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미술의 기적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02-07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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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의 기적
    그림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재산은 남이 무심히 스쳐가는 작은 것에도 마음 깊이 음미하며 감동하고 즐거워하는 또 다른 눈과 기회이다. 오십 중반에 푸른 하늘을 보면서 꿈 많은 아이같이 잔뜩 호기심을 품고 수많은 그림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눈과 마음의 소유자로 지낼 수 있다는 얘기다. 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픈 도전정신과 풍부하고 아름다운 감각과 순수함을 지니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얼마 전, 5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변화하고자 하는 내면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베, 옻칠, 흙, 숯가루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재료인 자개를 활용한 칠회화전이었다. 다행히 언론에서는 ‘만져보고 입어보는 전시회’라며 나의 실험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느라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괴로워했다. “그래,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것이다.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는 두려움과 떨림, 기대를 품고서….”

    이런 도전 혹은 실험의 원동력은 내 수업을 듣는 젊은 학생들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그 속에서 느끼는 잔잔한 감동은 나의 미술적 영감으로 피드백된다.

    내가 주력하는 수업은 디자인 전공학생들이 필수로 배우는 기초 드로잉이다. 학생들은 하얀 백지 위에서 창조자의 기쁨을 맛본다. 나는 흔히 가장 어렵다고 하는 누드화로 첫 강의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남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긴장을 풀도록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고는, 초보 학생일수록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되도록 덜 보게 하면서 모델에만 집중해 그리도록 한다.

    놀라운 것은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 그림을 그려본다는 학생들의 선이 마치 대가의 그것처럼 대담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때론 신이 내게 주신 보물 찾기에 동참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나는 이런 일상의 발견에 신이 난다.



    내가 재직하는 ‘삼성 아트 앤 디자인 스쿨(SADI)’은 학위를 요구하지 않고 시작한지라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용감한’ 학생이 많이 들어왔다. 그들은 거칠고 정제되지 않아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백지에서 나오는 순수함을 바탕으로 무한대의 파워를 발산하곤 했다.

    미술가의 상상력은 부단히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그림에 대한 영감을 떠올릴 때 담금질이 된다. 나는 학생들에게 스케치 여행을 자주 나가라고 당부한다. 요즘은 인터넷 등으로 갖가지 영상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어 그런지 학생들이 이를 대단치 않게 여기는 듯하다.

    나는 20대 때 배를 타고 제주도, 홍도 등지로 여행을 다녔다. 동양화를 전공한 나는 가끔 호남선 기차역을 돌아다니며 돗자리 안에 화선지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돗자리를 깔고 붓을 들고 좌판을 벌이면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두 명은 “점 좀 봐달라”며 다가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가슴이 뛰지만,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붓을 대기 시작하면 이내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눈망울이 내 가슴속으로 하나씩 꽂혀왔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옆에서 구경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었고, 자신이 붙고 나서는 시야를 가린다며 사람들에게 “빨리 좀 지나가시라”고 큰소리를 치는 호기도 부릴 수 있었다.

    시골 분위기가 물씬한 옷매무새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하는 아주머니, 엄마 손을 꼭 쥐고 두리번거리는 코흘리개들…. 그야말로 사람 냄새 가득한 풍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어느새 눈은 사진기처럼 순간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곰방대를 물고 있는 할아버지 얼굴에 굵고 깊게 팬 주름, 무거운 짐보따리에 온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청년의 눈동자, 차 시간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며 수다 떨기에 바쁜 아줌마들의 구겨진 한복…. 요즘 고만고만한 도시인들의 모습에 식상해선지 예전에 보고 느낀 그런 다양한 삶의 현장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미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회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외심과 배려라고 강조한다. ‘사랑’이란 안테나를 통해 많은 이의 진정한 삶의 욕구가 무엇인지 찾으려 애쓸 때 테크니션에서 예술인으로 넘어가는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

    학생들이 군에 입대할 때도 신신당부한다.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지 말아라. 철책선에서 보초를 서면 하늘을 보고 그려봐라. 여건이 안 되면 마음으로라도 그려보라. 벗어놓은 군화라도 쉼 없이 관찰하며 그려보라. 끊임없이 손이 마려워야 한다”고.

    며칠 전 내 전시장에 박훈규라는 애제자가 찾아왔다. SADI 1기생이라 열정적으로 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첫 시간 과제물로 각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취하는 동작을 연이어서 그려 오라고 했다. 그때 훈규는 만화 형식을 빌려 장면 장면을 웃음이 터져나오도록 재밌게 구성했다. 그는 만화공부를 하겠다고 고등학교 때 가출했다가는 포기하고, 평화시장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다가 디자인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러다 테크닉만 가지고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뒤늦게 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훈규는 군대라는 무대를 상상력의 자극제로 사용했다. 그는 보초를 서며 그린 구름, 군인들이 잠자고 쉬는 모습 등을 조그만 연습장에 촘촘히 그려와 나를 감동시켰다. 복학한 뒤 그는 학비를 벌겠다며 호주로 가겠다고 했고, 1년여가 지나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실력도 늘고 학비도 넉넉히 벌어왔노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호주는 물론, 기회가 닿아 영국에 까지 건너갔던 그는 사람들을 그려주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비싼 경험을 얻었다고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관찰을 통한 예술적 모티브의 축적’이라고 할까. 그는 어느새 한 틀에 묶을 수 없는 자유로운 디자이너로 성장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는 현재 콘서트 무대에서 영상 소스를 믹스해 보여주는 ‘비주얼 자키(Visual Jockey)’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일본의 유명한 디자인 잡지에 ‘한국의 젊은이 중 3대 아티스트’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는 20여 년 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2세에 그림공부를 더 하겠노라고 뒤늦게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그림으로 녹여내는, 이 단순한 예술행위 흐름 하나하나가 주는 쾌감을 잘 알았기에 공백에 따른 목마름이 더 컸다.

    미국 유학 9년 반 동안엔 사진, 조각, 판화, 유화, 도자기까지 마음껏 찍고 만들고 그렸다. 방학 때는 멕시코, 캐나다 등지로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단기 선교사로 에콰도르, 콜롬비아의 오지에도 찾아갔다.

    미술의 기적
    이정연

    1952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졸, 동 대학원 수료

    미국 Pratt Institute 미술석사, 컬럼비아대 미술교육 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現 SADI(삼성 디자인 앤 아트 스쿨) 기초학과 교수


    그때마다 예술인으로서 배격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내가 품고 담고 그릴 수 있는 화폭의 세상은 더욱 넓어져갔다. 스케치 여행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어서, 지금도 그림에 집중하던 때의 그곳 날씨와 나의 감성상태는 물론, 바람 속에 실려온 향기까지 고스란히 떠오른다.

    2, 3년 전부터는 디자인스쿨에도 다른 전공을 하다가 온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다. 그들은 스스로 나이도 많고 머리도 굳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나는 그들이 나약함과 자신없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되찾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찰하며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그림의 신비, 미술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과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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