철학적 주제였다. 친구들은 “그때는 고대 전체가 너무 진지하고 진보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고대에는 사학과의 강만길·이상신 교수를 위시해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 정외과 최장집, 철학과 김용옥 교수 등 쟁쟁한 진보적 학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군부독재에 항거해 삭발한 교수도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논술이 10년 만에 부활된 것으로 옮겨갔다. 논술 부활이 사교육 광풍의 주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 친구가 “그래도 이해찬이 논술 부활해서 운동권 출신들 밥벌이 할 길을 만들어주지 않았냐”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사실이 그렇다. 서울 강남 학원가의 잘 나가는 논술강사나 논술학원장 중에는 운동권 출신이 많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도 2000년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박승흡(르몽드 코리아 대표이사)씨가 5년간 논술강사를 하며 번 돈을 토대로 설립됐다. 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이 고대 사학과 87학번 김주환인데, 그는 6월항쟁 때 사학과 과대표로서 동기들을 진두지휘했고,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직업 운동가다. 비정규노동센터 창립 멤버이자 전임 기획국장인 박영삼도 과 동기로, 현재 한국노총 기획조정실장을 맡고 있다.

    눈물, 눈물, 눈물

    운동권 출신은 논술에 강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경험을 했다. 학생운동권은 대자보와 기관지, 학회지, ‘피(성명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고, 그러다보니 논객이자 이론가가 됐다. 밤을 새워가며 탐독한 사회과학 서적은 과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줬고, 끊임없이 찍어낸 대자보, 성명서, 기관지, 학회지는 문장 서사구조와 기술(記述)의 노하우를 체득케 했다. 뉴라이트운동을 하는 김배균과 더불어 노동운동가 김주환, 박영삼도 비록 학생운동권 내의 정파는 달랐지만 사학과 87학번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문필가였다. 박영삼은 진보적 노동계 신문인 ‘매일노동뉴스’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대학생활은 눈물로 시작했다. 겨우내 대운동장에 쌓여있던 최루탄 가루는 봄이 되면서 사람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눈을 자극했다. 입학식 때는 가족들도 함께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프레시맨’의 낭만을 즐기던 신입생은 사학과 학회실을 들락거리면서 또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죽음을 넘어 사선을 넘어’라는 광주학살 화보집을 본 동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군의 노제(오른쪽)와 그해 6월9일 직격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군.

    한쪽 머리가 날아가고 없는 시체, 유방이 잘린 여자, 군홧발로 시민을 짓밟는 군인들,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 1980년 ‘광주사태’를 불순분자들의 폭거쯤으로 알고 있던 신입생들에게 광주의 진실은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뿌리채 흔들었다. 당시 특급 금서(禁書)였던 그 책은 운동권에서 ‘너머 너머’로 불렸다. 기자는 그 책을 가지고 다니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연행된 적이 있다. 운 좋게도 관할 성북경찰서장이 과 선배인 덕분에 풀려나올 수 있었다.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과 동기들은 무섭게 변해갔다. ‘왜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신입생들은 사학과 각 학회에 가입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에 눈을 뜬다.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뛰어드는 친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사학과 신입생들의 ‘의식화 교육용’ 도서로는 ‘철학에세이’ ‘사이공의 횐 옷’ ‘철학강좌’ ‘세계철학사’ ‘우리동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마르크스 입문’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과 헤겔 관련 책들이 떠오른다.

    입학하고 얼마 후에는 그해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군의 사인이 물고문이었으며 경찰이 조직적으로 이를 은폐했다는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면서 신입생들은 또 한번 ‘잠’을 깼다.

    교수도 운동, 학생도 운동

    당시 사학과 학생회는 1985년 미문화원 점거 사태와 1986년 건국대 사건(단일 시국사건으로는 최대인 1290명 구속)으로 구속된 선배들 때문에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거기에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학생회 사무실은 화염병 제조공장을 방불케 했다.

    한 과에서 10명이 넘는 학생이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자 선배들은 소위 언더서클(비클)을 사학과 내 학회에 조직하기 시작했다. 사학과에는 한국사, 서양사, 동양사, 역사철학 학회가 있었다. 학생운동 진영은 전대협이 속한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 계열과 CA(제헌의회)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실질적 운동의 하부조직은 전대협이 주도하는 과 학회였다. 당시 고려대 문과대학 학생회장은 사학과 85학번인 여택수 학형이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초기 청와대 행정관으로 있다 대통령 측근 비리에 얽혀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제헌의회 그룹은 1986년 대규모 구속 사태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와해 일보직전에 있었고, 주류 그룹이던 NLPDR 그룹 내에도 정통 주사파, 민족해방 비주사계열(NL 비주사파), 민중민주혁명계열(후에 PD계열로 분화) 등 다양한 정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1학년이던 사학과 87학번들은 그저 군부독재의 잔인함과 비민주성에 분노하고 사회정의에 목말라 있었다. 그들이 각종 시위에 참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학기 초까지만 해도 ‘혁명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 할 만한 동기들은 드물었다. 그러나 학기말로 가면서 운동권으로 편입된 동기들은 여러 정파로 갈라져 서로 다른 현장에서 싸움을 전개해갔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 정권은 야당인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뿌리치며 호헌을 선언했고, 이에 전대협은 신민당을 비롯한 재야시민운동단체와 결합해 직선제 쟁취 투쟁을 벌였다. 제헌의회 그룹은 “신민당 보수세력이 하는 직선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민중계급이 직접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바꿔야 한다”며 이 싸움의 대열에서 벗어났다. 사학과 87학번 100명 중 약 50%는 학과 내 각 학회에서, 30%는 서클(지금의 ‘동아리’)에서 이 싸움에 동참했다. 나머지 20%는 정서적으로는 민주화 투쟁에 공감했지만 선뜻 시위 대열에 합류하진 못하고 있었다. 기자도 거기에 속했다.

    4월 말,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많은 과 동기와 선배들은 비를 맞으며 대운동장과 정문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현재 인터넷 관련 기업에 다니는 김용만과 제일기획 카피라이터를 하다 시를 쓰겠다고 홀연히 사라진 이광수, 그리고 기자는 “시위에 나가야 하나, 수업을 들어야 하나”를 망설이다 강만길 교수를 찾았다. 강 교수는 웃으면서 “난 은하수 담배 안 사다주면 이야기 안 하는데”라고 했다(강 교수는 엄청난 골초였다). 그날, 장고(長考) 끝에 강 교수가 우리에게 들려준 말은 이러했다.

    “나도 자네들 같은 자식이 있네. 아버지로서는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하겠네. 하지만 사학과 교수로서 역사학도들에게 말하라고 하면…지금 역사는 강의실이 아니라 대운동장과 거리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네. 답이 됐는가.”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6월 항쟁 당시 87학번 고려대 사학과 대표였던 김주환 한국비정규노동 센터 부소장과 그 동기인 박석훈, 오강국, 정웅, 김배균(왼쪽부터 차례로).

    결국 수업에 들어가지 말고 시위에 동참하라는 얘기였다. 강 교수는 아버지가 아니었고, 우리는 어쨌든 역사학도였다. 이후 사학과 동기들은 전공수업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수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학과 전공과목 강의는 학생회에서 줄줄이 수업거부를 하거나 교수들 스스로 시험을 리포트로 대체했다. 그 후 사학과 동기생들을 전공시험장에서 다시 만난 것은 1987년 12월 대선이 진보진영의 패배로 끝나고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인 1988년 1월이었다. 학과 전체가 대선 싸움을 한다고 시험을 미뤄 겨울방학 중에 시험을 치르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아! 이한열

    과 동기들 대부분은 그 해 5월과 6월을 길거리와 철야 농성장에서 보냈다. 5월23일 종로 비폭력 연좌시위를 거쳐 전대협 소속 23개 대학이 5월27일부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재야·시민·사회단체 연합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이미 5월말부터 6·10 국민대회를 예고해놓고 있었다. 당일 행동규칙까지 보도가 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회 하루 전인 6월9일 연세대 86학번 이한열군이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이 쏜 직격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 현장에 기자도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연세대 정문은 고려대처럼 정문 앞에 오르막이나 턱이 없어 도망가기가 여의치 않고, 직격탄이 날아올 확률도 높았다. 이한열은 27일간 생명을 부지하다 끝내 숨을 거뒀지만, 시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6월10일 전국의 대학생들은 일단 고려대로 집결한 후 종로, 대학로, 명동, 시청으로 진출했다. 고려대 운동장은 1만여 명의 대학생으로 가득 찼고, 이미 종로-시청-서울역에 이르는 거리에는 100만명이 운집해 있었다. 그날 경찰에 연행된 참가자만 3831명. 과 동기 중 일부는 명동성당에 들어가 집단 농성을 벌였지만 대부분은 학교로 돌아왔다. 이후 가두행진은 전국적으로 계속됐고 여기에는 넥타이 부대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일반 시민들도 적극 동참했다.

    그 사이 몸이 아파 잠깐 고향으로 내려갔던 기자는 부모님으로부터 “대학생이 데모 안 하고 왜 내려왔냐. 우리도 여기서 데모하는데…”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 다시 상경해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어머니는 시장바구니를 든 채 가두행진에 동참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구두에는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전두환 정권과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이던 노태우 대표위원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던 시위대의 해산 방안을 고민하다 결국 6월29일 “호헌을 철회하고 직선제를 수용한다”고 선언했다. 노태우 후보는 결코 유쾌한 낯빛이 아니었다. 왠지 못마땅하고 뭔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발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 동기들은 6·29를 ‘속이구’라고 불렀다. 진정성이 없는 ‘쇼’라는 의미였다. 노 후보의 별명은 ‘노가리’였는데 그 때문인지 많은 대학생이 술안주로 노가리를 즐겼다. 한 접시 열 마리에 500원으로 값도 저렴했다. 그때 얼마나 노가리를 씹어댔는지 요즘은 노가리를 보기만 해도 질린다.

    6·29 선언 이후 87학번 동기들은 대통령 선거를 앞우고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우선 운동권 내부에 균열이 생겼다. 직선제는 싸워서 얻어냈는데, 과연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1노 3김 체제에서 전대협 지도부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자 많은 학생이 전대협에서 이탈해 새로운 학생조직을 만들었다. NL 비주사 계열과 PD그룹이 분화한 것도 그때다.

    PD 준비 그룹과 CA ‘잔당’(제헌의회 부활 소수파)들은 민중후보 백기완씨를 지지했지만 그는 대선을 코앞에 두고 후보자리에서 물러났다. 결국 민주진영의 표가 흩어지면서 노태우 후보가 승리를 거머쥔다.

    주사파의 기억

    대선이 끝난 후 87학번 동기들은 1988년 봄이 올 때까지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여러 동기들이 운동권 주변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이제 제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6월을 함께 보낸 과 동기들 중 절반가량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나머지는 각 운동권 진영에서 공부를 계속하거나 자체 조직을 만들어갔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으로 전대협의 중심이던 고대 총학이 1987년 11월 선거에서 NL계열에서 PD계열로 교체됐다. 학생운동사에서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일로 기록된다. 전통적으로 고대는 NL 주사파 계열이 장악해왔기 때문이다. 1988년, PD 총학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주사파 계열에 자리를 내줬다. PD 총학은 주사파에 실망한 일반 학생들이 집중 지원해 당선됐지만 하부 세력이 전혀 없었다. 각 단과대 학생회장은 모두 NL 계열이라 학교 전체 차원의 집회조차 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만큼 학생운동 안에서 NL계열과 PD계열의 정파투쟁이 가열됐다.

    1988년 5월 국민주 모집을 통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과 학생회가 이 신문을 배달하는 지국 노릇을 했다. 87학번 동기 중에는 월세와 하숙비를 쪼개어 주식을 산 이들도 꽤 있었다. 친구들은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 한겨레신문을 배달했다. 당시 점집이 몰려 있던 미아리 산 꼭대기에서 신문을 받아보던 선배가 사학과 87학번들의 강력한 항의로 배달처를 학교로 옮긴 해프닝도 있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한겨레신문은 사학과 동기 대다수로부터 욕을 먹고 있다. 그 때 산 주식의 반환운동을 해야 한다는 동기들도 있다.

    동기 김배균은 전대협에 활동가를 공급했던 자주대오라는 학생회에 속해 운동권 활동을 계속했다. 그가 본격적인 주사파가 된 것도 이때였다. 그는 1987년 겨울부터 김일성의 일대기를 다룬 ‘불멸의 총서’(‘봄우뢰’ ‘닻은 올랐다’)를 읽고 ‘조선혁명의 진로’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 수령관, 후계자론에 대한 공부를 진행했다. 그러고는 학교에 남아 꾸준히 후배들을 주사파로 교육시키며 조직사업을 했다. 언젠가 기자가 그의 주사파 선배 자취방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 선배는 단파방송으로 나오는 북한 노래를 악보에다 받아적고 있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김배균을 위시한 사학과 내 주사파들은 통일운동을 계속 펼치며 총학생회 활동에도 간여했다.

    이후 기자도 주체사상론을 공부했는데, 수령론을 읽고 나서 ‘이것은 사회과학이나 철학서가 아니라 종교서적이다’고 생각했다. 품성론은 꼭 조선왕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세습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사상’이라고 포장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자 정운영

    사학과 한쪽에서는 ‘사회주의는 무엇이고 마르크스, 레닌은 누구인가’를 철저히 학문적으로 공부하려는 그룹도 생겨났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저서들을 독일어 원전과 일본어 번역본으로 읽으며 우리 사회에서 과연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한가를 모색하는 그룹이었다. 이들은 고대 한문학과 장원철 선생(전임강사)을 중심으로 맹자의 혁명사상을 한문 원전으로 해독하고 3개 외국어를 동시에 공부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기자도 합류했다. 그야말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공부에만 매달렸던 시기다.

    1988년 ‘강단 PD파’로 유명했던 정운영(전 경기대 교수, 중앙일보 논설위원)씨가 고대 경제학과에서 정치경제학원론을 강의했는데, 300명이 들어가는 대강당에 학생들이 복도에까지 앉아 수업을 받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당시 주사파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는 고대에서의 고별 강연에서 “선생님에게 사회주의 혁명은 신념입니까 과학입니까”라는 한 학생의 질문을 받고, 강단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이렇게 말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신념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신념도 지켜내지 못한 채 2005년 9월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주사파 계열이 1988년 이후 통일운동과 학내운동에 주력했다면 다른 계열의 학생운동권은 당시 대폭발을 일으킨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대선이 끝나고 친구들(김배균과 김용만)의 꼬임에 넘어가 학년 과 대표와 사학과 학생회장을 맡았던 김주환은 1989년 초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속돼 학교에서 제적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곧바로 인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장에서 용접일을 배우고 선반일을 익히며 진짜 노동자로 변해갔다. 이 시기 PD계열의 김용만도 불심검문에서 불온서적을 가지고 있다 구속돼 의왕교도소에 얼마간 갇혀 있었다.

    1987년 6월은 사학과 87학번들에게 엄청난 역사적 무게를 덧씌웠다. 동기 누군가의 말처럼 우린 너무 진지했고 그래서 탈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제도권으로 나갈 준비, 즉 취직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ROTC를 지원하는 것도, 국가안전기획부에 지원서를 넣는 것도, 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사학과에서 유일하게 ROTC를 했던 정웅은 “나도 군부독재와 대항해 싸웠지만 사학과에는 다양성이란 게 부재했다. 개인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개인별 차이도 감싸주는 게 민주주의인데, 운동권은 그 안에서 독재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군대, 복학, 그리고 취직

    1989년 3월 김주환과 김용만이 구속된 후 사학과 동기들은 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기자도 1989년 5월 방위병으로 소집됐다. 이 시기에 동기들은 군대에서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갖은 고난을 겪고 ROTC 장교로 임관한 정웅은 1992년 중위 시절 같은 고대 87학번 출신 임관 동기인 이지문 중위가 부재자 투표 선거부정에 대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하자 충격에 빠졌다. 정웅은 “난 그때 정훈장교로서 장교들을 대상으로 선거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 동기인 이지문의 행동은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기자도 1990년 모 사단 부관부에 속해 병역비리에 일조하고 있었다. 사단장과 헌병대, 보안대에서 들어오는 청탁을 받아 방위병들을 좋은 보직으로 빼내는 일을 했다. 결국 당시 부관부와 전산부 장교들이 모두 대통령 특별감사단에 의해 옷을 벗는 모습을 보고 소집해제됐다. 그러나 청탁을 했던 헌병대, 보안대 사람들과 사단장은 이후에도 멀쩡히 군에 살아남았다.

    1991년에 복학하니 사학과의 학생운동세력은 일부 통일운동세력을 빼고는 자취를 감췄다. 주사파는 그때도 대학에 남아 총학생회 후배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기자는 당시 과 복학생회장을 맡아 등록금 인상 반대와 어용교수 축출 문제를 놓고 학교와 갈등을 빚었다. 그런 한편으로 취업 준비에 매달렸다. 사학과는 운동권 이미지 때문인지 대기업의 추천서가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학과 복학생들에게 취업은 엄청난 고민으로 다가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학과, 사회학과, 철학과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장이 언론사였다. 언론 자유가 확대되고 기자들의 월급이 현실화하면서 신문사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따기’가 됐다. ‘언론고시’라는 말도 그때 생겼다. 고대 중앙도서관에 100여 개, 과학도서관에 50여 개의 언론취업 스터디팀이 구성됐다. 그때 기자와 같은 스터디팀에 속해 있던 동기가 지금 LG생활건강 홍보실에서 근무하는 오강국이다. 그는 1995년에 LG화학에 들어간 후 줄곧 홍보실에서 일하며 기자들을 상대하고 보도자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기자가 되려다 거꾸로 기자를 상대하는 홍보맨이 돼버린 것이다.

    기자는 1992년 4학년 2학기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일간지에 취업해 학교를 떠났다. 그때 사학과 학과장이던 민현구 교수(한국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학생회장 하면서 수업거부 하자고 찾아온 게 모두 13번이었는데, 그래도 자넨 타협을 아는 친구야. 어쨌든 꼴통이 가장 먼저 취업한다는 과 전통을 그대로 이었네. 남은 학점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알아서 함세.”

    민 교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시험 한 번 안 쳤는데도 대학생활 8학기 중 최고의 성적이 나왔다. 그가 모든 과목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준 것이다. 심지어 1학년 때 F학점을 맞고 재수강한 교양체육도 담당 강사에게 부탁을 해 A를 받아줬다. 그는 기자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또 ‘사고’를 칠까봐 노심초사했다. 최근 고대 시간강사를 하는 김진우가 결혼을 앞두고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민 교수를 찾아갔는데 그는 기자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친구 대학 졸업시키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학과 8학년, 9학년들

    1992년 말은 김영삼씨가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해다. 패배한 김대중씨는 은퇴를 선언하고 정치판을 떠났다. 그때 기자는 민주당 대구지부에서 취재를 하다 당원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쓰레기통도 날아왔다. “제도권 언론이 선생님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선거에서 졌다”는 것이었다.

    1993년에서 1995년 사이에 사학과 동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취직을 했다. 정웅은 동부화재에 입사한 후 나산그룹 유통부로 자리를 옮겼고, 박석훈은 대우건설 영업부에서 일했다. 기자는 그 무렵, 최근 조작사건으로 판명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최초로 보도했다. 대구지역 기자들도 2명이나 희생된 사건으로,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어느 매체에서도 선뜻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들의 만류에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기사를 썼는데 데스크의 반응은 의외로 “이제는 써도 되지 않겠냐”였다.

    하지만 그 시절엔 국가보안법을 통한 공안통치도 강화되고 있었다. 1987년 이후 최대의 노동변혁조직이라고 일컫는 인민노련(인천민주노동자연맹)에서 일하던 과 동기 김주환이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재판부로부터 “감옥 갈래, 군대 갈래”라는 제의를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후 군에 입대했다.

    ‘민주화 20년’ 맞는 고려대 사학과 87학번의 인생 변주곡

    1987년 6월의 촛불시위.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손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보이고 있다.

    통일운동을 하던 강진구는 김일성청년동맹 사건으로 구속됐다. 1994년 8월 사회부에서 근무하던 기자는 ‘연합뉴스’와 ‘동아일보’ 1면을 보다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전대협의 후신인 ‘이적단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배후에서 조정했다는 혐의였다. 그가 주사파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청년동맹까지 만들 줄은 몰랐다. 1월9일 사학과 동기 모임에 나온 강진구에게 물었다.

    “진구야, 정말 김일성청년동맹이 실체는 있는 거냐? 그리고 넌 아직도 주사파냐?”

    진구가 답했다.

    “그 혐의 내용은 다 조작됐지만 실체는 있었다. 그리고 난 대학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 통일이 될 때까지 이 운동을 할 거다.”

    1989년 구속된 후 제적된 김주환은 1994년 복학해 1년에 무려 60학점을 이수하고 1995년 졸업장을 받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학교측의 ‘배려’가 있었던 듯하다. 학교측도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3개 학과로 갈라진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구 사학과 출신의 학적부를 정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강진구도 1995년 복학해 1996년 졸업장을 받았다. 사학과 입학 후 8년과 9년 만의 졸업이었다. 졸업 후 김주환은 다시 섬유노련을 조직하면서 노동운동으로 복귀했고, 강진구도 통일운동으로 복귀했다.

    그 시기 주사파의 핵심이던 김배균은 1994년 12월 만기 제대하고 나온 뒤 주체사상을 버렸다. 1995년 동양화재에 입사한 이후 2000년에는 벤처열풍에 몸을 실었지만 2003년 총선에서 옛 주사파 출신 선배를 돕기 위해 열린우리당 모 후보의 경선에 참가했다. 경선 실패 후 컨설팅 회사에 몸을 담은 그는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자 뉴라이트 운동가로 변신했다. 이후 그는 뉴라이트닷컴에서 ‘김처사’라는 닉네임으로 ‘김처사의 마흔 코앞에서 철들기’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노무현 정권과 좌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서 오던 그는 최근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고 주사파에서 뉴라이트 운동가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고해성사한 뒤 본격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IMF에 울고, 월드컵에 웃고

    사학과 87학번 동기들은 외환위기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정웅은 나산의 부도로 실업자가 됐고, 기자가 다니던 지방신문도 부도를 맞았다.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했던 LG화학의 오강국은 환란(外亂)의 칼날을 용케 피했다. 김배균은 연차가 낮아 동양화재 구조조정 명단에서 벗어났다. 노동운동가 김주환과 박영삼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에 맞서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은 과연 IMF 관리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일단 김영삼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꼽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직도 노동운동을 하는 동기들은 이를 ‘세계적 수준의 신자유주의(금융자본체계)가 한국에서 체계화하는 계기’로 바라본다. 그리고 아무리 똑똑한 경제관료가 있었더라도 막을 수 없었던 시대의 흐름이라고 해석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 김주환은 “김대중 정부가 입만 열면 신자유주의를 말하며 신자유의주의의 전도사가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일까. 1987년 6·10 항쟁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동기들은 1997년 12월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을 고운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한때 김대중씨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과 동기 김배균은 이를 “엄청난 기쁨으로 바라보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처음으로 탄생한 민주정권이라는 점과 그가 집권 당시 취한 유연한 대북정책에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가 외환위기를 탈출한다는 명분으로 취한 부동산 규제 해제 조치, 신자유주의 정책 등에 대해서는 이를 가는 이들이 많다.

    아직 전셋집을 전전하거나 서울 변두리에 산 집 때문에 빚에 파묻혀 사는 동기들은 노무현 정권 들어 집값이 폭등한 단초는 모두 DJ 정권이 만들어놓았다고 개탄한다. 분양가 자율화, 아파트 분양권 전매 허용, 재건축 자율화 등 오늘날 아파트 값 폭등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요인들이 모두 그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당시 부동산정책에 힘입은 주택건설 경기 붐 덕분에 지금 이 정도로나마 먹고사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택경기에 기댄 경기 활성화로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할 수 있었고, 회사를 쫓겨났던 동기들도 다시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2000년 6월, 신문의 지면확대와 잡지시장 활황 덕분에 ‘동아일보’에 경력기자로 입사할 수 있었다.

    사학과 동기들에게 2002년 월드컵은 1987년 6월의 흥분을 되살려놓았다. ‘민주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것은 아니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100만명씩 모여본 사람들은 그 오묘한 군중심리를 잘 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의 중심이던 시청앞 광장과 대학로는 6월항쟁의 중심지였다. 신문, 방송에서 응원단 중에 아이를 업고 안고 나온 ‘386’들이 많다고 보도했는데, 사실 그들 중 상당수는 6월항쟁 때 학생신분으로 ‘한 싸움’ 했던 사람들이다.

    월드컵 덕분에 인생의 전기를 마련한 친구도 있다. 외환위기 때 나산의 부도로 실업자가 됐다 SK네트웍스 쇼핑몰 물품구매담당 바이어가 된 정웅은 당시 대학로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대학로 조그만 편의점 한 곳의 하루 매출이 수억원에 달했다면 믿겠나. 내가 맞은 손님만 하루 5000명이었고 순이익만 하루 2000만원이었다. 편의점 사업의 매력을 그때 알았다.”

    소주병 넘어지는 것도 노무현 탓?

    회사 조직의 경직성과 부패에 몸서리치던 정웅은 2년 후 경기도 구리시에 편의점을 차리고 직장생활을 접었다. 그는 요즘 3시간 노동에 웬만한 월급쟁이 수입을 얻으며, 나머지 시간엔 시집을 읽고 경매 강의도 들으면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월드컵 때 다시 확인된 386세대의 거리문화, 응집의 정서, 문화적 코드는 2002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폭발적인 힘을 보여준다. 6월항쟁에 함께했던 사학과 동기의 대부분은 2002년 선거에서 별 고민 없이 노무현 후보를 선택했다. 손가락으로 겨우 헤아릴 수 있는 이들만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찍거나 기권했다. 동기들이 누구를 찍었는지 기자가 어떻게 다 아냐고? 사학과 87학번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속일 만큼 세상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의 정서는 민주노동당에 더 가깝게 있었지만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좀더 가까이에 있는 ‘정치권력’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가온 탄핵파동. 많은 동기들이 국회 앞 탄핵반대 촛불집회 현장에 있었다. 취재를 나갔던 기자와 마주친 친구도 여럿이었다. 눈가가 촉촉해진 친구들도 있었다. 촛불시위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6월항쟁 때였다. 학생들은 비폭력운동의 상징으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다. 1987년에 터져나오던 그들의 눈물이 아직 덜 말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눈물’에 감동했던 것도 그런 동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몇 년이 흐른 지금, 동기들은 과연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월9일의 동기 모임에서 직접 물어봤다. 중구난방으로 대답이 나왔지만 공통적으로 나온 분석은 ‘권위주의를 허문 것에 대해서는 평가할 만하다’는 것. 그러나 그 외의 대목에서는 운동권과 비운동권 출신, 뉴라이트 간의 시각 차이가 컸다. 노 대통령은 분명 좌파로부터 더 많은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 대통령이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년 동안 정책적 결정에 흠을 찾아볼 수 없다. 경기 불안정, 부동산 값 폭등, 노사갈등, 한미 FTA, 개헌… 이 모두 역대 정권에서 쌓여온 것이 이제 와서 터지는 것이다. 한 가지 확인된 사실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추동세력으로 나타난 386세대가 보수기득권층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이 갈수록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이를 침소봉대해 트집 잡는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은 더 문제다.”(오강국, 정웅, 김태수, 박석훈)

    그때 실수로 소주병을 넘어뜨린 동기가 “소주병이 넘어지는 것도 노무현 탓이다”고 하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동기는 “아직 그의 임기가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보자”고 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인 이정환은 “노 대통령은 ‘말장난’을 너무 많이 해 진중한 처신을 보여주지 못한다. 노무현 정권으로 인해 386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지역적 이유나 학벌을 핑계 삼아 꼴통 우파들이 쏟아 붓는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고 했고,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부소장 김주환은 “지역정치를 없애고, 안정적인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자는 게 그의 구상인 것 같은데 실제로 중요한 것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다. 그런데도 그는 신자유주의의 선봉자가 되서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에 대해선 목숨을 걸 듯하면서도, 중요한 문제, 예를 들어 비정규직 등 사회기층의 생존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한다”고 비판했다.

    탄핵규탄 집회에 촛불을 들고 나타났던, 그러나 지금은 뉴라이트 운동가가 된 김배균은 “이미 사문화한 국가보안법 폐지와 같이 중요치 않은 문제에 열을 내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양극화 선동에 나서며 북한 주민의 인권을 무시한 햇볕정책을 강행하는 노 정권은 무능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그는 뉴라이트 닷컴에 쓴 칼럼에서 노 대통령을 ‘개장수’ ‘마피아’라는 극한 표현을 써가며 비판했다. 동기들의 입에서 “세월이 많이 변했다. 배균이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니…”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긍지와 보람의 세대

    이제 불혹의 나이가 된 고대 사학과 87학번들은 지금 20년 전의 6월항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들의 이야기들을 짧게 정리하며 글을 맺는다.

    “절차 민주주의의 승리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동거하게 된 최초의 거대한 사건이다. 발전적인 양자의 상호작용은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 참여정부 출범과 탄핵역풍에 따른 민주의 과잉을 초래했다.”(김배균·뉴라이트 폴리진 조직위원장)

    “6·10 민주화 투쟁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1980년 광주투쟁에도 불구하고 지체되어 있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지만, 그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였다. 그래서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학생운동이 만들어낸 그때의 민주화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심화되지 못하고 결국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 결과를 낳았다.”(김주환·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

    “개인적 삶 속에서 소중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 사회의 공통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1987년 민주화 운동은 내가 살아온 20년의 긍지였다. 하지만 이제 그 민주화의 틀이 ‘공평함’ 또 ‘삶의 질 향상’이라는 틀로 변해야 한다. 현재의 나에게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도 하다.”(이정환·인터넷 사업)

    “6·29 20주년이라는 용어는 적당하지 않다. 타도의 대상이던 노태우가 민주화의 과실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당시의 민주화는 군사독재라는 정치체제의 타파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군사독재로 인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던 의식의 경직성과 문화의 일원주의에 대항하고 개인의 삶의 다양성을 인정해달라는 역사적 행위였다. 6월항쟁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엄청난 무게로 나의 삶을 규정짓고 있다.”(정웅·편의점 운영)

    “우리는 정의를 세울 줄 아는 백성이다. 우리는 승리했고 또 다른 승리를 이룰 수 있다. 6월 항쟁은 그런 의미로 내게 살아 있다. 만약 자본이 내 푼돈을 뺏어가고, 권력이 말 없는 나를 다시 얕잡아 보고 괴롭힌다면 나는 언제고 다시 투쟁할 수 있다.”(김태수·ING생명 FC)

    “6월항쟁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을 떠나 강력한 정치적 성향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게 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발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모든 불만도 1987년에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면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오강국·LG생명건강 홍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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